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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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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욱은 조위의 조상, 사마소, 사마염(진 무제)을 섬기며 서진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조방의 섭정 조상의 보좌관으로 시작하여 안양현 현령, 사마소의 군사 고문 등을 역임했다. 사마소의 촉한 정복 및 동오 정벌 계획에 관여했으며, 사마염 즉위 후 가충 등과 함께 정치적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가남풍과의 관계, 무제에게 아첨한 행위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음악 편곡, 서예 교육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최종적으로 의동삼사의 대우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사망했으며, 사후 성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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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관직상서령 (尚書令)
재임 시작기원후 280년대 경
재임 종료289년
군주진 무제
관직 1광록대부 (光祿大夫)
군주 1진 무제
관직 2저작 (著作)
임기 2266년–?
군주 2진 무제
관직 3시중 (侍中)
임기 3266년–?
군주 3진 무제
관직 4중서감 (中書監)
임기 4266년–?
군주 4진 무제
관직 5전기실 (記室)
군주 5조모 / 조환
관직 6정위정 (廷尉正)
군주 6조모 / 조환
관직 7종사중랑 (從事中郎)
군주 7조방 / 조모
관직 8안양령 (安陽令)
군주 8조방 / 조모
출생일알 수 없음
사망일289년 12월
가문영천 순씨
조부종요
부친순희
모친종요의 조카딸
자녀순기
순번
순조
이름 없는 아들 둘
이름 없는 딸 하나
직업음악가, 화가, 정치가, 작가
공증 (公曾)
시호성공후 (成侯)

2. 생애

순욱은 명문 영천 순씨 가문 출신으로, 본관은 현재 허창 허난성에 위치한 영음현(潁陰縣), 영천군(穎川郡)이었다. 증조부 순상은 동한 시대에 사공을 지냈고, 할아버지 순비(荀棐)는 사성교위(射聲校尉)를 지냈다.[5] 아버지 순힐(荀肸)은 일찍 죽어, 순욱은 외증조부 종요와 종씨 가문에서 자랐다. 종요는 조위의 조정에서 태부(太傅)를 지냈다. 순욱은 어릴 때부터 배우는 속도가 빨라, 10살 때 이미 글을 쓸 수 있었다. 종요는 순욱이 자라서 증조부 순상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6]

순욱의 친척 중에는 순욱, 순열, 순유가 있었다. 순욱과 순열은 순욱의 재종형이었고, 순유는 순욱의 삼종형이었다. 순욱과 순유는 조조의 조언가였으며, 조조는 삼국 시대에 위나라의 기반을 닦았다. 순열은 동한 말기의 관료이자 역사가이며 유교 학자였다.

순욱은 십여 세 때 외조부 종요로부터 증조부 순상과 같을 것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사마소의 측근이 되어 왕위 찬탈 계획에 협조하였고, 265년 사마염이 황제가 되었을 때(무제) 가충, 왕침, 양호, 배수 등과 함께 중심 역할을 맡아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양호가 동오 정벌을 주장하자 가충과 함께 반대하였다. 진의 제도인 태시율령 제정에 관여하는 등 무제의 정치에 공헌하였다.

장화진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승진시킬 것을 무제에게 상주하였을 때, 순욱은 진수가 저술한 《위지》(魏志)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참언하여 진수를 한직으로 내쫓았다.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던 순욱은 음률에 대해 완함과 논쟁을 벌였는데, 완함의 상대가 되지 못하자 불만을 품어 완함도 한직으로 내쫓았다.

이후에도 무제의 최측근으로 중용되었으나, 거만한 태도 등으로 무제의 총애를 잃어 상서(尙書)로 승진하고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의동삼사(儀同三司 : 삼공 다음가는 벼슬)의 대우를 받았으나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어 실의에 빠져 쓰러졌고, 태강 10년(289년) 11월에 죽었다.

인격 품행과 언동에는 비판이 많았지만, 문화적 사업에 관한 공헌은 커서, 비서감으로서 급군에서 출토된 죽서(竹書)를 정리하거나, 궁중의 서적을 분류하기도 했다. 사부분류는 그가 저술한 도서 목록인 중경신부의 분류가 원점이 되고 있다.

