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타보리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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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는 1897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로 망명하여 반유대주의 잡지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22년에는 파벨 밀류코프 암살을 시도하여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나보코프를 살해하고 9명에게 부상을 입혀 1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되었다. 나치 독일 시기에는 러시아 이민자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나치당에 가입했고,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숨기고 독일 귀족 행세를 했다. 또한, 친위대 산하의 러시아 청소년 조직을 창설하는 등 나치에 협력했으며, 극우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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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타보리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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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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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7년 8월 12일 |
사망일 | 1980년 10월 16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지 | 서독, 림부르크안데어란 |
직업 | 언론인, 정치 활동가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42년–1945년) |
2. 일생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는 유대인 혈통을 가졌으나 러시아 정교회 신자로 자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군주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로 망명하여 키예프에서 만난 표트르 샤벨스키-보르크와 함께 극우 반유대주의 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 잡지 Луч Света|루치 스베타rus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하며 시온 의정서를 재출판하는 등 나치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922년, 타보리츠키는 샤벨스키-보르크와 함께 망명 중이던 러시아 정치인 파벨 밀류코프 암살을 시도했으나, 이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에비치 나보코프를 살해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14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27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타보리츠키는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독일 러시아 난민 사무소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이민자들을 감시하고, 독소전쟁 발발 후에는 국방군을 위한 번역가 모집을 주도했다. 그는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숨기고 독일 귀족 행세를 하며 1942년 나치당에 가입했다. 또한, 히틀러 유겐트 산하의 러시아 청년 조직을 창설하는 등 나치 체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2. 1. 초기 생애
세르게이와 그의 남동생 니콜라이 타보리츠키는 세례받은 유대인 재단사이자 패션 상점 주인이었던 안나 블라디미로브나와 그녀의 동거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자페발로프(1901년 결별)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1] 20세기 초 타보리츠키 형제의 성 표기는 일관성이 없었으나, 망명 기간 동안에는 주로 "타보리츠키"로 표기되었다.[1] 두 형제는 모두 러시아 정교회 신자로 자랐으며, 세르게이의 대부는 훗날 최고 검찰관이 되는 블라디미르 사블레르였다.[1] 형제는 안나 블라디미로브나의 첫 번째 남편이자 역시 유대인이었던 아슈먀니 출신 상인 울프 아이지코비치 타보리스키의 성을 물려받았는데, 그는 형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887년에 러시아를 떠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첫 이혼이 1899년에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울프 타보리스키의 자녀로 간주되었다.[1] 어머니는 이후 두 번째 길드 상인이 되었고, 마라사노프라는 귀족과 결혼하여 마라사노프 성을 사용했다. 안나 마라사노바는 1914년 3월 프랑스에서 사망했다.[1]191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세르게이와 니콜라이는 페트로그라드 영적 종무원에 자신들의 종교적, 군주주의적 성향을 내세우며 "러시아 정교 신자"의 자녀로 인정받고 유대인 혈통을 의미하는 "카인의 인장"을 없애달라고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같은 해, 그는 구레비치의 실과학교(레알슐레)를 졸업했다.[2]
이후 타보리츠키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휘하의 캅카스 원주민 기병 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1915년부터 1919년까지 그의 행적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 신뢰하기 어렵다.[2]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 그는 국무원 위원이자 부의원이었던 게오르기 데류긴의 조수였다고 한다.[2]
