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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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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야는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존속했던 고대 국가 연맹으로,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이 되어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 가야는 철 생산과 해상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일본, 백제 등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4세기 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되었고, 후기 가야 연맹은 신라의 공세에 멸망하여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는 철기 문화, 토기, 유리 공예, 불교,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특히 가야금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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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지도
가야 연맹의 대략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기본 정보
한국어 표기가야
한자 표기加耶 또는 伽倻
로마자 표기Gaya
시대고대
존속 기간42년 ~ 562년
정치 체제연맹
수도구야국(전기)
반파국(후기)
주요 언어가야어
종교불교, 무속신앙
현재 국가대한민국
민족변한인
역사
건국기원 42년
멸망신라에 병합 (562년)
이전 국가변한
다음 국가신라
백제
역대 지도자
초대 군주 (금관가야)수로왕 (42년 ~ 199년)
마지막 군주 (대가야)도설지 (? ~ 562년)

2. 역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알에서 여섯 소년이 태어났고, 이들은 성장하여 수로왕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나머지는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를 건국했다.[10]

가야는 변한 12개 부족 연맹에서 발전하여 금관가야 중심의 여섯 가야 연맹체로 통합되었다. 3세기 후반 변한에서 가야로의 전환기에 군사 활동 증가와 장례 풍습 변화가 나타났고, 일부 소국에서 부여 세력으로 지배층이 교체되며 군사적 지배 방식이 강화되었다.[11][12]

포상팔국의 난(209~212) 이후 가야는 신라 영향을 받았으나, 백제일본을 통해 독립을 유지했다. 광개토대왕 압력으로 가야 연맹은 쇠퇴했으나, 마지막 가야 소국들은 562년 신라 정복 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신라는 백제 지원을 이유로 가야를 정벌했다.

529년 신라는 탁기탄가야(啄己呑國)를 멸망시키고 탁순가야(卓淳國) 영토 절반을 차지, 대가야는 아라가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아라가야는 안라회의(安羅會議)를 통해 신라, 백제, 일본을 초청했으나, 백제는 강경했고 신라는 무관심했다. 일본은 아라가야를 지지했으나 돕지 못했다.[13][14][15]

541년544년 사비회의(泗沘會議)에서 가야는 신라-백제 연합으로 고구려를 공격, 서울을 얻었으나 백제가 신라에 배신당하며 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었다.[16][17]

일본서기를 근거로 가야(임나, 가라)가 야마토 시대(300~710년) 일본 군사 전초기지였다는 주장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23][24]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가야가 규슈에 기술, 문화를 전파한 주체임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 군사력은 가야 정복에 미치지 못했고, 가야 기술이 일본보다 발전했기에 전초기지설은 기각된다.[25][26] 1970년대 이후 이 이론은 반박되었으나, 2010년 한일 공동 연구팀은 가야가 일본 식민지가 아니었음에 합의했다.[27] 광개토대왕릉비(414년)에 "임나가라"가 처음 등장한다.[28]

남제서에 따르면 가라국(加羅國)은 삼한(三韓) 일족으로, 남제 건원 원년에 가라왕 하지(荷知)가 조공, 보국장군 겸 본국왕에 봉해졌다. 일본서기(720년)에는 '가라'와 '임나'가 함께 기록, 수이닝천황 2년 가라 왕자 도누가아라스토 관련 기록이 있다.

중국 사서 송서, 남제서, 양서, 한원(660년), 통전(801년), 태평어람(983년), 책부원귀(1013년)에 "임나, 가라"가 함께 기록, 청 전당문에만 가야(伽耶) 표기가 쓰였다.[32] 삼국사기 나해 이사금 6년(202년)에 "가야",[33] 14년(210년)에 "가라"로 표기.[33]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3세기까지 가야 신화·전승을 전달하나, 고고학 자료는 기원전 1세기경 부족 집단 형성을 보여준다. 1세기 중엽 삼국지, 후한서에 구야한국(경상남도 김해시)과 변한 소국들이 등장, 구야한국 지역은 야요이 시대 중기(기원전 4, 3세기) 이후 야요이식 토기가 급증, 왜인 진출 결과로 보인다.[34] 수로왕 건국 김관국 중심 통합 가설이 있다. 4세기고구려 확장으로 마한백제에 통합, 변한은 존속했다.

6세기 가야는 백제, 신라 침략으로 서쪽은 백제에, 동쪽은 신라에 멸망당했다.[35] 532년 남부 김관국, 562년 낙동강 유역 가야가 신라에 멸망했다. 가야 권력층에 왜계 성씨 집단이 확인된다.[36]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 무문토기 주민이 낙동강 하류에 정착, 농경, 지석묘,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 기원전 1세기경 대구, 경주 지역에 진한 여러 나라, 변한 지역에 기원전 10세기부터 산동반도·요서·요동반도 유사 유물 등장, 1세기 중엽 변한 여러 나라가 등장, 풍부한 철과 해운 조건이 있었다.

2세기-3세기 한반도 남동부 나라는 공통 문화 기반, 진한과 변한으로 나뉨, 변한 소국 중 김해 금관국(구야한국, 가락국)이 우세, 임나 문화 중심지는 김해, 함안군 중심 경상남도 해안, 패총, 토광묘 유적이 있다.[37]

6세기 전반 백제 남하, 5세기고구려낙랑군, 대방군 정복, 신라 세력 확장, 신라는 진한 맹주로 독자 세력을 굳혔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391년 왜가 백제, 신라 정복,[38] 393년 왜가 신라 수도 포위,[39] 397년 백제는 왜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39] 399년 백제는 고구려 배반, 왜와 통교,[38] 400년 왜가 신라 수도 공격,[38] 광개토왕이 신라 지원, 왜군을 임나, 가라 종벌성에서 격퇴,[38] 402년 신라는 왜에 미사흔 인질,[39] 404년 왜가 고구려 대방계 침입.[38] 405년 백제 왕자 전지, 왜 호위 속 백제왕 즉위, 왜 영향력이 강력했다.

