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치
1. 개요
산치는 청나라 황족으로, 호게의 후손으로 1866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그는 총문 세무 감독관, 육군 지휘관, 민정부 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광서 신정 시기에는 입헌제를 지지하며 개명 황족으로 활동했다. 신해혁명 이후 선통제의 퇴위를 반대하며 일본의 지원을 받아 만주국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2년 뤼순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숙충친왕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근대화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으나, 만주국 수립 시도는 일본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한국의 독립운동과는 상반된 입장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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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산치 |
|---|---|
| 자(字) | 아이탕 |
| 작위 | 친왕 |
| 봉호 | 숙친왕 |
| 만주어 이름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ᡧᠠᠨᡴᡳ |
| 출생일 | 1866년 10월 5일 |
|---|---|
| 출생지 | 순톈부, 베이징, 청나라 |
| 사망일 | 1922년 3월 29일 |
| 사망지 | 뤼순커우 구, 관동주 |
| 묘지 | 숙친왕 묘지, 베이징, 중화민국 |
| 왕조 | 청나라 |
|---|---|
| 씨족 | 아이신-교로 |
| 아버지 | 융친 |
| 어머니 | 리기야씨 |
| 배우자 | 허셰리씨, 청기야씨, 퉁기야씨, 장기야씨, 장지야씨 |
|---|
| 자녀 | 셴장, 진비동, 가와시마 요시코, 진모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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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직 기간 (숙친왕) | 1898년–1922년 |
|---|---|
| 이전 숙친왕 | 룽친 |
| 다음 숙친왕 | 셴장 |
| 민족 사무 부장 재임 기간 | 1911년 8월 15일 – 1911년 11월 1일 |
| 이전 민족 사무 부장 | 쇼우치 |
| 다음 민족 사무 부장 | 다쇼우 |
| 내무 부장 재임 기간 | 1911년 5월 5일 – 1911년 8월 15일 |
| 이전 내무 부장 | 신설 |
| 다음 내무 부장 | 구이춘 (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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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친왕 -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홍타이지의 장남인 아이신기오로 호오거는 청나라 초기의 황족이자 용맹한 군인으로, 숙친왕에 봉해졌으나 황위 계승 실패 후 도르곤의 섭정 시기에 옥사, 순치제 즉위 후 복권되었다. -
청나라의 제독 -
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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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제독 -
정여창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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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양백기인 -
혁현
이혁현은 도광제의 아들이자 함풍제의 동생으로, 서태후의 매부로서 신유정변과 광서제 즉위에 관여하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서태후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해군 아문 대신으로 북양함대 육성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 청나라 황족이다. -
만주 양백기인 -
영선
영선은 건륭제의 아들로, 의친왕에 봉해져 가경제와 도광제 치세 동안 존경을 받았으며, 술과 여색을 즐기다 86세로 사망하여 청나라 황족 중 가장 장수했다.
2. 생애
산치는 1866년 10월 5일(음력 8월 27일) 베이징에서 태어나 1922년 뤼순구에서 사망했다. 호게의 후손이자 10대 숙친왕이었다. 동치 5년(1866년)에 태어났다.
광서 24년(189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숙친왕 작위를 계승했다. 산치는 청나라 말기 총문 세무 감독관, 육군 지휘관, 민정부 상서 등을 역임하며 근대화 개혁에 참여했다. 광서제 말년에 혁명가들에게 동정적이었으며, 선통제(푸이) 초기 왕자오밍의 섭정 재풍 암살 미수 사건을 심문하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 선통제의 퇴위를 거부하고 일본 조계지인 뤼순으로 망명하여, 보황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만주 복고 운동을 펼쳤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푸이를 옹립하여 독립된 만주국을 세우려 했고, 딸 진비후이를 가와시마 나니와에게 입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이 위안스카이와 협력하면서 실패했다.
1917년 장쉰의 만주 복고 전후 두 차례의 만주-몽골 독립 운동에 관여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산치는 중화민국과 화해하지 못하고 뤼순에서 생을 마감했다. 푸이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사후 숙충친왕(肅忠親王)으로 추증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활동
산치는 1866년 10월 5일(음력 8월 27일)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10대 숙친왕이자 호게의 후손이었다. 동치 5년(1866년)에 태어난 것이다.