2월 혁명 이후, 타보리츠키는 우크라이나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다. 키예프의 시몬 페틀류라 파 감옥에서 군주주의자 표트르 샤벨스키-보르크를 알게 되었고, 이후 망명 생활 동안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2. 2. 망명 생활과 밀류코프 암살 미수 사건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는 처음에는 베를린에 거주하다가, 이후 메클렌부르크로 옮겼고,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는 뮌헨에서 지냈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그는 1919년 4월부터 발행된 반유대주의 잡지 Луч Света|루치 스베타rus(빛의 광선)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이 잡지는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 위조 문서인 시온 의정서를 재출판했으며,[3] 표트르 샤벨스키-보르크, 표도르 빈베르크와 함께 특정 인종이나 집단을 하위 인간으로 간주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펼쳐, 당시 급성장하던 나치즘 이념에 영향을 미친 초기 외부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파벨 밀류코프 암살 시도 전까지 그는 타자수로 일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소비에트 연방의 의뢰를 거부하기도 했다.1921년, 타보리츠키는 베를린 거리에서 망명 중이던 러시아의 전 국가 두마 정치인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를 우연히 마주치자 우산으로 그를 공격했고, 이 일로 며칠간 현지 감옥에 수감되었다.[4]
타보리츠키는 샤벨스키-보르크와 함께 파벨 밀류코프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를 위해 그들은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했다. 1922년 3월 28일 밤, 밀류코프의 강연 도중 타보리츠키가 총격을 시작했다. 이때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에비치 나보코프가 권총을 든 샤벨스키-보르크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쳤고, 타보리츠키는 나보코프를 향해 근거리에서 세 발의 총을 쏘았다. 나보코프는 심장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이후 타보리츠키는 옷을 챙겨 도주하려 했으나, 한 여성이 "저기 살인범이 있다!"라고 외치면서 군중에게 붙잡혔다. 이 총격으로 나보코프 외에도 입헌 민주당 베를린 지부 의장 L. E. 엘랴셰프와 Руль|룰rus 신문의 편집자 중 한 명인 아브구스트 카민카를 포함한 9명이 부상을 입었다.
샤벨스키-보르크와 타보리츠키에 대한 의학 검사 결과,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약물을 사용해 왔으며 암살 시도 당일에는 강력한 용량의 약물을 복용한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5]
밀류코프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재판은 1922년 7월 3일부터 7일까지 모아비트의 베를린 형사 법원에서 열렸다. 법원은 타보리츠키에게 암살 시도 공모 및 나보코프에게 고의로 치명상을 입혀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14년의 징역형(중노동)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는 1927년 봄, 사면 조치로 석방되었다.
2. 3. 나치 협력 활동
1936년 5월부터 타보리츠키는 나치 정권이 설립한 독일 러시아 난민 사무소(Vertrauensstelle für russische Flüchtlinge in Deutschlandde)에서 바실리 비스쿠프스키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6] 그의 임무는 러시아 이민자들의 서류를 관리하고 그들의 정치적 동향을 감시하는 것이었다.[7] 독소전쟁 발발 후, 그는 러시아 이민자들 중에서 국방군을 위한 번역가 모집을 이끌었으며, 이 활동은 게슈타포와 긴밀히 협력하여 이루어졌다.[1]1937년 4월, 타보리츠키는 1931년부터 나치 당원이었던 천문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크노르의 손녀 엘리자베스 폰 크노르와 결혼했다. 수많은 청원(요제프 괴벨스의 이름으로 제출된 청원 포함)과 거절 끝에 1938년 독일 시민권을 얻었다.[1] 1939년에는 SS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러시아 청년 국가 기구(NORM)(Националь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русской молодёжиru)를 창설했다.[9] 이 조직은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 조직과 유사했으며 그에 종속되었다. 1942년에는 NSDAP에 가입했는데, 이는 1940년 신청일로부터 소급 적용되었다.[1]
타보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가 유대인 혈통임을 숨기고 독일계라고 주장했으며, 허구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타보리츠키'에게 러시아 귀족 혈통을 부여했다. 그는 귀족 출신인 척하며 독일식 이름에 '폰'을 붙여 '폰 타보리츠키'라고 행세했다. 그는 자신이 형사 처벌을 받았던 밀류코프 암살 시도를 "유대인 민주주의 지도자"이자 "독일 혐오자"에 대한 공격이었다며 새로운 조국 독일을 위한 공헌으로 미화했다.[1] 또한 자신이 처음으로 ''시온 의정서''를 독일에 알렸다고 주장하며, 유대인과 "좌파"로부터 박해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1]
3. 비판 및 논란