2. 1. 조위(曹魏)에서의 활동

사마의의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 일당이 살해되자, 조상의 문생고리들은 연좌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조상의 장례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욱은 혼자 장례에 참석했고, 다른 사람들도 순욱을 따라 장례에 참석했다.[7] 이후 안양현(安陽縣)의 현령으로 부임하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 사당이 지어질 정도였다.[8]

263년, 사마소촉한을 공략할 때 대장을 누구로 삼을 것인지 묻자 등애종회를 천거하였다.[11] 같은 시기, 기병 장교 노이는 사마소에게 촉한에 잠입하여 촉한의 지도자들을 암살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순욱은 촉한을 정복하는 것이 사마소가 명성을 얻는 더 나은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암살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사마소는 순욱의 현명한 조언에 감탄했다.[10]

264년, 종회는 위군을 이끌고 촉나라를 정복한 후 사마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마소는 반란에 대한 소문만 들었을 뿐 아직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는 종회를 오랫동안 잘 대해왔기 때문에 종회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믿는 것을 꺼렸다. 순욱이 종회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 후, 사마소는 예방 조치로 장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곽익과 왕심(王深)은 종씨 가문에서 자란 순욱이 종회 편에 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사마소에게 순욱을 추방할 것을 촉구했다(종회는 종요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사마소는 그들을 무시하고 이전처럼 순욱을 대했으며, 심지어 순욱이 자신과 같은 마차를 타는 것을 허락했다. 앞서 사마소는 종회에게 위군을 이끌고 촉을 정복하도록 명령했을 때 순욱은 위관을 지휘자로 추천했었다. 나중에 위관은 종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1] 종회가 반란을 꾀하다 패사하자, 곽익과 왕심은 순욱을 낙양으로 돌려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사마소는 이를 물리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순욱을 신임했다.

촉한을 제거한 후, 사마소는 동오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사신을 보내 오나라 황제인 손호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사마소는 이전에 부하들에게 손호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도록 명령했었다. 그가 읽은 수많은 초안 중에서 그는 결국 순욱이 쓴 것을 선택했다. 손호는 서신을 읽고 위나라와 화해하기로 동의했다. 사마소는 순욱의 서신이 10만 명의 군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64년 중반, 조환은 사마소에게 제후 왕, 즉 "진왕(晉王)"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순욱은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고, 안양후(安陽侯)로 봉해졌으며 1,000호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영지를 받았다.[12]

2. 2. 서진(西晉) 건국과 활동

263년, 사마소촉한을 공략할 때 대장을 누구로 삼을 것인지 묻자 등애종회를 천거하였다.[11] 265년, 사마염이 황제가 되었을 때(무제) 가충, 왕침, 양호, 배수 등과 함께 중심 역할을 맡았으며,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13] 양호가 동오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자 가충과 함께 이에 반대하였다.[14] 또한 진의 제도인 태시율령 제정에 관여하는 등 무제의 정치에 공헌하였다.[13]

사마소가 265년 9월 사망한 후, 266년 2월, 위(魏) 황제 조환은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에게 양위하여 위를 대체할 진 왕조를 세웠다. 사마염이 황위에 올라 역사적으로 무제(武帝)로 알려지자, 순욱은 제북군공에 봉해졌다. 그러나 순욱은 양호도 그의 봉작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봉작을 사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북후"라는 새로운 칭호로 여전히 후작으로 남았다. 순욱은 이후 중서감, 시중, 저작(著作; 선임 작가)을 겸임했다. 황제는 또한 그와 가충에게 진 왕조의 법을 기초하도록 했다.[13]

서진 초기인 함녕 시대(275~280)에 무제는 순욱, 석포 등을 진 왕조의 개척자로 명명하고, 그들을 진 왕조의 사당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에 포함시켰다.[14] 280년경, 왕준이 군대를 이끌고 동오를 정복할 허락을 요청했을 때(삼국의 마지막 국가), 순욱과 가충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무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왕준 등에게 진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하도록 명령했다. 침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진 왕조 아래 중국의 재통일을 이끌었다. 무제는 순욱이 칙령 초안 작성에 기여한 것을 평가하여 순욱의 아들 중 한 명을 그의 후작령에서 과세 가능한 1,000가구를 가진 촌후(村侯)로 봉하고 비단 1,000필을 하사했다.[14] 황제는 또한 순욱의 손자 순현(荀顯)을 영양정후(潁陽亭侯)로 봉했다.[15]

태강 시대(280~289)에 무제는 순욱의 재능과 기여를 칭찬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그가 더 큰 책임을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를 삼공 중 한 명처럼 대우하기 위해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임명하고, 중서감과 시중으로서의 기존 임명 외에 자신의 행정 사무실을 갖도록 했다. 그 무렵, 가충과 이윤은 이미 사망했고 태자태부(太子太傅) 자리는 비어 있었다. 순욱은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양요를 태자태부로, 위관 또는 산도를 새로운 사도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 무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8]

나중에 무제는 순욱을 상서령(尚書令)으로 승진시켰다.[25] 순욱은 오랫동안 중서감으로 재직하며 국가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가 상서령으로 재배치된 후, 그는 불만과 불행을 느꼈다. 누군가 그의 새로운 임명을 축하했을 때, 그는 이전 임명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2. 3. 가남풍(賈南風)과의 관계와 몰락

