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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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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유는 서진 시대의 인물로,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차남이며,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의 동복 동생이다. 그는 총명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아버지 사마소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여러 신료들의 반대로 사마염이 진왕위를 승계했다. 사마유는 정치적 활동을 펼치며 황태자 사마충을 보좌했으나, 순욱과 풍담의 모함으로 인해 청주 제군사로 임명되어 귀국하게 된다. 이후 병을 얻어 3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팔왕의 난의 시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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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유
기본 정보
출생일246년
사망일283년 4월 27일 (37세)
배우자가포
작위
작위명제 왕 (齊王)
재위 기간266년 2월 9일 – 283년 4월 27일
이전 통치자조방
후임 통치자사마경
가문
가문사마씨
부친사마소
모친왕원희
자녀사마예
사마식 (司馬寔)
사마찬 (司馬贊)
사마경
자녀 링크사마의 가계도
추증 시호
시호헌왕 (獻王)

2. 생애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차남이며, 서진의 시조 사마염의 동복동생이다. 사마사가 자식이 없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마소는 늙어 후계자를 정하려 할 때, 저돌적인 성격의 사마염보다는 온유한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신료들의 반대로 장자인 사마염이 진왕직을 승계했고, 진 황제에 올랐다. 진 왕조 성립 후, 사마유는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14] 사마유는 사마염의 후계 경쟁자였기에 사마염의 인척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다.

후에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삼공(三公)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지만, 사마유는 신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공부(公府)가 하급 관리들의 동향에 어둡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벌을 명확히 하여 정사를 다잡았고, 조정의 안팎은 숙연해졌다. 후에 무제가 표기(驃騎)의 병력을 해산하자,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사마유를 사모하여 떠나려 하지 않았고, 무제는 다시 병력을 돌려주었다.

사마유는 정치에 정력적으로 임했고, 『진서』는 "유(攸)는 조정의 정치에 매번 크게 의논하고, 마음을 다하여 이를 진술했다"고 전하고 있다.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으로 전임했고,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임, 잠시 후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태시 4년(268년), 어머니 왕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태후는 자신의 병이 깊어졌을 때, 병상에 무제를 불러 "유는 정이 격렬한 아들이라 그대를 차가운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없어진 후, 그대와 유가 서로 화합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대에게 유를 부탁합니다만,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울면서 부탁했다.

무제의 만년에는 황자들이 모두 연약했고, 조정의 안팎은 사마유에게 기대를 걸었으며, 황위를 계승하게 하거나 어리석은 황태자 사마충(혜제)을 보필하여 실권을 장악하는 것을 바랐다. 중서감 순욱·시중 풍담 등은 평소 무제에게 아첨했는데, 사마유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순욱과 풍담은 사마유가 황태자가 되면 자신들이 파멸될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무제에게 사마유를 모함했다.

결국 무제는 태강 3년(282년)에 사마유를 대사마·도독청주 제군사(諸軍事)로 임명하고 귀국을 명했다. 사마유는 이 조치에 기뻐하지 않고, "나는 시대를 바로잡는 데에는 쓸모없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무제의 숙부인 부풍왕 사마준왕혼·조지 (조식의 아들) 등 많은 조정 대신들이 무제에게 잇따라 반대했지만, 무제는 "이는 황실 내부, 게다가 형제 간의 문제이며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라고 격노했다.[12]

태강 4년(283년), 무제는 사마유의 부임을 위해 성대하게 문물을 갖추게 했지만, 사마유는 이것이 순욱 등의 책략임을 알자 분노하여 병이 났다. 무제가 파견한 전의(典醫)들은 무제의 뜻에 영합하여 "왕에게 병이 없다"라고 거짓 보고했기 때문에, 사마유의 병은 악화되었는데, 임지로의 출발을 강요당했다. 사마유는 무리하여 위엄을 갖추고,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일상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무제는 병이 아닌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출발 이틀 후), 사마유는 숙소에서 피를 토하며 38세[11]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계 계승

정시 7년(246년)[11], 사마소왕원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마의는 "이 아이는 큰 그릇이다"라고 칭찬하며 장래를 촉망했다. 사마소는 자신의 침상을 어루만지며 "여기는 도부(사마유의 자)의 자리야"라고 말할 정도로 사마유를 사랑했다. 사마사가 아들을 낳지 못해 그의 양자가 되었지만, 정원 2년(255년)에 사마사가 죽자 매우 슬퍼했고, 그 모습에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사마사의 아내인 양휘유에게 효성을 다했다.

