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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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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니바는 아일랜드 왕국의 상속자였으나, 결혼을 강요하는 이교도 왕을 피해 노르웨이로 도망쳐 셀랴와 킨 섬에 정착한 인물이다. 그녀는 하콘 시구르다르손의 통치 기간 동안 동굴에 숨어 순교했고, 이후 부패하지 않은 시신이 발견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순니바 전설은 1170년경 쓰인 "Acta sanctorum in Selio"에 기록되었으며, 노르웨이에서 숭배가 시작되어 베르겐으로 확산되었다. 순니바는 노르웨이에서 여성 이름으로도 사용되며, 다양한 문화 예술 작품과 현대 행사에서 그녀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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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니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딕 미술|후기 고딕]] 성 순니바 조각상
오스테볼 제단 조각상의 후기 고딕 성 순니바 조각상 (기원후 1520년경, 현재 베르겐 박물관 소장).
축일7월 8일
숭배 장소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참된 정교회
출생지아일랜드
사망지셀야 섬, 노르웨이
주요 성지셀예 수도원
수호뵈르그빈 교구; 베스트란

2. 전설

순니바와 동료들의 이야기는 1170년 직후 라틴어로 쓰인 성인 전기 ''Acta sanctorum in Selio''에 기록되어 있다. 오드르 스노라손은 그의 저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사가''에서 "알바니 사트르 오크 순니푸"(Albani þáttr ok Sunnifu|알바니 파트르 오크 순니푸non, Alban and Sunniva의 이야기) 또는 "셀윰만나 사트르"(Seljumanna þáttr|셀류만나 파트르non)라는 부분에서 이 자료를 활용했다.[1][2] 오드르의 원본은 라틴어였으나 현재는 고대 아이슬란드어 번역본만 남아 있으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편집된 ''올라프 트리그바손 엔 메스타''에도 포함되었다. 이후 편집된 기록 역시 ''Acta sanctorum in Selio''에 직접 기반을 두고 있으며, 12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3]

전설에 따르면, 순니바는 아일랜드 왕국의 공주였으나, 이교도 왕이 그녀와 강제로 결혼하려 하자 이를 피해 도망쳤다. 그녀는 오빠 알반(후대에 보르니와 마리타라는 두 자매가 추가됨)과 추종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노르웨이로 향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이교도인 야를 하콘 시구르다르손(재위 962–995)이 통치하고 있었고, 순니바 일행은 사람이 살지 않던 셀랴 섬과 섬에 정착했다.

그러나 본토의 노르웨이 주민들은 이 기독교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양을 훔친다고 의심하여 하콘 야를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하콘은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셀랴 섬으로 갔다. 위험을 감지한 순니바와 기독교인들은 섬의 동굴에 숨어, 자신들이 이교도들의 손에 죽임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동굴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는 이루어져 동굴이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아일랜드인들이 순교했다.

시간이 흘러, 토르드 에이길레이브손과 토르드 요룬손이라는 두 농부가 트론헤임으로 가던 중 셀랴 섬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밤에 섬 위에서 신비로운 빛을 목격했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하얀 해골을 발견했다. 트론헤임에 도착한 두 농부는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과 시구르드 주교에게 이 경험을 이야기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목격자의 증언도 이어지자, 왕과 주교는 직접 셀랴 섬으로 가서 조사했다. 그들은 동굴을 발굴하여 달콤한 향기가 나는 많은 뼈와 함께, 마치 잠든 것처럼 부패하지 않은 성 순니바의 시신을 발견했다. 발견된 유골들은 상자에 담아 수습했고, 순니바의 시신은 새로 지어진 나무 성당에 안치되었다.

