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구왈기야 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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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완구왈기야 싱포는 청나라 말기의 무관으로, 태평천국의 난과 념군 진압에 참여했다. 도광 20년 거인이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태평천국 북벌 당시 추격과 톈진 방어에 참여하여 바투르 칭호를 받았다. 이후 념군 진압 과정에서 공을 세웠으나, 1860년 노주와 딩위안 탈환 실패로 인해 흠차대신에서 해임되었다. 신유정변에서 서태후를 지지하며 정권을 장악하는데 기여했으나, 묘패림의 반란으로 탄핵을 받아 1863년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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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구왈기야 싱포 | |
|---|---|
| 기본 정보 | |
![]() | |
| 만주어 이름 | ᠰᡠᠸᠠᠨ ᡤᡡᠸᠠᠯᡤᡳᠶᠠ ᠰᡞᠩᠪᠣᠣ (suwan gūwalgiya singboo) |
| 한자 이름 | 勝保 (승보) |
| 생년월일 | 1798년 |
| 사망일 | 1863년 |
| 사인 | 처형 |
| 민족 | 만주족 |
| 출신 부족 | 수완 구왈기야 씨족 |
| 기치 | 만주 양람기 |
| 배우자 | 황족 여성 |
| 작위 | 이등진국공 (二等鎮國公) |
| 경력 | |
| 복무 | 청나라 군대 |
| 계급 | 장군 |
| 참여 전쟁 | 태평천국의 난 진압 염군의 난 진압 |
2. 생애
도광 20년(1840년)에 거인이 되어 순천부 교수, 좌찬선, 한림원 시강, 한림원 시독, 국자감 제주, 광록시경을 역임했다.
함풍 3년(1853년), 태평천국이 난징을 함락시키자, 기산을 따라 군무에 종사하여 양저우 교외에 강북대영을 건설했다. 4월에 태평천국군이 북벌을 시작하자 승보는 추격을 시작하여 허난성회경부의 포위를 풀고, 도통의 대우를 받으며 바투르의 칭호를 얻었다. 더욱이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군세가 4천 명을 넘었고, 대태평천국군 주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승보군은 톈진 방어를 하면서 징하이를 포위했다.
이듬해 함풍 4년(1854년) 1월, 홀친 군왕 센게린친(senggerincin, 승격림친)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간 북벌군을 추격하여, 북벌군은 푸청으로 물러났다. 3월에 승보는 태평천국의 원군을 산둥성에서 요격했으나, 린칭을 점령당했다. 그러나 4월에 린칭을 탈환하고, 센게린친과 함께 롄전의 북벌군을 포위했다. 북벌군은 롄전과 가오탕에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청군도 두 갈래로 나뉘어 센게린친이 롄전의 포위를 계속하고, 승보가 가오탕 포위를 맡았다. 함풍 5년(1855년) 1월, 센게린친은 롄전을 함락시켰지만, 승보는 가오탕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조정으로부터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대신 센게린친 군이 가오탕 공략을 맡았다.
2년 후인 함풍 6년(1856년)에 소환되어, 안후이성·허난성에서 념군의 진압을 맡게 되었고, 이듬해 함풍 7년(1857년) 1월, 구스에서 념군의 맹주인 장락행을 격파하여, 념군의 거점을 잇따라 공략해 갔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진옥성 군이 허난성 남부로 들어가 념군과 연합하여 다시 구스를 포위했기 때문에, 승보는 원갑삼과 함께 구원에 달려가 포위를 풀었다. 함풍 8년(1858년)에 흠차대신 독변 안휘 군무를 명받고, 태평천국에 붙었던 회북의 단련인 묘패림과 념군의 이소수를 배반시켰다. 그러나 함풍 10년(1860년), 노주·딩위안 탈환에 실패한 일로 인해, 흠차대신에서 해임되어 하남독변 군무로 옮겨졌다. 게다가 념군의 허난성 서부 침입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병권도 해제되어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광록시경으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의 애로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진격했을 때, 승보는 패배했으나 용전했기 때문에 병부시랑·흠차대신으로 승진했다. 함풍 11년(1861년)에 함풍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동태후·공친왕혁흔과 이친왕재원·정친왕단화·숙순 등이 대립했으나, 승보는 서태후·공친왕을 지지했다. 신유 정변으로 서태후 등이 정권을 탈취하자, 상황기 만주 도통·정람기 호군통령에 임명되어, 산둥성·안후이성·허난성의 념군 진압을 맡았다.