일본서기 249년 또는 369년 기록에 신공황후 신라 정벌, 삼한정벌 기사, 아라타와케, 카가와케 파견,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 평정, 비리, 벽중, 부미지, 반고 4읍 항복 기사가 있다.

한국 학자 김태식은 5세기 후반 대가야 중심 후기 가야 연맹, 일본 학자 다나카 토시아키는 대가야 중심 좁은 범위 연맹(대가야 연맹)을 주장했다. 백승옥은 일시적 연맹, 지역 국가 시각을 강조했다.

5세기 중반 신라는 고구려 격퇴, 장수왕 남하 정책, 475년 백제 한성(서울특별시) 함락, 백제 남하, 신라 서진, 5세기 말 백제 남하, 신라 통합으로 고령 반로국 주도 후기 가야 연맹 형성, 479년 남제 조공, 보국장군·본국왕 책봉은 대가야로 추정된다.

대가야 중심 후기 가야 연맹은 481년 예맥[40] 신라 침입에 백제와 원병, 백제 강제 가야 서부 사현 할양, 가야-백제 관계 악화, 백제 탁순국·다라국 침공, 이뇌왕 522년 신라 법흥왕 혼인, 신라 침공, 532년 금관국 신라 항복, 백제 지원 요청, 백제 안라 주둔, 성왕 주재 임나 부흥 회의, 백제 세력 확대, 신라·백제 쟁탈전, 554년 관산성 전투 신라 승리, 562년 대가야 멸망, 임나 가야 신라 병합.[41]

신라 영향으로 수닌 3년 아메노히보코 신라 왕자 도래, 하리마쿠니 정착, 타지마쿠니 키요히코, 징코황후 탄생, 592년 아스카쿄(와쿄) 중심 아스카 시대 시작.

금관국(가락국, 금관가야, 임나가야)은 김해시 추정, 삼국지 구야한국으로, 초기 가야 연맹 맹주였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건국 신화는 알 탄생, 수로왕 금빛 알 탄생, 김(金) 성, 532년 구형왕 신라 항복, 신라 귀족 편입, 김유신 활약, 금관김씨(김해 김씨) 유래, 김유신수로왕 12세손, 소호금천씨 후예.[42]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김해금관가야휴게소에 기념물 설치.

대가라는 고유명사 아닌 유력 국가 존칭, 금관국 대신 반파(경상북도 고령군)[43]가 대가라, 석리정전에 고령 가야산 신 정견모주, 천신 ‘이비가지’ 사이 뇌질주일(이진아고·내진주지) 대가라 시조, 뇌질청예(수로왕) 금관국 시조, 대가라 신흥 세력 의식 반영. 다나카 토시아키는 남제서 하지를 고령가야 가실왕으로 주장.

고령군 고령지산동고분군 옆 대가야박물관 유물 전시,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조성.

금관국·대가야(반파), 안라가야(경상남도 함안군), 고령가야(경상북도 상주시), 성산가야(경상북도 성주군), 소가야(경상남도 고성군) 등 육가야·오가야, 다라(경상남도 합천군), 탁순(경상남도 창원시)[44], 기문(전라북도 남원시), 체사(경상남도 하동군) 등 소국, 전방후원분 발견, 일본 묘제 관련 주목.

삼국유사 등 한국 역사서에 수로왕허황옥 아유타국(사타바하나 왕조) 출신, 2대 구형왕모정, 3대 마품왕호구 기록, 1892년 임태보 조선사수로왕, 허황후 인도인, 인도-한반도 이동 논술,[45] "가야 기원", "가야 기원 속고" 논문, 가락국기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씨, 가야 인도인 개척 주장,[45] 한국 고대 가야, 인도 고대 가야 사적 비교, 유사성, 인도인 말라카 해협 동쪽 교류, 한반도 남해안 가야국 건국,[47] 가야 인도 문화 영향, 고구려 중국 문명 영향 주장,[48] 한국 건국 초기 중국, 일본, 인도 지배, 가야 인도 영향.[49]

백조고길은 임태보 주장 비판, 몽골 설화 유사성, 인도인 몽골 개척 주장 반박.[50] 2004년 허황옥 인도 유래설 과학적 증거 제시,[51]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정선,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김정일 교수, 김해 고분 유골 분석, 한민족 몽골 북방계 아닌 인도 남방계 미토콘드리아 DNA 보고,[51] 허황옥 사타바하나 왕조 공주, 48년 가야, 10명 아들, 2명 허씨, 김해 허씨 기원,[51] 인도 유래설 사실, 후손 허씨 DNA, 인도 남방계 DNA, 추가 연구 필요.[51]

일본 메이지 시대 이후 임나, 가라 연구는 나카 미치요, 스가 마사토모, 쓰다 소우키치, 스에마쓰 야스카즈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결실. 고고학 조사에 김해시 구야한국(狗邪韓國), 금관국(金官國) 일본 양식 유물 발견, 항아리관 요시노가리 유적(吉野ヶ里遺跡) 야요이 시대 북부 규슈 독특 매장, 봉황대 유적(鳳凰臺遺跡) 인접 김해패총(金海貝塚) 항아리관 출토, 3세기 대형 항아리관 영산강(榮山江) 유역 발견, 영산강 마한 영역, 가라 항아리관 마한 고분 양식 유사, 가라-마한 교류.[52] 요시노가리 유적 주형 출토 파형동기, 요시노가리 유적 유사 세형동검, 김해패총 출토품 국립김해박물관(國立金海博物館) 전시.[53]

야요이 시대 한국 인섬 유적 발치 인골, 조개껍데기 팔찌, 일본 야요이 시대 토기 출토, 일본인 이주 연구.[5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구는 일본 출장 기관 부정, 현대 한국 정치 욕구에 좌우.[55][56] 1970년대 낙동강 유역 가야 지역 발굴, 자료 풍부, 현대 한국 정치 욕구 기반 민족사관 가설 주장.[55][56]

고려대학교 김현구 교수, 일본서기 왜 임나일본부 설치, 한반도 남부 지배, 삼국 문화 반출, 한국 역사 교과서 삼국 문화 일본 전파만 설명, 삼국사기 인용, 일본 학자 임나일본부설 주장, 한국 학계 거부, 더블 스탠다드 지적.[57]

1990년대 가야 연구 금관국·임나가야(김해), 왜 관계, 다나카 토시아키 대가야 연맹, 고령 대가야 중심 가야 역사 연구, 1990년대 후반 탁순(창원)·안라(함안) 연구, 전방후원분 발견, 왜인 집주 인정.

