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안양-수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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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흥-안양-수원 전투는 1950년 7월 3일부터 4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시흥, 안양, 수원을 중심으로 국군이 벌인 전투이다. 서울 함락 이후 국군은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수원까지 포기하고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미군 참전 시간을 확보하고, 북한군의 적화 통일을 늦추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항전 의지를 고취하고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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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은 고구려 잉벌노현에서 시작하여 신라 곡양현, 고려 금주를 거쳐 조선 시대에 금천현, 시흥현으로 개칭된 후 1895년 시흥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안산군, 과천군과 통합되고 서울 확장과 주변 지역 시 승격으로 축소되다 1989년 시흥시, 군포시, 의왕시로 분리 승격되며 폐지된 경기도의 옛 행정 구역이다.
시흥-안양-수원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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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7월 3일 ~ 7월 4일 |
장소 | 경기도 안양, 수원, 시흥(현재의 서울 금천구, 관악구, 경기도 광명시 일대)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대한민국 지휘관 | 김홍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소장 이종찬 혼성수도사단장 대령 서종철 제8연대장 중령 이철원† 제1대대장 소령 고백규 제2대대장 소령 박태원 제3대대장 소령 박철용 제18연대 1대대장 소령 박무열 기갑연대 제1장갑대대장 소령 유재흥 혼성 제7사단장 준장 이희권 제1연대장 중령 강원래 혼성대대장 대위 윤춘근 제9연대장 중령 유항박 혼성대대장 소령 박기병 제20연대장 대령 김한주 혼성대대장 소령 배운용† 제25연대 혼성 2대대장 소령 이존일 제15연대 1대대장 소령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임선하 혼성 제2사단장 대령 이한림 혼성 제2사단장 대령 (7월 1일부터) 최수창† 제3연대장 중령 임백진 제1대대장 소령 김봉익 제3대대장 소령 최창언 제5연대장 중령 박기성 제5연대장 중령 (7월 3일부터) 이경수 제1대대장 소령 차갑준 제2대대장 소령 문용채 제16연대장 대령 유의준 제1대대장 중령 윤태호 제2대대장 소령 유해준 보병학교혼성연대장 중령 하갑청 혼성대대장 중령 장철부 기갑연대 제2기병대대장 소령 이준식 혼성 제3사단장 준장 강태민 제22연대장 중령 황명 제1대대장 소령 김재규 제2대대장 소령 손영을 제3대대장 소령 김병경 제25연대장 중령 나희필 제2대대장 대위 고동기 제3대대장 대위 손관도 사관학교생도대장 소령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김점곤 제12연대장 중령 김진위 제13연대장 대리 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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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사상자 |
2. 배경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면서 국군은 혼란에 빠졌다. 의정부와 문산 방면에서 싸우던 병력은 각각 다른 나루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넜다. 광나루를 건넌 병력은 수원으로, 뚝섬, 한남동, 서빙고를 거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나뉘었고, 마포, 하중리, 행주를 거친 병력은 대부분 시흥으로 모였다.
6월 28일 밤과 6월 29일 아침 사이, 철수병력 집결이 거의 완료되었다. 6월 28일 낮, 육군본부는 수원농업시험장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시흥(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김홍일 소장이 지휘하는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혼성부대를 만들고, 노량진 부근에 배치하여 한강 방어선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계속된 후퇴로 매우 지쳐있었고, 수습된 병력도 연대 규모에 못 미치는 대대 수준이었다. 중장비는 대부분 강북에 버려두고 와서, 공용화기도 연대 당 박격포 2~3문과 기관총 5~6정이 전부였다. 통신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부대 간 협조는 물론, 상하 지휘체계도 원활하지 않았다. 혼성 편성된 부대라 지휘관과 부하가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흩어지는 일도 잦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국군은 북한군 전차가 쉽게 한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과 미군 지원에 대한 기대를 안고, 한강을 방어선 삼아 최대한 버티고자 했다.
2. 1. 작전 계획
6월 28일 오전, 존 H. 처치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회동하여 미군 참전 가능성을 시사하고, 시흥-수원 선에서 낙오병을 수습하여 한강 선을 고수하기로 결정하였다.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김홍일 소장에게 시흥에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지금의 제1군단)를 설치하고(12시), 철수하는 병력으로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한강 선을 방어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응준 소장의 제5사단은 수원에서 낙오병을 수습하고 지역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김홍일 소장이 시흥 보병학교에 도착했을 때(14시), 김포에서는 계인주 대령의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김포 반도 전투와 오류동 전투를 치르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참모진과 지휘관들은 병력 수습에 힘을 쏟았다.
한강을 건넌 국군은 대부분 시흥과 수원으로 집결하였는데, 육군본부는 이들을 김홍일 소장의 지휘 하에 혼성부대로 편성하여 노량진 부근에 투입,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임선하 대령의 혼성 제2사단, 유재흥 준장의 혼성 제7사단, 이종찬 대령의 혼성 수도사단이 한강 남쪽 강변을 방어하게 되었으나, 병력과 장비 부족, 통신망 미비, 혼성 편성으로 인한 지휘 체계 혼란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미군의 지원과 한강이라는 자연적 방어막을 믿고 한강 선에서 최대한 버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3. 전투 과정
6월 28일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후, 국군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의정부 방면 병력은 광나루와 뚝섬, 한남동, 서빙고, 마포, 하중리(서강) 나루터 등을 통해, 문산 방면 병력은 행주와 이산포 나루터 등을 통해 도강했다. 광나루를 통해 건넌 병력은 수원으로, 뚝섬, 한남동, 서빙고를 거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마포와 하중리, 행주를 통해 건넌 병력은 시흥으로 집결했다.
