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충은 위나라와 진나라의 신하로, 사마씨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진나라 건국 후에는 법률 제정에 참여했다. 그는 사마소의 심복으로 조모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종회의 난 진압에도 참여했다. 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딸들을 황족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 권력을 유지했으며, 오나라 정벌에는 반대했다. 말년에는 태위가 되었으나, 오나라 정벌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위는 유지되었다. 가충의 딸 가남풍은 혜제의 황후가 되었으나, 팔왕의 난을 촉발하여 서진 멸망의 원인이 되었고, 가문은 몰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17년 출생 - 왕원희
왕원희는 삼국시대 위나라 왕숙의 딸이자 진 무제 사마염의 어머니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사마소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고, 사마소가 섭정이 된 후 종회의 위험성을 경고했으며,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 황태후가 되어 검소한 생활을 하다 사마소와 합장되었다. - 217년 출생 - 노숙 (동오)
노숙은 삼국시대 동오의 무장으로, 손휴와 손호 대에 걸쳐 무창과 하구의 독을 역임하며 엄정한 통치를 펼쳤으나, 서진 공격에 실패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 노목이 뒤를 이었다. - 282년 사망 - 황보밀
황보밀은 삼국시대 위나라 말부터 서진 시대에 걸쳐 활동한 학자이자 저술가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며 《침구갑을경》, 《제왕세기》 등의 저서를 남겼고, 특히 《침구갑을경》은 침구학의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 282년 사망 - 프로부스 (황제)
프로부스는 일리리아 출신으로 군인 경력을 쌓아 로마 황제(276년~282년)가 되었으며,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전선에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제국 내 반란을 진압하는 등 치세 동안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페르시아 원정 준비 중 암살당했다. - 서진의 태위 - 사마옹
사마옹은 서진의 황족이자 군벌로,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혼란을 야기했으며, 진서장군으로서 관중 지역을 수비하다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암살당했다. - 서진의 태위 - 장궤
장궤는 서진 시대에 상서랑 등을 역임하고 양주 자사로 부임하여 선비족을 토벌하고 반독립 세력을 형성했으며, 서진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며 지역 안정에 힘쓰다 60세에 사망했다.
가충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가충 (賈充) |
자 | 공려 (公閭) |
출생 | 217년 |
사망 | 282년 5월 19일 (향년 65세) |
출생지 | 산시성 샹펀현 |
국적 | 진나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가규 |
어머니 | 유씨 (劉氏) |
형제 | 가혼 (賈混) |
배우자 | 이완 곽괴 (郭槐) |
자녀 | 가포 (賈褒) 가유 (賈裕) 가남풍 가오 (賈午) 가리민 (賈利民) 이름 없는 아들 1명 |
관직 정보 | |
관직 | 녹상서사 (錄尚書事) |
재임 기간 | 알 수 없음 |
군주 | 진 무제 사마염 |
관직 (태위) | 태위 (太尉) |
임명일 | 276년 9월 16일 |
군주 (태위) | 진 무제 사마염 |
사망일 | 282년 5월 19일 |
관직 (거기장군) | 거기장군 (車騎將軍) |
임명일 (거기장군) | 266년 2월 9일 |
퇴임일 (거기장군) | 272년 8월 경 |
군주 (거기장군) | 진 무제 사마염 |
관직 (상서령) | 상서령 (尚書令) |
재임 기간 (상서령) | 알 수 없음 |
군주 (상서령) | 진 무제 사마염 |
관직 (사공) | 사공 (司空) |
임명일 (사공) | 272년 8월 경 |
퇴임일 (사공) | 276년 9월 16일 |
군주 (사공) | 진 무제 사마염 |
작위 정보 | |
작위 | 노공 (魯公) |
시호 | 무공 (武公) |
2. 위나라의 신하
가충의 아버지 가규는 위나라의 무장이었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의 전형으로 여겨졌다.[5] 가충은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의 제후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사마사 밑에서 일했고, 그 다음에는 사마사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사마소 밑에서 일했다.