진 무제가 가충관중 지역으로 보내려 하자, 순욱은 황제가 가충을 수도 낙양 밖으로 보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마충 태자와 가충의 딸 가남풍의 혼인을 주선하도록 진 무제를 설득하여, 가충이 낙양에 머물도록 했다. 많은 관리들은 순욱의 이러한 행동을 혐오하여 그를 아첨꾼이라고 불렀다.[27]

진 무제는 사마충에게 발달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걱정하여 순욱에게 사마충을 평가하게 했다. 순욱은 사마충을 덕이 있는 태자라고 칭찬했지만, 이는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고, 이로 인해 조롱을 받았다.[28]

진 무제가 가남풍을 태자빈 자리에서 폐위시키려 하자, 순욱은 황제에게 간청하여 결정을 재고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순욱이 잠재적으로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29]

순욱이 가남풍을 황태자비로 추천하고, 무제가 그녀를 폐출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막은 행위는 훗날 서진 왕조를 붕괴로 이끄는 큰 원인이 되었기에 후세에 강하게 비판받게 되었다.

3. 평가

순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부정적인 평가로는 정치적 행보와 처신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진서》에서는 흉신(凶臣)으로 묘사되기도 했다.[4]

3. 1. 긍정적 평가

순욱은 무제의 치세인 태강 연간(280-289) 말에 사망했지만, 황제는 그에게 사공시호를 내렸고, 시호는 "성후(成侯)"였다.[4] 또한 그의 가족에게 황궁 소장 도자기, 관복 한 벌, 50만 전,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 순욱의 장례식에는 황제의 개인 대표로 어사(御史)가 파견되었다.[34]

순욱은 추밀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국가 기밀을 담당했다. 그는 재능 있는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주에 대한 신하로서 자신의 위치를 잘 이해하는 깊이 있는 사색가였다. 그는 군주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 행동하여 군주를 기쁘게 했다. 이것이 그가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35]

십여 세 때 외조부인 종요로부터 증조부 순상과 같을 것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사마의 등의 쿠데타(고평릉의 변)로 조상 일당이 살해되자, 조상의 문생고리들은 연좌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조상의 장례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욱이 혼자 장례에 참석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참석했다.

경원 4년(263년), 사마소로부터 촉한 공략의 대장을 누구로 할지 질문을 받았을 때, 등애종회를 추천했다.

태시 원년(265년), 사마염(무제)이 황제에 즉위할 때, 가충, 왕침, 양호, 배수 등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위가 멸망하고 이 성립되자, 황제가 된 사마염으로부터 크게 총애를 받았다. 양호가 를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을 때, 가충과 함께 이를 간했다. 게다가 진의 제도인 태시율령 제정에 관여하는 등, 무제의 정치에 기여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의 재능을 동료인 장화와 함께 높이 평가했다. 또한, 뛰어난 음률가이기도 했던 순욱은 조정의 악률을 정비했다.

문화적 사업에 관한 공헌은 커서, 비서감으로서 급군에서 출토된 죽서(竹書)를 정리하거나, 궁중의 서적을 분류하기도 했다. 특히 오늘날 한적 분류의 기본인 『사부분류』는, 그가 저술한 도서 목록인 『중경신부』의 분류가 원점이 되고 있다.

3. 2. 부정적 평가

순욱은 정적에 대해 참언을 하고, 무제에게 아첨한 것 등으로 인해 《진서》에서 흉신(凶臣)으로 묘사되었다.[4]

추밀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국가 기밀을 담당했던 순욱은 군주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 행동하여 군주를 기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35]

경원 4년(263년), 사마소로부터 촉한 공략의 대장을 누구로 할지 질문을 받았을 때, 등애종회를 추천했다. 종회가 반란을 꾀하다 죽자, 곽익과 왕심은 순욱을 낙양으로 돌려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사마소는 이를 물리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순욱을 신임했다.

태시 원년(265년), 사마염(무제)이 황제에 즉위할 때, 가충, 왕침, 양호, 배수 등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양호가 를 토벌해야 한다고 했을 때, 가충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의 재능을 동료인 장화와 함께 높이 평가했지만, 진수가 기록한 『위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부에 헐뜯어 중앙에서 멀리하고, 군 태수로 좌천시켰다. 또한, 뛰어난 음률가이기도 했던 순욱은 조정의 악률을 정비했을 때 완함에게 뒤에서 비난받은 것을 앙심을 품고 시평 태수로 좌천시켰다.

