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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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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혼은 조위의 장군 왕창의 아들로, 서진 시대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서주 자사, 예주 자사를 거쳐 양주 자사로 재임하며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왕준과의 갈등으로 인해 평가가 엇갈렸다. 이후 중앙으로 돌아와 상서좌복야, 사도를 역임했으며, 297년에 사망하여 원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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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왕혼 (경릉공)
왕혼 (경릉공)
이름왕혼
로마자 표기Wang Hun
아버지왕창
현충(玄沖)
시호원공(元公)
작위경릉후(京陵侯)
경릉원공(京陵元公)
배우자종염
자녀왕상
왕제
왕청
왕문
배개의 아내
하교의 아내
위항의 아내
이름 미상의 딸 2명
가문태원 왕씨
출생지병주태원군진양현
출생 연도223년
사망일297년 9월 4일
사망 나이74세
정치 체제위 → 서진
주요 직위안동장군(安東將軍)
사도(司徒)
녹상서사(錄尚書事)
경력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녹상서사(錄尚書事)
주군조방
조모
조환
사마염
사마충

2. 생애

왕혼은 침착하고 고상하며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아버지 왕창의 작위인 경릉후를 계승했으며, 조상에게 초빙되었으나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주살되면서 면직되었다. 이후 회현의 현령으로 복귀했고, 사마소의 참군사가 되었으며, 황문시랑, 산기상시, 월기교위로 승진했다.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자 양열장군의 관직이 더해졌고, 서주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기근이 발생하자 백성들을 구휼하여 인심을 안정시켰으며, 봉읍이 늘어나고 동중랑장, 감 회북 제군사가 되어 허창에 주둔했다.

이후 가절, 감 예주 제군사, 정로장군, 예주자사로 전임되었다. 오나라에 대해 위세를 떨치자 오나라에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설영, 노숙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수중에 500명의 병사밖에 없었지만, 왕혼은 이 병력으로 오군의 허를 찔러 설영 등을 격파했다.

안동장군, 도독양주 제군사, 지절이 되자, 양주자사 응초와 도독 회남 제군사를 파견하여 오나라의 중요 거점이었던 완성과 여러 둔영을 공격하여 파하고, 많은 곡물, 벼, 배를 불태웠다. 왕혼은 동쪽 경계에 병사를 정렬하고 지형과 적성을 관찰하여 오나라의 공격에 대비했다.

함녕 5년 (279년) 오나라 정벌에서 양주 자사인 주준과 사마 손추를 파견하여 오나라의 장제, 손진을 격파하고 7800명의 포로를 얻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혼이 오나라의 주력과 싸우는 틈에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침공해온 왕준손호를 항복시켰다. 왕혼은 왕준의 독단적인 행동을 탄핵했지만, 사마염 (무제)은 왕준과 왕혼에게 함께 포상을 내리고 자제들에게 작위를 주었다.

양주에 머물며 통치에 힘쓴 후, 상서좌복야, 산기상시가 되어 중앙으로 돌아왔다. 제왕 사마유흉노유연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유연과 친분이 있었던 왕혼은 그를 변호했다[20]. 사마유가 무제와 사이가 멀어져 봉지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사마준을 비롯한 많은 군신들과 함께 반대하며 사마유 대신 사마량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제는 따르지 않았다. 아들 왕제는 무제의 사위였지만, 아버지와 함께 무제의 뜻에 반대하여 총애를 잃었고, 얼마 후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태희 연간에 사도가 되었고, 혜제 시대에 시중이 더해졌다. 양준이 주살되자, 옛 신하로서 숭경을 받아 병권을 받았지만, 문관인 사도가 일시적인 총애로 병력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납했다.

이후 초왕 사마위가 사마량과 위관을 치기 위해 거병했을 때, 왕혼을 아군으로 삼으려 했지만, 왕혼은 응하지 않고 가병 천여 명을 배치하고 사저에 틀어박혔다. 사마위가 주살되자, 병력을 이끌고 관사로 나아가 녹상서사에 임명되었다. 왕혼은 관직을 역임하며 칭찬을 받았지만, 태보 (재상)에 취임한 이후로는 명성이 떨어졌다고 한다.