257년, 사마소는 가충을 보내 제갈탄이 위나라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가충은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260년, 위나라 황제 조모가 사마소의 권력 독점에 분노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자, 가충은 부하인 성제에게 황제를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백성들은 가충을 국왕 살해자로 여기게 되었지만, 사마소는 가충을 처벌하지 않았다.
264년, 가충은 종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 1. 사마씨의 심복
일찍부터 사마씨(司馬氏)의 무리에 가담했다.258년, 사마씨의 반대세력인 제갈탄(諸葛誕)을 찾아갔으나, 제갈탄이 사마씨에게 반감을 보이자 제갈탄 일행을 제거하였다. 또한 사마소(司馬昭)의 명을 받아 성제(成濟)로 하여금 위의 황제 조모를 시해하게 하였다. 이때 진태(陳泰)는 가충을 죽일 것을 요구하였으나, 사마소는 가충을 죽이지 않았다.[5]
진왕이 되었던 사마소는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가충은 사마염(司馬炎)을 추천하였고, 사마염이 진왕이 되자 제위를 빼앗아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다.
255년,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참군으로 출정했다. 사마사가 급사한 후 군의 지휘를 맡았다.
257년, 사마소의 명령으로 제갈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자로 파견되었고, 제갈탄에게 반역 의사가 있음을 사마소에게 보고했다.
260년, 황제 조모가 사마씨로부터 실권을 되찾기 위해 병사를 일으켰을 때, 사마소의 지시를 받아 난의 진압에 나섰다. 이때, 가충은 부하인 성제에게 명하여 조모를 살해하게 했다(감로의 변). 진태가 가충을 황제 살해죄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사마소에게 호소했지만, 결국 실행범인 성제가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을 뿐, 가충은 아무런 죄도 묻지 않았다.
264년, 촉한 정벌 후에 종회가 반기를 들어 독립을 꾀하자, 사마소의 명령으로 토벌군의 지휘를 맡아 관중으로 향했지만, 도중에 종회의 죽음이 전해져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2. 2. 제갈탄의 난 진압
257년, 사마소는 가충을 보내 제갈탄이 위나라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당시 수춘에 주둔하고 있던 제갈탄은 가충이 그 앞에서 사마소를 끊임없이 칭찬하자 꾸짖었다. 가충이 수도 낙양으로 돌아온 후, 사마소에게 제갈탄이 그의 섭정에 복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마소는 그에 따라 제갈탄을 수도로 소환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했고,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이 사건 이후, 가충은 사마소에게 더욱 높이 평가받았다.[5] 감로 2년(257년)의 일이다.2. 3. 조모 시해 사건
260년 6월, 위나라 황제 조모는 사마소의 권력 독점에 분노하여 권력을 되찾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다.[5] 사마주가 이끄는 군대가 조모의 군대에 의해 빠르게 붕괴되자, 가충은 부하인 성제(成濟)에게 황제와 그의 충성파를 물리치기 위해 어떤 조치라도 취하도록 명령했다.[5] 성제는 조모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5] (감로의 변)[5]사건 이후, 백성들은 성제와 가충의 처형을 요구했다.[5] 사마소는 10일 넘게 고심한 끝에 성제와 그의 일족을 죽이기로 결정했지만, 가충은 살려두었다.[5] 진태(陳泰)는 사마소에게 가충을 황제 살해죄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실행범인 성제가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을 뿐, 가충은 아무런 죄도 묻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가충의 평판은 백성들 사이에서 국왕 살해자로 굳어졌다.