이노우에 히데오 임나일본부 일본서기 인용 백제본기 명칭, 백제본기 백제 왕조 왜국 영합 사서, 일본 연구 부정 시도,[58] 임나일본부 조선총독부 아닌 한반도 남부 왜인 정치 집단,[58] 삼국지『위지』한전 왜 기록, 백제, 신라 가야 지칭, 가야 정치 집단, 백제본기 편찬자 가야 별칭, 일본 열도 왜국 결부, 임나일본부, 야마토 왜 관계 부정 가설.[58] 2010년 한일 공동 조사팀 한반도 남부, 가야 고대 일본 식민지 아니지만, 일본인 6세기 활동 발표, 조선일보 양국 외교 관계 전환점 예상.[59]

고구려·신라 대항 백제·왜국 제휴, 왜국 군사 외교 기관(후 “임나일본부”) 설치설, 요시다 타카시 “임나” 고구려, 신라 대항 백제·왜국 결탁 임나가야(금관가야) 맹주 소국 연맹 정치 영역, 가야 지역과 중복, 불일치, 왜국 설치 군사 외교 기관 “임나일본부”, 백제 할양 사현 임나가야 왜인 이주 지역, 532년 임나가야 멸망 후 안라 군사 기관 이전, 562년 대가야 멸망, 거점 상실. 스즈키 타케키 479년 남제 조공, 보국장군·본국왕 책봉 금관가야국 주장, 하지 “본국왕” 요구, 왜왕 무 칭호 임나 포함, 임나 본국 번역, 이름 버리고 실리 주장.[60]

가야 지역 야마토 朝廷 파견 왜인 군인·관리, 야마토 朝廷 신종 지방 호족 현지 통치권·군사 지휘권·정기 징발권 소유설.[61] 왜국 한반도 활동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 기록, 3세기 말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한반도 왜국 북쪽 경계 구야한국(狗邪韓國), “한 남쪽 왜 접경”. 광개토왕릉비 개찬설 부정,[62] 왜 391년 신라, 백제, 가야 신민, 고구려 400년 5만 대군 파견, 신라 왕도 왜군 격퇴, 임나, 가야 압박, 임나·가야 안라군 역 임나, 가야 종벌성 방어.[63][64]

일본 열도 “전방후원형 고분” 한반도 발견,[65]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백제 남천 전 임나, 금관국 중심 임나 최서부 존재, 원통 하니와, 남섬산 패류 제품, 벤가라 칠 석실 등 왜계 유물, 유구,[66] 신라, 백제, 임나 일본산 비취 옥구슬 대량 출토(고구려 옛 영토 드물다), 한반도 비취 원산지, 동아시아 일본, 미얀마 한정,[67] 화학 성분 검사 한반도 출토 옥구슬 이토이가와 주변 유적 동일,[68] 왜국 교류, 한반도 왜국 활동 연구.

2. 1. 전기 가야 연맹 (1세기 ~ 4세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존속한 전기 가야 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등지와 교역하기도 했다.[10] 전기 가야 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변한(弁韓)은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될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으나,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되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금관가야)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다.

구야국(금관가야)의 왕위를 두고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 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 이사금이 되었다.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 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읍)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 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 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다. 전기 가야 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였으나, 가야는 당시 중국 (한사군 포함), 일본의 소국들, 마한, 동예, 신라를 제외한 진한의 소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신라가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에 밀렸다.

전기 가야 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인 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 국가로,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왜와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 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과 왜도 변진과 전기 가야 연맹의 철을 수입하였다. 왜는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 연맹의 철에 의지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 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 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골포국(창원), 고사포국(고성), 사물국(사천) 등의 전기 가야 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 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 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도움으로 전기 가야 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 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백제가 중국 요서와 평양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다.

4세기 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연패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 백제와 금관가야, 왜국이 연합하여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연합군은 신라군보다 강력하여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서라벌을 함락하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援軍)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다. 연합군이 궤멸당하고 남쪽으로 후퇴해, 결국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구야국을 패망시키고 전기 가야 연맹은 와해되었다. 고구려는 종발성을 공격했고, 구야국은 옛 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경제 기반이었던 해상 무역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고령 지방의 대가야가 이후 후기 가야 연맹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2. 2. 후기 가야 연맹 (5세기 ~ 6세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침범하여 백제를 압박했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한 대가야는 신라의 낙동강 수로와 옛 김해만 대신 백제의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고, 섬진강 유역은 새로운 무역항이자 무역 기반이 되었다. 전북 남원, 진안, 임실, 장수 일대에 기문지방이 이루어지고, 전남 광양(모루), 순천(사타), 여수(상, 하다리) 등의 지역을 장악해 소위 섭라지방이 형성되어 대가야는 전성기를 이루었다.[10] 섭라지방에서 산출된 옥은 고구려로 수출되고, 고구려는 옥을 북위와의 무역에서 중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대가야는 일본과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다. 479년에 가야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고, 48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에 전쟁을 일으킬때 대가야 군이 동원되어 신라를 구원하였다.[10]