세르게이 타보리츠키의 생애는 여러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된다. 특히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숨기면서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활동을 벌인 모순적인 행보는 주요 비판 지점이다.[1] 그는 나치 독일 정권 하에서 러시아 이민자들을 감시하고 게슈타포와 협력하는 등 적극적으로 부역했으며,[1][6][7] 히틀러 유겐트와 유사한 파시즘 성향의 청년 조직을 직접 창설하기도 했다.[9] 이러한 활동들은 그의 극단적인 사상과 나치즘에 대한 동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3. 1. 유대인 출신 은폐와 반유대주의 활동
타보리츠키는 어머니가 유대인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저히 숨겼다.[1] 그는 어머니를 독일계 혈통으로 꾸며냈으며, 실존하지 않는 아버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타보리츠키"를 만들어 러시아 귀족 출신이라고 주장했다.[1] 심지어 독일 귀족임을 나타내는 '폰'(von)을 자신의 성 앞에 붙여 '폰 타보리츠키'라고 행세하며 귀족 신분을 가장했다.[1]1937년 4월, 그는 1931년부터 나치당 당원이었던 천문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크노레의 손녀 엘리자베트 폰 크노레와 결혼했다.[1] 이후 여러 차례의 청원과 거절 끝에, 괴벨스에게까지 청원서를 제출한 끝에 1938년 독일 시민권을 얻었다.[1] 1940년에 가입 신청을 하여 1942년에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했으며, 이는 신청일인 1940년부터 소급 적용되었다.[1]
독일 시민이 된 후, 타보리츠키는 자신의 과거 범죄 경력, 특히 파벨 밀류코프 암살 미수 사건을 오히려 새로운 조국인 나치 독일을 위한 공헌이라고 주장했다.[1] 그는 밀류코프를 "유대인 민주주의 지도자"이자 "독일 혐오자"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1] 또한 자신이 독일에 처음으로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 위서인 ''시온 의정서''를 소개했다고 주장했으며, 유대인과 "좌파"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1] 이러한 행동은 그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성향과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숨기려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반유대주의적 신념은 나치 정권 하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1936년 5월부터 나치 정권이 세운 독일 러시아 난민 사무소(''Vertrauensstelle für russische Flüchtlinge in Deutschland'')에서 바실리 비스쿠프스키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며 러시아 이민자들을 감시했고,[6][7] 독소전쟁 발발 후에는 국방군을 위한 번역가 모집을 담당했으며, 이 모든 활동은 게슈타포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루어졌다.[1] 1939년에는 SS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전러시아 청년 조직(NORM)을 창설하기도 했다.[9] 이 조직은 히틀러 유겐트와 유사한 성격의 파시즘 단체였다.
3. 2. 나치 부역 행위
1936년 5월부터 타보리츠키는 나치 정권이 설립한 독일 내 러시아 난민을 위한 신뢰 사무소(Vertrauensstelle für russische Flüchtlinge in Deutschlandde)에서 바실리 비스쿠프스키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6] 그의 주요 임무는 러시아 이민자 관련 서류를 관리하고 그들의 정치적 동향을 감시하는 것이었다.[7] 독소전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 이민자 중에서 국방군을 위한 번역가를 모집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이러한 활동은 게슈타포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루어졌다.[1] 글레프 라르는 타보리츠키를 "마르고, 야위고, 뾰족하며, 시들고, 약간 쌕쌕거리는 체형으로, 피어나기보다는 시들어가는 타입"이라고 묘사했다.[8]1937년 4월, 타보리츠키는 1931년부터 나치 당원이었던 천문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크노레의 손녀 엘리자베트 폰 크노레와 결혼했다. 그는 요제프 괴벨스의 이름으로 제출된 것을 포함한 수많은 청원과 거절 끝에 1938년 독일 시민권을 얻었고, 1942년에는 NSDAP에 가입했다(가입 신청일인 1940년부터 소급 적용).[1] 이 과정에서 그는 어머니의 유대인 혈통을 숨기고 독일계라고 주장했으며,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타보리츠키"에게 러시아 귀족 혈통을 부여했다. 그는 귀족 출신인 척하며 독일식 성 앞에 귀족을 나타내는 '폰'(von)을 붙여 '폰 타보리츠키'라고 행세했다. 또한, 과거 파벨 밀류코프 암살 미수로 형사 처벌을 받은 것을 "유대인 민주주의 지도자"이자 "독일 혐오자"에 대한 행동이었다며 새로운 조국 독일을 위한 공적인 행위였다고 주장했다.[1] 그는 자신이 독일에 ''시온 의정서''를 처음 소개했다고 주장하며 유대인과 "좌파"로부터 박해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1]
1939년에는 러시아 청년 국가 조직(NORM)을 창설했다.[9] 이 조직은 SS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으며,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와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었고 그 하부 조직으로 간주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타보리츠키는 베를린에서 도망쳐 림부르크안데어란에서 거주했다. 전후에도 그는 브라질에 본부를 둔 군주주의 성향의 잡지 ''블라디미르스키 베스트니크''에 간헐적으로 글을 기고했다.[1] 1952년, 과거 암살 시도의 공범이었던 샤벨스키-보르크가 사망하자 그에 대한 부고를 쓰기도 했다.[1] 타보리츠키는 1980년 10월 16일 림부르크안데어란에서 사망했다.