성장한 사마유는 조용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현사(賢士)와 친하게 지내며 사람을 사랑했고, 학문을 좋아하여 문장에도 능했다. 재능과 인망은 형인 사마염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성인이 되자 산기상시(散騎常侍)·보병교위(步兵校尉)를 역임했으며, 오등작(五等爵)이 제정되자 안창후(安昌侯)에 봉해져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경원 5년(264년) 3월,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晋王)이 되자, 후계자로 사마염보다 사마유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중시하는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이때 사마소는 "나는 지금 형님(사마사)의 죽음으로 상국의 지위에 임시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후에는 대업을 그 후계자인 유에게 돌려야 한다", "이는 경왕(사마사)의 천하다. 어찌 내가 관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함희 2년(265년) 8월, 아버지 사마소가 병사했다. 병상에 있던 사마소는 사마유의 앞날을 걱정하며 불안해했고, 형제에게 냉대받았던 조식의 처지를 떠올리며 임종 시 사마유의 손을 잡고 사마염에게 맡겼다. 아버지를 잃은 사마유의 비탄은 극심했고, 심적으로 고통스러워 쇠약해져 음식을 먹지 못했다. 어머니 왕부인은 "만약 다른 병을 얻으면 어쩌시려고요. 한 가지 일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계희(계강의 형)는 "필부(匹夫)조차 목숨을 아끼고 조상을 제사지냅니다. 하물며 천하의 대업을 짊어지고 황실을 보좌하는 중임을 맡은 당신이 그러면 어쩌시렵니까"라며 억지로 음식을 먹였다. 계희가 물러간 후, 사마유는 "계사마는 나에게 장례의 절도를 잊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이겠지"라고 말했다.

2. 2. 뛰어난 재능과 인품

정시 7년(246년)[11], 사마소왕원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마의는 늘 "이 아이는 큰 그릇이다"라고 칭찬하며 장래를 촉망받았다. 사마소는 자신의 침상을 어루만지며 "여기는 도부(사마유의 자)의 자리야"라고 말할 정도로 사마유를 사랑했다. 사마사가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그의 양자가 되었지만, 정원 2년(255년)에 사마사가 죽자 매우 슬퍼했고, 그 모습에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사마사의 아내인 양휘유에게 효성을 다했다.

성장한 사마유는 조용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현사(賢士)와 친하게 지내며 사람을 사랑했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여 문장에도 능했다. 재능과 인망은 형인 사마염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성인이 되자 산기상시(散騎常侍)·보병교위(步兵校尉)를 역임했으며, 오등작(五等爵)이 제정되자 안창후(安昌侯)에 봉해져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함녕 2년(276년), 가충을 대신하여 사공이 되었다. 시중을 겸했고, 태자소부는 그대로였다.

태강 4년(283년), 무제는 사마유의 부임을 위해 성대하게 문물을 갖추게 했지만, 사마유는 이것이 순욱 등의 책략임을 알자 분노하여 병이 났다. 죽은 모후의 능을 지킬 것(=관직을 물러나는 것)을 바랐지만, 무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제가 파견한 전의(典醫)들은 무제의 뜻에 영합하여 "왕에게 병이 없다"라고 거짓 보고했기 때문에, 사마유의 병은 악화될 뿐이었는데, 임지로의 출발을 강요당했다. 사마유는 무리하여 위엄을 갖추고,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일상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무제는 병이 아닌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유는 숙소에서 피를 토하며 38세[11]로 사망했다.

진서』 제헌왕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사마유의 인품을 요약하고 있다. "사마유는 예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과실이 거의 없었다. 사람에게서 서적을 빌리면 그 오자를 제대로 고쳐서 돌려주었다. 세심한 성품은 사람을 능가했고, 자신의 휘(諱)를 언급하면 눈물을 흘렸다. 무제(武帝)라도 동생을 존경하고 꺼리는 바가 있어 반드시 말을 가려서 했다."