6월 28일 밤과 6월 29일 아침 사이, 육군본부는 수원농업시험장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서울특별시 시흥(현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김홍일 소장 지휘 하의 전투사령부를 설치, 이곳에서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노량진 부근에 투입해 한강방어선을 방어하게 했다.
임선하 대령의 혼성 제2사단, 유재흥 준장의 혼성 제7사단, 이종찬 대령의 혼성 수도사단은 연대 규모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말죽거리-양화교 간 한강 남쪽 강변을 방어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피로가 극에 달했고, 중장비는 대부분 강북에 유기된 상태였다. 공용화기는 연대 당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이 전부였다. 통신망 미확보와 혼성 편성 부대의 문제로 지휘체계 또한 원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군은 북한군 전차가 쉽게 한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과 미군 지원에 대한 기대를 안고 한강 방어막을 활용, 지구전을 펼치고자 했다.
3. 1. 7월 3일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미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대전을 지나 북상 중인 상황에서,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현 전선에서 최대한 지연하기로 결심하였다. 7월 3일 아침, 노량진-영등포 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육군본부에 보고되자 이러한 결정은 더욱 확고해졌다.한편, 시흥지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아침에 유재흥 준장의 제7사단과 이종찬 대령의 수도사단에 다음과 같은 긴급명령을 하달하였다.
긴급명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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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일 소장은 영등포-시흥 도로가 북한군에게 개방될 것을 예상하고, 오류동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도 당면한 적에게서 벗어나 안양으로 철수하도록 조치한 후, 11:00에 사령부를 철수하여 14:00에 안양으로 이동하였다.
수도사단은 15:00경 시흥 남쪽에 제1저지선을 확보하였다. 제7사단은 일부가 시흥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관악산-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바로 집결하게 되었고, 안양과 군포장에서 수습된 일부 병력으로 수도사단이 시흥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안양천 남쪽 고지대에 제2선 진지를 급히 편성하였다.
전날 군포장으로 지휘소를 이동한 이한림 대령의 제2사단은 시흥전투사령부의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2사단은 지휘소를 군포장 남쪽 2km 지점으로 다시 옮기고, 안양 남쪽의 426고지(안양 남쪽 2km, 국도 서쪽)를 중심으로 진지를 점령하여 국도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한편,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시흥전투사령부의 철수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제1사단장 백선업 대령은 오후에 수원에서 육사생도대를 배속받아 풍덕천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은 풍덕천 서남쪽의 188고지(풍덕천 남쪽 2km)-237고지(188고지 서북쪽 2.5km) 사이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는 수원에서 5km 남짓한 거리로, 수원에서 18km가 넘는 시흥-안양 사이에서 시간을 다투는 지연전을 벌일 시흥전투사령부 주력의 철수로 확보가 제1사단에 달려있었다.
3. 2. 7월 4일
1950년 7월 4일, 리권무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4사단은 T-34 전차 12대를 앞세우고 경수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삼막리(284고지 남쪽 1.6km) 부근에서 이현진 대리 중령의 제8연대와 임충식 중령의 제18연대를 공격했다. 국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북한군 전차가 도로를 돌파하면서 10:00경 양 연대는 분산되어 수원을 향해 철수했다. 이 여파로 안양의 전투사령부와 재편성 중이던 병력도 철수했다.14:00경, 북한군은 안양에서 군포로 진출, 426고지의 제5연대와 김병화 소령이 지휘하는 보병학교 일부 병력의 집중 사격에도 불구하고 군포장의 제3선을 와해시켰다. 김홍일 소장은 지지대고개(군포장 동남쪽 5km)에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했으나, 전차의 남하를 막지 못했다.
348고지 서북록의 최수창 중령이 이끄는 제3연대는 퇴로가 차단될 위협에 직면하여 판교 쪽으로 철수하던 중, 연대장 최수창 중령이 사기막골(판교 서쪽 4.5km) 부근에서 전사하고 병력은 흩어졌다.
정일권 총참모장은 육군본부를 평택으로 철수시키고, 후위부대를 수원 북문(장안문)에 배치했다. 최창식 대령은 북문 파괴를 명령했으나, 이종찬 대령의 반대로 대전차지뢰 매설로 대체되었다. 김홍일 소장 등 시흥 사령부 장병은 수원에서 철수했고, 북한군 전차가 동문에 접근하자 국군 병력은 저지선에서 철수했다.
4. 결과 및 영향
국군은 7월 4일 수원마저 포기하면서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고,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지연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 전투는 국군 입장에서 북한군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당시 국군의 목적은 적 격멸이나 실지 회복이 아니라 시간을 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강선에서의 일주일은 기사회생의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연전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항전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는 북한의 침략 행위를 명확히 알리고 UN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승만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와 국군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한강선 돌파가 지연되면서 당초 계획했던 '수원 북방에서 아군 병력 타격'과 '미군 참전 전 방어선 조기 돌파'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작전 계획 차질은 훗날 북한 스스로가 적화통일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분석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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