529년 신라는 대가야와의 동맹을 빌미로 탁기탄가야(啄己呑國)를 멸망시키고 탁순가야(卓淳國)의 영토 절반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대가야는 다른 가야들을 불신하게 되었고,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백제와 신라의 가야 간섭을 피하기 위해 아라가야는 신라, 백제, 일본을 초청하여 안라회의(安羅會議)를 개최했다. 아라가야는 이 회의를 통해 신라에 압력을 가해 탁기탄가야(啄己呑國)를 재건하고 안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려고 했지만, 백제는 강경한 외교를 선호했고 신라는 관심이 없었다. 계태제의 일본은 아라가야를 지지했지만 내부 문제로 도울 수 없었다.[13][14][15]

541년과 544년 백제는 아라를 포함한 7개국이 참여한 사비회의(泗沘會議)를 주도했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여전히 백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회의 결과 가야는 신라-백제 연합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서울을 얻었다. 이 공격에서 백제는 신라에게 배신당했고, 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었다.[16][17]

5세기 중반에 고구려 주둔군을 전멸시킨 신라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특별시)을 함락시키자, 백제는 남하하여 통일된 국가가 없는 한반도 남서부로 진출을 활발하게 했다. 통합된 지 얼마 안 된 신라는 이 기회를 타서 추풍령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는 등, 한반도 정세는 크게 변했다. 5세기 말 백제의 남하와 신라의 통합에 의해, 임나가야 중 북부에 위치한 소국들은 자위를 위한 통합의 기운이 생겨, 고령 지방의 주체 세력이었던 반로국(또는 반파국)이 주도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형성했다는 설이 있다. 479년, 남제에 조공하여 〈보국장군·본국왕〉에 책봉된 것은 이 대가야국으로 생각된다.[41]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은 481년에 고구려와 그에 예속된 예맥[40]의 신라 침입에 대해, 백제와 함께 원병을 보냈다. 백제가 에 대해 반강제적으로 가야 서부의 사현을 할양시키자, 가야 여러 국가는 백제와 소백산맥을 경계로 접하며 악화되었다. 백제가 탁순국·다라국 등에 침공하자, 대가야의 이뇌왕522년에 신라의 법흥왕에게 혼인을 청하여 신라와의 동맹을 원했으나, 반복적으로 반항하는 신라는 오히려 임나가야 여러 국가에 대한 침공을 반복하고, 532년에는 임나의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했다. 이 때문에 임나가야 여러 국가는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고, 백제는 안라에 주둔하여 신라에 대비하는 동시에, 성왕이 주재하여 임나가야 여러 국가의 수장과 왜의 사신 간의 부흥 회의(소위 임나 부흥 회의)를 열었지만, 백제는 단순히 임나가야 여러 국가를 신라로부터 지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백제 자신이 임나가야 여러 국가에 대한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임나가야 지역은 신라·백제의 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지만, 백제가 554년에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하여 성왕이 전사하자 신라의 우세는 결정적이 되었고, 562년에는 대가야(고령)가 신라에 멸망하고, 남은 임나가야 여러 국가는 신라에 병합되었다.[41]

2. 3. 가야의 쇠퇴 및 멸망 (6세기)

494년 가야 연맹은 22개국에 달하여 경상남도를 최초로 장악했지만, 512년 백제 무령왕은 대가야가 지배하던 기문 지방과 상·하다리, 사타, 모루 등의 4현을 되찾아 가야는 15국으로 줄어들었다.[13] 513년 반파는 자탄, 대사에 성을 쌓아 만해까지 연결하고 봉화대와 군량고를 만들었으며, 이열비,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연결하고 군사와 무기를 모아 신라와 화친하였다.

6세기 초, 백제무령왕 때 남진 정책을 펴 대가야는 호남 동부를 잃었다. 대가야522년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지만, 신라는 가야와의 외교 분쟁을 일으키고 529년 탁기탄(경남 밀양)을 점령하여 후기 가야 연맹의 소국들은 대가야 조정을 불신하게 되었고, 대가야는 무산되었다.[13]

이후 아라가야는 위기를 느껴 529년 3월 안라회의를 개최하여 가야 부흥을 꾀했지만, 회의에서 백제와 신라는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다.[13] 531년 백제는 아라가야를 소국으로 만들었으며, 532년 신라는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13] 538년 탁순국의 마지막 왕인 아리사등이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한다.

541년과 544년, 성왕의 주도로 1, 2차 사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일본 사신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산반하, 걸손, 졸마, 사이기, 다라의 8개 가야 소국 대표가 모였으나 성과는 없었다.[16] 548년 아라가야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여 백제를 공격했지만, 신라의 개입으로 고구려와 아라가야가 패배했다. 3년 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한강 유역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고, 소가야와 사물국이 멸망했다. 555년 신라는 창녕군에 완산주를 설치하고 남은 가야 10국을 공격했다. 557년부터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여 559년경 임례, 자타, 걸손, 졸마, 사이기, 산반하의 6개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 561년 2월 신라는 아라파사산을 공격하여 아라가야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성과 비석을 설치했다. 562년 1월, 남은 3국 중 다라국, 거열국이 신라에 멸망했고, 562년 9월, 마침내 대가야가 멸망하여 가야는 완전히 신라에 복속되었다.

2. 4. 가야 유민들의 일본 망명

일본 시가현에 있는 안라신사에서는 일본인들이 아라가야인들이 모시던 신을 모시고 있다.[69] 함안군구사쓰시와 교류를 맺고 매년 안라신사 제례에 방문단을 보내 참배하고 있다.[70]

가야와 일본과의 관계는 양국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일본 언론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가야(일본에서는 "임나" 또는 "가라")가 야마토 시대(300~710년) 일본의 군사 전초기지였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국주의자, 민족주의자, 언론이 옹호했다.[23][24]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가야는 기술과 문화를 규슈로 수출하는 주요 세력이었다. 당시 가야나 한국의 다른 지역을 정복할 만한 일본의 군사력은 없었고, 가야의 기술은 일본 왕조보다 발전했기에 일본 전초기지설은 널리 기각되고 있다.[25][26]

이 이론은 1970년대 이후 대부분 반박되었지만, 여전히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2010년, 한일 양국 정부 후원 역사 공동 연구팀은 가야가 고대 일본에 의해 군사적으로 식민지화된 적이 없다는 데 합의했다.[27]

도누가아라시토는 대가야(의부가라국)의 왕자로, 숭신천황 또는 수닌천황 시대에 현재의 후쿠이현 쓰루가시에 도래했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쓰루가시의 기비신궁 경내 摂社(각록신사)의 신이다.

