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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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문표는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중국의 수력 공학 기술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장강의 물줄기를 변경하는 대규모 사업을 조직하여 농업 지역에 관개 시설을 제공했다. 또한, 업 지역의 미신적 인신공양 의식을 타파하고 관개 사업을 추진하여 지역의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서문표는 위나라 중앙 정치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그의 업적은 후세에 널리 알려져 칭송받았으며, 조조가 묘소를 그의 사당 근처에 만들도록 유언할 정도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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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서문표 |
출생 | 기원전 5세기 |
사망 | 기원전 4세기 |
시대 | 전국시대 |
국가 | 위나라 |
직업 | 철학자 기술자 정치가 |
업적 | |
치수 사업 | 장수 지역의 관개 시설 건설 |
사회 개혁 | 탐관오리 숙청 및 미신 타파 |
관련 기록 | |
사기 | 사기 |
활후열전 | 사기 활후열전 |
2. 생애
서문표는 기원전 5세기에 수력 공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겨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이전에 안양에서 황허강으로 흘러들어가던 장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대규모 사업을 조직했다. 그의 사업으로 장강은 오늘날의 톈진 근처에서 황허강과 합류하게 되었다.[1] 장강은 산시성의 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렀으며, 당시에는 황허강의 범람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공학 사업의 목적은 운하를 제공하여 허네이의 넓은 농업 지역(황허강 하류 왼쪽 유역)에 관개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1][2]
서문표는 기원전 5세기에 수력 공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안양에서 황허강으로 흘러가던 장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대규모 사업을 이끌었다. 이 사업을 통해 장강은 오늘날의 톈진 근처에서 황허강과 합류하게 되었다.[1] 장강은 원래 산시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렀는데, 이 때문에 황허강의 범람이 더욱 심해졌다. 서문표의 공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허네이 지역(황허강 하류 왼쪽 유역)의 넓은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1][2]
운하 시스템 공사는 문후(文侯)와 그의 후계자인 무후(武侯)가 위(魏)나라를 다스리던 기원전 403년에서 387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몇 차례의 난관(일부 지역 주민들의 요역에 대한 일시적인 반대 포함)으로 인해 문후의 손자인 양왕(襄王, 재위 기원전 319–296년)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1] 이 시기에 위나라의 기술자 석기가 서문표의 공사를 마무리했다.[1]
3. 업(鄴) 지역 통치
운하 건설은 위(魏)나라 문후와 무후(武侯)가 다스리던 기원전 403년에서 387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문후의 손자인 양왕(襄王, 재위 기원전 319–296년) 시대에 이르러 석기라는 기술자에 의해 완공되었다.[1]
기원전 400년경, 서문표는 홍수가 잦았던 업현(鄴城)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당시 업에서는 하백에게 젊은 여성을 인신공양하는 미신이 만연해 있었다. 서문표는 이 미신을 타파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녀와 삼로, 관리들을 강에 빠뜨리는 기지를 발휘했다.
또한, 서문표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을 12개의 운하로 돌려 물의 흐름을 줄이고 농지에 관개 시설을 제공했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불평도 있었지만, 운하 완공 후에는 홍수 피해가 사라지고 작물 수확량이 늘어나는 등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공자의 제자인 복상(자하)에게서 정치를 배운 서문표는 이극과 함께 문후를 섬겨 업의 령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성급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느슨한 가죽 띠를 착용하는 등 자기 수양에도 힘썼다.