원강 7년 (297년)에 사망했고, '''원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남 왕상이 일찍 죽었고, 차남 왕제도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제의 아들 왕탁이 뒤를 이었다. 왕혼과 그 일족은 중화 통일의 원훈으로서 서진 조정에서 영화를 누렸다.[21]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왕혼은 태원군 진양현(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 출신으로, 조위의 장군 왕창의 아들이다. 침착하고 고상하며 도량이 넓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대장군 조상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했다.[3]

249년,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과 그의 측근들을 처형했을 때, 왕혼은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곧 복귀하여 사마소의 군사 고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3] 아버지 왕창의 작위인 경릉후를 계승했다. 이후 회현의 현령으로 복귀했고, 사마소의 참군사가 되었으며, 황문시랑·산기상시·월기교위로 승진했다.

훗날 오호 십육국 시대의 주요 국가 중 하나인 한(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흉노 귀족 유연과 친구였다.[7] 당시 유연은 진나라의 관료였으며, 왕혼은 아들 왕제와 함께 종종 유연을 위해 사마염에게 이야기하곤 했다.[7] 유연은 사마염에게 호감을 샀지만, 그의 측근들은 유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혼은 황제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불공정하며 국가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유연을 변호했다.[8]

2. 2. 서주, 예주, 양주에서의 활약

266년 위가 해체되고 진이 건국된 후, 왕혼은 진위(鎭威)장군과 서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서주 재임 기간에 기근이 발생하자 왕혼은 곡창과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여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4] 이후 허창을 방어하고 회북의 군사를 관할하는 임무를 맡았다.

왕혼은 예주로 전임되어 예주 군사를 지휘하고 자사 직무를 대행했다. 예주는 진(晉)의 남쪽 경쟁국인 오와 접경 지역이었기에, 왕혼은 자국의 위세를 널리 알렸고, 이로 인해 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당시 오의 장군 설영과 노서는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자부했다. 273년, 설영과 노서는 이양과 신식(新息; 현재의 사현 서남쪽, 허난성)을 공격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진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 지역을 지키는 부대는 단 한 개 여단뿐이었다. 그럼에도 왕혼은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하여 군대를 이끌고 은밀히 회수를 건넜다. 설영과 노서는 진 군대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고, 왕혼은 그들을 격파했다.[5]

왕혼은 다시 전임되어 양주(揚州)로 가서 진동(鎭東)장군, 양주(揚州)의 최고 통치자로 봉직하며 수춘(壽春)을 방어했다. 오는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완성(宛城; 현재의 남양에 위치)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왕혼은 양주 자사인 응탁(應綽)에게 완성의 농지를 습격하도록 명령했다. 응탁은 완성의 지방 수비대를 파괴하고 오의 곡물, 벼 모종, 선박의 많은 부분을 불태운 후 돌아왔다. 그 후 왕혼은 동쪽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지형과 적의 도시들을 관찰하며 진의 향후 침략 계획을 세웠다.[6]

2. 3. 오나라 정벌

삼국시대 말기, 오나라의 폭군 손호(孫皓)는 술사(術士) 상광(尙廣)의 예언을 믿고 진(晉) 공격에 힘을 쏟았다. 278년, 왕혼은 오군을 격파하여 5천 명을 베고 전선 6백여 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그럼에도 손호가 진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왕혼은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했다.[9]

