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팔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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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천 팔마비는 고려 시대 최석이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청덕비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최석이 1281년 승평부사로 재직하며 관례로 받던 말 8필을 거절하고 망아지까지 돌려보낸 데서 유래하여, 이후 여러 차례 훼손과 중건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진다. 1617년 이수광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2021년 보물 제212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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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팔마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국가 | 대한민국 전라남도 |
| 유형 | 대한민국의 보물 |
| 지정 번호 | 2122 |
| 지정일 | 2021년 3월 25일 |
|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로 95 (영동) |
| 관리 | 순천시 |
| 문화재청 ID | 21,00760000,36 |
2. 역사
비의 전면에는 팔마비八馬碑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팔마비의 건립내역을 적은 내용이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되어 내용 판독이 힘들다. 이 비의 건립 배경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고려사》 권34의 열전 최석에 기록된 관계 사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고려 최석이 1281년 승평부사(昇平府使)로 재직할 당시, 관례로 받던 말 8필을 거절하고 망아지까지 돌려보내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것에서 유래한다.[3][4]
《고려사》에는 최석이 승평부(현 순천) 태수로 부임했을 때, 전임 태수들이 퇴임 시 말 8필을 받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하다며 고을 사람들이 주는 말을 받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최석은 집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냈고, 고을 사람들이 받지 않자, 자신이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탐욕이라며 망아지까지 모두 돌려보냈다. 이에 증마(贈馬)의 폐단이 끊어졌고, 고을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불렀다.[3][4]
이 비는 한국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5]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재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3][5]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는[6]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3][5]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이다.[7]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16.5cm이다. 전면에는 액자처럼 도드라지게 구획을 만들어 글씨를 새겼는데, 이 액의 상부는 귀접이[8] 형태로 하였다. 액의 크기는 높이 약 140cm, 폭은 약 63cm로서 그 내부에 ‘八馬碑(팔마비)’ 석 자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cm로 상당히 크다. 비좌의[9] 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76cm, 높이는 33.5cm이며, 비를 세우기 위해 파 넣은 홈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8cm이다. 비좌의 상면에는 비신을 받치기 위한 호형의[10] 2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각각 약 2.5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11] 비신,[12] 대좌를[13]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5]
순천 팔마비는 건립된 이후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3월 25일 보물 2122호로 지정되었다.[5]
2. 1. 건립 배경 및 유래
고려 최석이 1281년 승평부사(昇平府使)로 재직할 당시, 관례로 받던 말 8필을 거절하고 망아지까지 돌려보내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것에서 유래한다.[3][4]《고려사》에는 최석이 승평부(현 순천) 태수로 부임했을 때, 전임 태수들이 퇴임 시 말 8필을 받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하다며 고을 사람들이 주는 말을 받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최석은 집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냈고, 고을 사람들이 받지 않자, 자신이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탐욕이라며 망아지까지 모두 돌려보냈다. 이에 증마(贈馬)의 폐단이 끊어졌고, 고을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불렀다.[3][4]
이 비는 한국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5] 조선시대에 들어 정유재란으로 훼손되었으나, 1617년 부사 이수광에 의해 다시 건립되었다.[3][5]
2. 2. 중건 및 보존
순천 팔마비는 고려 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정유재란으로 완전히 훼손되었다.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3][5]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는[6]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3][5]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이다.[7]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16.5cm이다. 전면에는 액자처럼 도드라지게 구획을 만들어 글씨를 새겼는데, 이 액의 상부는 귀접이[8] 형태로 하였다. 액의 크기는 높이 약 140cm, 폭은 약 63cm로서 그 내부에 ‘八馬碑(팔마비)’ 석 자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cm로 상당히 크다. 비좌의[9] 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76cm, 높이는 33.5cm이며, 비를 세우기 위해 파 넣은 홈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8cm이다. 비좌의 상면에는 비신을 받치기 위한 호형의[10] 2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각각 약 2.5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11] 비신,[12] 대좌를[13]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5]
순천 팔마비는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21년 3월 25일 보물 2122호로 지정되었다.[5]
3. 형태 및 특징
3. 1. 형태
3. 2. 특징
4. 문화재적 가치
5. 의의 및 영향
참조
[1]
웹인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순천팔마비 (順天八馬碑)
http://www.heritage.[...]
[2]
웹인용
순천 청렴의 상징 '팔마비(八馬碑)' 국가보물로 지정
https://www.ajunews.[...]
2021-03-24
[3]
웹인용
순천팔마비
http://suncheon.gran[...]
[4]
웹인용
청렴 상징 ‘순천 팔마비’ 역사 오류 바로 잡는다
https://www.hankooki[...]
2017-09-05
[5]
웹인용
「공주 갑사 대웅전」·「의성 대곡사 범종루」·「순천 팔마비」 보물로 지정
https://www.cha.go.k[...]
2021-03-23
[6]
문서
음기(陰記)는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을 말한다.
[7]
문서
비갈형(碑碣形)이란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모양으로 만들어 비(碑)와 그런 것을 얹지 않고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인 갈(碣)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8]
문서
귀접이란 물건의 귀를 깍아 버리거나 접어서 붙인 것을 말한다.
[9]
문서
비좌(碑座)란 비석의 몸체를 세우는 받침을 말한다.
[10]
문서
호형(弧形)은 활 같이 굽은 모양을 말한다.
[11]
문서
옥개석(屋蓋石)은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를 덮는 돌을 말한다.
[12]
문서
비신(碑身)은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를 말한다.
[13]
문서
대좌(臺座)는 불상을 놓는 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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