2. 1. 순니바의 기적과 숭배

셀레 수도원 유적


베네딕토회 소속의 셀레 수도원은 1100년경 순니바와 일행이 순교한 장소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본래 성 알반에게 헌정되었는데,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통에서는 3세기 영국 성인 알반과 셀레에 있던 10세기 아일랜드 성인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다만, 원래 헌정 대상은 영국 성인이 아닌 동명의 독일 성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5] 순니바에 대한 지역적 숭배는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성 우르술라와 11,000명의 동정녀 숭배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지만,[4] 초기에는 그녀의 형제들에 대한 숭배보다 부차적이었다. 학자 레크달(2004)은 이 전설을 초기 중세 노르드-게일족과의 접촉, 특히 성 도난의 전설과 연결 짓는다. 성 도난의 전설은 617년 에이그 섬에서 그와 동료들이 이교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다.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순니바의 유물은 1170년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현재의 베르겐 대성당)로 옮겨졌고, 이를 계기로 순니바 숭배는 노르웨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170년 또는 1171년, 그리고 1198년에 베르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순니바의 유물함을 대성당 밖으로 옮겨 산드브루(Sandbru) 지역에 두자 화재의 확산이 멈췄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기적으로 여겨졌다. 순니바의 유물함은 1531년까지 베르겐 그리스도 교회에 보관되었으나, 종교 개혁 시기 교회가 파괴되면서 문켈리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536년 문켈리브 수도원마저 파괴되면서 유물함은 소실되었다.

우르네스 목조 교회에서 가져온 중세 시대 조각상(1200년경). 마돈나 또는 성 순니바로 해석된다. (현재 베르겐 박물관 소장)


성 알반, 순니바, 그리고 그 동료들의 축일은 '셀유만나메세'(Seljumannamessenno)로 알려져 있으며, 7월 8일이다. 또한 순니바의 유물이 베르겐으로 옮겨진 날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이 8월 31일 또는 9월 7일에 지켜진다.[6]

1924년 42세의 나이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노르웨이의 유명 작가 시그리드 운세트는 1926년 셀레 수도원 유적을 방문한 후 깊은 영감을 받아 순니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그녀는 친구인 화가 괴스타 아프 게이에르스탐에게 삽화를 의뢰하여 1928년에 소설을 완성했다. 이 책은 1932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운세트가 쓴 원본 노르웨이어 판은 2000년에야 출간되었다.

셀레 항구의 성 순니바 조각상


오늘날 노르웨이의 여러 기관이 순니바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몰데의 가톨릭 교회, 성 순니바 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 노르웨이 선박들, 베르겐의 성 순니바 기숙사, 베르겐의 순니바 완화 치료 센터(Sunniva senter for lindrende behandlingnno) 등이 대표적이다. 셀레 시는 1991년 순니바를 묘사한 문장을 공식 문장으로 채택했다.

2011년 9월 7일에는 베르겐 박물관에서 "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유물함"(Sankta Sunniva og det heilage skrinetnno)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를 위해 유물함이 재건되었으며, 성인의 유물 이전을 기념하는 행렬의 일부로 재건된 롱보트에 실려 박물관으로 옮겨졌다.[7]

3. 역사적 배경과 기록

성녀 순니바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중세 시대에 기록된 문헌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다. 이러한 기록들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순니바와 관련된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다양한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다.

순니바 전설의 가장 핵심적인 초기 기록으로는 12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라틴어 성인 전기인 ''Acta sanctorum in Selio''가 있다. 또한, 아이슬란드의 작가 오드르 스노라손은 이 ''Acta sanctorum in Selio''를 바탕으로 자신의 저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사가''에서 순니바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 사가의 원본은 라틴어로 쓰였으나 현재는 고대 아이슬란드어 번역본만 남아있다.

이러한 초기 기록 외에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시그리드 운세트의 순니바 관련 저작을 비롯하여, 셀랴의 성지와 순니바 숭배에 대한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가 꾸준히 발표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순니바 전설의 형성 과정과 중세 노르웨이 사회에서의 의미 등을 밝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3. 1. Acta sanctorum in Selio