3. 1. 하백 신부 미신 타파
당시 업 지방에는 하백에게 첩을 골라 수장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첩을 고르는 사람은 70세가 넘은 무당이었고, 재물을 모으는 것은 그 지방의 세 장로였다. 무당에게는 4명의 제자 무당들이 있었다.[1]
기원전 400년경, 서문표는 끊임없이 홍수가 일어나던 가난한 지역인 업현(鄴城)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묻기 위해 현지인들을 만났다. 놀랍게도 현지인들은 홍수보다 하백에게 신부를 바치기 위해 내야 하는 높은 세금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그들의 재정을 심각하게 고갈시켰고, 어린 딸을 둔 사람들은 공포 속에 살았다. 많은 촌락 원로들의 지지를 받은 삼로(三老)라고 알려진 세 명의 권력 있는 원로들은 현지 관리(廷椽)와 무녀와 공모하여 홍수가 하백의 분노로 인해 발생했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신을 달래기 위해 현지인들은 매년 아름다운 젊은 처녀를 그의 신부로 희생해야 했다. 그들은 현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고, 그 돈의 일부를 신부 의식을 준비하는 데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자신들이 나누어 가졌다. 세금을 낼 여력이 없는 집은 딸을 희생으로 빼앗겼다. 딸은 그날 화려하게 차려입고 의식을 치른 후, 조잡한 배에 태워 강으로 보내져 배가 부서지고 함께 강에 잠겼다. 어린 딸을 둔 많은 가족들은 딸이 끌려갈까 두려워 딸들을 멀리 보냈고, 이는 현에 더 많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2]
서문표는 부임한 후 무당에게 다음에는 더 나은 처녀를 하백에게 첩으로 바치겠다고 말하고 오라면서 무당을 수장했고, 그 후에는 무당이 오지 않는다고 무당을 모셔오라며 4명의 제자를 수장시켰다. 그리고 수장한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면서 세 장로까지 수장시켰다. 그런 다음, 하백에게 첩을 바치는 관습을 없앴다.[1]
의식 날, 서문표는 강가의 희생 제단에 도착하여 무녀, 그녀의 제자들, 삼로, 현지 관리, 몇몇 촌락 원로들, 그리고 처녀를 만났다. 천 명이 넘는 구경꾼들도 참석했다. 서문표는 처녀를 검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부적절한 신부를 바치는 것은 강의 신의 분노를 유발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서문표는 적절한 신부를 찾을 때까지 의식을 연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녀를 강에 던져 강의 신에게 연기 사실을 보고하고 신의 답변을 서문표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얼마 후, 익사한 무녀가 강에서 당연히 돌아오지 않자, 그는 그녀의 제자들에게도 같은 임무를 맡기고, 각 제자를 강에 담그기 전에 무녀를 찾도록 했다. 그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자, 서문표는 삼로에게도 같은 임무를 맡기고 강에 던졌다. 무녀, 그녀의 제자들, 원로들 중 아무도 강에서 돌아오지 않자, 서문표는 현지 관리와 촌락 원로들에게 그들을 찾아 강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그들 모두는 대신 공포에 질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는 희생을 치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하백에게 신부를 바치는 희생은 예현에서 사라졌다.[2]
서문표는 강의 신을 믿는 척하며, 의식의 중심 인물을 반론할 수 없게 한 채 일소하여, 미신도 일소했다. 이 결과, 공물을 갈취당하지 않게 된 민중은 가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고, 혼기가 찬 딸이 있는 집은 도망가지 않게 되었으며, 관리와 민중 모두 서문표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1]
3. 2. 관개 사업 추진
서문표는 읍 지역에 하백에게 첩을 바치는 관습을 없애고, 하백의 보복을 우려하여 12개의 수로를 만들었다. 하백이 파도를 일으켜 지방을 물에 잠그려 했지만, 파도는 12갈래의 수로로 흘러들어 오히려 백성들의 논밭에 물을 대주었다.[1]
이후 서문표는 읍 부근의 촌락 장로들을 모아 황하와 장하에서 읍의 밭으로 물을 대는 관개 사업을 시작했다. 읍 사람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서문표는 "백성은 결과는 함께 기뻐할 수 있지만, 그 시작을 함께 생각할 수는 없다."라며 공사를 강행했다.[1]
이 관개 사업으로 읍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고, 위나라는 강성해져 전국 칠웅에 꼽힐 정도였다. 읍 사람들은 이후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4. 위(魏)나라 중앙 정치에서의 갈등
서문표는 읍을 훌륭하게 다스렸지만, 위나라 문후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중앙에서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측근들은 문후에게 서문표를 중상모략했고, 문후는 서문표를 해임하려 했다. 이에 서문표는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고, 문후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 읍령으로 임명했다. 이후 서문표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문후의 측근들에게 보냈다.[1]
