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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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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종은 1506년 훈구파의 쿠데타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옹립된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즉위 후 사림파를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잦은 사화와 외척 간의 갈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 삼포왜란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사회 불안이 지속되었으며,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1544년 인종에게 양위하고 이듬해 사망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훈몽자회》 등 서적 편찬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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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중종의 능인 선정릉 정릉
중종의 능인 선정릉 정릉
목록제11대 조선 국왕
재위1506년 9월 2일 ~ 1544년 11월 14일 (음력)
즉위식경복궁 근정전
전임자연산군
후임자인종
이역(李懌)
별호진성대군(晉城大君)
능호정릉(靖陵)
위치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출생일1488년 3월 5일 (음력)
출생지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사망일1544년 11월 15일 (음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아버지성종
어머니정현왕후 윤씨
칭호
묘호중종(中宗)
시호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개인 정보
이역 (李懌)
낙천 (樂天)
가계
배우자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자녀9남 11녀 (14남 12녀)
왕조
왕가전주 이씨
재위 기간
즉위1506년 9월 18일
사망1544년 12월 9일
추가 정보
아버지 (영어)Seongjong of Joseon
어머니 (영어)Queen Jeonghyeon

2. 생애

1494년 6세의 나이에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 훈구파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주도한 쿠데타연산군이 폐위되면서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를 '''중종반정'''이라 한다.

즉위 초 중종은 반정 공신들의 위세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연산군 치하에서 탄압받았던 사림파를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은 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는 기득권 훈구파의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1519년, 훈구파는 조광조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주초위왕 사건을 조작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 인사가 숙청되거나 희생되었다. 이때 희생된 학자들은 후세에 '기묘명현'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정국은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을 비롯하여 작서의 변(1527년), 가작인두의 변(1533년) 등 크고 작은 옥사와 궁중 암투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 과정에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 등이 희생되었다. 또한 김안로와 같은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다가 실각하는 등, 훈구파와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외척 간의 갈등은 훗날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가 발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1510년 남쪽에서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 국경 지역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1544년 11월 14일, 재위 38년 2개월 만에 장남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날인 11월 15일,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묘는 정릉(靖陵)이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연산군의 폭정을 끝냈다는 의미에서 묘호가 '중종'으로 정해졌으나, 재위 기간 내내 공신 세력과 외척 세력에 휘둘리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고, 사화와 옥사가 끊이지 않아 정국 혼란을 막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7] 그의 병약함과 우유부단한 성격은 아들 인종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2. 1. 즉위 과정

는 '''역'''(懌), 는 낙천(樂天)이며, 본관은 전주이다.[10] 1488년(성종 19년) 3월 5일, 성종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성종의 여덟째 아들이자 적차남으로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년) 6세의 나이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신수근의 딸 신씨(단경왕후)와 혼인했는데, 신수근은 당시 왕비였던 폐비 신씨의 오빠였다. 이로 인해 진성대군은 이복형인 연산군과 처고모부-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를 동시에 맺게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켰다.[11] 반정이 일어난 날, 반정 군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을 포위하자 그는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해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 신씨(단경왕후)의 만류로 목숨을 건졌다.

결국 진성대군은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 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18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즉위 직후 반정 공신들의 압력으로 인해 부인 신씨는 왕비 자리에서 폐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 2. 훈구 세력 견제와 사림 등용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즉위 초 공신 세력의 위세에 눌려 실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12] 그는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바로잡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비대해진 훈구파 공신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지했던 법제를 복구하고,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며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지만, 공신들의 힘이 막강하여 초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박원종, 성희안 등 주요 공신들이 병이나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훈구파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중종은 사림파 인물들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 등용하여 정계에 복귀시켰다. 특히 갑자사화 등으로 밀려났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젊은 사림 세력을 중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조광조 등 사림파는 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주요 개혁 내용으로는 인재 등용을 위한 현량과 실시, 향촌 자치 규약인 향약의 전국적 보급, 유교 경전의 보급, 도교 제사 기관인 소격서 폐지 등이 있었다.[2] 또한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한 토지 개혁을 시도했으며, 노비를 포함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법을 엄격히 시행하여 관리들이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이고 타협 없는 개혁은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특히 중종반정 공신 중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공훈을 삭제하자는 '위훈 삭제'(僞勳削除) 주장은 훈구파의 위기감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중종 역시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왕권 강화를 우선시했던 반면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도학정치와 군신 공치(君臣共治)를 추구하여[13]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였다. 조광조는 임금 또한 성리학적 도리에 충실한 사림(士林)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의 강직한 성품과 잦은 간언 또한 중종에게 점차 부담으로 작용했다.[3]