2. 3. 아버지 사마소의 후계자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차남이며, 서진의 시조 사마염의 동복동생이다. 사마사가 자식이 없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마소는 늙어 후계자를 정하려 할 때, 저돌적인 성격의 사마염보다는 온유한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신료들의 반대로 장자인 사마염이 진왕직을 승계했고, 진황제에 올랐다.[14] 진 왕조 성립 후, 사마유는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 사마유는 사마염의 후계 경쟁자였기에 사마염의 인척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다.[14] 사마염이 죽자, 그의 장남 사마충이 제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사마사가 사마소에게 물려준 예에 따라 사마충 대신 사마유가 제위를 승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283년, 사마충이 제위에 오르기 전에 사마유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부상하자, 순욱과 풍담이 사마염에게 모함하였다.[14] 이때 병이 났던 사마유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14]

2. 4. 형 사마염의 즉위와 제왕 책봉

사마소가 늙어 후계자를 정하려 할 때, 사마소는 저돌적인 성격의 사마염보다 온유한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료들의 반대로 장자인 사마염이 진왕직을 승계했고, 진 황제에 오르게 된다. 진 왕조 성립 후, 사마유는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14]

함희 2년(265년) 8월, 아버지 사마소가 병사하자 사마유는 심적으로 고통스러워 쇠약해졌다. 사람들은 음식을 권했지만 먹지 못했다. 그해 12월, 사마염은 위(魏)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고, 사마유는 제왕에 봉해졌다. 사마유는 직접 영지로 가지는 않았지만, 제나라의 문무(文武) 관료, 사졸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급여를 분배하고, 질병이나 장례에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수해와 한발이 일어나면 백성을 구제했고, 풍년이 들면 조세의 2할을 감면했으므로, 백성들은 이를 다행으로 여겼다. 당시 왕족의 의식주는 국고에서 나왔지만, 사마유는 자국의 세입만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상소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사마유는 사마염의 후계 경쟁자였기에 사마염의 인척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다. 무제(사마염)의 만년에는, 그의 황자들이 모두 연약했고, 조정의 안팎은 사마유에게 기대를 걸었다. 어리석은 황태자 사마충(혜제)을 대신하여 사마유가 황위를 계승하거나, 그를 보필하여 실권을 장악하기를 바랐다.

283년, 사마충이 제위에 오르기 전에 사마유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부상하자, 순욱과 풍담이 사마염에게 모함하였다. 이때 병이 났던 사마유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14]

2. 5. 정치 활동과 황태자 교육

사마유는 정시 7년(246년)에 사마소왕원희의 아들로 태어났다.[11]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마의는 "이 아이는 큰 그릇이다"라고 칭찬했다. 사마사가 아들을 낳지 못해 그의 양자가 되었지만, 정원 2년(255년)에 사마사가 죽자 매우 슬퍼했고, 그 모습에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성장한 사마유는 조용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현명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사람을 사랑했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여 문장에도 능했다. 재능과 인망은 형인 사마염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성인이 되자 산기상시(散騎常侍)·보병교위(步兵校尉)를 역임했으며, 오등작(五等爵)이 제정되자 안창후(安昌侯)에 봉해져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경원 5년(264년) 3월,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晋王)이 되자, 후계자로 사마염보다 사마유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중시하는 중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함희 2년(265년) 8월, 아버지 사마소가 병사했다. 사마유는 비탄에 빠져 심적으로 고통스러워 쇠약해졌고, 사람들이 음식을 권해도 먹지 못했다.

진왕을 계승한 사마염은, 그 해 12월에 위(魏)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고, 사마유는 제왕(斉王)에 봉해졌다. 제나라의 문무(文武) 관료와 사졸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급여를 분배하고, 질병이나 장례에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수해와 한발이 일어나면 백성을 구제했고, 풍년이 들면 조세의 2할을 감면했으므로, 백성들은 이를 다행으로 여겼다.

후에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삼공(三公)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지만, 사마유는 신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공부(公府)가 하급 관리들의 동향에 어둡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벌을 명확히 하여 정사를 다잡았고, 조정의 안팎은 숙연해졌다. 후에 무제가 표기(驃騎)의 병력을 해산하자,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사마유를 사모하여 떠나려 하지 않았고, 무제는 다시 병력을 돌려주었다.