4. 1. 문후와의 갈등과 화해
위나라 문후는 서문표에게 읍을 다스리게 했지만, 읍의 행정부 창고에는 곡식과 재물이 없고, 무기고에는 무기와 방어구가 없으며, 관청에는 지출 장부가 없다는 백성들의 호소가 빗발쳤다. 문후가 직접 읍에 가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1]문후는 서문표에게 조리 있게 변명하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서문표는 "왕자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패자는 무력을 부유하게 하며, 망국의 군주는 창고를 부유하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임금은 패왕의 지위를 원하시니, 백성에게 축적하게 하였습니다. 의심하신다면, 성벽에 올라 북을 치십시오. 무기도 식량도 곧 모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1]
문후가 성벽에 올라 북을 치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백성들과 식량을 짊어진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문후는 "알았다"라고 했지만, 서문표는 백성과의 신뢰를 강조하며 연나라에게 빼앗긴 성을 되찾아오겠다고 제안했고, 문후는 이를 허락했다. 서문표는 연나라를 공격하여 빼앗긴 성을 모두 되찾고 돌아왔다.[1]
서문표는 읍을 훌륭하게 다스렸지만, 문후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중앙에서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측근들의 중상모략으로 문후는 서문표를 해임하려 했으나, 서문표의 간청으로 다시 읍령으로 임명했다.[1]
이후 서문표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문후의 측근들에게 보냈다. 문후는 서문표를 칭찬했지만, 서문표는 누구를 위해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직책을 반납하고 떠났다. 문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서문표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설에서는 임명하려 했으나 서문표가 거절했다).[1]
4. 2. 유산
지역 주민들은 장강 물길 전환 사업을 기념하여 유행가를 만들었고, 이는 후대 한나라 역사가인 반고의 역사서에 기록되었다.[1] 이후 한 왕조에서 수로 변경 명령을 내렸을 때, 그 땅의 노인들은 이에 반대하며 명령을 기각했다. 서문표의 말처럼, 그의 업적은 후세에까지 평가받았다.그의 사당으로 여겨지는 서문표사당은 장하 강변 읍의 옛 땅인 현재의 허난성 안양시 부근에 다수 존재한다.
삼국 시대의 조조는 "서문표사당 근처 서쪽에 나의 묘를 만들어라"라고 유언하여 상당한 경의를 표한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 활계열전 결말 부분에는 "자산은 정(鄭)을 다스렸지만 백성을 속일 수 없었다. 자천은 단보를 다스렸지만 백성을 속이기에 참을 수 없었다. 서문표는 읍을 다스렸고, 백성을 속이려 하지 않았다. 시정자는 누가 가장 뛰어난지 알아야 한다"라는 평가가 있다.
현재 중국에서도 서문표에 대한 내용은 교과서 등에 실리는 경우가 많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공자의 손제자이므로 유가로 여겨지지만, 미신을 타파한 현실주의자라는 점에서 법가로도 여겨진다. 이는 위나라 문후가 당장 쓸모 있는 인재를 구했고,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서문표가 법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5. 평가
서문표는 후세에까지 업적이 평가받았다. 한 왕조가 수로 변경을 명령했을 때, 그 땅의 노인들은 서문표의 뜻을 이어받아 이에 반대하여 명령을 기각시켰다.
장하 강변의 읍의 옛 땅인 현재의 허난성 안양시 부근에는 서문표의 사당이라고 여겨지는 서문표사당이 다수 존재한다.
삼국 시대의 조조는 "서문표사당 근처 서쪽에 나의 묘를 만들어라"라고 유언하여 상당한 경의를 표했다고 추측된다.
『사기』의 활계열전에서는 "자산은 정(鄭)을 다스렸지만 백성을 속일 수 없었다. 자천은 단보를 다스렸지만 백성을 속이기에 참을 수 없었다. 서문표는 읍을 다스렸고, 백성을 속이려 하지 않았다. 시정자는 누가 가장 뛰어난지 알아야 한다"라고 서문표를 평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에서도 서문표에 대한 내용은 교과서 등에 실리는 경우가 많아 널리 알려져 있다.
애초에 그는 공자의 손제자이므로 유가로 여겨지지만, 미신을 타파한 현실주의자라는 점에서 법가로도 여겨진다. 이는 위나라 문후가 당장 쓸모있는 인재를 구했고, 서문표는 그 요구에 응하기 위해 법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조
[1]
서적
Needham, Volume 4, Part 3
[2]
서적
Needham, Volume 4, 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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