이러한 갈등 속에서 1519년 말,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궁궐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하여 마치 하늘의 계시처럼 보이게 했다. 走와 肖를 합치면 조광조의 성씨인 趙가 되므로,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역모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훈구파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조광조가 역심을 품었다고 모함했고, 중종은 이를 빌미로 조광조와 사림 세력을 숙청했다. 1520년 1월,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많은 사림 인사가 유배되거나 처형되었으며, 그의 개혁 정책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4] 기묘사화 이후 신사무옥(1521년) 등 사림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으며, 속삼강행실도나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이후 문화 발전 정책도 거의 중단되었다. 비록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와 사림파가 추구했던 사상은 이후 조선 사회에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3. 잦은 사화와 외척 간의 갈등

기묘사화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대거 숙청된 이후, 훈구파 공신 세력과 김안로, 윤임, 윤원형 등 새로 등용한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다. 중종은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외척 세력을 끌어들였으나, 이는 또 다른 파벌 싸움과 정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3]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궁중 암투 또한 빈번하게 발생했다.

1527년(중종 22년)에는 동궁 전각에 불에 지진 쥐를 매달아 세자(인종)를 저주한 사건인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14]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은 폐서인되어 궁궐에서 쫓겨났고, 경빈 박씨의 딸들인 혜순옹주혜정옹주도 함께 폐서인되었다.[26]

1533년(중종 28년)에는 사람 머리 모양의 목패에 세자와 왕비(문정왕후)를 저주하는 글을 적어 동궁에 걸어둔 가작인두의 변이 발생했다.[15] 이 사건으로 폐서인되었던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들이 김안로와 그의 아들 김희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음이 밝혀졌다.[16]

김안로1524년 남곤, 심정 등에 의해 부패 혐의로 축출되었으나, 이후 권력을 되찾아 경빈 박씨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그는 문정왕후명종을 낳자 폐위시키려 시도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다가, 문정왕후의 오빠들인 윤원로, 윤원형 등에게 밀려나 1537년 결국 사사되었다.

김안로가 제거된 이후에는 왕비들의 외척인 윤임(장경왕후의 오빠)과 윤원형(문정왕후의 동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 구도가 형성되었다. 인종을 지지하는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지지하는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불렀는데, 이들 간의 갈등은 점차 깊어져 중종 사후 을사사화라는 또 다른 비극을 낳는 배경이 되었다.[17]

이처럼 중종 재위 기간에는 기묘사화 외에도 1521년신사무옥, 1531년 심정·이항 등의 실각, 1537년 김안로 일파 숙청 등 크고 작은 옥사가 끊이지 않아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고 정국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왕실 내부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은 국정 운영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이는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 등 외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4. 대외 관계

중종 재위 중에는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 침입이 자주 발생하여 국방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6][7] 1510년에는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삼포왜란이 발생하였다.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중종은 이계동, 유담년, 이지방 등의 무관을 파견하여 평안도간도, 함경도 등지의 여진족을 수시로 토벌하게 하였다. 이러한 남쪽 왜구와 북쪽 여진족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임시 군사 기구로서 비변사가 처음 설치되었다.

2. 5. 최후

1544년(중종 39년) 병세가 깊어진 중종은 11월 14일, 세자(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세자가 이를 간곡히 사양하여 무산되었다.[21] 다음 날인 11월 15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재위 기간은 38년 2개월이었다.