''Acta sanctorum in Selio''는 성 알반과 순니바,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에 대한 라틴어 성인 전기이다. 1170년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오드르 스노라손은 그의 저서인 ''올라프 트리그바손 사가''에서 "알바니 사트르 오크 순니푸"(en: Alban and Sunniva의 이야기) 또는 "셀윰만나 사트르"로 알려진 부분에서 이 자료를 활용했다.[1][2] 오드르의 원본은 라틴어로 쓰였지만, 현재는 고대 아이슬란드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 이 전설은 이후 편집된 ''올라프 트리그바손 엔 메스타''에도 포함되었다. 이 이야기는 ''Acta sanctorum in Selio''에 직접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약간 더 늦게 쓰였지만, 여전히 12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3]

전설에 따르면, 순니바는 아일랜드 왕국의 상속자였지만, 그녀와 결혼하려는 이교도 왕 때문에 도망쳐야 했다. 그녀와 그녀의 오빠 알반,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노르웨이의 이교도 야를 하콘 시구르다르손 (재위 962–995) 통치 기간 동안 이전에 사람이 살지 않던 셀랴와 섬에 정착한다. 본토의 노르웨이 이웃들은 이 기독교인들이 양을 훔친다고 의심하여 야를 하콘에게 불만을 제기한다. 하콘은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셀랴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죽이려 한다. 기독교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고 섬의 동굴에 숨어 하콘과 그의 병사들에게 죽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굴이 무너지도록 신에게 기도한다. 동굴이 무너져 모든 아일랜드인들이 죽는다.

전설에는 두 명의 농부, 토르드 에이길레이브손과 토르드 요룬손이 트론헤임으로 가는 길에 밤을 보내기 위해 셀랴에 정박하여 섬 위에서 초자연적인 빛을 목격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표백된 해골을 발견하는 이야기가 있다. 트론헤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올라프 트리그바손과 시구르드 주교에게 그들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다른 목격자의 비슷한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증언 이후, 국왕과 주교는 셀랴로 가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많은 뼈를 발견했다. 그들은 동굴을 발굴하여 부패하지 않은 성 순니바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마치 성인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뼈는 수집되어 상자에 넣었고, 순니바의 시신은 나무 성당에 안치되었다.

3. 2. 올라프 트리그바손 사가

오드르 스노라손은 자신의 저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사가''에서 ''Acta sanctorum in Selio''를 중요한 자료로 활용했다.[1][2] ''Acta sanctorum in Selio''는 성 알반과 순니바, 그리고 그 동료들에 대한 라틴어 성인 전기로, 1170년 직후에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가에서 이 부분은 "알바니 사트르 오크 순니푸"(Alban and Sunniva의 이야기) 또는 "셀윰만나 사트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오드르가 처음 쓴 원본은 라틴어였으나, 현재는 고대 아이슬란드어로 번역된 판본만 전해진다. 이 전설은 이후 편집된 ''올라프 트리그바손 엔 메스타''에도 수록되었다. 이 이야기는 ''Acta sanctorum in Selio''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조금 더 늦은 시기인 12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3]

사가에 따르면, 순니바는 아일랜드 왕국의 왕위를 이을 공주였으나, 그녀와 강제로 결혼하려는 이교도 왕을 피해 고국을 떠나야 했다. 순니바는 오빠 알반(후대에 보르니와 마리타라는 두 자매가 추가됨)과 추종자들을 이끌고 노르웨이로 향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이교도 야를인 하콘 시구르다르손(재위 962–995)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순니바 일행은 사람이 살지 않던 셀랴 섬과 섬에 정착했다. 하지만 본토의 노르웨이 주민들은 이들 기독교인이 자신들의 양을 훔쳤다고 의심하여 하콘 야를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하콘은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셀랴 섬으로 갔다. 위협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섬의 동굴 속으로 피신했고, 하콘과 그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동굴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대로 동굴이 무너져 내려 순니바를 포함한 모든 아일랜드인이 그곳에서 순교했다.

