조선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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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선포한, 한반도에 수립하려던 임시 정부이다. 1930년대부터 이어진 국내 독립운동과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이승만, 여운형, 김구 등 다양한 인물이 참여했으며, 정치, 경제적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토지 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노동법 개혁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를 명령했으며, 북한에서는 조만식 대신 김일성이 지도자가 되어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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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조선인민공화국 |
한자 표기 | 朝鮮人民共和國 |
로마자 표기 | Joseon Inmin Gonghwaguk (문화관광부 2000년식), Chosŏn Inmin Konghwaguk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일반 명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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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모토 | 자주독립국가 |
수도 | 서울 |
최대 도시 | 수도와 동일 |
공용어 | 한국어 |
시대 | 냉전 |
건국일 | 1945년 8월 15일 |
건국 사건 | 일본의 항복 |
소련군 주둔 | 1945년 8월 24일 평양 주둔 |
미국군 주둔 | 1945년 9월 9일 서울 주둔 |
남한 지역 해산 | 1945년 12월 12일 |
북한 지역 위원회 통합 | 1946년 2월 8일 |
통화 | 한국 원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정부 형태 | 민주공화국, 임시 정부 |
정치 | |
국가 주석 | 이승만 |
국가 부주석 | 여운형 |
국무총리 | 허헌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 일제강점기 조선 |
다음 국가 | |
다음 국가 1 | 소비에트 민정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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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가 2 | 미군정 |
역사적 사건 |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설치 | 1945년 8월 15일 |
정부 수립 선언 | 1945년 9월 6일 |
연합군의 정부 승인 거부 | 1945년 10월 10일 |
2. 광복 직전 국내 독립운동 동향
1930년대부터 광복 직전까지 국내 독립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이끌었다.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핵심인 경성콤그룹은 민족적 대중운동을 주창한 이재유의 이재유 그룹이 기반이다. 경성콤그룹 뿐만 아니라 건국동맹도 구성원 다수가 이전부터 계속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28]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여운형 등은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3] 건준은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독립으로의 이행을 조율했다.[4]
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 이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또한 지역과 대중에 뿌리박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나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이 빠르게 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28]
사회주의자들은 일제 말기에 서울 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 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되었고,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 직전까지 존재했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29]
3. 설립 과정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과 건국동맹 구성원들은 일제 말기부터 비밀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며 대중 속에서 조직을 만들어왔다.[28][29] 이러한 배경은 광복 직후 인민위원회가 빠르게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소련 연방이 함경북도 지역을 점령하고 청진시에서 일본 제국과 전투를 벌이자, 조선총독부는 경성시마저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될 것을 우려하여 조선인들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8월 15일 오전 9시,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을 불러들였고, 여운형은 총독부와 교섭하여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관철시켰다.[3]
여운형은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국가 건설을 준비하려 했다.[30]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조선총독부는 8월 20일 반격을 시도했고, 9월 8일 인천시에 상륙한 미국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
건준은 인민위원회 형태로 지방 자치를 실시한 최초의 한국 정치 조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0개가 넘는 위원회가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설립되었다.[7]
3. 1.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중앙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으며, 군정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남북의 전 도, 군, 면에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30][31][32][33]
9월 14일 발표된 주요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대리 |
---|---|---|
주석 | 이승만 | |
부주석 | 여운형 | |
국무총리 | 허헌 | |
내무부장 | 김구 | 조동혁, 김계림 |
외무부장 | 김규식 | 최근우, 강진 |
재무부장 | 조만식 | 박문규, 강병도 |
군사부장 | 김원봉 | 김세용, 장기욱 |
경제부장 | 하필원 | 김형선, 정태식 |
농림부장 | 강기덕 | 유축운, 이광 |
보건부장 | 이만규 | 이정윤, 김점권 |
교통부장 | 홍남표 | 이순근, 정종근 |
보안부장 | 최용달 | 무정, 이기석 |
사법부장 | 김병로 | 이승엽, 정진태 |
문교부장 | 김성수 | 김태준, 김기전 |
선전부장 | 이관술 | 이민준, 서중석 |
체신부장 | 신익희 | 김철수, 조두원 |
노동부장 | 이주상 | 김상혁, 이순금 |
서기장 | 이강국 | 최성환 |
법제국장 | 최익한 | 김용암 |
기획부장 | 정백 | 안기성 |
이 각료 명단은 비슷한 시기 중도우익성향 단체 '선구회'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대중이 원했던 지도자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민의를 반영했다.
순위 | 이름 | 득표율 |
---|---|---|
1위 | 여운형 | 33% |
2위 | 이승만 | 21% |
3위 | 김구 | 18% |
4위 | 박헌영 | 16% |
5위 | 이관술 | 12% |
6위 | 김일성 | 9% |
7위 | 최현배 | 7% |
8위 | 김규식 | 6% |
9위 | 서재필 | 5% |
10위 | 홍남표 | 5% |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 |
조선인민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정강을 제시했다.
-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
-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 세력 일소 및 민주주의 실현
- 노동자, 농민 기타 일체 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
- 세계 민주주의 제국과 상호 제휴하여 세계 평화 확보
구 분 | 명 단 |
---|---|
중앙인민위원 |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요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전, 최용달, 이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이승엽, 강기덕, 조두원, 이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호,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
후보위원 |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
고문 |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항규,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이영 |
4. 주요 정책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요 정책은 9월 14일에 발표된 27개항의 강령에 제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2][13]
- '''토지개혁''': 일본인과 친일파 소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또한, 재분배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임대료 상한제를 실시하였다.