사후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으로 정해졌다. 묘호 '중종'은 연산군의 실정(失政)으로부터 나라를 구해 중흥시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21]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정릉 내의 정릉(靖陵)이다.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시에 능을 조성했으나,[5]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의견과 장마철마다 재실(齋室)이 침수되는 문제가 발생하여 명종 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능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되어 외모를 정확히 기억하는 신하 나 궁인들이 드물었고, 그나마 남은 이들도 고령이어서 증언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중종은 키가 크고 보통 체격에 수염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누런색이었으며, 이마에는 녹두보다 작은 검은 사마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얼굴은 갸름하며 약간 얽은 자국이 있었고, 턱 끝이 살짝 굽은 모난 형태였으며, 코는 높고 길면서 약간 굽었다고 전해진다.[22] 하지만 발견된 시신은 비대하고 키가 작았으며(포백척 기준 3척 2촌[23]),[24] 중종이 여름에 승하했음에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능을 욕보이기 위해 다른 시신을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시신의 진위는 가려내지 못했고, 중종의 시신일 가능성을 고려하여 선정릉 근처 정결한 곳에 따로 묻었다. 현재까지 이 시신이 실제 중종의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중종의 왕위는 세자였던 인종이 이었으나, 인종은 후사 없이 재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왕위는 중종의 다른 아들이자 인종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훗날 명종)에게 돌아갔다.

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기간 내내 훈구파사림파의 대립, 사화와 옥사, 외척 세력의 발호 등으로 정국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도 받는다.[6][7]

3. 가족 관계



=== 왕비 ===

구분시호본관생몰년부모비고
정비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거창1487년 ~ 1557년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 한씨
중종 1년(1506년) 폐위[12]
영조 15년(1739년) 복위[25]
제1계비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파평1491년 ~ 1515년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
제2계비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파평1501년 ~ 1565년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
전성부부인(全城府夫人) 이씨



=== 후궁 ===

작호이름본관생몰년부모비고
경빈(敬嬪)박씨밀양? ~ 1533년박수림
미상
작서의 변 연루로 폐출[26] 및 사사[27]
희빈(熙嬪)홍씨남양1494년 ~ 1581년홍경주
권씨
창빈(昌嬪)안씨안산1499년 ~ 1549년안탄대
황씨
제14대 국왕 선조의 할머니
선조 10년(1577년) 창빈으로 추증
귀인(貴人)한씨청주1500년 ~ 1575년한순
이씨
예종안순왕후의 조카
숙의(淑儀)나씨나주1489년 ~ 1514년나숙담
영월 신씨
숙의(淑儀)이씨경주? ~ 1524년이형신
미상
숙의(淑儀)홍씨남양미상미상
숙의(淑儀)김씨미상? ~ 1562년미상
숙원(淑媛)이씨대원? ~ 1520년이백선
미상



=== 왕자 ===

구분군호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1남복성군미(嵋)1509년 ~ 1533년경빈 박씨군부인 윤씨작서의 변 연루로 폐출[26] 및 사사[28]
2남해안군희(㟓)1511년 ~ 1573년숙의 홍씨진산군부인(晉山郡夫人) 유씨
익창군부인(益昌郡夫人) 신씨
3남금원군영(岺)1513년 ~ 1562년희빈 홍씨파징군부인(波澄郡夫人) 정씨
4남인종(仁宗)호(岵)1515년 ~ 1545년장경왕후 윤씨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제12대 국왕
5남영양군(永陽君)거(岠)1521년 ~ 1561년창빈 안씨경양군부인(景陽郡夫人) 안씨
6남덕양군기(岐)1524년 ~ 1581년숙의 이씨영가군부인(英嘉郡夫人) 권씨
7남봉성군완(岏)1528년 ~ 1547년희빈 홍씨군부인 정씨정미사화 연루로 사사[29]
8남왕자[30]1528년 (요절)귀인 한씨이름 미상
9남덕흥대원군초(岹)1530년 ~ 1559년창빈 안씨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제14대 국왕 선조의 아버지
10남명종(明宗)
(경원대군)
환(峘)1534년 ~ 1567년문정왕후 윤씨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제13대 국왕
11남왕자[31]미상 (요절)희빈 홍씨이름 미상
12남왕자[31]미상 (요절)희빈 홍씨이름 미상
13남왕자[31]미상 (요절)희빈 홍씨이름 미상
14남왕자[32]이수(頤壽)1525년 ~ 1526년 (요절)창빈 안씨