동치 원년(1862년), 승보가 배반시킨 묘패림이 진옥성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승보는 태평천국군과 회민 봉기 군을 진압하기 위해 산시성에 파견되었으나 전공이 없었고, 묘패림이 다시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정적인 반조음·원갑삼·센게린친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이듬해 동치 2년(1863년)에 자결을 명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도광 20년(1840년)에 거인이 되어 순천부 교수, 좌찬선, 한림원 시강, 한림원 시독, 국자감 제주, 광록시경을 역임했다.함풍 3년(1853년), 태평천국이 난징을 함락시키자, 기산을 따라 군무에 종사하여 양저우 교외에 강북대영을 건설했다. 4월에 태평천국군이 북벌을 시작하자 승보는 추격을 시작하여 허난성회경부의 포위를 풀고, 도통의 대우를 받으며 바투르의 칭호를 얻었다. 더욱이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군세가 4천 명을 넘었고, 대태평천국군 주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승보군은 톈진 방어를 하면서 징하이를 포위했다.
이듬해 함풍 4년(1854년) 1월, 홀친 군왕 센게린친(senggerincin, 승격림친)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간 북벌군을 추격하여, 북벌군은 푸청으로 물러났다. 3월에 승보는 태평천국의 원군을 산둥성에서 요격했으나, 린칭을 점령당했다. 그러나 4월에 린칭을 탈환하고, 센게린친과 함께 롄전의 북벌군을 포위했다. 북벌군은 롄전과 가오탕에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청군도 두 갈래로 나뉘어 센게린친이 롄전의 포위를 계속하고, 승보가 가오탕 포위를 맡았다. 함풍 5년(1855년) 1월, 센게린친은 롄전을 함락시켰지만, 승보는 가오탕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조정으로부터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대신 센게린친 군이 가오탕 공략을 맡았다.
2년 후인 함풍 6년(1856년)에 소환되어, 안후이성·허난성에서 념군의 진압을 맡게 되었고, 이듬해 함풍 7년(1857년) 1월, 구스에서 념군의 맹주인 장락행을 격파하여, 념군의 거점을 잇따라 공략해 갔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진옥성 군이 허난성 남부로 들어가 념군과 연합하여 다시 구스를 포위했기 때문에, 승보는 원갑삼과 함께 구원에 달려가 포위를 풀었다. 함풍 8년(1858년)에 흠차대신 독변 안휘 군무를 명받고, 태평천국에 붙었던 회북의 단련인 묘패림과 념군의 이소수를 배반시켰다. 그러나 함풍 10년(1860년), 노주·딩위안 탈환에 실패한 일로 인해, 흠차대신에서 해임되어 하남독변 군무로 옮겨졌다. 게다가 념군의 허난성 서부 침입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병권도 해제되어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광록시경으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의 애로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진격했을 때, 승보는 패배했으나 용전했기 때문에 병부시랑·흠차대신으로 승진했다. 함풍 11년(1861년)에 함풍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동태후·공친왕혁흔과 이친왕재원·정친왕단화·숙순 등이 대립했으나, 승보는 서태후·공친왕을 지지했다. 신유 정변으로 서태후 등이 정권을 탈취하자, 상황기 만주 도통·정람기 호군통령에 임명되어, 산둥성·안후이성·허난성의 념군 진압을 맡았다.
동치 원년(1862년), 승보가 배반시킨 묘패림이 진옥성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승보는 태평천국군과 회민 봉기 군을 진압하기 위해 산시성에 파견되었으나 전공이 없었고, 묘패림이 다시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정적인 반조음·원갑삼·센게린친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이듬해 동치 2년(1863년)에 자결을 명받았다.
2. 2. 태평천국의 난 진압
함풍 3년(1853년), 태평천국이 난징을 함락시키자, 기산을 따라 군무에 종사하여 양저우 교외에 강북대영을 건설했다. 4월에 태평천국군이 북벌을 시작하자 승보는 추격을 시작하여 허난성회경부의 포위를 풀고, 도통의 대우를 받으며 바투르의 칭호를 얻었다. 더욱이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군세가 4천 명을 넘었고, 대태평천국군 주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승보군은 톈진 방어를 하면서 징하이를 포위했다.이듬해 함풍 4년(1854년) 1월, 홀친 군왕 센게린친(senggerincin, 승격림친)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간 북벌군을 추격하여, 북벌군은 푸청으로 물러났다. 3월에 승보는 태평천국의 원군을 산둥성에서 요격했으나, 린칭을 점령당했다. 그러나 4월에 린칭을 탈환하고, 센게린친과 함께 롄전의 북벌군을 포위했다. 북벌군은 롄전과 가오탕에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청군도 두 갈래로 나뉘어 센게린친이 롄전의 포위를 계속하고, 승보가 가오탕 포위를 맡았다. 함풍 5년(1855년) 1월, 센게린친은 롄전을 함락시켰지만, 승보는 가오탕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조정으로부터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대신 센게린친 군이 가오탕 공략을 맡았다.