3. 정치

고대 역사 기록에는 여러 가야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려사략(高麗史略)》에는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등 다섯 개의 가야가 기록되어 있다.[20]

가야 연맹은 전통적으로 일본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고구려-왜 전쟁에서 세 나라가 고구려신라에 맞서 동맹을 맺은 것이 그 예이다.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백제와 함께 일본에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지원을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군사 및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야마토 궁정은 기술 발전과 문화적 진보를 원했고, 백제와 가야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전쟁에서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19]

다양한 가야 정치 세력들은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연맹을 형성했으며, 오늘날 김해에 위치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쇠퇴기를 거친 후, 5세기 말과 6세기 초에 연맹은 부활했는데, 이번에는 오늘날 고령군에 위치한 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맹은 이웃 나라 신라의 침입과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가야 연맹은 신라에 병합되었다.[20]

가야 연맹이 멸망한 후, 연맹 국가의 많은 귀족과 엘리트들은 신라의 골품제에 통합되었는데, 멸망한 가야 연맹의 왕족들도 포함되었다.[21] 한 예로, 삼국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지배자인 구해왕의 증손자였다. 그 결과,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해 김씨(Gimhae Kim) 씨족이 신라의 유력한 귀족 가문인 경주 김씨(Gyeongju Kim) 씨족과 결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인 "진골"의 지위를 부여받았다.[2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구는 일본의 출장 기관을 부정하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며, 현대 한국의 정치적 욕구에 해석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55][56] 1970년대 이후, 전혀 조사되지 않았던 낙동강 유역의 옛 가야 지역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문헌 자료가 부족한 가야사 연구를 위한 자료가 풍부해졌지만, 현대 한국의 정치적 욕구에 기반한 새로운 민족사관에 따른 가설이 활발하게 주장되고 있다.[55][56]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일본 고대사 학자인 김현구는 “『일본서기』에는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면서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문화를 반출해갔다고 되어 있는데, 한국의 중학교·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는 국제 관계는 설명이 없고, 단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이야기만 가르치고 있다. 더욱이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했다는 이야기는 조선 최고의 사서가 12세기의 『삼국사기』이며 조선의 고대 사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두 『일본서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학자가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 한국 학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며, 이러한 더블 스탠다드 때문에 일본 학계가 한국 학계를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닌가”라고 지적하고 있다.[57]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야 연구의 대상이 기존의 금관국·임나(김해 지역)와 왜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나카 토시아키가 제창한 대가야 연맹의 개념을 가지고,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 자체의 역사 연구로 이행해갔다. 또 1990년대 후반부터는 주로 고고학적 측면에서, 탁순(창원)·안라(함안) 등 여러 지역에 대한 연구가 추진되는 한편, 전방후원분의 발견前方後円墳|젠포코엔훈일본어을 바탕으로 일부 지역에 대한 왜인의 집주를 인정하는 논고가 나오고 있다.

이노우에 히데오는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가 인용하는 별서 『백제본기』의 명칭이며, 『백제본기』는 백제 왕조가 왜국(야마토 왜(大和倭))에 영합적으로 쓴 사서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이노우에는 일본의 기존 연구를 부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58] 임나일본부에 대해 근대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것이 상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태는 한반도 남부의 왜인의 정치 집단이었다고 했다.[58] 삼국지『위지』한전에 왜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이 왜는 백제와 신라가 가야 여러 나라를 지칭한 것으로, 백제·신라에 나라를 빼앗긴 가야 여러 나라의 정치 집단을 가리킨다고 한다.[58] 별서 『백제본기』의 편찬자는 이 가야 여러 나라의 별칭과 일본 열도의 왜국(야마토 왜(大和倭))을 결부시켰으며, 임나일본부와 야마토 왜는 직접적으로는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는 가설을 내놓았다.[58] 2010년, 일본과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공동 조사팀은 한반도 남부와 가야는 고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일본인은 6세기에 활동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이번 성명이 양국 외교 관계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59]

고구려·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왜국과 손을 잡고, 왜국에 의해 군사를 주로 하는 외교 기관(후에 “임나일본부”라고 불렸다)이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요시다 타카시에 의하면, “임나”는 고구려·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왜국(야마토 왜(大和倭))과 결탁한 임나가야(금관가야)를 맹주로 하는 소국 연맹으로 정치적 영역을 가리키며, 지리적 영역인 가야 지역과는 중복되지만 일치하지 않고, 왜국이 설치한 군사를 주로 하는 외교 기관을 후에 “임나일본부”라고 불렀다고 주장하며, 백제에 할양한 사현은 임나가야가 왜인을 이주시킨 지역이었다고 했다. 또, 532년 임나가야 멸망 후에는 안라에 군사 기관을 옮겼지만, 562년 대가야의 멸망으로 거점을 잃었다고 한다. 스즈키 다케키는 479년, 남제에 조공하여 〈보국장군·본국왕〉에 책봉된 것은 금관가야국이라고 주장했다. 하지가 “본국왕”을 요구한 것은 왜왕 무의 칭호에 이미 임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나를 본국으로 번역하여 제에 임하고, 이름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다고 주장했다.[60]

가야 지역에 야마토 朝廷에서 파견된 왜인의 군인·관리, 또는 야마토 朝廷에 신종한 지방 호족이 현지에서 통치권·군사 지휘권·정기적인 징발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61] 왜국의 한반도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 일본, 중국 및 한국의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3세기 말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는 한반도에서 왜국의 북쪽 경계가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되어 있다. 또는 “한은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개찬설이 부정됨으로써[62], 왜가 391년에 신라와 백제와 가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다시 확인되었다.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 400년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 왕도에 있던 왜군을 퇴각시키고, 더 나아가 임나·가야에 압박했다. 그러나 임나·가야의 안라군 등이 역으로 임나·가야의 종벌성을 지키게 했다.[63][64]