2. 4. 종회의 난 진압
264년, 촉한 정벌 후에 종회가 반기를 들어 독립을 꾀하자, 사마소의 명령으로 가충은 토벌군의 지휘를 맡아 관중으로 향했다.[5] 사마소는 종회가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음을 예측하고, 종회로부터의 가능한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가충에게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는 등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5] 도중에 종회의 죽음이 전해졌는데, 종회는 반란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던 그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5]3. 진나라의 신하
사마소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사마염을 섬기며 그 선양에 협력했다. 사마염(무제)이 즉위하자 양호, 순욱, 배수, 왕침 등과 함께 좌명(佐命)의 훈(진나라 건국의 공신)으로 공을 포상받았으며, 가충의 공적도 으뜸으로 꼽혔다. 진건과 함께 특별한 향을 부여받기도 했다.[17]
진나라 시대가 되자 사공, 상서령 등을 역임했다.
태시 6년 (270년), 옹주, 양주에서 이민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석감이 진압에 실패하자, 임개는 사마염에게 가충을 진압에 파견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임개는 이전부터 가충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가충 또한 임개를 비난했기 때문에, 이 진언은 가충을 외지로 내보내기 위한 계략으로 여겨졌다.[18] 가충은 송별 연회에서 순욱과 모의했다. 순욱은 사마충 (태자)의 비(妃)로 가충의 딸[19]을 시집보내면, 낙양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곧 순욱이 연회로 돌아와, 가충의 딸을 사마충에게 시집보낼 것을 주장하자, 순의와 무원 양황후도 찬동했다. 이렇게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어, 가충은 낙양에 머무를 수 있었다. 또한, 양호도 은밀히 가충의 부임을 반대하는 주청을 올렸고, 사마염에게 그 사실을 전해지자, 가충은 양호에게 "귀하께서 덕이 뛰어나심을 처음 알았습니다"라며 사례했다.
276년 9월 16일, 가충은 태위가 되었고, 사마유가 상서령의 직책을 이어받았다.[14]
생애를 통해 사마염에게 충실한 신하였지만, 사마염의 동복 동생이자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사마유(제왕)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282년, 향년 65세에 죽었다. 시호를 심의한 박사 진수는 "황"이 상당하다고 상신했다. 생전의 공적이나 소행의 선악을 참작하여 시호는 결정되는 것이며, "황"은 "유희를 마음대로 하고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한" 자에게 주어진다. 그의 생애에 비추어 이 시호는 당연했지만, 사마염은 인정하지 않았고, 그 뜻을 헤아린 박사 단창이 건의한 "무"로 결정되었다.
3. 1. 진나라 건국과 법률 제정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자, 가충은 고관의 직위에 오르고 딸들을 황태자 사마충(후의 효혜제)과 제왕 사마유의 비로 보내며 외척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순욱, 두예, 장화 등과 함께 《진율령(晉律令)》을 편찬하기도 했다.[6]265년 사마소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사마염은 266년 조환에게 강제로 선위를 받아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했다. 가충은 진나라 건국의 공신으로, 266년 2월 9일에 "노공(魯公)"으로 봉해졌다.[6] 무제(사마염)는 가충에게 진나라 법률 초안 작성을 위임했는데, 초기에는 위나라의 엄격한 법률보다 훨씬 자비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의 불균등한 집행은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17]
가충은 『태시율령』 편찬의 중심 인물이 되어 형벌을 가볍게 하고,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정령을 정리했으며, 유교에 의한 질서를 중시했다. 『진서』는 『태시율령』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가충은 시정에서 농업 생산을 중시하고 권한이 중복되는 관직의 통폐합을 추진했으며, 사마염은 가충의 방침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무관과 문관의 분리를 철저히 하고 문관이 병사를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7]
280년, 양호가 오나라 토벌전을 상주하였을 때 가충은 반대하였다. 이때 장화가 이를 꾸짖자 아무런 말도 못하였다. 오나라를 토벌할 때 총사령관을 맡았지만, 군사 행동에 계속 반대했다. 손호가 항복하자 잔학한 행동을 힐책했으나, 반대로 조모를 암살한 것을 지적당하였다.
통일 후 노공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무공(武公)이다.