- '''주요 산업 국유화''': 광업, 운송업, 금융업, 통신업 등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국가 감독을 실시하였다.
- '''노동 정책''':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아동 노동 금지 등 노동법 개혁을 추진하였다.
- '''기본권 보장''': 언론, 출판, 집회, 신앙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였다.
- '''여성 평등''': 18세 이상 성인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보장하고, 여성의 평등을 추구하였다.
- '''국제 관계''': 미국, 소련, 영국,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고, 국가 내정에 간섭하는 모든 외세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표방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의 강령은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전국조선노동조합평의회, 전국농민조합연맹,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 여성동맹 등의 단체들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강령을 지지하였다.
5.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되었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 18일 귀국 후,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추대는 모르는 일이며 호의를 표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34][35] 11월 7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석직을 거부했다.[36][37] 김구와 김규식 또한 11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조선인민공화국과 관련된 것을 부인하였다.[38][39]
6. 미군정과의 갈등 및 해체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활동하자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공식 성명을 통해 38선 이남에는 오직 미군정이라는 한 정부만 있을 뿐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권위와 세력과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해체를 명령하였다.[42]
이에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조선에서 통일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로서 군정과 모순되지 않으며 군 행정을 방해하려는 의사는 없다고 밝혔다.[43] 또한, 일반 대중에게 신임과 지지를 얻기 위해 신임 총투표, 일반 국민선거를 제안, 확정하고 새로운 주권 확립을 시도하였다.[44]
그러나 미군정은 아놀드 장관의 성명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의 이러한 시도를 허위선거라고 규정하고, 선거는 "대중을 유도하는 자칭 정치가의 유희물"이 되기에는 너무도 신성한 것이라며 선거 중지를 요구하였다.[45]
아놀드 군정장관이 모욕적인 성명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 자체를 부정한 뒤에도,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과의 협조 전술을 계속 유지하였다. 미군정이 지방 점령 정책을 실시하면서 인민위원회를 탄압, 해체하는 상황에도 수세적으로 대응하였다. 수원에서 박송극 인민위원장의 구금에 항의하여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남원에서는 미군정이 무력으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여 대중 봉기가 일어났지만 정면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1945년 11월에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 회의에서 지방 인민위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인물들에 대한 검거와 구속, 발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은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했다.[46]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다.
7. 북한에서의 전개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조만식이 이끄는 지역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어 있었다.[14] 소련 당국은 초기에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협력했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우호적인 한국인, 특히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권력의 자리에 배치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기울였다.[15] 소련 관리들은 한국에 진주한 직후 인민위원회의 정치적 중심을 소련 친화적인 성향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여러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인민위원회에 배치하여 결국 이들 조직 내에서 다수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소련 정부는 북한을 이끌 지도자로 조만식을 처음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소련은 독립을 위한 준비 단계로 최대 5년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제안에 동의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조만식을 포함하여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했으며, 그는 1946년 1월 4일 공개 회의에서 이 제안에 반대했다. 그 후 그는 가택 연금 상태로 사라졌다.[16] 그는 김일성으로 대체되었는데, 김일성은 대부분의 한국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소련 정부의 압력 아래 신탁통치를 지지했다. 1946년 2월 8일,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임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17] 새로운 정권은 토지 분배, 산업 국유화, 노동법 개혁, 여성 평등과 같은 인기 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기존의 공산주의 단체들은 김일성의 지도 아래 조선로동당으로 재편되었다.
통일을 위한 협상이 실패한 후,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18]
8. 평가 및 의의
조선인민공화국은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였으나, 미군정과 소련 군정의 개입으로 해체되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추진했던 정책들은 이후 남북한 정부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토지개혁, 노동 정책 등은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26]
미군정 실시 2년 후 여론조사에서 대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세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보다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호했으며, 미군정의 제도보다 인민위원회를 선호했다. 이 여론조사를 분석하면 조선인민공화국이 신임투표를 했다면 70% 정도의 지지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 국호는? | |||
---|---|---|---|
1위 | 조선인민공화국 | 1708표 | 70% |
2위 | 대한민국 | 604표 | 24% |
3위 | 기타 | 8표 | 1% |
4위 | 기권 | 139표 | 4% |
(2) 정권 형태? | |||
1위 | 인민위원회 | 1757표 | 71% |
2위 | 종래 제도 | 327표 | 14% |
3위 | 기타 | 262표 | 10% |
4위 | 기권 | 113표 | 5% |
(3) 토지개혁 방식? | |||
1위 | 무상몰수 무상분배 | 1673표 | 68% |
2위 | 유상몰수 유상분배 | 427표 | 17% |
3위 | 유상몰수 무상분배 | 260표 | 10% |
4위 | 기권 | 99표 | 5% |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실제 상황을 넘어, 통일 조선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이상을 보여주는 말로 '''환상의 공화국'''이라고도 불리며, 이상화되어 이야기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조선에는 노선의 차이는 있었지만,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국가)를 만들려는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조선의 민족 운동에 대한 미군과 소비에트 연방군(적군)의 무이해도 조선의 분단 고착화와 장기화로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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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http://www.riss.kr/s[...]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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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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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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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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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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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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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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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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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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