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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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명력은 당나라의 서앙이 편찬한 역법으로, 일식과 월식 예보에 진보를 보였다. 중국 당나라에서 822년부터 89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숭현력으로 대체되었다. 고려에서는 약 400년 동안 사용되었고, 수시력 채택 후에도 일식, 월식 계산에 활용되었다. 일본에는 859년에 발해 사신에 의해 전해져 861년부터 1685년까지 823년 동안 사용되었으나, 조정의 쇠퇴와 역학의 미발달로 오차가 누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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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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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선명력은 당나라 시대에 개발되어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된 역법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기인 822년부터 892년까지 약 71년간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4] 이후 숭현력으로 대체되었다.[5]
한국에서는 고려 태조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충선왕 때 원나라의 수시력이 도입되기 전까지 약 400년 동안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 중국보다 더 오랫동안 선명력을 사용한 사례이며, 수시력이 공식 채택된 이후에도 일식이나 월식 계산 등에는 선명력의 계산법이 계속 활용되었다.
일본에서는 859년 발해 사신을 통해 전래되어 862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6] 이후 1685년 조쿄력으로 개정될 때까지 무려 823년 동안 사용되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역법이다.[10] 오랜 기간 사용되면서 천체 운행과의 오차가 누적되었고, 에도 시대에 이르러 시부카와 하루미에 의해 일본 실정에 맞는 조쿄력으로 대체되었다.[12]
2. 1. 중국
선명력은 당나라 시대에 개발된 여러 달력 중 하나였다. 당나라 장경 2년(822년)부터 경복 원년(892년)까지 71년간 사용되었다.[4] 893년에는 숭현력으로 대체되었으며, 숭현력은 당나라 말기 및 그 이후의 오대 십국 시대까지 사용되었다.[5]2. 2. 한국
한반도에서도 선명력은 중국보다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고려사》 역지 및 《칠정산내편》에 따르면, 고려 왕조는 태조 때부터 선명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사용되지 않던 역법이었으나, 고려는 충선왕 시대에 수시력이 채택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계속해서 선명력을 사용하였다. 수시력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이후에도 일식이나 월식 등을 계산할 때는 선명력의 계산 방법을 계속 활용했다고 한다.2. 3. 일본
선명력은 859년 발해 사신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었다. 일본에서 이 달력이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세이와 천황 치세인 조간 3년(861년) 8월에 나타난다.[6] 력박사(暦博士) 오하루카스 마노마로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기존에 사용되던 대연력과 오기력[9]을 대체하여 조간 4년 1월 1일(862년 2월 3일)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이후 선명력은 조쿄 원년 12월 30일(1685년[10] 2월 3일)까지 총 823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이는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역법이다. 이렇게 장기간 사용된 배경에는 조정의 쇠퇴, 조와 연간의 견당사 파견 중단 이후 중국 왕조와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 단절, 그리고 일본 자체의 역학(暦學) 수준이 독자적인 역법을 개발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12]
오랜 기간 사용되면서 오차가 누적되어, 조쿄력으로 개력될 당시에는 실제 천체 운행과 약 2일 정도의 차이가 발생했다. 본래 역의 편찬은 조정이 독점하고 관련 지식은 음양료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 비서로 취급되었으나, 선명력이 워낙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점차 민간에 유포되고 출판되기까지 했다. 특히 가마쿠라 시대 이후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교토에서 편찬된 역력이 지방까지 원활하게 전달되지 못하자, 각지에서 선명력의 계산법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역(민간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국 시대에는 역 계산을 담당하던 간게노코지 가문(가모노 아손 씨)이 단절되는 등 교토에서의 역 편찬 기능에 혼란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교토에서 사용되는 역과 지방의 민간력 사이에 윤일법 등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예를 들어, 덴쇼 11년(1583년) 1월에 교토력 기준으로 윤달을 두어야 했으나, 민간력인 미시마력을 사용하던 호조 씨, 우에스기 씨, 사토미 씨 등의 영지에서는 이미 전년도인 덴쇼 10년 12월에 윤달을 시행했다. 시나노 국에서는 같은 지역 내에서도 사나다 씨와 아시다 씨는 미시마력을, 스와 씨와 오가사와라 씨는 교토력을 따르는 등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에도 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누적된 오차로 인해 24절기가 실제보다 2일 정도 빨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물론, 9세기에 만들어진 역법이 800년 넘게 사용되면서 오차가 2일 정도에 그쳤다는 점은 당시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부카와 하루미가 일본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역법인 조쿄력을 편찬했고, 조쿄 2년 1월 1일(1685년 2월 4일)부터 조쿄력으로 개력되었다. 선명력의 오차는 주로 절기 계산에서 발생했으며, 달의 위상 변화를 기준으로 초하루(1일)를 정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역 자체가 2일 빨라졌다"는 표현은 정확히는 절기 계산의 오차를 의미한다.
3. 특징
당나라 시대에 개발된 여러 역법 중 하나이다. 당나라의 서앙이 편찬하였다. 당시 기준으로 뛰어난 역법으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일식과 월식 예보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참조
[1]
서적
Semmei-reki
https://books.google[...]
2005
[2]
서적
Highlighting the history of astronomy in the Asia-Pacific Region
https://books.google[...]
2011
[3]
서적
Historical Perspectives On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https://books.google[...]
World Scientific
2002-07-24
[4]
서적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Mathematics and the sciences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https://books.google[...]
1959
[5]
서적
Historical Perspectives On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https://books.google[...]
World Scientific
2002-07-24
[6]
서적
An outline history of Japanese education: prepared for the Philadelphia International Exhibition, 1876
https://books.google[...]
1876
[7]
문서
ユリウス暦1582年10月4日は、グレゴリオ暦で換算すると同年10月14日に当たる。
[8]
문서
1582年10月15日はグレゴリオ暦の制定日に当たる。
[9]
문서
五紀暦は、天安 2年(858年)から貞観3年(861年)までの間、大衍暦と併用される。
[10]
문서
貞享元年12月30日(宣明暦)は、グレゴリオ暦では年が明けて「'''1685年'''」となる。
[11]
문서
『高麗史』巻五十、暦一「高麗不別治暦、承用唐宣明暦。自長慶壬寅、下距太祖開国、殆逾百年、其術已差、前此唐已改暦矣。自是暦凡二十二改、而高麗猶馴用之。至忠宣王改用元授時暦、而開方之術不伝、故交食一節尚循宣明旧術。」
[12]
문서
中国において暦法の制定と頒暦は皇帝の大権に属しており、中国王朝の冊封体制の強化によって遣唐使途絶以後の日本に暦法が伝わることは事実上困難になったこと、宣明暦が1日の誤差が生じて問題が深刻化した時期(鎌倉時代後期)に起きた元寇によって授時暦伝来の可能性が完全に絶たれたことが、中国暦法の導入という伝統的な改暦方法を不可能にした({{Harvnb|湯浅吉美|2009|pp=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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