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 (노비)
1. 개요
서일은 본명이 일이이며,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이원기 소유의 노비였다. 비록 노비 신분이었지만, 서일은 대구 또는 달성 서씨 성과 본관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아들 서일선은 1717년에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어 평민이 되었으며, 이후 서일 본인도 평민으로 속량되었다. 서일의 후손들은 경상남도 단성현 법물야면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동성동본 결혼을 하지 않는 등 강한 혈연 의식을 보였다. 인근 진주 강씨 가문은 신분 상승을 위해 본관을 바꾸거나 동성동본 결혼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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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
수봉
수봉은 조선 시대 단성현 출신으로 노비의 아들에서 평민 신분을 얻고 김해 김씨 성과 본관을 획득했으며, 기근 시 곡물 납부로 관직을 얻고 후손들은 신분 세탁을 통해 중인, 양반으로 상승한 인물이다. -
경상남도의 역사 -
경상남도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경상남도는 인구가 증가하고 농림수산업, 광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으며, 철도와 항만이 주요 교통 시설로 이용되었고, 부산, 마산 등지에 신사가 있었으며, 조선방송협회 방송국이 운영되었다. -
경상남도의 역사 -
가야
가야는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경상도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연맹으로, 철기 제작과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신라의 팽창과 외교 관계 속에서 멸망하였으며, 언어 및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
해방 노예 -
헤일로타이
헤일로타이는 고대 스파르타의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역에 거주하며 스파르타 시민에게 예속되어 농업 노동에 종사했던 원주민 집단으로, 생산물 일부를 바치고 억압 속에서 생활하며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
해방 노예 -
호라티우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노예 출신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고 전투 경험을 쌓은 후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아 사비나 농장에서 시 창작에 전념하며 풍자시, 서정시, 서간시, 시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작품은 고대 로마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여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 서일의 생애와 신분 변동
본명은 일이(日伊)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용인에 사는 이원기(李元起) 소유의 노비였다. 1678년의 노비호 가운데에는 용인에 거주하는 이원기(李元起)의 소유 사노 서일(徐日)이 존재한다. 그는 1717년 호적에 서일선(徐日先)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사노 일이(日伊)와 동일 인물이다.
그는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태어날 때 이미 서씨 성과 대구 또는 달성의 본관이 있었다. 호적에서 서일이와 서일이의 아들 서일선은 대구 달성를 병용해서 썼다. 그의 가계 중 확인되는 인물은 고조부 서국량(徐國良)이었다. 서국량은 달성 혹은 대구의 본관과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반 또는 평민 아버지를 두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속량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었다. 서국량의 후손들 역시 노비 신분이었다. 서국량의 아버지와 선조는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다. 서일의 아버지 실이(實伊)와 할아버지 후양(厚陽)은 1717년의 호적에는 정병으로 올라가 있고, 외할아버지는 경주 이씨 이남(李男)이라 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경상남도 단성현 법물야면 이교리(梨橋里)에 있는, 멀리 떨어진 주인의 월경지를 경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이유로 평민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717년(숙종 43년) 서일의 아들 서일선은 노비에서 해방, 평민 신분을 획득한다. 1717년 당시 아들 서일선은 금위군 병사가 된다. 당시 서일이의 처는 이미 사망한 상태이고, 아들 서일선과 며느리 봉대(鳳臺), 아들 세발(世發)은 모두 평민 신분이었고 세발은 순영(巡營)의 수철장(水鐵匠)이었다. 그러나 1717년 당시까지도 서일 본인은 이원기의 노비 신세였다. 서일은 그 뒤에 노비에서 평민으로 속량되었는데, 속량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어떤 이유로 그와 그의 후손들이 단성현 법물야면을 떠나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서일의 조카들 역시 단성현으로 이주해 왔고, 단성현 법물야면에는, 그의 후손들, 서국량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2.1. 출생과 가계
서일의 본명은 일이(日伊)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용인에 사는 이원기(李元起) 소유의 노비였다. 1678년의 노비호 가운데에는 용인에 거주하는 이원기(李元起)의 소유 사노 서일(徐日)이 존재한다. 그는 1717년 호적에 서일선(徐日先)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사노 일이(日伊)와 동일 인물이다.
