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비트게프트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제독으로, 1847년 오데사에서 태어나 1904년 황해 해전에서 전사했다. 1868년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세계 일주를 하였으며, 1885년 함선 지휘를 시작하여 여러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1899년 극동 함대로 전속되어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00년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하여 훈장을 받았다. 러일 전쟁 중 임시 함대 사령관으로 뤼순 항에 고립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항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황해 해전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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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10월 14일오데사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난 빌헬름 비트게프트는 1868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클리퍼 ‘사드니크’(''Wsadnik'')의 승무원으로 세계일주를 했다. 1870년 하사관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1873년 소위로 임관했다. 1875년부터 3년간 포술과 기뢰 전문 교육을 받고 발트 함대에 배속되었다.
1885년 항양 포함 ‘그로자’(''Groza'') 함장을 시작으로, 1892년 수뢰 순양함 ‘보예보다’, 1894년 2등 순양함 ‘나에즈니크’, 1895년 1등 순양함 ‘드미트리이 돈스코이’, 1898년 장갑함 ‘오실랴뱌’ 함장을 맡았다. 1894년 1등급 선장으로 승진했다.
1904년러일 전쟁 발발 후,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이 전사하면서 비트게프트는 임시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 해군의 여순항 포위에 맞서 뤼순 항에 머무르며 전력을 보존하는 소극적인 전략을 택했다.[2] 그러나 뤼순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자 비판을 받았고, 결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전보를 받고 1904년8월 10일블라디보스토크 항구로 탈출을 시도했다.[3]
뤼순항에서 40해리 떨어진 곳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연합 함대에 포착되어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전투 중 비트게프트가 탑승한 기함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일본 해군 전함이 발사한 포탄이 직격했다.[4] 이로 인해 지휘하던 비트게프트를 포함한 참모진이 전사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1847년10월 14일오데사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난 비트게프트는 1868년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클리퍼 ‘사드니크’(''Wsadnik'')의 승무원으로 세계일주를 했다. 1870년 하사관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1873년 소위로 임관했다. 1875년부터 3년간 포술과 기뢰 전문 교육을 받고 발트 함대에 배속되어 복무했다.
1885년 항양 포함 ‘그로자’(''Groza'')의 함장을 처음 맡았으며, 1892년 수뢰 순양함 ‘보예보다’ 함장을 역임했다. 1894년 1등급 선장으로 승진하여 2등 순양함 ‘나에즈니크’를 지휘했다. 1895년부터 1등 순양함 ‘드미트리이 돈스코이’, 1898년부터 장갑함 ‘오실랴뱌’ 함장을 맡았다.
1904년러일 전쟁 발발 후,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이 전사하면서 비트게프트는 임시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임 제독과는 달리, 비트게프트는 우세한 일본 해군의 여순항 포위에 맞서 뤼순 항에 머무르며 전력을 보존하는 소극적인 전략을 택했다.[2] 그러나 뤼순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비판을 받았고, 결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전보를 받고 1904년 8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로 탈출을 시도했다.[3]
뤼순항에서 40해리 떨어진 곳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연합 함대에 포착되어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전투 중 비트게프트가 탑승한 기함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일본 해군 전함이 발사한 포탄이 직격했다.[4] 이로 인해 나침 함교에서 지휘하던 비트게프트를 포함한 참모진이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러시아 함대에 큰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 러시아 함대는 조직적인 탈출에 실패했다.
3. 평가
비트게프트는 유능한 참모였지만, 지휘관으로서는 결단력과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소극적인 전략을 주도하여 패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러시아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스테판 마카로프는 전력 보존을 중시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출격한 반면, 비트게프트는 거의 출격하지 않았다. 뤼순이 고립되자 전략 방침이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로 전환되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6월 23일 탈출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에 발견되어 중지되었고, 이후 뤼순이 포위되자 그의 소극적인 자세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전보를 받고 8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연합함대에 포착되어 전투 중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러시아 함대에 혼란을 가져왔고, 결국 패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비트게프트의 사례를 통해 안보 위협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3. 1. 긍정적 평가
비트게프트는 1868년 해군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클리퍼 후사드니크 승무원으로 세계를 일주했다. 1875년부터 3년간 포술과 기뢰 전문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발트 함대에 배속되었다. 1885년 항양 포함 그로저 함장을 시작으로, 수뢰 순양함 보예보다, 2등 순양함 나예즈니크, 1등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장갑함 오슬랴뱌 등 다양한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1899년에는 태평양 함대 사령장관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휘하에서 참모장이 되었고, 준장으로 승진했다. 알렉세예프가 극동 총독으로 승격되면서 총독부 해군 막료장이 되는 등 참모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3. 2. 부정적 평가
비트게프트는 러일 전쟁 당시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전략으로 일관하여 러시아 해군을 패전으로 이끈 주범으로 평가받는다. 황해 해전에서 비트게프트가 전사하지 않고 생존하여 지휘를 계속했더라도, 러시아 함대가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3. 3. 종합적 평가
비트게프트는 유능한 참모였지만, 지휘관으로서는 결단력과 적극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소극적인 전략을 주도하여 패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소극적인 전략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스테판 마카로프 사령관은 전력 보존을 중시하면서도 적극적인 출격을 감행한 반면, 비트게프트는 거의 출격하지 않았다. 뤼순이 고립되자 전략 방침이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로 전환되었지만, 우세한 적을 앞에 두고 탈출은 쉽게 실행되지 못했다. 6월 23일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중지되었다. 뤼순이 일본군에 포위되자 그의 소극적인 자세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전보를 받고, 육상 부대로부터 포격을 받자 8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목표로 출격했으나,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연합함대에 포착되어 전투 중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러시아 함대에 큰 혼란을 가져왔고, 결국 러시아 해군은 패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비트게프트의 사례를 통해 안보 위협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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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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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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