3. 3. 극단적인 사상
1936년 5월부터 타보리츠키는 나치 정권이 설립한 재독 러시아 난민 신뢰처(''Vertrauensstelle für russische Flüchtlinge in Deutschland'')에서 바실리 비스쿠프스키 장군의 부관으로 일했다.[6] 그의 주요 임무는 러시아 이민자 관련 서류를 관리하고 그들의 정치적 동향을 감시하는 것이었다.[7]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는 러시아 이민자 중에서 국방군을 위한 번역가를 모집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이러한 활동은 게슈타포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루어졌다.[1] 글레프 라르(ru:Рар, Глеб Александрович)는 타보리츠키를 "마르고, 야위고, 뾰족하며, 시들고, 약간 쌕쌕거리는 체형으로, 피어나기보다는 시들어가는 타입"이라고 묘사했다.[8]1937년 4월, 타보리츠키는 1931년부터 나치 당원이었던 천문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크노레(en:Karl Friedrich Knorre)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폰 크노르와 결혼했다. 여러 차례의 청원(괴벨스 명의 포함)과 거절을 거쳐 1938년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고, 1942년에는 NSDAP에 입당했다(신청일인 1940년부터 소급 적용).[1] 이 과정에서 그는 어머니가 유대인 혈통임을 숨기고 독일계라고 주장했으며, 가상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타보리츠키'를 만들어 러시아 귀족 출신이라고 속였다. 그는 스스로 귀족인 것처럼 행세하며 독일식 성에 귀족을 나타내는 '폰(von)'을 붙여 '폰 타보리츠키'라고 칭했다.[1] 그는 과거 파벨 밀류코프 암살 미수 사건(타보리츠키는 밀류코프를 '유대인 민주주의 지도자'이자 '독일 혐오자'로 묘사했다)으로 처벌받은 것을 새로운 조국(독일)을 위한 공적이라고 주장했다.[1] 또한 자신이 ''시온 의정서''를 독일에 처음 소개했다고 주장하며, 유대인과 "좌파"로부터 박해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1]
1939년에는 SS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전러시아 청년 조직(NORM)(ru:Националь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русской молодёжи)을 창설했다.[9] 이 조직은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와 유사했으며 그 하부 조직처럼 운영되었다.
전쟁 말기 베를린에서 도망쳐 나온 후 림부르크 안 데어 란에서 거주했으며, 브라질에 기반을 둔 군주주의 성향의 잡지 ''블라디미르스키 베스트니크(ru:Владимирский вестник)''에 간헐적으로 글을 기고했다.[1] 1952년 표트르 샤벨스키보르크가 사망하자 그에 대한 부고를 쓰기도 했다.[1] 타보리츠키는 1980년 10월 16일 그곳에서 사망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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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Все самочинцы произвола...": подлинная биография Сергея Таборицкого
https://www.nlobooks[...]
New Literary Observer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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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Незамеченное поколение" писателя Владимира Варшавского. О судьбе мужа и своей жизни рассказывает в Женеве переводчик Татьяна Варшавская
https://www.svoboda.[...]
201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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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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