279년 12월, 사마염은 중국 통일을 위해 오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정복 작전 전에 왕혼은 손호가 북쪽을 공격하려 한다는 경고를 담은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은 손호에게 그러한 계획이 없다고 믿었다. 왕혼은 쉰양(尋陽), 가오왕(高望), 라이샹(賴鄉)을 점령하고, 오나라 장군 주흥(周興)을 사로잡았으며, 천다이(陳代)와 주밍(朱明)의 항복을 받았다. 손호는 재상 장제에게 제갈정, 손진(孫震), 심영과 병사 3만 명을 주어 양쯔강을 건너 진나라 군대에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장제는 초기에 승리했지만, 왕혼의 부하 저우준(周浚)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병사 7,800명과 함께 사망했고, 제갈정은 도주했다.[9]

장제의 죽음은 오나라를 뒤흔들었고, 오나라 군대의 주력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했다. 왕혼은 신중함을 유지하여 승리를 활용하지 못했고, 왕준은 먼저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에 도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왕혼의 부하 허윈(何惲)이 이 사실을 알렸지만, 왕혼은 더 자세한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고 듣지 않았다.[10]

얼마 지나지 않아 왕혼은 오나라의 상서령(尙書令) 허지(何植)와 장군 손안(孫晏)의 항복을 받았다. 왕혼, 왕준, 사마주손호로부터 사신을 받았는데, 손호는 그들 중 누구에게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5월 1일, 왕준은 신속하게 건업으로 가서 손호를 만났다. 왕혼은 왕준에게 멈춰서 함께 논의하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왕준은 그를 무시했다. 결국 왕준은 건업에 도착하여 손호의 항복을 받아 삼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11]

2. 3. 1. 왕준과의 갈등

279년 왕준두예사마염에게 글을 올려 오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여 대대적인 정벌군이 편성되었고, 당시 안동장군(安東將軍)이었던 왕혼은 강서(江西)쪽을 공격하게 되었다. 280년 정벌이 시작되자 오나라에서는 승상 장제심영, 제갈정 등을 보내어 왕혼의 군사를 요격하게 하였다. 왕혼은 이들을 격파하여 장제와 심영을 죽이고 오군 7천 8백을 베었다.[12] 다른 전선의 장수들도 오군을 격파하였고 왕준이 석두성에 들어가 손호를 붙잡아 낙양으로 보냄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정벌 중 사마염은 왕준에게 건평에서는 두예의 통제를 받고, 건업에 이르러서는 왕혼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두예는 오나라를 치기 좋은 때를 놓칠 수 없다 여기고 왕준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고 건업으로 진군하도록 배려했다.

왕준이 오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건업 근처에 이르자, 왕혼은 왕준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과 함께 건업으로 진군하자고 통보하려 했다. 왕혼의 부하인 주준(周浚)과 하운(何惲)은 왕준이 진군하게 놔두는 것이 좋다고 여기고 왕혼에게 간언했으나, 왕혼은 듣지 않고 자신의 뜻을 왕준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때 순풍이 불어 전선을 타고 진격하기 좋았기 때문에 왕준은 그대로 나아가 건업을 점령하였다.

왕준이 손호를 붙잡고 제일가는 공을 세우게 되자, 왕혼은 분노와 질투로 인해 왕준을 공격하려 했다. 왕준은 왕혼을 달래기 위해 낙양으로 보내던 손호를 왕혼의 진영을 거쳐서 가도록 하여 진나라 군사끼리 싸우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혼은 주준의 말을 듣지 않고 조정에 왕준을 모함하는 글을 올렸다.[12]

왕혼의 아들 왕제(王濟)는 사마염의 딸 상산공주(常山公主)의 남편이었기에 조정에서는 왕혼의 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고, 사마염도 왕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왕준을 책망하기도 했다. 왕준이 거듭 해명하여 의혹을 풀 수 있었으나 사마염 앞에서도 감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으며, 논공행상에서도 공에 알맞은 상을 받지 못했다. 다른 신하들이 이의 부당함을 탄원하는 글을 올린 덕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에 임명되었으나, 왕준은 왕혼을 몹시 꺼려 왕혼이 찾아왔을 때 경계를 삼엄히 하고 만날 정도였다.[14]

사마염은 그의 신하인 유송에게 최종 판결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유송은 왕혼에게 주요 공로를, 왕준에게는 중간 공로를 부여했다.[13] 유송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사마염은 그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고 나중에 왕준에게 후하게 보상할 것이다. 상황은 해결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조정에서 왕혼은 정복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자주 자랑했고, 승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면 언제든지 뛰쳐나갔다.