그는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태어날 때 이미 서씨 성과 대구 또는 달성의 본관이 있었다. 그의 가계 중 확인되는 인물은 고조부 서국량(徐國良)이었다. 서국량은 달성 혹은 대구의 본관과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반 또는 평민 아버지를 두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속량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었다. 서국량의 후손들 역시 노비 신분이었다. 서국량의 아버지와 선조는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다. 서일의 아버지 실이(實伊)와 할아버지 후양(厚陽)은 1717년의 호적에는 정병으로 올라가 있고, 외할아버지는 경주 이씨 이남(李男)이라 한다. 호적에서 서일이와 서일이의 아들 서일선은 대구 달성를 병용해서 썼다.
그가 어떤 이유로 경상남도 단성현 법물야면 이교리(梨橋里)에 있는, 멀리 떨어진 주인의 월경지를 경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이유로 평민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2. 노비 생활과 평민 신분 획득
서일(徐日)은 본명이 일이(日伊)로, 경기도 용인 출신이며 이원기(李元起) 소유의 노비였다. 1678년 노비호에 따르면 용인에 거주하는 이원기 소유 사노 서일이 존재한다. 그는 1717년 호적에 서일선(徐日先)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사노 일이(日伊)와 동일 인물이다.
서일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태어날 때 이미 서씨 성과 대구 또는 달성의 본관을 가지고 있었다. 호적에서 서일과 그의 아들 서일선은 대구 서씨와 달성 서씨를 병용해서 썼다. 그의 가계 중 확인되는 인물은 고조부 서국량(徐國良)이다. 서국량은 달성 서씨 혹은 대구 서씨의 본관과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반 또는 평민 아버지를 두었지만 속량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었다. 서국량의 후손들 역시 노비 신분이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경상남도 단성현 법물야면 이교리(梨橋里)에 있는, 멀리 떨어진 주인의 월경지를 경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이유로 평민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717년(숙종 43년), 서일은 먼저 자신의 아들들을 평민으로 속량시켰다. 아들 서일선은 노비에서 해방되어 평민 신분을 획득하고 금위군 병사가 되었다. 당시 서일의 처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아들 서일선과 며느리 봉대(鳳臺), 아들 세발(世發)은 모두 평민 신분이었으며, 세발은 순영(巡營)의 수철장(水鐵匠)이었다. 그러나 1717년 당시까지도 서일 본인은 이원기의 노비 신세였다. 서일은 그 뒤에 노비에서 평민으로 속량되었는데, 속량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어떤 이유로 그와 그의 후손들이 단성현 법물야면을 떠나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서일의 조카들 역시 단성현으로 이주해 왔고, 단성현 법물야면에는 그의 후손들, 서국량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3. 단성현 집성촌 형성과 후손들의 삶
3.1. 집성촌 형성 과정
3.2. 후손들의 삶과 동성동본 금혼
서일의 자손들은 서일의 자녀들 대에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되었지만,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혈연의식이 강해 동성동본 결혼은 19세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인근 단성현 법물야면 이교리 일대에 집성촌을 형성한 달성 서씨 혹은 대구 서씨들은 서일이와 서국량의 가계였다. 1717년 이후의 호적에 등장하는 달성 서씨도 거의 대부분은 서국량의 후손들이었다.
인근 법물야면 갈전의 진주 강씨는 호적에 등장하는 인물을 기준으로 할 때 강문이(姜文伊)로부터 시작하는 가계의 남성 구성원이 141명, 강남이(姜南伊)의 가계 60명, 강천귀(姜千貴) 가계 29명으로 진주 강씨 가계였다. 이들은 후대의 족보에서 진주 강씨 특정 계파에 속하는 것으로 수록되었지만 실제 어떤 촌수인지 혈연적 연관성은 확인하기 어렵다.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 강씨들은 동성동본 결혼을 했다. 17~19세기 호적에서 갈전의 진주 강씨 남성 구성원의 배우자 가운데 성씨가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184명이었다. 이 가운데 같은 진주 강씨는 모두 7명이었다.
