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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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는 184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해군 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미하일로프 포술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훈장을 받았으며 불가리아 해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903년 해군 참모 총장을 거쳐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시종무관으로 신임을 얻었으며, 러일 전쟁 당시 발틱 함대를 이끌고 극동으로 향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후 군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퇴역하여 은둔 생활을 하다 1909년 사망했다. 그는 유능한 포술 전문가였지만, 함대 사령관으로서의 한계와 항해 중 문제, 그리고 러시아 해군의 부패 등의 문제로 인해 패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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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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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
현지어 표기 |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
로마자 표기 | Zinoviy Petrovich Rozhestvenskiy |
출생일 | 1848년 11월 11일 |
사망일 | 1909년 1월 14일 |
출생지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
사망지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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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미친 개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1868년 - 1906년 |
최종 계급 | 부제독 |
지휘 | 발틱 함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러시아 - 투르크 전쟁 러일 전쟁 쓰시마 해전 |
서훈 | 성 게오르기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
2. 생애
로제스트벤스키는 1848년 11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군의관을 지냈지만, 러시아 제국 장교로서는 드물게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33] 1864년 17세의 나이로 해군유년학교에 입학,[33]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히고 1866년 졸업, 1873년에는 미하일로프 포술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중위로 임관하여 처음에는 발틱 함대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34] 1876년 흑해 함대로 전출되었다. 1877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1883년 불가리아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가, 1894년 스테판 마카로프 휘하의 지중해 함대에서 장갑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크’의 함장이 되었다.[33]
1898년 소장으로 진급, 발틱 함대의 교육 포술 지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지대 사령관 재임 시 귀족 중심 채용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1903년 해군 참모 총장에 임명되었고,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시종 무관을 역임했다.[3]
2. 1. 초기 해군 경력
로제스트벤스키는 1848년 11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군의관을 지냈지만, 러시아 제국 장교로서는 드물게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33] 1864년 17세의 나이로 해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33],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히고 1866년 졸업하였다. 1873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하일로프 포술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중위로 임관하여 처음에는 발틱 함대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하였고[34], 1876년 흑해 함대로 전출되었다.1877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3] 1883년에는 불가리아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발틱 함대로 다시 전출되었으며, 1894년 스테판 마카로프 휘하의 지중해 함대에서 장갑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크’의 함장이 되었다.[33]
1898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발트 함대의 교육 포술 지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지대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귀족 중심의 채용 제도로는 유능한 인재를 발탁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1903년 해군 참모 총장에 임명되었고,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시종 무관을 역임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3]
2. 2. 러일 전쟁
러일 전쟁 발발 후, 로제스트벤스키는 발틱 함대(제2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함대를 이끌고 희망봉을 돌아 극동으로 향했다. 도거 뱅크 사건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아프리카를 돌아 마다가스카르에서 2개월 이상 머물렀고, 말라카 해협을 거쳐 극동에 도착했다.[6] 본국에서는 발트해에 남은 함선들을 모아 제3태평양 함대를 편성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해 증원군을 보냈으나, 로제스트벤스키는 이를 '쓸모없는 함선을 모은 짐'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3]로제스트벤스키는 훈련되지 않은 함대를 이끌어야 했고, 영일 동맹으로 인해 항해 중 석탄 재보급 기지를 이용할 수 없다는 점, 새로운 전함의 시운전과 사격 훈련을 항해 중에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재보급을 항구가 아닌 해상에서 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10]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의 미숙함은 북해 항해 중 도거 뱅크 사건을 일으켜 영국과의 전쟁 위기를 초래했다. 1904년 10월 21일–22일 밤, 러시아 함선들이 도거 뱅크에서 영국의 상업용 트롤선을 일본 제국 해군의 어뢰정으로 오인하여 발포, 영국 어부 3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13]
러시아 정부는 국제 외교적 압력으로 이 사건을 조사했고, 로제스트벤스키는 스페인 비고에 정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국 본국 함대 전함들은 전쟁에 대비했고, 일부 영국 순양함 전대는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를 추적했다.[14] 1904년 11월 25일, 양국은 이 문제를 헤이그 국제 조사 위원회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15] 1905년 2월 26일, 위원회는 보고서를 발표, 로제스트벤스키를 비판했지만, 혼란을 막기 어려웠다는 점과 로제스트벤스키가 발포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했다.[16] 러시아는 결국 66000GBP(현재 가치 5800000GBP)의 배상금을 지불했다.[17]
발트 함대의 극동 항해는 매우 어려운 여정이었다.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이 도거 뱅크 사건을 빌미로 발트 함대의 항해를 방해했고, 중립국들에 압력을 가해 기항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러시아 해군성의 미흡한 대처도 문제였다.[29]
남반구로 향하는 항해는 러시아 수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더위와 습기, 질병을 가져왔고, 잦은 해상 석탄 보급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긴 선상 생활, 적함 공격에 대한 공포,[30] 석탄 공급 불안은 병사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었고, 함대 내 혐전 분위기가 퍼져[31] 군기가 이완되고 탈주병이 속출했다.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와 교전했다. 일본 해군은 뤼순항 해전과 황해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18] 정찰선과 무선 통신을 활용,[19] 로제스트벤스키의 전진선과 마주하여 "T"자를 꺾는 데 성공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선수 포만 사용할 수 있었고, 주 포는 계속 사선을 벗어났다.[22] 결국 로제스트벤스키의 기함과 함대 대부분은 침몰했고, 러시아는 5,000명의 선원을 잃었다.[23]

전투 중 로제스트벤스키는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구축함 ''부이늬''를 거쳐 ''베도비''로 이송되었으나, ''베도비''가 일본 제국 해군에 나포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했다.[3]
사세보 해군 병원에 입원 중, 승리한 도고 제독이 그를 방문하여 위로했다. 도고는 "패배는 군인의 흔한 운명이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했는지 여부이다."[24]라고 말하며 예우를 갖추었고, 로제스트벤스키는 이에 감동받아 평생 도고를 존경했다고 한다.