=== 왕녀 ===

구분작호이름[33]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1녀효혜공주옥하(玉荷)1511년 ~ 1531년장경왕후 윤씨연성위 김희[34]
2녀혜순옹주철환(鐵環)1512년 ~ 1583년경빈 박씨광천위 김인경
3녀혜정옹주석환(石環)1514년 ~ 1580년경빈 박씨당성위 홍여
4녀옹주[36]월환(月環)1516년 ~ ? (요절)미상
5녀정순옹주(貞順翁主)정환(貞環)1517년 ~ 1581년숙원 이씨여성위 송인
6녀효정옹주순환(順環)1520년 ~ 1544년숙원 이씨순원위 조의정
7녀의혜공주옥혜(玉蕙)1521년 ~ 1564년문정왕후 윤씨청원위 한경록
8녀효순공주옥련(玉蓮)1522년 ~ 1538년문정왕후 윤씨능원위 구사안[37][38]
9녀숙정옹주(淑靜翁主)수환(守環)1525년 ~ 1564년숙의 김씨능창위 구한사위와의 간통으로 사사됨[39]
10녀정신옹주(靜愼翁主)선환(善環)1526년 ~ 1552년창빈 안씨청천위 한경우
11녀경현공주옥현(玉賢)1530년 ~ 1584년문정왕후 윤씨영천위 신의
12녀인순공주1542년 ~ 1545년 (요절)문정왕후 윤씨


4. 평가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려 견성군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단경왕후)를 내치고 박빈(경빈 박씨)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과 당성위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11월 15일 (경술)

4. 1. 긍정적 평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바로잡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연산군 대에 문란해진 국가 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폐지되었던 법제를 복구하고, 국왕의 자문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신하들의 학문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했다.[12] 또한 연산군 시대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성균관사헌부를 다시 열었다.[2]

즉위 초반에는 반정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웠으나, 박원종, 성희안 등 주요 공신들이 사망한 후에는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특히 훈구 세력의 지나친 권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갑자사화 등으로 정계에서 밀려났던 사림파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 주요 언관직에 사림 인사를 배치하여 훈구 세력과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광조로, 중종은 그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조광조는 지방 자치를 강화하기 위해 향약을 보급하고, 유교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했으며, 토지 개혁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등용(현량과)을 추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재직할 당시 법을 엄격히 집행하여 관리들의 부패가 크게 줄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이러한 개혁 정책은 비록 기묘사화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연산군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4]

문화적으로도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속삼강행실도》(1514년)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이 중종 시대에 편찬되어 간행되었다. 이는 당시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기여한 성과로 평가된다.

4. 2. 부정적 평가

실록의 사관은 중종에 대해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고 평가하며,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가리지 못해 재위 기간 동안 혼란이 많았다고 비판했다.[13] 또한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견성군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를 해치고, 단경왕후를 내쫓았으며 경빈 박씨복성군, 홍려 등을 죽음으로 내몰아 부부, 부자, 군신 간의 정을 해쳤다고 지적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태생적으로 반정 공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초기에는 실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등용하여 유교적 이상에 기반한 개혁 정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특히 위훈 삭제는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개혁의 속도와 방향에 부담을 느낀 중종은 결국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가 조작한 走肖爲王|주초위왕중국어 사건을 빌미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을 숙청하고 개혁을 중단시켰다(기묘사화). 이는 개혁 세력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중종의 우유부단함과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1527년 동궁에서 발생한 작서의 변1533년의 목패의 변 등 왕실 내부의 저주 사건은 끊이지 않는 궁중 암투를 보여주었다. 이 사건들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는데, 이는 훗날 김안로의 음모였음이 밝혀졌다.[16] 중종은 기존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안로와 같은 외척 세력을 등용했지만, 이는 또 다른 권력 다툼을 야기했다. 김안로 집권기에 많은 인물들이 숙청되었고, 그 역시 윤임, 윤원형 등 새로운 외척 세력과의 갈등 끝에 몰락하는 등 중종 재위 기간 내내 정치적 혼란과 숙청(화옥)이 반복되었다.

