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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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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희안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반정의 주요 인물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의 숭유 정책에 참여했다. 연산군 시대에는 폭정을 풍자하는 시를 지어 좌천되기도 했으며, 1506년 박원종, 유순정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중종 옹립에 기여했다. 반정 이후 병조판서, 이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1513년 영의정 재임 중 사망했으며, 중종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충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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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관직
영의정term_start: 1513년 5월 6일
term_end: 1513년 8월 27일
predecessor: 류순정
successor: 송질
좌의정term_start: 1512년 11월 14일
term_end: 1513년 5월 6일
predecessor: 류순정
successor: 송질
우의정term_start: 1509년 11월 9일
term_end: 1512년 11월 14일
predecessor: 류순정
successor: 송질
개인 정보
출생일1461년 1월
사망일1513년
국가
국가조선

2. 생애

성희안은 성찬(成瓚)과 그의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외할아버지는 덕천군 이후생이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1480년(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 예빈시 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의 숭유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신진 관료로서 국왕의 자문에 응하며 김종직의 제자들 중에서도 학문적 깊이를 인정받았다. 1499년(연산군 5)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 되어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150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의 부사가 되어 세자 책봉 고명을 받아오는 임무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맡았을 때, 양화도 망원정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풍자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가 미움을 사 행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심해지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측근들조차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성희안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정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반정의 명분을 세우고, 유순정,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에게 군사를 동원하도록 설득하여 진성대군(훗날 중종)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권신 유자광에게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반정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김종직의 문하생들인 남곤, 이행, 이이 등에게도 연락하여 지지를 확보했다.

중종반정 성공 후, 성희안은 병책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策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이후 병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숭록대부의 지위에 올랐다.

1507년, 창산부원군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고, 문재주에게 당대의 사대부를 설득하여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반정 후의 처리를 하였다. 중종 즉위에 명나라의 고명이 어려워지자, 성희안은 반정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해 명나라에 직접 청승습사를 청하러 갔다. 명나라에 가서는 연산군이 적절한 계승자가 아니었고, 이제 성종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났다는 식으로 명나라 황제를 설득했다. 귀국 후에는 실록총재관이 되어 "오산군일기"의 편찬을 주관했다.

1509년 우의정이 되어 이듬해 발발한 삼포왜란에서는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며 군무를 총괄하기도 하였다. 이후 무관들을 발탁, 등용하는 정책을 펴다가 다른 마음을 먹고 옹호하였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이 무마시켰다. 그 뒤 좌의정을 거쳐 1513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사후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2. 1. 생애 초반

성찬(成瓚)과 그의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덕천군 이후생이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1480년(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2. 2. 성종~연산군 시절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1] 이후 부수찬, 예빈시 주부 등을 역임하였다.[1] 성종의 숭유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신진 관료로서 국왕의 자문에 응하며 김종직의 제자들 중에서도 학문적 깊이를 인정받았다.[1] 1499년(연산군 5)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 되어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2] 150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의 부사가 되어 세자 책봉 고명을 받아오는 임무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2]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맡았을 때, 양화도 망원정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풍자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가 미움을 사 행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3] 연산군의 폭정이 극심해지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측근들조차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성희안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3]

2. 3. 중종반정 주도

1506년(연산군 12년),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정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3] 그는 반정의 명분을 세우고, 유순정,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에게 군사를 동원하도록 설득하여 진성대군(훗날 중종)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권신 유자광에게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반정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김종직의 문하생들인 남곤, 이행, 이이 등에게도 연락하여 지지를 확보했다.

중종반정 성공 후, 성희안은 병책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策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2. 4. 중종반정 이후

1509년 우의정이 되어 이듬해 발발한 삼포왜란에서는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며 군무를 총괄하기도 하였다.[1] 이후 무관들을 발탁, 등용하는 정책을 펴다가 다른 마음을 먹고 옹호하였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이 무마시켰다.[1] 그 뒤 좌의정을 거쳐 1513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1]

2. 5. 생애 후반

1509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발발한 삼포왜란에서는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며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후 무관들을 발탁, 등용하는 정책을 펴다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으나, 중종의 신임으로 무마되었다.[3] 1513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3]

중종반정에서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고, 적극적으로 지지 세력을 규합했으며,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인맥을 활용하여 반정 성공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벼슬은 차례가 있다며 박원종, 유순정, 홍경주 등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세 번째에 서는 겸손함을 보였다. 또한 자신의 딸이나 조카를 후궁으로 들이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는 등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처신으로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아 오랫동안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3]

사후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3]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성사달(成士達)
증조부성부(成溥)
조부성효연(成孝淵)
아버지성찬(成瓚)
외조부덕천군 이후생정종의 10남
어머니전주 이씨덕천군의 장녀
성희증(成希曾)
남동생성희옹(成希雍)
누이창녕 성씨조원륜(趙元倫)의 처
누이영천 이씨이제손(李悌孫)의 처
누이남원 윤씨윤형(尹衡)의 처
누이평산 신씨신수린(申壽麟)의 처
부인풍양 조씨조익상(趙益祥)의 딸
장남성율(成瑮)1498년 ~ ?[4]
며느리전주 이씨덕진군(德津君) 이활의 딸
손자성수철(成壽鐵)1512년 ~ ?[4]
손녀성명억(成命億)1515년 ~ ?[4]
손녀성천억(成薦億)1519년 ~ ?[4]
손녀성가시(成加屎)1530년 ~ ?[4]
장녀안동 권씨권영(權詠)의 처
외손자권호(權顥)
외손자권이(權頤)1541년 ~ ?[4]
차녀평창 이씨이희명(李希明)의 처[4]
외손자이섭(李渉)1534년 ~ ?[4]
외손자이발(李潑)
외손자이옥(李沃)1537년 ~ ?[4]
외손자이철(李澈)1538년 ~ ?[4]
외손녀파평 윤씨윤담휴(尹覃休)의 처
사돈덕진군(德津君) 이활창원군 이성(李晟)의 양자, 조선 세조의 서손자


4. 일화

좌의정으로 있던 어느 날 오랜 친구인 신당 정붕에게 "청송 고을에는 웅당 잣과 꿀이 많을 터이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를 본 정붕은 "잣은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찌 이것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으리요"라는 답장을 보냈다. 정붕의 답장을 받은 성희안은 자신의 실수를 깊이 뉘우치고 사과하였다고 한다.

5. 미디어에서

참조

[1] 웹사이트 Seong Huian http://100.naver.com[...]
[2] 웹사이트 Seong Huian http://100.naver.com[...]
[3] 뉴스 말과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7-11-26
[4] 문서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외고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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