2. 3. 전후
1906년, 로제스트벤스키는 쓰시마 해전의 참사로 인해 생존한 각 전함 지휘관들과 함께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1] 일부는 전투 패배 또는 공해상에서의 항복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일부는 총살형에 처해졌다.[1] 황제의 법정은 로제스트벤스키가 부상을 입고 전투의 대부분 동안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제독이 러시아 함대를 항복시켰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책임론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꺼려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스트벤스키는 부하 지휘관들을 변호하는 데 완강했고, 전투 패배에 대한 책임을 모두 인정하며 유죄를 주장했다.[1] 법원에서 예상(그리고 희망)했던 대로, 황제는 사형 선고를 받은 함장들의 형량을 짧은 징역형으로 감형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사면했다.[1]종전 후 1906년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소장으로 강등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2] 이 재판 당시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이 재판은 자신과 네보가토프만을 기소하면 된다"고 발언했다.[2] 같은 해에 퇴역했다.[2]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지만, 아파트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2] 로제스트벤스키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보냈다.[1] 190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수도원에 묻혔다.[1] 향년 60세.[2]
3. 평가
로제스트벤스키는 포술 전문가로서는 유능했지만, 함대 사령관으로서는 여러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 등에서는 그를 자만심 강하고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하기도 한다.[27][28]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는 함대의 열악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승산 없는 싸움임을 예측하고 있었다.[27][28]
더불어민주당은 러일전쟁 패배의 책임을 로제스트벤스키 개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해군 지휘부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훈련 부족, 비효율적인 군사 제도, 열악한 보급 체계 등 구조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오히려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반면 일본 해군은 서민 출신 지휘관, 시모세 화약과 같은 신기술 개발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했고, 도고 헤이하치로와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4. 항해 중 문제
발트 함대의 극동 항해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우선,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이 도거 뱅크 사건을 빌미로 압력을 가하여 기항지 확보와 석탄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29] 영국은 중립국에 발트 함대의 기항을 허용하면 중립 위반이라고 압박했고, 자국 식민지 항구의 기항을 거부했으며, 러시아와 계약한 독일 운수 회사에 석탄 공급 중단을 요청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발트 함대의 항해를 방해했다.
러시아 해군성의 무능과 보급 체계 문제도 심각했다. 러시아 해군성은 로제스트벤스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기항지와 연료 공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29]
장기간의 항해와 낯선 환경, 전투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군기가 문란해졌다.[30] 희망봉을 경유하는 남반구 항해는 북국 출신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더위와 습기, 질병을 가져왔다. 기항지가 제한되어 해상에서 석탄 보급을 해야 했고, 이는 병사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31] 극동에 가까워질수록 혐전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기항지에서 탈주하는 병사가 속출했다.
5. 훈장
훈장 | 등급 |
---|---|
성 게오르기 훈장 | 4등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3등 |
성 블라디미르 훈장 | 4등 (리본 포함) |
성 안나 훈장 | 2등 |
성 안나 훈장 | 3등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1등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2등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3등 |
참조
[1]
문서
Pleshakov, photo caption, page not numbered
[2]
문서
'''Рожественский'''. Several other [[transliteration]]s are also known in [[English language|English]] texts.
[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4]
문서
Pleshakov
[5]
문서
Watts
[6]
문서
Pleshakov
[7]
문서
Pleshakov
[8]
문서
Pleshakov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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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shakov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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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shakov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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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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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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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University of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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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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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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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Books
2002
[2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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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27]
뉴스
読売新聞
2007-10-25
[28]
서적
もうひとつの日露戦争
朝日新聞出版
2009
[29]
문서
当初海軍省は石炭問題を重要視していなかった
[30]
서적
ツシマ〈上〉バルチック艦隊遠征
[31]
문서
これが後の日本海海戦の敗北の伏線にもなったといわれる
[32]
문서
Pleshakov, photo caption, page not numbered
[3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34]
문서
Plesha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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