이러한 정적에 대한 참언과 무제에 대한 아첨 때문에, 능신으로서 꺼림을 받았다는 것이 『진서』에 나타나 있다. 무제의 동생인 제왕 사마유도 그중 한 명으로, "중서감 순욱, 시중 풍담(馮紞)은 모두 스스로 아첨했으나, 사마유는 본래부터 그들을 미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순욱은 풍담과 함께 교묘한 말로 무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마유를 그 영지인 제로 부임하게 했다. 사마유는 분노하여 병으로 사망했다. 또한 가충의 딸 가남풍을 황태자 사마충에게 장가들도록 무제에게 권한 것은, 후에 서진 왕조를 붕괴로 이끄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후세에 강하게 비판받게 되었다. 무제 자신도 처음부터 이 결혼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그 후에도 그녀를 폐하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순욱이 말을 다하여 생각을 돌이켰다고 한다.

그 후에도, 무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지만,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제의 총애를 잃고, 상서령으로 승진하는 형태이기는 했지만, 기밀에서 멀어졌다. 분통함이 가시지 않아, 남들이 승진을 축하하자 "내 봉황지를 빼앗겼는데, 무엇을 축하한다는 것인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4. 문화적 업적

순욱은 음악, 장서 및 목록학, 서예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뛰어난 음률가였던 순욱은 음악 편곡에 능했으며 그가 편곡한 곡들은 널리 퍼졌다. 카우벨을 악기로 활용하여 음악을 미세하게 조율하는 아이디어를 냈으며,[30] 조정의 악률을 정비하기도 했다.

미서감(秘書監)으로 재직 시에는 황실 도서관의 소장품을 목록화하고, 고대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을 정리 및 편집하여 ''중경''(中經)을 편찬했다.[31] 특히, 그가 저술한 도서 목록인 『중경신부』는 오늘날 한적 분류의 기본인 사부분류의 원점이 되었다.

또한, 종요와 호무경의 서체를 본따 서예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여[32] 서예 교육에도 기여했다.

4. 1. 음악

순욱은 음악 편곡을 담당했으며, 그가 편곡한 몇몇 곡들은 널리 퍼졌다. 그는 카우벨 소리를 듣고 카우벨을 악기로 사용하여 음악을 미세하게 조율할 생각을 했다.[30] 그는 조정의 악률을 정비하기도 했다.

4. 2. 장서 및 목록학

순욱은 미서감(秘書監; 감독 비서)으로 재직할 때, 무제는 그와 장화에게 유향의 ''별록''(別錄)처럼 황실 도서관의 소장품을 목록화하는 임무를 맡겼다.[31] 279년, 즙군(汲郡)의 고대 무덤에서 오래된 죽간이 발견되자, 무제는 순욱에게 이를 베껴 정리하고 편집하는 임무를 맡겼다. 순욱은 이를 수행하여 ''중경''(中經)이라는 책을 만들었고, 이 책은 이후 황실 도서관의 소장품에 추가되었다.[31]

특히 오늘날 한적 분류의 기본인 사부분류는, 그가 저술한 도서 목록인 『중경신부』의 분류가 원점이 되고 있다.

4. 3. 서예

순욱은 종요와 호무경의 서체를 본따 서예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다.[32]

5. 가계

순욱은 10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그 중 주목할 만한 아들은 순범, 순조(荀組), 순집(荀輯)이었다. 순집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서진에서 벼슬했으며, 최종 관직은 위위(衛尉)였다. 사후에는 시호인 "간후(簡侯)"로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순준(荀畯)이 그 뒤를 이었으며, 사후 "열후(烈侯)"로 추증되었다. 순준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작위는 조카인 순식(荀識)에게 넘어갔다.[36]

순집의 또 다른 아들 순탁(荀綽)은 자(자)가 언서(彥舒)였다. 순탁은 문재로 명성이 높았으며, 《진후서(晉後書)》 15편을 저술했다. 진 회제의 영가 시대(307–313) 말년에 사공의 종사중랑(從事中郎)을 지냈다. 석륵이 서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석륵에게 붙잡혀 그의 군사 고문이 되었다.[37]

순욱에게는 적어도 두 명의 딸이 있었다. 한 명은 무통(武統)과 결혼했고,[23] 다른 한 명은 진 민제의 어머니였다.[38]

순욱의 손자 중 한 명인 순현(荀顯)은 진 무제에 의해 영양정후(潁陽亭侯)에 봉해졌다.[15]

참조

[1] 문서
[2] 문서
[3] 간행물 A Third Century AD Chinese System of Di-Flute Temperament: Matching Ancient Pitch-Standards and Confronting Modal Practice Galpin Society 2009-04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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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서적 Jin Shu vol. 39
[37] 서적 Jin Shu vol. 39
[38] 서적 Zizhi Tongjian
[39] 서적 진서
[40] 서적 순씨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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