만화가 박시백은 중종이 평소에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듯 보였으나, 조광조김안로 같은 권신들을 제거할 때는 기습적이고 단호한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분석했다.[41][42][43] 그러나 이러한 결단력은 국가 개혁이나 민생 안정보다는 비대해진 신권을 견제하고 왕좌를 지키는 데 국한되었다는 한계를 지적했다.[44]

결론적으로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으며, 재위 기간 내내 훈구파, 사림파, 외척 세력 간의 복잡한 권력 다툼 속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잦은 사화와 옥사, 궁중 암투, 그리고 삼포왜란과 여진족의 침입 등 내우외환 속에서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6][7]

4.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 공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추대되었다.[12] 이로 인해 집권 초기에는 공신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연산군 시대의 폐단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으나, 막강한 공신 세력 앞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중종은 훈구파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 위해 갑자사화 등으로 정계에서 밀려났던 사림파 인물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광조를 발탁하여 현량과 실시, 향약 보급, 소격서 폐지 등 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2] 이는 왕도정치를 통해 공신들의 힘을 누르고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였으며,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들의 부패를 막으려는 노력이었다.[2]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타협을 몰랐기 때문에, 기득권을 가진 보수적인 훈구 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중종반정 공신 중 자격 미달인 인물들의 공훈을 삭제하려 한 '위훈 삭제' 주장은 훈구파의 위기감을 최고조로 만들었다. 또한, 중종 자신도 왕권 강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반면, 조광조는 군주 역시 성리학의 도덕적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군신 공치(君臣共治)를 강조하며[13] 점차 왕과 갈등을 빚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끊임없는 직언과 급진적인 정책 추진에 피로감을 느꼈고,[13] 결국 훈구 세력이 조작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4] 등을 빌미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 인사를 숙청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1519년)이며, 이로 인해 중종 시대의 개혁은 좌절되었다.[4]

기묘사화로 개혁 세력이 제거된 후, 중종은 다시 훈구파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김안로외척 세력을 등용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새롭게 등장한 외척 세력은 기존 훈구 세력과 권력 다툼을 벌였고, 중종 치세 중후반기는 이들 간의 정쟁으로 얼룩졌다. 김안로의 전횡과 그의 몰락(1537년), 작서의 변으로 인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의 사사 등 옥사와 궁중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말년에는 세자(훗날 인종)를 지지하는 윤임 중심의 대윤과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윤원형 중심의 소윤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17] 다음 시대의 을사사화라는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실록의 사관은 중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사신은 논한다.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려

::견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 단경왕후)를 내치고 박빈(朴嬪, 경빈 박씨)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1544년) 11월 15일 (경술)

만화가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중종이 평소에는 신하들의 의견을 잘 따르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조광조김안로와 같은 강력한 신하들을 제거할 때는 매우 기습적이고 단호한,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지적했다.[41][42][43]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결단력을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기보다는, 지나치게 강해진 신하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데 주로 사용했다고 평가했다.[44]

결론적으로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을 끝내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개혁 의지를 가지고 사림파를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신을 왕위에 올린 훈구파의 거센 반발과 새롭게 등장한 외척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은 기묘사화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사화와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개혁의 실패와 극심한 정치 혼란을 초래했다. 중종 시대의 잦은 사화와 정치 불안은 귀중한 인재들을 희생시켰을 뿐 아니라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5. 문화와 유산

(내용 없음)

5. 1. 서적 편찬

중종 재위 기간에는 다양한 분야의 서적이 편찬, 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윤리 서적인 《속삼강행실도》(1514년)와 지리 서적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이 있다. 그러나 조광조사림파 세력이 숙청된 기묘사화 이후로는 이러한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5. 2. 기타

조선 의학의 변천사에서 중종은 해열제로 야인건수(인분을 에 녹인 것)를 복용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8][9]

6. 미디어에서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중종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드라마 《여인천하》, 《대장금》, 《사임당, 빛의 일기》, 영화 《물괴》 등이 있다. 중종을 연기한 배우와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드라마'''



'''영화'''

개봉일작품명연기자
1988년 2월 18일연산일기이경영
2015년 5월 21일《간신》고경표
2018년《물괴》박희순



'''애니메이션'''

방송 기간방송사작품명연기자
2005년MBC장금이의 꿈최한 (성우)