시간이 흘러 두 농부, 토르드 에이길레이브손과 토르드 요룬손이 트론헤임으로 가던 중 밤을 보내기 위해 셀랴 섬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섬 위에서 신비로운 빛을 목격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하얗게 바랜 해골을 발견했다. 트론헤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과 시구르드 주교에게 자신들이 겪은 기이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다른 목격자에게서도 비슷한 증언이 나오자, 왕과 주교는 직접 셀랴 섬으로 가서 확인했다. 그곳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많은 뼈를 발견했고, 동굴을 발굴한 결과 마치 잠든 것처럼 부패하지 않은 성 순니바의 시신을 찾아냈다. 수습된 뼈는 상자에 담겼고, 순니바의 시신은 나무로 지은 성당에 정중히 안치되었다.

3. 3. 기타 문헌 및 기록

''Acta sanctorum in Selio''는 성 알반과 순니바,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에 대한 라틴어 성인 전기이다. 1170년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슬란드의 작가 오드르 스노라손은 그의 저서인 ''올라프 트리그바손 사가''에서 이 자료를 활용했다. 해당 부분은 "알바니 사트르 오크 순니푸"(en: Alban and Sunniva의 이야기) 또는 "셀윰만나 사트르"로 알려져 있다.[1][2] 오드르의 원본은 라틴어로 쓰였지만, 현재는 고대 아이슬란드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 이 전설은 이후 편집된 ''올라프 트리그바손 엔 메스타''에도 포함되었다. 이 이야기는 ''Acta sanctorum in Selio''에 직접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약간 더 늦게 쓰였지만, 여전히 12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3]

순니바 전설과 관련된 후대의 주요 문헌 및 연구는 다음과 같다.

  • 잉그바르 닐센, "셀랴의 옛 성지", in: 역사 논문, RJE 사르스 교수에게 헌정, 1905, 164–181쪽.
  • 시그리드 운세트, 마르타 내프(번역), 예스타 아프 예이에르스탐(삽화), ''순니바'', J. 뮐러(1932); ''성녀 순니바'' 셀리에: 스크립토리엣(2000).
  • 카토 패신저, "셀랴의 성지", in: 노르웨이 고대 유물 협회. 연감 1949.
  • 에카르트 자우서, "순니바", ''생물학적-서지적 교회 백과사전''(BBKL). 제18권, 바우츠, 헤르츠베르크 2001, Sp. 1356–1357.
  • 후프스, 요하네스, ''게르만 고대 유물학 실용 백과사전: 제22권''. 발터 데 그루이터(2003).
  • 요아힘 셰퍼, "셀랴의 순니바와 동료들", ''에큐메니컬 성인 사전''(2003, 2014) https://www.heiligenlexikon.de/BiographienS/Sunniva_von_Selje.html heiligenlexikon.de
  • 오드르 스노라손, 테오도어 M. 앤더슨(번역) ''올라프 트뤼그바손의 사가''. 코넬 대학교 출판사(2003).
  • 얀 에릭 레크달, "순니바 전설 - 노르웨이 해변 바위 사이의 아일랜드 유물?", in: 존 비다르 시구르드손; 마리트 미킹 & 마그누스 린달 (편집), ''북유럽의 종교 변화. 800-1200년 노르딕 문화와 유럽 문화 사이의 갈등''. 유니펍 출판사(2004), 159–196.
  • 리스베트 미카엘손, "지역성과 신화: 셀랴의 재성소화와 성녀 순니바 숭배". in: NUMEN, Vol. 52 (2005).
  • 토룬 셀베르그, "셀랴의 성스러운 장소의 현실화와 성녀 순니바 전설", ''Arv. 북유럽 민속 연감''(2005).
  • 알렉산더 오하라, "성자 만들기: 12세기 노르웨이의 성녀 순니바 전설", ''바이킹과 중세 스칸디나비아'', 5권 (2009), pp. 105–121. https://www.academia.edu/199816 원문 링크
  • 에스펜 스벤슨(편집), https://prbkn.files.wordpress.com/2011/09/st-sunniva-eng.pdf "성녀 순니바와 성스러운 사당", 영어 전시 카탈로그, 브뤼겐스 박물관(2011).

