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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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복의 옥은 조선 숙종 때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남인 세력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세력이 군권을 장악하고 숙종의 견제를 받으면서, 허적의 유악 사건과 허견의 옥사, 삼복의 변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허적과 그의 서자 허견, 복창군 등은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고, 남인들은 대거 숙청되어 경신환국으로 이어졌다. 서인은 허적을 사사하고, 윤휴와 허목 등 남인 강경파를 제거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붕당 정치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조선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2. 1. 예송 논쟁과 남인의 집권
2. 2. 숙종의 견제와 서인의 반격
3. 전개
3. 1. 허적의 유악 사건
제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왕실 전례 문제인 복상 문제는 송시열을 죽이자는 의견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인 역시 남인을 죽이려 하였다. 남인은 폐지된 도체찰사를 부활시키면서까지 군권의 중요 직책을 장악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도체찰사는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는 직제로서 영의정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군권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그 외에도 훈련대장 등 모든 군 요직은 남인이 잡고 있었다.
군권을 남인이 장악한 것에 긴장한 숙종은 부체찰사직으로 자신의 외숙인 김석주를 천거했다. 남인은 김석주가 서인인 점 때문에 임명을 반대하였지만, 숙종의 의지로 서인인 김석주가 맡게 되었다. 남인 내 일부 반발 무마 세력이 있었는데, 이는 남인 내 온건파인 허적이 김석주의 일족이란 점도 일부 작용했다.
이 무렵 병판(兵判)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남인에서 독주로 죽일 것이며, 허적의 서자 견은 무사를 매복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1680년 3월 숙종은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내린다.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는데, 이날 아침 허적의 집에 잔치상을 차릴 때 닭이 한 마리 날아들어 상 또는 유리 잔이 깨지는 일이 있었다. 허적 등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허잠의 연시연에 서인에서는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 김익훈, 신여철 등 소수만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날 비가 오자 허적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이라 하는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왕이나 궁궐의 허락 없이 가져갔다. 숙종은 비가 오자 용봉차일을 허적에게 보내려고 명하였으나 허적이 가져간 사실을 확인하고 분노한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김익훈, 신여철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에 귀양갔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이후 삼정승은 영의정에 김수항, 좌의정에 정지화, 우의정에 민정중이 임명되면서 모두 서인으로 바뀌었고, 이조판서에 정재숭, 호조판서에 민유중, 예조판서에 홍처량, 병조판서에 김석주, 형조판서에 박신규, 공조판서에 이정영이 임명되면서 모두 서인으로 바뀌었다.
3. 2. 허견의 옥사와 삼복의 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형제와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위 ‘삼복의 변'이 적발되었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에게 왕위 계승을 언급하며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할 경우 병력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말했으나, 복선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과 복선군 등은 귀양을 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었다. 아들 허견이 역모 사건으로 죽은 후, 허적은 역모와 관련된 흔적이 없어 무관하다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부자연좌율에 따라 삭직되었다.
그러나 그 후 허견의 결탁 사건이 재조사되면서 결국 허적도 사사된다. 그는 백성으로 강등되어 저리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5월 5일에 사사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5월 11일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4. 결과
4. 1. 서인의 집권과 남인의 몰락
허적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송시열과 치열하게 맞섰던 윤휴와 허목에게도 화살이 돌아갔다. 남인들은 요직에서 해임, 파면, 유배되어 경신환국으로 이어진다.서인들은 윤휴를 탄핵하며 '''무례하게 대비를 단속하라고 나섰던 점''',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돈독하고 도체찰사의 복설을 주장했던 점''', '''부체찰사의 차출 때 자신이 임명되지 않자 왕 앞에서 현저하게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었다는 점''' 등을 죄목으로 지적했다. 윤휴는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으나 두 차례 형신에도 굴하지 않았다. 숙종은 윤휴에게 유배 명령을 내렸으나 다음날 사사하라는 명을 다시 내렸다. 사약을 받은 윤휴는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쓰면 될 것이지 죽일 필요까지 있는가"라고 항변했다. 윤선도에게 사후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허목은 1675년 숙종 즉위 초 송시열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기해예송 때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왕으로 생각하고 1년복을 주장했다.' 고 말했다. 서인은 허목의 발언을 문제삼아 오히려 허목이 효종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끈질기게 공격했다. 허목은 사형은 모면했지만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령이 떨어져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경기도 연천군에 체류하다가 2년 만에 죽는다. 이 사건 이후 숙종은 환국을 단행한다.(경신환국)
4. 2. 붕당 정치의 폐해
경신환국은 붕당 간의 권력 투쟁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권력을 잡은 서인은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정치적 보복을 가했다. 온건파인 허적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강경파로 송시열과 치열하게 맞섰던 윤휴와 허목에게도 화살이 돌아갔다. 서인들은 윤휴가 대비를 단속하려 하고,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있으며, 부체찰사 임명에 불만을 품었다는 등의 이유로 탄핵했다. 윤휴는 국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나 결국 사사되었고,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추탈당했다. 허목은 1675년 숙종 즉위 초 송시열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기해예송 때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왕으로 생각하고 1년복을 주장했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령을 받아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경기도 연천군에 체류하던 허목은 2년 만에 죽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완전히 몰락했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환국을 이용했지만, 이는 정국 불안을 심화시키고 민생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5. 영향
5. 1. 권력 구조의 변화
경신환국 이후,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허새의 옥사를 조작했다. 숙종은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화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조선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5. 2. 이후의 환국
허적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송시열과 치열하게 맞섰던 윤휴와 허목에게도 화살이 돌아갔고, 남인들은 요직에서 해임, 파면, 유배되어 경신환국으로 이어진다.서인들은 윤휴가 대비를 단속하라고 한 점,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휴는 의금부 국문에서 두 차례 형신에도 굴하지 않았으나, 결국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는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쓰면 될 것이지 죽일 필요까지 있는가"라고 항변했다. 윤선도에게 내려졌던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허목은 1675년 숙종 즉위 초 송시열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기해예송 때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왕으로 생각하고 1년복을 주장했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죄인으로 몰려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령이 떨어져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경기도 연천군에 체류하다가 2년 만에 죽었고,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숙종은 환국을 단행한다. 경신환국은 숙종 대에 발생한 여러 환국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후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정권 교체가 반복되며 조선 정치의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6. 평가
6. 1. 부정적 평가
6. 2. 긍정적 평가 (소수 의견)
7. 기타
7. 1. 허견과 명성왕후의 갈등
허적의 서자 허견은 평소 싸움이 잦았으며, 민가에 행패를 부리거나 반상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비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허견은 자신의 처형과 크게 싸우고 처형의 이빨을 부러뜨린 일이 있었는데, 그의 처형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첩이자 명성왕후 김씨의 서모였다.천민이지만 국왕의 외할아버지의 첩이고, 대왕대비의 서모인 이를 구타하였다는 점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숙종은 허견의 고신을 강등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해두고 있었다.
김우명에 의해 복창군, 복평군 등의 역모 고변이 있었으나 김우명의 무고로 밝혀지면서 조야는 김우명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나왔고, 김우명의 처벌이 확실시되자 대비 명성왕후가 정청에 나타나 통곡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윤휴는 여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왕에게 대비를 단속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대비를 단속하라는 발언에 숙종의 비위가 상하게 된다.
허견과 윤휴에 대한 왕의 미움 역시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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