3. 2. 정치적 경쟁과 파벌 형성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자 가충은 고관의 직위에 오르고, 딸들을 황태자 사마충(후의 효혜제)과 제왕 사마유의 비로 보내며 외척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6] 임개, 유순과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사마유가 가보와 결혼한 후 이러한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7]271년, 임개와 유순은 무제를 설득하여 가충을 관중 지역으로 보내 진나라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반란을 막도록 했다.[8] 가충은 반란군과 싸우고 싶지 않아 순욱에게 조언을 구했고, 순욱은 그의 딸 중 한 명과 황태자의 결혼을 주선하면 된다고 하였다. 순욱은 아첨하는 기술과 무제의 부인 양 황후 및 순이의 도움을 받아 무제의 동의를 얻었다. 양호 또한 가충을 돕기 위해 뒤에서 노력했고, 가충은 그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9] 272년, 가충은 임개와 유순에게 보복하여 그들을 정치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10][11]
272년에서 274년 사이, 무제가 심각한 병에 걸리자 진나라 조정은 사마충 대신 사마유를 차기 황제로 고려했다. 가충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무제는 이 사건을 듣고 가충의 군사 지휘권을 박탈했지만, 조정에서 그의 작위와 대우는 유지하도록 했다.[13]
가충은 임개를 황제와의 접촉이 적은 상서로 전임시켜 사마염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두 사람을 이간질하려 했다. 이로 인해 임개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가충은 술자리에서 임개파 유순에게,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고 관직에 나아간다는 점을 비꼬았다. 유순은 분노하여 "고귀향공(조모)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황제 살해의 책임을 암시하며 비난했다. 유순은 나중에 사죄하고 사직했지만, 그 이상의 처벌은 받지 않았다.[20]
가충은 파벌을 만드는 데 열심이었으며, 많은 인재를 평가했지만, 평가는 개인적인 호오가 우선되었다. 두예 등 과거 대오 주전파 사람들은, 중앙에 뇌물을 보내는 등 보신에 급급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3. 3. 오나라 정벌 반대
280년, 양호가 오나라 정벌을 주장했을 때 가충은 이에 반대하였다. 장화가 이를 꾸짖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사마염이 오나라 정벌을 계획했을 때도 반대했지만, 사마염은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가충은 마지못해 따랐지만 군사 행동에 계속 반대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손호가 항복하자, 가충은 손호의 잔학한 행동을 힐책했으나, 손호는 조모를 암살한 가충의 과거를 지적하며 반박했다.[6]가충은 양호가 죽은 후에도 두예나 장화와 같은 주전파를 계속 비판했다. 함녕 6년 (280년) 오 정복전에서도 개전에 반대하여 사마염에게 꾸짖음을 받았다. 총지휘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철수를 주장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오나라 정복이 성공한 후에도 가충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4. 죽음과 평가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자, 가충은 고관의 직위에 오르고, 딸들을 황태자 사마충(후의 효혜제)의 비와 제왕(齊王) 사마유의 비로 보내며 외척으로써의 자리를 굳혔다. 거기장군 상서복야가 되어 순욱, 두예, 장화 등과 함께 《진율령》을 편찬하기도 했다.[4]
280년, 양호가 오나라 토벌전을 상주하였을 때 반대하였다. 이때 장화가 이를 꾸짖자 아무런 말도 못하였다. 오(吳)를 토벌할 때 총사령관을 맡았다. 손호가 항복하자 잔학한 행동을 힐책했으나, 반대로 조모를 암살한 것을 지적당하였다.[4]
통일 후 노공(魯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무공(武公)이다.[4]