1678년 병영(兵營)의 장인(匠人) 강귀산(姜貴山)의 처는 강소사(姜召史)인데 이때에는 본관이 기재되지 않았다. 1717년 강귀산이 납속직으로 추정되는 로 직역이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中樞府事)의 관직을 얻었을 때,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본관은 광주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호적을 통해 가계를 추적해 본 결과 진주 강씨로 연결되고 있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권내현은 진주강씨 강귀산의 처 진주강씨 부인의 본관 오타에 대해, 그녀의 본관을 광주로 표기한 것은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일 수 있다고 보았다.
4. 인근 진주 강씨 가문과의 비교
인근 법물야면 갈전의 진주 강씨는 호적에 등장하는 인물을 기준으로 할 때 강문이(姜文伊)로부터 시작하는 가계의 남성 구성원이 141명, 강남이(姜南伊)의 가계 60명, 강천귀(姜千貴) 가계 29명으로 구성된 진주 강씨 가계였다. 이들은 후대의 족보에서 진주 강씨 특정 계파에 속하는 것으로 수록되었지만 실제 어떤 촌수인지 혈연적 연관성은 확인하기 어렵다.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 강씨들은 동성동본 결혼을 했다. 진주 강씨 역시 17세기는 물론 18세기 전반에도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 강씨 호적에는 동성동본혼이 일부 남아 있었다. 17~19세기 호적에서 갈전의 진주 강씨 남성 구성원의 배우자 가운데 성씨가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184명이었다. 이 가운데 같은 진주 강씨는 모두 7명이었다. 권내현 교수는 진주 강씨 배우자는 이들 외에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1678년(숙종 4년) 병영(兵營)의 장인(匠人) 강귀산(姜貴山)의 처는 강소사(姜召史)인데 이때에는 본관이 기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17년 강귀산이 납속직으로 추정되는 로 직역이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中樞府事)의 관직을 얻었을 때,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본관은 광주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호적을 통해 가계를 추적해 본 결과 진주 강씨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는 각각 강내인(姜乃仁), 강금이(姜金伊), 강실이(姜實伊)인데 이들은 법물야면 갈전리의 또 다른 진주 강씨인 강남이(姜南伊) 가계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권내현은 진주 강씨 강귀산의 처 진주 강씨 부인의 본관 오타에 대해, 그녀의 본관을 광주로 표기한 것은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일 수 있다고 보았다. 1678년(숙종 4년) 장인이었던 강연문(姜軟文)의 부인도 진주 강씨였다. 그런데 강연문도 나중에 양반이 되고 1717년 절충장군 중추부사의 관직을 받자마자, 그 이후의 호적에서 강연문의 부인은 본관이 진주 강씨에서 경주로 바뀌었다.
반면, 1717년 이후 단성현 법물야면 이교리 일대에 집성촌을 형성한 달성 서씨 혹은 대구 서씨들은 서일이와 서국량의 가계였다. 1717년 이후의 호적에 등장하는 달성 서씨도 거의 대부분은 서국량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이교의 달성 서씨는 갈전의 진주 강씨와는 달리 동일한 선조의 후손이라는 혈연의식은 보다 더 강하였다. 인근 지역에는 서일선의 친 사촌형제들과 후손들이 있었다. 서일이의 자손들은 서일이의 자녀들 대에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되었지만,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혈연의식이 강해 동성동본 결혼은 19세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4.1. 진주 강씨 가문의 신분 상승 노력
진주 강씨 가문은 신분 상승을 위해 본관을 바꾸거나 동성동본 결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 강씨들은 동성동본 결혼을 했다. 진주 강씨 역시 17세기는 물론 18세기 전반에도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강씨 호적에는 동성동본혼이 일부 남아 있었다. 17~19세기 호적에서 갈전의 진주 강씨 남성 구성원의 배우자 가운데 성씨가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184명이었다. 이 가운데 같은 진주 강씨는 모두 7명이었다.