광서 24년(189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숙친왕 작위를 계승했다.
산치는 총문 세무 감독관, 육군 지휘관, 민정부 상서를 역임했다. 광서 26년(1900년) 의화단의 난 당시 어전 대신으로서 광서제, 서태후를 수행하여 시안으로 피난했다. 의화단의 난부터 신해혁명 발발까지, 이른바 광서 신정 시기에는 민정부 상서·민정대신·이판대신을 역임하며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에서 초빙한 가와시마 나미를 베이징 경무학당 창설에 참여시키는 등 친일파였으며, 입헌제로의 이행을 지지하고 혁명파에도 우호적인 개명 황족으로 알려졌다.
1908년, 해군부(해군아문) 감독에 참여하고, 만주족 진량의 지인이었다. 내무부에서 헌병대 발전에 기여했고, 종속부에서도 근무했는데, 이러한 임기는 중복되었다. 부준통령(헌병대장) 직을 맡았다. 1909년 초, 민간 업무 책임자로서 행정 지출을 줄이고 경찰 인력을 강화하여 전체 경찰 지출을 줄이는 개혁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경찰 내 귀창과 기원 직책이 폐지되었다.
2.2. 신해혁명과 망명
신해혁명 발발 당시, 공친왕 푸웨이와 함께 선통제의 퇴위에 반대했다. 1912년 2월, 청조 황제의 퇴위가 불가피해지자, 가와시마 나미 등의 도움으로 일본의 조차지 뤼순으로 도망쳤다. 청조 멸망 후에는 복벽을 목표로 하는 청조 유신의 종사당의 중심인물로서 몽골기인성윤(셰유)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12년 제1차 만몽 독립 운동에서는 일본 참모본부와 이른바 대륙 낭인의 지원으로 거병을 준비했으나, 일본 정부의 명령으로 계획은 중지되었다.
1916년 제2차 만몽 독립 운동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제정에 반대하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방침에 따라 남작 오쿠라 기하치로 등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선통제 복벽을 위한 근왕군을 조직하여 내몽골의 바부자브와 연합하여 거병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의 급사로 오쿠마 내각의 방침이 변경되어 지원이 중단되고, 만몽 지방군의 반격을 받아 바부자브가 전사하는 사태에 이르러 다시 실패했다.
2.3. 만몽 독립 운동과 좌절
신해혁명 이후, 산치는 보황당의 중심인물로서 청나라 황제 선통제의 퇴위에 반대했다. 그는 1912년 뤼순의 일본 조계지로 피신했다.
1912년 제1차 만몽 독립 운동은 일본 참모본부와 대륙 낭인들의 지원을 받아 거병을 준비했으나, 일본 정부의 정책 변화로 중단되었다.
1916년 제2차 만몽 독립 운동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는 일본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지원을 받아 선통제 복위를 위한 근왕군(勤王軍)을 조직했다. 산치는 일본 사업가 오쿠라 기하치로 등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고, 다나카 기이치 장군의 도움을 받아 만리장성 북쪽에 만주국을 세우고, 나아가 베이징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갑자기 사망하고 일본의 정책이 바뀌면서 지원이 중단되었고, 만몽 지방군의 반격으로 바부자브가 전사하는 등 실패로 끝났다.
만몽 독립 운동의 실패 이후에도 산치는 1917년 장쉰의 만주 복고에 관여하는 등 청조 부흥 노력을 지속했다.
2.4. 뤼순에서의 죽음과 평가
산치는 1922년 뤼순구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베이징의 숙친왕 묘지로 이송되었으며, 중화민국과 화해하지 못했다. 푸이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사후 숙충친왕(肅忠親王)으로 추증되었다.
산치는 청나라 황족으로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근대화와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등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의화단의 난부터 신해혁명 발발까지의 10년간, 이른바 광서 신정 시기에 민정부 상서, 민정대신, 이판대신을 역임하며 근대화 개혁을 촉진했고, 일본에서 초빙한 가와시마 나니와를 베이징 경무학당 창설에 참여시키는 등 친일파였다. 입헌제로의 이행을 지지하고 혁명파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 개명 황족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만주국 수립 시도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맞물려 한국의 독립운동과는 상반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