4. 셀레 수도원과 유적



성녀 순니바 숭배의 중심지였던 셀레 수도원은 셀레 섬에 위치하며, 현재 그 유적이 남아있다. 이 수도원은 1100년경 성 베네딕토회에 의해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성 알반에게 봉헌되었다.[5] 순니바에 대한 지역적 숭배는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며,[4] 이후 노르웨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4. 1. 셀레 수도원의 건립과 발전



베네딕토회 소속의 셀레 수도원은 1100년경 셀레 섬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본래 성 알반에게 봉헌되었는데, 여기서 성 알반은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통에서 셀레의 10세기 아일랜드 성인과 동일시된 3세기 영국 순교자를 가리킨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 헌정이 영국의 성인이 아닌 동명의 독일 성인에게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한다.[5]

성녀 순니바에 대한 지역적 숭배 역시 수도원 건립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숭배는 성 우르술라와 11,000명의 동정녀 전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으며,[4] 초기에는 순니바의 형제들에 대한 숭배에 비해 부차적인 성격을 띠었다. 학자 레크달(2004)은 순니바 전설이 초기 중세 노르드-게일족과의 접촉, 특히 성 도난의 전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성 도난 전설은 617년 에이그 섬에서 성인과 그의 동료들이 이교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다.

1170년,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순니바의 유물은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옛 베르겐 대성당)로 옮겨졌고, 이를 계기로 순니바 숭배는 노르웨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170년 또는 1171년, 그리고 1198년에 베르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순니바의 유물을 담은 성유물함을 대성당 밖 산드브루(Sandbru) 지역으로 옮기자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기적으로 여겨졌다. 순니바의 유물함은 1531년까지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에 보관되었으나, 종교 개혁의 혼란기에 교회가 파괴되면서 문켈리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536년 문켈리브 수도원마저 파괴되면서 성유물함은 결국 소실되었다.

성 알반, 성녀 순니바, 그리고 그 동료들을 기리는 축일은 Seljumannamesse|셀유만나메세nob라 불리며, 날짜는 7월 8일이다. 또한 순니바의 유물이 베르겐으로 옮겨진 것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8월 31일 또는 9월 7일)도 있다.[6]

1924년 42세의 나이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노르웨이의 유명 작가 시그리드 운세트는 1926년 셀레 수도원의 유적을 방문한 후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녀는 순니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집필에 착수하여 1928년에 완성했으며, 친구인 화가 괴스타 아프 게이에르스탐에게 15점의 수채화 삽화를 의뢰했다. 이 책은 1932년 독일어판으로 먼저 출간되었고, 운세트가 쓴 원본 노르웨이어 텍스트 판은 2000년에야 출판되었다.

오늘날 노르웨이의 여러 기관과 장소들이 순니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몰데의 가톨릭 교회, 성 순니바 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 노르웨이 선박들, 베르겐의 성 순니바 기숙사, 베르겐의 순니바 완화 치료 센터(Sunniva senter for lindrende behandling|순니바 센테르 포르 린드렌데 베한들링nob) 등이 그 예이다. 셀레 시는 1991년 순니바를 묘사한 문장을 공식 채택했다.

2011년 9월 7일에는 베르겐 박물관에서 "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신사"(Sankta Sunniva og det heilage skrinet|상크타 순니바 오 데 헤일라게 스크리네nob)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를 위해 순니바의 성유물함이 재건되었으며, 성인의 유물 이전을 기념하는 의미로 재현된 롱보트 행렬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7]

4. 2. 수도원 유적과 고고학적 발굴



베네딕토회 소속의 셀레 수도원은 1100년경 셀레 섬의 순니바 전설과 관련된 동굴 자리에 세워졌다. 수도원은 본래 성 알반에게 헌정되었는데,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통에서는 이 3세기 영국 성인을 셀레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10세기 아일랜드 성인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셀레 수도원이 처음 헌정된 알반 성인이 영국의 성인이 아닌 같은 이름의 독일 성인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5]