동치 원년(1862년), 승보가 배반시킨 묘패림이 진옥성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2. 3. 념군 진압과 권력 장악
도광 20년(1840년)에 거인이 된 수완구왈기야 싱포는 순천부 교수, 좌찬선, 한림원 시강, 한림원 시독, 국자감 제주, 광록시경을 역임했다.함풍 3년(1853년), 태평천국이 난징을 함락하자 기산을 따라 군무에 종사하여 양저우 교외에 강북대영을 건설했다. 4월에 태평천국군이 북벌을 시작하자 승보는 추격하여 허난성회경부의 포위를 풀고, 도통의 대우를 받으며 바투르 칭호를 얻었다. 더욱이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군세가 4천 명을 넘었고, 대태평천국군 주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승보군은 톈진 방어를 하면서 징하이를 포위했다.
함풍 4년(1854년) 1월, 홀친 군왕 센게린친(senggerincin)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간 북벌군을 추격하여 북벌군은 푸청으로 물러났다. 3월에 승보는 태평천국의 원군을 산둥성에서 요격했으나, 린칭을 점령당했다. 그러나 4월에 린칭을 탈환하고, 센게린친과 함께 롄전의 북벌군을 포위했다. 북벌군은 롄전과 가오탕에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청군도 두 갈래로 나뉘어 센게린친이 롄전의 포위를 계속하고, 승보가 가오탕 포위를 맡았다. 함풍 5년(1855년) 1월, 센게린친은 롄전을 함락시켰지만, 승보는 가오탕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조정으로부터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대신 센게린친 군이 가오탕 공략을 맡았다.
2년 후인 함풍 6년(1856년)에 소환되어, 안후이성·허난성에서 념군의 진압을 맡게 되었고, 이듬해 함풍 7년(1857년) 1월, 구스에서 념군의 맹주인 장락행을 격파하여 념군의 거점을 잇따라 공략해 갔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진옥성 군이 허난성 남부로 들어가 념군과 연합하여 다시 구스를 포위했기 때문에, 승보는 원갑삼과 함께 구원에 달려가 포위를 풀었다. 함풍 8년(1858년)에 흠차대신 독변 안휘 군무를 명받고, 태평천국에 붙었던 회북의 단련인 묘패림과 념군의 이소수를 배반시켰다. 그러나 함풍 10년(1860년), 노주·딩위안 탈환에 실패한 일로 인해, 흠차대신에서 해임되어 하남독변 군무로 옮겨졌다. 게다가 념군의 허난성 서부 침입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병권도 해제되어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광록시경으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 애로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진격했을 때, 승보는 패배했으나 용전했기 때문에 병부시랑·흠차대신으로 승진했다. 함풍 11년(1861년)에 함풍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동태후·공친왕혁흔과 이친왕재원·정친왕단화·숙순 등이 대립했으나, 승보는 서태후·공친왕을 지지했다. 신유 정변으로 서태후 등이 정권을 탈취하자, 상황기 만주 도통·정람기 호군통령에 임명되어, 산둥성·안후이성·허난성의 념군 진압을 맡았다.
동치 원년(1862년), 승보가 배반시킨 묘패림이 진옥성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승보는 태평천국군과 회민 봉기 군을 진압하기 위해 산시성에 파견되었으나 전공이 없었고, 묘패림이 다시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정적인 반조음·원갑삼·센게린친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이듬해 동치 2년(1863년)에 자결을 명받았다.