일본 열도에서 주로 발견되는 묘 형식인 “전방후원형 고분”이 한반도에서도 몇 개 발견되었다.[65] 한반도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모두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백제가 남쪽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임나였고, 금관국을 중심으로 한 임나의 최서부 지역에만 존재하며, 원통 하니와와 남섬산 패류 제품, 내부를 벤가라로 칠한 석실 등 왜계 유물, 유구를 함께 가지고 있다.[66] 그 외, 신라·백제·임나에서 일본산 비취 옥구슬이 대량으로 출토(고구려의 옛 영토에서는 드물다)하고 있으며, 한반도에는 비취(경옥)의 원산지가 없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일본과 미얀마에만 한정된다는 점[67]과, 화학 성분 검사를 통해 한반도에서 출토된 옥구슬이 이토이가와 주변 유적의 것과 같다는 것이 밝혀진 점[68] 등 왜국과의 교류, 한반도에서의 왜국의 활동 등이 연구되고 있다.

4. 사회

가야고분군을 통해 가야의 독특한 장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왕과 지배층의 무덤은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졌으며, 고분에는 다양한 유물과 함께 시종, 부하 등을 매장하는 순장 문화가 존재하였다. 대가야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40명 이상의 순장자가 함께 묻혔다.[71] 가야의 고분에는 철기 유물, 토기, 장신구 등이 부장되었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구조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72] 대표적으로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의 13호분 덮개돌에는 134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함안 지역 청동기 시대 고인돌의 별자리와도 연관성이 있으며, 가야의 천문학적 기술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삼국시대 별자리의 특징인 별의 밝기까지 새긴 홈의 크기와 별의 개수를 볼 때 고구려의 별자리 새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천문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3] 이러한 고분 문화는 가야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다.

금관국 왕족인 김씨 일족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고, 금관국의 김씨 일족에 연원을 둔 김해 김씨는 한국의 주요 성씨이다.

5. 문화

가야고분군을 통해 가야의 독특한 장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왕과 지배층의 무덤은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졌으며, 고분에는 다양한 유물과 함께 시종, 부하 등을 매장하는 순장 문화가 존재하였다. 대가야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40명 이상의 순장자가 함께 묻혔다.[71] 가야의 고분에는 철기 유물, 토기, 장신구 등이 부장되었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구조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72] 대표적으로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의 13호분은 덮개돌에 134개의 별자리 홈이 새겨져 있는데, 이 별자리는 함안 지역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와도 연관성이 있으며, 가야의 천문학적 기술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별자리의 특징인 별자리의 밝기까지 새긴 홈의 크기와 별의 개수를 볼 때 고구려의 별자리 새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천문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분 문화는 가야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다.[73]

가야는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대표적인 고대 국가이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가야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고분에서 발견된 다양한 철기 유물들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동이전은 가야가 삼한, 동예, 일본, 낙랑군대방군에까지 철을 수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는 철을 재료로 한 무기, 농기구, 장신구 등을 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다. 특히 고분에서 발견된 철제품들은 철을 단순한 무기나 도구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 가공하여 장신구나 의식용 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74]

가야는 또한 철을 덩이쇠 형태로 가공하여 화폐처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와 왜의 고분에서 덩이쇠가 여럿 출토되었다. 이러한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가야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철을 수출하면서 가야는 동아시아 무역망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였으며, 가야의 철기 문화는 국제 교류를 통한 문화적 발전에 기여하였다.[74]

가야의 토기는 한반도 고대 토기 문화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다양한 것으로 평가된다. 가야의 토기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형태와 장식 기법을 가지고 있어, 현대에 가야 연맹을 구성하는 여러 소국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범주화하는데 사용된다. 가야의 토기는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의 토기 가운데 가장 조형미가 뛰어났다. 같은 시대의 백제, 고구려 토기가 기종과 형태가 비교적 단순한 반면에 가야의 토기는 여러 소국마다 형태가 다른 다양한 토기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토기는 가야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가야 토기를 제작하던 도공이 일본 열도에 이주하여 스에키(須惠器) 토기를 창출한 것은 가야 토기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대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후엽에 이르면 고령, 합천, 의령 등지에서 가야 양식 토기가 신라 양식 토기로 교체된다.[75]

가야의 고분에서는 유리 제품도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가야의 국제 교류를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고분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는 가야가 당시 동아시아 무역망의 중요한 연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리 제품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어 가야의 기술력뿐만 아니라 국제 무역에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유리가공 기술은 고대 사회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 했으며, 가야에서는 납을 사용한 유리 제작이 발전하여 다양한 색상과 형태의 유리 제품을 만들어냈다. 납유리는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유리의 질을 평가할 때 척도인 납은 유리의 윤기를 높여주고 두드릴 때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 색깔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코발트와 구리, 철 등을 넣어 만든 푸른색, 풀색, 검은색 등의 제품이 가야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유리 제품은 가야의 장인들이 당시의 최신 기술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76]

가야의 음악 문화는 가야금이라는 전통 악기를 통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가야금은 가야에서 개발된 12줄의 현악기로, 가야의 예술적 감수성과 음악적 전통을 보여주는 중요한 악기이다. 가야금은 가야의 멸망 이후 우륵에 의해 신라로 전해졌고, 이후 신라의 음악 문화에 흡수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우륵은 가야금의 연주와 음악을 통해 가야의 문화를 신라에 전파하였으며, 이를 통해 가야의 예술적 유산이 한반도 전체로 확산되었다. 가야금은 현재까지도 한국 전통음악의 대표적인 악기로 사랑받고 있으며, 가야의 문화적 유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 중 하나이다. 가야금 연주는 오늘날에도 국악을 통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6. 가야의 위치 변천

伽耶일본어의 위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왔다.