순니바에 대한 지역적 숭배 역시 수도원 설립 시기와 비슷한 1100년경에 시작되었다. 이는 성 우르술라와 11,000명의 동정녀 순교 전설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4] 초기에는 알반 성인 숭배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있었다. 일부 연구자(레크달, 2004)는 순니바 전설을 초기 중세 노르드-게일족과의 접촉, 특히 성 도난의 이야기와 연결 짓기도 한다. 성 도난 전설은 617년 에이그 섬에서 성인과 그의 동료들이 이교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다.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순니바의 유물은 1170년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옛 대성당)로 옮겨졌고, 이를 계기로 순니바 숭배는 노르웨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170년 또는 1171년, 그리고 1198년에 베르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순니바의 유물을 대성당 밖 산드브루(Sandbru) 지역으로 옮기자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기적으로 여겨졌다. 순니바의 유물이 안치된 성유물함은 1531년까지 베르겐 그리스도 교회에 있었으나, 교회가 종교 개혁의 혼란기에 파괴되면서 문켈리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536년 문켈리브 수도원마저 파괴되면서 성유물함은 결국 소실되었다.

성 알반, 성 순니바, 그리고 그 동료들을 기리는 축일은 Seljumannamesse|셀유만나메세no라 불리며, 날짜는 7월 8일이다. 순니바는 1170년 베르겐으로 유물이 옮겨진 것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8월 31일 또는 9월 7일)도 가지고 있다.[6]

1924년 42세의 나이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노르웨이의 유명 작가 시그리드 운세트는 1926년 셀레 수도원 유적을 방문한 뒤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녀는 순니바 전설을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하여 1928년에 완성했고, 친구인 화가 괴스타 아프 게이에르스탐에게 15점의 수채화 삽화를 의뢰했다. 이 책은 1932년 독일에서 먼저 출판되었으며, 운세트가 쓴 원본 노르웨이어 판은 2000년에야 출간되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수많은 기관과 장소들이 순니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몰데의 가톨릭 교회, 성 순니바 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 다수의 노르웨이 선박, 베르겐의 성 순니바 기숙사, 베르겐의 순니바 완화 치료 센터(Sunniva senter for lindrende behandling|순니바 센테르 포르 린드레네 베한들링no) 등이 그 예이다. 셀레 시는 1991년 순니바를 묘사한 문장을 공식 채택했다.

2011년 9월 7일, 베르겐 박물관에서는 Sankta Sunniva og det heilage skrinet|상크타 순니바 오 데 헤일라게 스크리네no(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신사)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를 위해 성유물함이 재건되었으며, 과거 성인의 유물을 옮겼던 역사를 기념하여 재현된 롱보트를 이용한 행렬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7]

5. 순니바 숭배와 문화적 영향

성 순니바에 대한 숭배는 노르웨이의 종교 및 문화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셀레 수도원이 1100년경 순니바와 동료들이 순교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세워지면서 지역적인 숭배가 시작되었다.[4][5] 초기에는 성 알반이나 순니바의 형제 숭배에 비해 부차적이었으나, 1170년 순니바의 유물이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로 옮겨지면서 노르웨이 전역으로 숭배가 확산되었다. 특히 베르겐에서 발생한 화재를 순니바의 유물이 막았다는 기적 이야기는 그녀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비록 노르웨이 종교 개혁 시기에 유물이 담긴 신사는 파괴되어 사라졌지만, 순니바에 대한 기억과 숭배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순니바와 관련된 축일인 '셀유만나메세'(no)는 매년 7월 8일에 기념되며, 유물 이전 기념일(8월 31일 또는 9월 7일)도 별도로 지켜진다.[6]

순니바는 노르웨이 문화 여러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시그리드 운세트는 1926년 셀레 수도원 유적 방문 후 영감을 받아 순니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집필했으며, 이는 그녀의 신앙심과 노르웨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또한, 노르웨이의 수많은 기관들이 순니바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몰데의 가톨릭 교회, 성 순니바 학교를 포함한 여러 학교, 선박, 베르겐의 기숙사 및 완화 치료 센터(no) 등이 대표적이다. 셀레 시는 1991년 순니바를 묘사한 문장을 공식 채택하여 지역 정체성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순니바는 문화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1년에는 베르겐 박물관에서 순니바와 그녀의 신사를 주제로 한 "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신사"(no) 전시회가 열렸으며, 재건된 신사와 롱보트 행렬을 통해 그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7] 이처럼 순니바 숭배는 노르웨이의 종교적 유산을 넘어 문학, 교육, 지역 상징 등 다방면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1. 노르웨이에서의 순니바 숭배