1678년(숙종 4년) 병영(兵營)의 장인(匠人) 강귀산(姜貴山)의 처는 강소사(姜召史)인데 이때에는 본관이 기재되지 않았다. 1717년 강귀산이 납속직으로 추정되는 로 직역이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中樞府事)의 관직을 얻었을 때,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본관은 광주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호적을 통해 가계를 추적해 본 결과 진주 강씨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는 각각 강내인(姜乃仁), 강금이(姜金伊), 강실이(姜實伊)인데 이들은 법물야면 갈전리의 또 다른 진주 강씨인 강남이(姜南伊) 가계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권내현은 진주강씨 강귀산의 처 진주강씨 부인의 본관 오타에 대해, 그녀의 본관을 광주로 표기한 것은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일 수 있다고 보았다. 1678년(숙종 4년) 장인이었던 강연문(姜軟文)의 부인도 진주 강씨였다. 그런데 강연문도 나중에 양반이 도 ㅣ고 1717년 절충장군 중추부사의 관직을 받자마자, 그 이후의 호적에서 강연문의 부인은 본관이 진주 강씨에서 경주로 바뀌었다.
4.2. 서일 가문과 진주 강씨 가문의 비교
단성현 법물야면 갈전의 진주 강씨는 호적에 등장하는 인물을 기준으로 할 때 강문이(姜文伊)로부터 시작하는 가계의 남성 구성원이 141명, 강남이(姜南伊)의 가계 60명, 강천귀(姜千貴) 가계 29명으로 구성된 진주 강씨 가계였다. 이들은 후대의 족보에서 진주 강씨 특정 계파에 속하는 것으로 수록되었지만 실제 어떤 촌수인지 혈연적 연관성은 확인하기 어렵다.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 강씨들은 동성동본 결혼을 했다. 진주 강씨 역시 17세기는 물론 18세기 전반에도 법물야면 갈전리의 진주 강씨 호적에는 동성동본혼이 일부 남아 있었다. 17~19세기 호적에서 갈전의 진주 강씨 남성 구성원의 배우자 가운데 성씨가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184명이었다. 이 가운데 같은 진주 강씨는 모두 7명이었다. 권내현 교수는 진주 강씨 배우자는 이들 외에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1678년(숙종 4년) 병영(兵營)의 장인(匠人) 강귀산(姜貴山)의 처는 강소사(姜召史)인데 이때에는 본관이 기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17년 강귀산이 납속직으로 추정되는 로 직역이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中樞府事)의 관직을 얻었을 때,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본관은 광주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강귀산의 부인 강소사의 호적을 통해 가계를 추적해 본 결과 진주 강씨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는 각각 강내인(姜乃仁), 강금이(姜金伊), 강실이(姜實伊)인데 이들은 법물야면 갈전리의 또 다른 진주 강씨인 강남이(姜南伊) 가계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권내현은 진주 강씨 강귀산의 처 진주 강씨 부인의 본관 오타에 대해, 그녀의 본관을 광주로 표기한 것은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일 수 있다고 보았다. 1678년(숙종 4년) 장인이었던 강연문(姜軟文)의 부인도 진주 강씨였다. 그런데 강연문도 나중에 양반이 되고 1717년 절충장군 중추부사의 관직을 받자마자, 그 이후의 호적에서 강연문의 부인은 본관이 진주 강씨에서 경주로 바뀌었다.
반면, 1717년 이후 단성현 법물야면 이교리 일대에 집성촌을 형성한 달성 서씨 혹은 대구 서씨들은 서일이와 서국량의 가계였다. 1717년 이후의 호적에 등장하는 달성 서씨도 거의 대부분은 서국량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이교의 달성 서씨는 갈전의 진주 강씨와는 달리 동일한 선조의 후손이라는 혈연의식은 보다 더 강하였다. 인근 지역에는 서일선의 친 사촌형제들과 후손들이 있었다. 서일이의 자손들은 서일이의 자녀들 대에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되었지만,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혈연의식이 강해 동성동본 결혼은 19세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