2. 4. 제2차 아편 전쟁
함풍 3년(1853년), 태평천국이 난징을 함락하자, 기산을 따라 군무에 종사하여 양저우 교외에 강북대영을 건설했다. 4월에 태평천국군이 북벌을 시작하자 승보는 추격을 시작하여 허난성회경부의 포위를 풀고, 도통의 대우를 받으며 바투르의 칭호를 얻었다. 더욱이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군세가 4천 명을 넘었고, 대태평천국군 주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승보군은 톈진 방어를 하면서 징하이를 포위했다.이듬해 함풍 4년(1854년) 1월, 홀친 군왕 센게린친(senggerincin, 승격림친)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간 북벌군을 추격하여, 북벌군은 푸청으로 물러났다. 3월에 승보는 태평천국의 원군을 산둥성에서 요격했으나, 린칭을 점령당했다. 그러나 4월에 린칭을 탈환하고, 센게린친과 함께 롄전의 북벌군을 포위했다. 북벌군은 롄전과 가오탕에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청군도 두 갈래로 나뉘어 센게린친이 롄전의 포위를 계속하고, 승보가 가오탕 포위를 맡았다. 함풍 5년(1855년) 1월, 센게린친은 롄전을 함락시켰지만, 승보는 가오탕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조정으로부터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대신 센게린친 군이 가오탕 공략을 맡았다.
같은 해(1860년)의 애로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진격했을 때, 승보는 패배했으나 용전했기 때문에 병부시랑·흠차대신으로 승진했다.
2. 5. 신유정변과 권력 강화
함풍제가 사망한 1861년, 서태후·동태후·공친왕혁흔과 이친왕재원·정친왕단화·숙순 등이 대립했을 때, 수완구왈기야 싱포는 서태후·공친왕을 지지했다. 신유정변으로 서태후 등이 정권을 탈취하자, 상황기 만주 도통·정람기 호군통령에 임명되어, 산둥성·안후이성·허난성의 념군 진압을 맡았다.2. 6. 최후
도광 20년(1840년)에 거인이 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함풍 3년(1853년)에 태평천국이 난징을 함락시키자, 기산을 따라 군무에 종사하여 양저우 교외에 강북대영을 건설했다. 태평천국군이 북벌을 시작하자 승보는 추격하여 허난성회경부의 포위를 풀고, 도통의 대우를 받으며 바투르의 칭호를 얻었다.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군세가 4천 명을 넘었고, 대태평천국군 주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승보군은 톈진 방어를 하면서 징하이를 포위했다.함풍 4년(1854년) 1월, 홀친 군왕 센게린친(senggerincin, 승격림친)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간 북벌군을 추격하여, 북벌군은 푸청으로 물러났다. 3월에 승보는 태평천국의 원군을 산둥성에서 요격했으나, 린칭을 점령당했다. 4월에 린칭을 탈환하고, 센게린친과 함께 롄전의 북벌군을 포위했다. 함풍 5년(1855년) 1월, 센게린친은 롄전을 함락시켰지만, 승보는 가오탕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조정으로부터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대신 센게린친 군이 가오탕 공략을 맡았다.
함풍 6년(1856년)에 소환되어, 안후이성·허난성에서 념군의 진압을 맡게 되었고, 함풍 7년(1857년) 1월, 구스에서 념군의 맹주인 장락행을 격파하여, 념군의 거점을 잇따라 공략해 갔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진옥성 군이 허난성 남부로 들어가 념군과 연합하여 다시 구스를 포위했기 때문에, 승보는 원갑삼과 함께 구원에 달려가 포위를 풀었다. 함풍 8년(1858년)에 흠차대신 독변 안휘 군무를 명받고, 태평천국에 붙었던 회북의 단련인 묘패림과 념군의 이소수를 배반시켰다. 그러나 함풍 10년(1860년), 노주·딩위안 탈환에 실패한 일로 인해, 흠차대신에서 해임되어 하남독변 군무로 옮겨졌다. 게다가 념군의 허난성 서부 침입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병권도 해제되어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광록시경으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의 애로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진격했을 때, 승보는 패배했으나 용전했기 때문에 병부시랑·흠차대신으로 승진했다. 함풍 11년(1861년)에 함풍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동태후·공친왕혁흔과 이친왕재원·정친왕단화·숙순 등이 대립했으나, 승보는 서태후·공친왕을 지지했다. 신유 정변으로 서태후 등이 정권을 탈취하자, 상황기 만주 도통·정람기 호군통령에 임명되어, 산둥성·안후이성·허난성의 념군 진압을 맡았다.
동치 원년(1862년), 승보가 배반시킨 묘패림이 진옥성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승보는 태평천국군과 회민 봉기 군을 진압하기 위해 산시성에 파견되었으나 전공이 없었고, 묘패림이 다시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정적인 반조음·원갑삼·센게린친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이듬해 동치 2년(1863년)에 자결을 명받았다.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종합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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