성 베네딕토회 소속의 셀레 수도원은 순니바와 동료들이 순교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에 1100년경 세워졌다. 처음에는 성 알반에게 봉헌되었는데, 이 성 알반은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통에서 셀레의 10세기 아일랜드 성인과 합쳐진 3세기 영국 성인이다. 다만, 원래 봉헌 대상은 영국의 성인이 아닌 같은 이름의 독일 성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5] 순니바에 대한 지역적 숭배는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성 우르술라와 11,000명의 동정녀 숭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4] 초기에는 순니바의 형제 숭배보다 중요도가 낮았다. 일부 연구자(레크달, 2004)는 이 전설이 초기 중세 노르드-게일족과의 접촉, 특히 성 도난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성 도난 전설은 617년 에이그 섬에서 성인과 그의 형제들이 이교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다.

1170년,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순니바의 유물은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옛 베르겐 대성당)로 옮겨졌고, 이를 계기로 순니바 숭배는 노르웨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170/71년과 1198년 베르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순니바의 유물을 대성당 밖 산드브루(no) 지역으로 옮기자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기적으로 여겨졌다. 순니바의 유물이 담긴 신사(성유물함)는 1531년까지 베르겐의 그리스도 교회에 있었으나, 노르웨이 종교 개혁의 혼란 속에서 교회가 파괴되면서 문켈리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1536년 문켈리브 수도원마저 파괴되면서 신사는 결국 사라졌다.

성 알반, 성 순니바,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을 기리는 축일은 '셀유만나메세'(no)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7월 8일에 열린다. 또한, 1170년 순니바의 유물이 베르겐으로 옮겨진 것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이 8월 31일 또는 9월 7일에 지켜진다.[6]

노르웨이의 유명 작가 시그리드 운세트는 1924년 42세의 나이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1926년 셀레 수도원 유적을 방문하고 순니바 전설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집필했다. 그녀는 친구인 화가 괴스타 아프 게이에르스탐에게 삽화를 의뢰하여 1928년에 완성했다. 이 책은 1932년 독일어로 먼저 출판되었고, 운세트가 쓴 원본 노르웨이어 판은 2000년에야 출간되었다.

오늘날 노르웨이의 여러 기관이 순니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몰데의 가톨릭 교회, 성 순니바 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 노르웨이 선박들, 베르겐의 성 순니바 기숙사, 베르겐의 순니바 완화 치료 센터(no) 등이 대표적이다. 셀레 시는 1991년 순니바를 묘사한 문장을 공식 채택했다.

2011년 9월 7일, 베르겐 박물관에서는 "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신사"(no)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를 위해 순니바의 신사가 재건되었으며, 성인의 유물 이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재건된 롱보트를 포함한 행렬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7]

5. 2. 순니바 이름의 유래와 사용

''순니바''는 노르웨이에서 여성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 이름은 ''Acta sanctorum in Selio''에서 유래한 라틴어 형태이다. 옛 아이슬란드어 형태는 ''Sunnifa''(필사본 표기 ''Sunniuæ'')이다. 이 모든 형태는 고대 영어 이름 ''Sunngifu'', ''Sunnigifu''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태양'을 의미하는 ''sunne''와 '선물'을 의미하는 ''gifu''가 합쳐진 것이다. 이 고대 영어 이름은 요크셔Domesday Book에 ''Sonneuæ''로 기록되어 있다.[8]

노르웨이 스타드 시의 문장에 묘사된 성 순니바


이 이름의 현대 형태에는 노르웨이에서 사용되는 ''Synnøve'', ''Synøve'', ''Sønneva'', ''Sønneve'', ''Sunneva'', ''Synneva'', ''Synneve'' 등이 있다. 이 중 ''Synnøve''가 가장 널리 사용되며, 스웨덴에서는 ''Synnöve'' 형태로 쓰인다. 2015년 기준으로 노르웨이 여성 5,021명이 ''Synnøve''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름의 인기는 20세기 초에 급증하여 1920년대에는 신생 여아 이름의 약 0.7%를 차지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인기는 꾸준히 감소하여 2000년대에는 0.1% 미만으로 떨어졌다.