'''경북''' 지역의 경우, 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고령군 지역에 반로국(半路國)이 있었고, 이는 반파국(伴跛國)으로 불렸다. 5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상가라도(上加羅都)라고 불렸으며, 신라 시대에는 고령군(高靈郡)으로, 후삼국 시대에는 대가야(大伽倻)로 불렸다. 김천시는 감로국(甘路國)에서 감문국(甘文國)으로 변했다가 신라 영토가 되었다. 성주군은 원래 신라 영토였으나, 본피현(本彼縣)/벽진군(碧珍郡)을 거쳐 성산가야(星山伽倻)가 되었다. 청도군은 우유국(優由國)에서 이서국(伊西國)으로 변했다가 신라 영토가 되었다. 상주시 함창읍은 진한 사벌국에서 신라 영토를 거쳐 고령군(古寧郡)이 되었고, 후삼국 시대에는 고령가야(古寧伽倻)로 불렸다.

'''경남''' 지역의 경우, 밀양시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에서 5~6세기에는 탁기탄(啄己呑), 추봉(推封)으로 불렸고, 신라 시대에는 밀성군(密城郡)이 되었다. 밀양시 삼랑진읍은 마차해(麻且奚)를 거쳐 밀진현(密鎭縣)이 되었다. 창녕군 영산면은 마수비(麻須比)를 거쳐 상약현(尙藥縣)이 되었다. 고성군은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에서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자국(古自國)/ 고(구)차국(古(久)嵯國)을 거쳐 신라 시대에 고성군(固城郡)이 되었고, 후삼국 시대에는 소가야(小伽倻)로 불렸다. 산청군 단성면은 고순시국(古淳是國)에서 걸손(乞飡)을 거쳐 궐성군(闕城郡)이 되었다. 진주시는 자타(子他), 자탄(子呑)을 거쳐 거타주(居陀州), 강주(康州)가 되었다. 의령군은 임례국(稔禮國)을 거쳐 의령현(宜寧縣)이 되었다. 의령군 부림면은 사이기(斯二岐), 이열비(爾列比)/이사(爾赦)를 거쳐 의상현(宜桑縣)이 되었다. 거창군은 거열(居列)을 거쳐 거창군(居昌郡)이 되었다. 하동군은 대사(帶沙)를 거쳐 하동군(河東郡)이 되었다. 하동군 악양면은 악노국(樂奴國)에서 악양현(岳陽縣)이 되었다. 합천군은 다라(多羅)를 거쳐 대야성(大耶城), 강양군(江陽郡)이 되었다. 합천군 초계면은 초팔국(草八國)에서 사팔혜(沙八兮)를 거쳐 팔계현(八谿縣)이 되었다. 합천군 삼가면은 산반해/하(散半奚/下)를 거쳐 가수현(嘉壽縣)이 되었다. 사천시는 사물국(史勿國)에서 사물(思勿)을 거쳐 사수현(泗水縣)이 되었다. 사천시 곤양은 군미국(軍彌國)에서 곤미(昆彌)를 거쳐 하읍현, 성량현이 되었다. 창원시는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에서 골포국(骨浦國)을 거쳐 탁순국(卓淳國)이 되었고, 신라 시대에는 의안군, 합포현이 되었다. 함안군은 안야국(安邪國)/안라국(安羅國)에서 하가라도(下加羅都)를 거쳐 함안군(咸安郡)이 되었고, 후삼국 시대에는 아라가야(阿羅伽倻)로 불렸다. 함안군 칠원읍은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에서 칠포국(漆浦國)을 거쳐 구례모라(久禮牟羅)가 되었고, 신라 시대에는 칠제현(漆堤縣)이 되었다. 부산광역시 동래는 독로국(瀆盧國)에서 종발성(從拔城)을 거쳐 신라 영토가 되었다. 김해시는 구야국(句倻國, 狗邪國)에서 가락국(駕洛國)을 거쳐 금관국(金冠國)이 되었고, 신라 시대에는 김해경이 되었으며, 후삼국 시대에는 금관가야로 불렸다.

'''호남''' 지역의 경우, 남원시는 고랍국에서 하기물(下奇勿)을 거쳐 남원경이 되었다. 장수군, 임실군은 상기물(上奇勿)을 거쳐 청웅현(靑雄縣)이 되었다. 순천시는 사타(娑陀)를 거쳐 승평군(昇平郡)이 되었다. 광양시는 물혜(勿慧)/모루(牟婁)를 거쳐 희양현(晞陽縣)이 되었다. 여수시는 상다리(上哆唎), 달이(達已)를 거쳐 해읍현(海邑縣)이 되었다. 여수시 돌산읍은 하다리(下哆唎)를 거쳐 돌산현(突山縣)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伽耶일본어의 위치 변천
지역변한·변진伽耶일본어(1~5세기)대가야, 우륵의 12곡(5~6세기)신라 군현6가야(후삼국)
경북
고령군반로국(半路國)반파국(伴跛國)상가라도(上加羅都)고령군(高靈郡)대가야(大伽倻)
김천시감로국(甘路國)감문국(甘文國)신라영토
청도군우유국(優由國)이서국(伊西國)
성주군- 원래 신라영토 -본피현(本彼縣)/벽진군(碧珍郡)성산가야(星山伽倻)
상주시 함창읍진한 사벌국-원래 신라영토 -고령군(古寧郡)고령가야(古寧伽倻)
경남
밀양시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탁기탄(啄己呑), 추봉(推封)밀성군(密城郡)
밀양시 삼랑진읍마차해(麻且奚)밀진현(密鎭縣)
창녕군 영산면마수비(麻須比)상약현(尙藥縣)
고성군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사포국(古史浦國)고자국(古自國)/ 고(구)차국(古(久)嵯國)고성군(固城郡)소가야(小伽倻)
산청군 단성면고순시국(古淳是國)걸손(乞飡)궐성군(闕城郡)
진주시자타(子他), 자탄(子呑)거타주(居陀州), 강주(康州)
의령군임례국(稔禮國)의령현(宜寧縣)
의령군 부림면사이기(斯二岐), 이열비(爾列比)/이사(爾赦)의상현(宜桑縣)
거창군거열(居列)거창군(居昌郡)
하동군대사(帶沙)하동군(河東郡)
하동군 악양면악노국(樂奴國)악양현(岳陽縣)
합천군다라(多羅)대야성(大耶城), 강양군(江陽郡)
합천군 초계면초팔국(草八國)사팔혜(沙八兮)팔계현(八谿縣)
합천군 삼가면산반해/하(散半奚/下)가수현(嘉壽縣)
사천시사물국(史勿國)사물(思勿)사수현(泗水縣)
사천시 곤양군미국(軍彌國)곤미(昆彌)하읍현, 성량현
창원시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골포국(骨浦國)탁순국(卓淳國)의안군, 합포현
함안군안야국(安邪國)/안라국(安羅國)하가라도(下加羅都)함안군(咸安郡)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군 칠원읍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칠포국(漆浦國)구례모라(久禮牟羅)칠제현(漆堤縣)
부산광역시 동래독로국(瀆盧國)종발성(從拔城)신라영토
김해시구야국(句倻國, 狗邪國)가락국(駕洛國)금관국(金冠國)김해경금관가야
호남
남원시고랍국하기물(下奇勿)남원경
장수군, 임실군상기물(上奇勿)청웅현(靑雄縣)
순천시사타(娑陀)승평군(昇平郡)
광양시물혜(勿慧)/모루(牟婁)희양현(晞陽縣)
여수시상다리(上哆唎), 달이(達已)해읍현(海邑縣)
여수시 돌산읍하다리(下哆唎)돌산현(突山縣)