2. 4. 서진 조정에서의 활동과 죽음

282년 순욱과 풍담 등은 사마염에게 제후들 중 사마유만이 낙양에 머물고 있으므로 봉지(封地)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염은 사마유를 대사마(大司馬) 겸 도독청주제군사(都督靑州諸軍事)로 임명하여 산동 지역으로 내보내려 했다. 왕혼은 이에 반대하고 사마유를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삼아 조정을 보좌하게 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혼의 아들 왕제가 상산공주와 함께 사마염을 찾아가 사마유를 위해 간절히 호소했으나 사마염의 노여움만 사 국자좨주(國子祭酒)로 강등되었다.[15]

이 때문에 사마유는 결국 병이 들어 얼마 가지 못하고 죽었다.

285년 왕혼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임명되었으며, 290년에는 사도(司徒)가 되었다. 297년에 죽었는데, [16] 279년 사마유가 남흉노의 왕자로서 인질로 와 있던 유연을 제거해야 한다고 아뢰자 왕혼은 의혹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면서 이를 반대했다. 사마염은 왕혼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나, 결국 유연은 한(漢)나라(훗날의 전조)를 세우고 낙양을 공격하여 진나라가 장강 남쪽으로 쫓겨가게 만들었기 때문에 왕혼은 본의 아니게 진나라의 우환거리를 키우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20]

290년 5월 사마염이 사망하고 그의 발달 장애가 있는 아들 혜제가 황위에 올랐다. 왕혼은 시중으로 임명되었고 자신의 사병들을 받았다. 291년, 가후와 초왕 사마위는 황제의 섭정인 유남왕 사마량위관을 폐위하려 했다. 사마위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왕혼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왕혼은 병을 핑계로 자신의 저택에 천 명 이상의 경비병과 함께 틀어박혀 거절했다. 사마위는 왕혼을 강제로 끌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없이 일을 진행했다. 섭정들을 죽인 후 가후는 사마위를 공격하여 그를 처형했다. 왕혼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상서사로 임명되었다.[17]

사도가 된 후 왕혼의 명성은 점차 쇠퇴했다. 그는 297년 9월 4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동아시아식 계산), 사후 '''경릉원공'''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장남 왕상(王尚)은 일찍 죽었기에 왕제가 왕혼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왕제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고, 왕혼의 작위는 결국 그의 손자인 왕탁(王卓)에게 돌아갔다.[18][21]

3. 《삼국지연의》에서의 왕혼

왕준이 상소를 올려 오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당시 시중이었던 왕혼은 당장 오나라를 치지 말고 오군을 피로하게 한 다음에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10] 그러나 두예장화사마염의 마음을 움직여 정벌이 결정되었다.[10] 정벌이 시작되었을 때 왕혼의 벼슬은 안동장군이 아닌 정동장군으로 나온다.[10]

참조

[1] 문서 not to be confused with the father of Wang Rong https://en.wikipedia[...]
[2] 문서 ding'chou day of the 8th month of the 7th year of the Yuan'kang era, per Emperor Hui's biography in Book of Jin
[3]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4]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5]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6]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7]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Sixteen Kingdoms, Volume 1
[8]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0
[9]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10]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11]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12]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13]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14]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1
[15]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16] 문서 jisi day of the 1st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Tai'xi era, per Emperor Wu's biography in Book of Jin
[17]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18] 서적 Book of Jin, Volume 42
[19] 서적 鍾繇の曾孫娘 晋書列女伝
[20] 서적 劉淵伝 晋書
[21] 문서 王渾伝の中では「次男の王尚」という記述もあり、正誤は不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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