한편, 원래 이름인 ''Sunniva''와 약칭 ''Synne''가 최근 가장 인기 있는 형태가 되었다. ''Sunniva''는 중세 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1900년부터 1970년까지는 드물게 사용되었다. ''Synne''는 196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두 이름 모두 1970년대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2000년경에 정점에 달했다. 그해 ''Sunniva''는 신생 여아 이름 순위 33위, ''Synne''는 36위를 기록했으며, 각각 여아 이름의 약 0.6%를 차지했다. 이후 두 이름의 사용 빈도는 약 0.2%로 감소했다.[9]

5. 3. 문화 예술 작품 속의 순니바



성 순니바는 다양한 문화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우르네스 목조 교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중세 시대(1200년경)의 조각상은 왕관을 쓴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인데, 이는 마돈나 또는 성 순니바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며 현재 베르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셀레 항구에도 성 순니바를 기리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노르웨이의 유명 작가이자 1924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그리드 운세트는 순니바 전설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녀는 1926년 셀레 수도원 유적을 방문한 후, 순니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 집필에 착수하여 1928년에 완성했다. 이 소설은 친구인 화가 괴스타 아프 게이에르스탐이 그린 15점의 수채화 삽화와 함께 1932년 독일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운세트가 쓴 노르웨이어 원본은 2000년에 이르러서야 출간되었다.

셀레 시는 1991년, 지역의 수호성인인 순니바를 형상화한 문장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1년 9월 7일에는 베르겐 박물관에서 Sankta Sunniva og det heilage skrinet|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신사nb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순니바의 유물을 담았던 신사를 재건하여 선보였으며, 과거 유물 이전을 기념하는 의미로 재현된 롱보트 행렬을 통해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행사도 진행되었다.[7]

5. 4. 현대의 순니바 관련 행사

노르웨이의 작가 시그리드 운세트는 1924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1926년 셀레 수도원 유적을 방문하였다. 이 경험은 그녀에게 영감을 주어 순니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집필로 이어졌고, 1928년에 완성되었다. 운세트는 친구 괴스타 아프 게이에르스탐에게 15개의 수채화 삽화를 의뢰하기도 했다. 이 책은 1932년 독일어로 먼저 출판되었으며, 운세트의 원본 노르웨이어 텍스트가 담긴 판은 2000년에야 출판되었다.

2011년 9월 7일에는 베르겐 박물관에서 "성 순니바와 성스러운 신사"(Sankta Sunniva og det heilage skrinet|상크타 순니바 오그 데 헤일라게 스크리네no)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순니바의 신사를 재건하여 선보였으며, 성인의 유물이 베르겐으로 옮겨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재건된 롱보트를 포함한 행렬이 박물관까지 이어졌다.[7]

참조

[1] 서적 The legends of the saints in Old Norse-Icelandic pros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 문서 Hoops 2003
[3] 논문 Folktale and thattr: The case of Rognvald and Raud https://scholarworks[...] 1980
[4] 서적 Draumkvedet, og tekster fra norrøn middelalder
[5] 논문 From saint's life to saga: The fatal walk of Alfred Ætheling, Saint Amphibalus, and the Viking bróðir http://www.vsnrweb-p[...] 1998-2001
[6] 문서 Schäfer 2003
[7] 뉴스 Sunnivaskrinet http://www.efremforl[...] Vårt Land 2011-09-08
[8] 서적 The Pre-Conquest Personal Names of Domesday Book Almqvist & Wiksell
[9] 웹사이트 Statistisk Sentralbyrå http://www.ssb.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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