참조

[1] 뉴스 Jo Gwang-jo, Joseon reformist https://world.kbs.co[...] 2024-01-16
[2] 문서 Jungjong Sillok, year 16
[3] 논문 Between Confucian Ideology and the State: A New Approach to Understanding the Literati Purge of 1519 https://accesson.kr/[...] 2024-01-16
[4] 논문 Between Confucian Ideology and the State: A New Approach to Understanding the Literati Purge of 1519 https://accesson.kr/[...] 2024-01-16
[5] 문서 The Annals of King Jungjong https://sillok.histo[...]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the Republic of Korea
[6] 웹사이트 【韓国時代劇マニア】朝鮮王朝史上“もっとも優柔不断な王”と揶揄される、ちょっと残念な王様「第11代王・中宗」の実像は?(1/2ページ) https://futabanet.jp[...] 2024-04-08
[7] 웹사이트 【韓国時代劇マニア】朝鮮王朝史上“もっとも優柔不断な王”と揶揄される、ちょっと残念な王様「第11代王・中宗」の実像は?(2/2ページ) https://futabanet.jp[...] 2024-04-08
[8] 웹사이트 「世宗大王は肉食がお好き…肥満に糖尿病」 http://japanese.dong[...] 東亜日報 2005-08-22
[9] 웹사이트 韓国国史編纂委員会 朝鮮王朝実録 中宗実録105巻、中宗39年11月4日 http://sillok.histor[...]
[10] 문서 《중종대왕 태지》
[11] 문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2일 (무인)
[12] 문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9일 (을유)
[13] 뉴스 못다 핀 개혁의 꿈, 500년 비문으로 남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8-30
[14] 문서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3월 22일 (기해)
[15] 문서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17일 (기미)
[16] 문서 《중종실록》 96권, 중종 36년(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11월 9일 (신묘)
[17] 문서 《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2월 24일 (무술)
[18] 문서 《중종실록》 88권, 중종 33년(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10월 2일 (임인)
[19] 문서 《중종실록》 88권, 중종 33년(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10월 4일 (갑진)
[20] 문서 《중종실록》 92권, 중종 34년(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10월 20일 (갑신)
[21] 문서 반대로 38년의 재위기간 중에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가운데 중(中)자를 썼다는 해석도 있다. 조선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조선 중종을 연산군 대신 잇는 왕으로서 '조'(祖)를 붙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종'(宗)을 붙이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22]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3] 문서 약 149cm로 추산. 당시 포백척을 46.66cm 정도로 본다.
[24]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5] 문서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1739년 청 건륭(乾隆) 4년) 3월 28일 (갑술)
[26] 문서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4월 21일 (정묘)
[27] 문서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23일 (을축)
[28] 문서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26일 (무진)
[29] 문서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1547년 명 가정(嘉靖) 26년) 윤9월 16일 (갑오)
[30] 문서 《귀인한씨묘지명》
[31] 문서 《희빈홍씨묘지명》
[32] 문서 《선원록》(璿源錄) 및 《왕녀태실태지》
[33] 문서 김안로의 아들
[34] 문서 중종 28년(1533년) 경빈 박씨, 복성군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사망
[36] 문서 《옹주월환태재기》 http://yoksa.aks.ac.[...]
[37] 문서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의 큰아버지
[38] 문서 효순공주 사후 국법을 어기고 재혼하여 은위를 박탈당하였다
[39] 실록 졸(卒)한 숙정옹주(淑靜翁主) 【중종의 후궁인 숙의 김씨의 소생이다.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에게 시집갔었는데, 한이 죽자 그 사위와 간통하여 대내(大內)로부터 사약(賜藥)을 내려 죽였다.】의 아들 구사근(具思謹)에게는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초직(初職)을 제수하라. 명종실록 1566-12-21
[40] 드라마 여인천하 2001
[41] 실록 중종 37권, 14년(1519년) 12월 16일 2번째기사 // 중종 85권, 32년(1537년) 10월 24일 2번째기사
[42] 실록 중종 37권, 14년(1519년) 12월 16일 2번째기사
[43] 실록 중종 85권, 32년(1537년) 10월 24일 2번째기사 / 사관의 평 주목
[44] 서적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 휴머니스트 2006
[45] 웹인용 사성통해 (四聲通解)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2-15
[46] 웹인용 훈몽자회 (訓蒙字會)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2-15
[47] 간행물 어학고전 《훈몽자회》의 몇가지 특징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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