282년, 향년 65세에 죽었다.[4] 가충이 위독해지자, 진 무제는 태자 사마충에게 가충을 특별히 문병하도록 명하는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가충이 사망한 후, 그의 둘째 부인 곽괴는 가충의 외손자 한밀이 그의 공작위를 상속받기를 원했다. 진 무제는 외손자가 외조부의 작위를 상속받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졌음에도 이를 승인했다. 이 때문에, 중요한 관리들의 시호를 선정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인 진수(秦秀)는 처음에는 가충의 시호를 "황"(荒; 글자 그대로 "불법 행위자")으로 선택하려 했으나, 진 무제가 진수의 권고를 무시하고 "무"(武; 글자 그대로 "무예")를 가충의 시호로 선택했다.[5]
5. 팔왕의 난과 가문의 몰락
가충의 두 딸은 태자비와 제왕비가 되었다. 태자비는 후에 혜제(혜제)의 가황후가 되어 횡포가 심해졌는데, 팔왕의 난이 일어나 서진의 멸망의 단서가 되었다.[21]
가남풍은 사마염 사후, 사마충(혜제)의 황후가 되었지만, 권력 투쟁을 벌인 결과 서진을 쇠퇴시키고 (팔왕의 난), 마지막에는 사마륜(조왕)에게 자결하도록 몰렸으며, 가문 일족도 모두 몰살당했다.[21]
이완의 딸 중 한 명인 가천은 사마유의 비가 되어, 사마경(제왕)을 낳았다. 처음 사마경은 사마륜과 함께 가문 일족을 멸망시키는 데 가담했지만, 후에 사마륜과 대립하여 이를 물리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가후나 사마륜과 마찬가지로 내란에 휘말려 살해되었다.[21]
가충이 건국에 공헌한 서진은, 이렇게 그의 자식과 손자들에 의해 단기간 내에 멸망으로 향해 갔다. 그것은 또한 그의 일족을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21]
6.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가규 | 양리정후(陽里亭侯) |
어머니 | 유씨(柳氏) 부인 | |
동생 | 가혼 | 영평후(永平侯), 아들: 가이, 가준, 가모 |
첫째 부인 | 이완 | 이풍의 딸, 이풍 사후 이혼 및 유배[15], 가포, 가유 출산. |
둘째 부인 | 곽회 | 곽회의 조카, 가남풍, 가오, 가여민 외 아들 1명 출산. |
장녀 | 가전(賈筌) | 제왕 사마유의 비 |
차녀 | 가준(賈浚) | |
3녀 | 가남풍 | 사마충과 결혼, 자녀 출산 (네 딸) |
4녀 | 가오 | 한수와 결혼, 자녀 출산 (두 아들) |
장남 | 가여민(賈黎民) | 요절 |
차남 | ? | 요절 |
가충의 어머니는 절의를 중시하여 아들의 행동을 알지 못한 채, 주위의 냉소를 받았다. 어머니는 죽기 전 가충에게 전처 이완을 다시 불러오라고 유언했다.[21]
가충은 이완과 이혼 후 곽회와 재혼했다. 이완 사후, 가남풍은 이완이 가충과 합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가남풍 사후에 비로소 합장되었다.[16]
가충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나, 외손자 가밀을 후계자로 삼았다.[21] 가남풍은 권력 투쟁 끝에 사마륜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가문 일족도 몰살당했다.
이완의 딸 가포는 사마유의 비가 되어 사마경을 낳았다. 사마경은 사마륜과 함께 가문 일족을 멸망시키는 데 가담했지만, 후에 사마륜을 물리치고 정치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란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7. 대중문화 속의 가충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의 8번째 작품에서 처음으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Jin Shu
[2]
서적
Jin Shu
[3]
서적
Jin Shu
[4]
서적
Jin Shu
[5]
문서
[6]
서적
Jin Shu
[7]
서적
Jin Shu
[8]
서적
Book of Jin
[9]
서적
Book of Jin
[10]
서적
Jin Shu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Book of Jin
[13]
서적
Book of Jin
[14]
서적
Jin Shu
[15]
서적
Shishuo Xinyu
[16]
서적
Jin Shu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서적
晋書
[22]
서적
가충별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