사마유는 정치에 정력적으로 임했고, 『진서』는 "유(攸)는 조정의 정치에 매번 크게 의논하고, 마음을 다하여 이를 진술했다"고 전하고 있다.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으로 전임했고,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임, 잠시 후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사마유는 황태자 사마충(후의 혜제)에게 잠언을 주었다.

태시 4년(268년), 어머니 왕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함녕 2년(276년), 가충을 대신하여 사공이 되었다. 시중을 겸했고, 태자소부는 그대로였다.

무제 만년에는 황자들이 모두 연약했고, 조정의 안팎은 사마유에게 기대를 걸었으며, 황위를 계승하게 하거나 어리석은 황태자 사마충(혜제)을 보필하여 실권을 장악하는 것을 바랐다. 중서감 순욱·시중 풍담 등은 평소 무제에게 아첨했는데, 사마유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순욱과 풍담은 사마유가 황태자가 되면 자신들이 파멸될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무제를 설득했고, 결국 무제는 태강 3년(282년)에 사마유를 대사마·도독청주 제군사(諸軍事)로 임명하고 귀국을 명했다. 사마유는 이 조치에 기뻐하지 않고, "나는 시대를 바로잡는 데에는 쓸모없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태강 4년(283년), 무제는 사마유의 부임을 위해 성대하게 문물을 갖추게 했지만, 사마유는 이것이 순욱 등의 책략임을 알자, 분노하여 병이 났다. 무제가 파견한 전의(典醫)들은 무제의 뜻에 영합하여 "왕에게 병이 없다"라고 거짓 보고했기 때문에, 사마유의 병은 악화되었는데, 임지로의 출발을 강요당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유는 숙소에서 피를 토하며 38세[11]로 사망했다.

2. 6. 모함과 죽음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차남이며,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의 동복동생이다. 백부 사마사가 아들이 없자 그의 양자로 들어갔다.

사마소가 나이가 들어 후계자를 정하려 할 때, 사마소는 저돌적인 성격의 사마염보다 온화한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장남인 사마염이 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결국 황제에 올랐다. 진나라 건국 후, 사마유는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사마유가 사마염의 후계 경쟁자였기 때문에, 사마염의 친척들에게 많은 공격을 받았다.[14] 사마염이 죽고 그의 장남 사마충이 황제 자리를 계승했는데, 그는 무능했기 때문에 사마사가 사마소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것처럼 사마충 대신 사마유가 제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283년, 사마충이 황제가 되기 전에 사마유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순욱과 풍담이 사마염에게 사마유를 모함하였다. 이때 병이 났던 사마유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14]

3. 평가

『진서』 제헌왕전에서는 사마유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사마유는 예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과실이 거의 없었다. 사람에게서 서적을 빌리면 그 오자를 제대로 고쳐서 돌려주었다. 세심한 성품은 사람을 능가했고, 자신의 휘(諱)를 언급하면 눈물을 흘렸다. 무제(武帝)라도 동생을 존경하고 꺼리는 바가 있어 반드시 말을 가려서 했다."[1]

후쿠하라 키로는 사마유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제왕유 귀번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사마염이 천하를 평정한 후 외척(양준)과 측근(순욱·풍담)이 중용되고 여론이 무시되어 정치가 사유화되어 가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 신하들이, 황제와 가깝고 여론의 기대가 높은 사마유의 귀국을 허락하면 그보다 황제와 소원한 관계에 있는 자신들마저 외척과 측근들에게 배제될 것을 두려워하여 사마유의 귀국 반대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 귀국 반대 운동은 무력 항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그 후에 발생한 팔왕의 난에서의 거병 과정과 같은 구도였다고 지적하며, 팔왕의 난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2]

4. 가계

司馬攸|사마유중국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4. 1. 자녀


  • 사마식 (경심)
  • 사마경 (경치, 생모는 가충의 딸)
  • 사마찬 (경기, 사마광덕의 유자) - 요절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Book of Jin
[3] 서적 Jin Shu 283-04-27
[4] 서적 Book of Jin
[5] 서적 Book of Jin
[6] 서적 Book of Jin
[7] 서적 Jin Shu
[8] 서적 Jin Shu 283-01-28
[9] 서적 晉書 648
[10] 서적 晉書 648
[11] 서적 晋書
[12] 서적 世説新語
[13] 서적 魏晋政治社会史研究 京都大学学術出版会
[14] 서적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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