7. 유물

가야고분군에서는 가야의 독특한 장례 문화를 볼 수 있다. 가야의 왕과 지배층 무덤은 크고 웅장하며, 순장 문화가 있었다. 대가야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40명 이상이 순장되었다.[71] 고분에는 철기, 토기, 장신구 등이 부장되어 당시 사회구조와 생활상을 보여준다.[72]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 13호분 덮개돌에는 134개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함안 지역 청동기 시대 고인돌 별자리와 연관되며, 가야의 천문학이 오랜 기간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별자리 특징인 밝기까지 새긴 홈 크기와 별 개수를 보면 고구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천문 지식을 알 수 있다.[73]

가야는 철 생산과 무역으로 번영한 고대 국가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가야가 삼한, 동예, 일본, 낙랑군, 대방군에 철을 수출했다고 기록한다. 가야는 철로 무기, 농기구, 장신구를 제작하고 주변국과 교역했다. 고분에서 발견된 철제품들은 철을 예술적으로 가공하여 장신구나 의식용 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74]

가야는 철을 덩이쇠 형태로 가공하여 화폐처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와 왜 고분에서 덩이쇠가 출토되었다.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가야는 구야국 중심으로 주변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과 일본에 철을 수출하며 동아시아 무역망의 핵심으로 기능했고, 철기 문화는 국제 교류를 통한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74]

가야 토기는 한반도 고대 토기 문화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다양하다. 각 지역마다 고유한 형태와 장식 기법을 가져, 현대에 가야 연맹 소국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범주화하는데 사용된다. 가야 토기는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 토기 중 조형미가 뛰어났다. 백제, 고구려 토기가 단순한 반면 가야 토기는 다양했다. 가야 토기 제작 도공이 일본에 이주하여 스에키(須惠器)토기를 창출한 것은 가야 토기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대가야 멸망 후 6세기 후엽 고령, 합천, 의령 등지에서 가야 토기가 신라 토기로 교체된다.[75]

가야 고분에서는 유리 제품도 다수 발견되어 국제 교류를 증명한다. 고분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는 가야가 동아시아 무역망의 중요 연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유리 제품은 정교하게 제작되어 기술력과 국제 무역 역할을 보여준다. 가야는 납을 사용한 유리제작이 발전하여 다양한 색과 형태의 유리 제품을 만들었다. 납유리는 고조선시대부터 사용했고, 유리의 윤기를 높이고 맑은 소리를 낸다. 코발트, 구리, 철 등을 넣어 만든 푸른색, 풀색, 검은색 제품이 가야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유리 제품은 가야 장인들이 최신 기술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76]

삼국유사는 가야를 이른 시기에 불교 문화를 수용한 국가 중 하나로 기록한다. 수로왕 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은 가야의 국제 교류와 불교 수용을 상징한다. 파사석탑은 서역의 돌로 만들어져 독특한 외형을 가지며, 가야의 불교 수용과 서역 교류를 보여준다.[77]

허황옥 동생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장유사는 가야 시대 대표적 불교 사찰이다.[78] 이 사찰은 한반도 최초 사찰 중 하나로,[79] 가야에서 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신앙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려 말 장유화상 사리탑이 1980년 중창된 불모산 장유사에 남아있다.[79] 불교 문화 수용은 가야인 삶과 종교관에 영향을 미쳤고, 신라로 전파되어 한반도에 불교 문화 확산 계기가 되었다.

가야 음악 문화는 가야금을 통해 이어진다. 가야금은 가야에서 개발된 12줄 현악기로, 가야의 예술적 감수성과 음악 전통을 보여준다. 가야금은 가야 멸망 후 우륵에 의해 신라로 전해져 발전했다. 우륵은 가야금 연주와 음악으로 가야 문화를 신라에 전파, 가야 유산이 확산되었다.

가야금은 현재도 한국 전통음악 대표 악기로, 가야 문화 유산을 보여준다. 가야금 연주는 국악을 통해 이어진다.

가야 소국의 각배


토기


금관가야 방패 장신구


대가야 투구


김해 대성동 구야한국(금관가야)철갑


용봉무늬환두대도


창원 다호리 고분 가야검


김해 양동리 가야 검


김해 대성동 고적 철갑


김해 대성동 고적 철갑


김해 대성동 고적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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