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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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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산 해전은 1904년 8월 14일, 러일 전쟁 중 울산 남방 해역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일본 제2함대와 교전하여 장갑순양함 류리크를 잃고, 로시야와 그로모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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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울산 해전
전쟁러일 전쟁
울산 해전에서 침몰하는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 (1904년 당시의 선전용 엽서)
울산 해전에서 침몰하는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 (1904년 당시의 선전용 엽서)
날짜1904년 8월 14일
장소울산 앞바다, 동해 (35)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지휘관
지휘관 1가미무라 히코노조
지휘관 2카를 에센
병력 규모
병력 1장갑 순양함 4척, 방호 순양함 2척
병력 2장갑 순양함 3척
피해 규모
피해 1전사 44명, 부상 71명, 순양함 1척 경미한 손상
피해 2전사 343명, 부상 652명, 장갑 순양함 1척 침몰, 장갑 순양함 2척 손상

2. 배경

러일 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주력은 뤼순의 포트 아서에 봉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러시아 해군 기지는 데와 시게토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장갑순양함 로시야, 류리크, 그로모보이로 구성된 강력한 블라디보스토크 독립 순양함 전대가 있었고, 이들은 통상파괴전을 반복했다.

1904년 6월 15일, 육군 병사를 수송 중이던 "히타치마루", "이즈미마루"가 격침되고 "사도마루"가 대파되는 히타치마루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스치겐지로 중령 이하 근위 후비 보병 제1연대 등 천여 명이 전사했다.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도쿄 만 연안에 출현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짙은 안개'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놓쳤다고 보고하자, 한 의원이 "농무(濃霧)를 거꾸로 읽으면 무능"이라고 야유했다.[18] 분노한 민중들은 가미무라의 집에 돌을 던졌고, 히코노조를 '로탐'(러시아 스파이)이라고 비난했다.

8월 10일, 뤼순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 정보는 즈푸로 향한 구축함 레시체리누이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해졌고, 8월 11일 저녁 예센 소장이 출격 명령을 받았다.[19] 그러나 이미 뤼순 함대는 황해 해전에서 패배한 후였다.[19]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뤼순 함대와 만나지 못해도 부산 아래로 남하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20]

한편, 일본 측은 황해 해전 이후 자오저우 만에 들어간 러시아 순양함 '노비크'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남하할 것에 대비해 제2전대가 서쪽 물길을, 제4전대가 동쪽 물길을 경계하고 있었다.[22]

2. 1. 러일전쟁 발발과 러시아 함대의 상황

러일 전쟁 초기, 블라디보스토크를 모항으로 하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뤼순의 주력 함대와는 다른 전략을 취했다. 이들은 장갑순양함 '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를 중심으로 활발한 통상파괴전을 전개했다.[1]

일본 제국 해군은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끄는 제2함대를 파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추적했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특히 1904년 6월 15일에는 히타치마루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육군 병사 수송선 '히타치마루', '이즈미마루'가 격침되고, '사도마루'가 대파되어 1,0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도쿄 만 연안까지 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통상파괴전은 일본 제국의회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가미무라 중장이 짙은 안개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놓쳤다고 보고하자, 한 의원은 "농무(濃霧)를 거꾸로 읽으면 무능"이라고 야유하며 비판했다.[18] 분노한 민중들은 가미무라의 집에 돌을 던지고, 그를 '로탐'(러시아 스파이)이라고 비난했다.

1904년 8월 10일, 뤼순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 소식은 즈푸로 향한 구축함 레시체리누이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전달되었고, 8월 11일 저녁 예센 소장은 뤼순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격 명령을 받았다.[19] 그러나 이미 뤼순 함대는 황해 해전에서 패배한 뒤였다.[19] 예센 함대는 출격 1시간 30분 후 뤼순 함대의 탈출 실패 소식을 들었지만, 추격하던 수뢰정이 따라잡지 못해 조선 해협으로 계속 항해했다.[20] 예센은 뤼순 함대와 만나지 못하면 부산 아래로는 남하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20]

한편, 일본 측은 황해 해전 이후 자오저우 만으로 도피한 러시아 순양함 '노비크'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제2전대가 서쪽 물길을, 제4전대가 동쪽 물길을 경계하고 있었다.[22]

2. 2. 일본 해군의 대응과 가미무라 히코노조

러일 전쟁 초기,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뤼순의 주력 함대와 별도로 활발한 통상파괴전을 전개했다. 이에 일본군은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2함대를 파견하여 대응했다.

제2함대는 장갑순양함 '야쿠모', '아사마' 등을 주력으로 편성되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포착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04년 6월 15일에는 히타치마루 사건이 발생하여 육군 병사 수송선이 격침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도쿄 만 연안까지 출현하면서 일본 내 여론은 악화되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가미무라 중장이 '짙은 안개'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놓쳤다고 보고하자, 한 의원이 "농무(濃霧)를 거꾸로 읽으면 무능"이라고 야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8] 이는 가미무라 중장에 대한 비판 여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격분한 민중들은 가미무라의 집에 돌을 던지며 그를 '로탐'(러시아 스파이)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은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가미무라 히코노조의 군사적 판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의 "무능" 논란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1904년 8월, 가미무라 제독 휘하의 일본 제2함대는 4척의 장갑순양함 (이즈모, 아즈마, 토키와, 이와테)과 2척의 방호순양함(나니와, 다카치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8월 14일 새벽, 일본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던 러시아 함대를 발견하고 전투를 개시했다.

3. 해전의 전개

8월 14일 새벽,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부산 인근에서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1904년 8월 11일 오후, 포트 아서에 주둔한 제1태평양 전대에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이 일본 해상 봉쇄를 뚫고 나가기로 결정했다는 전보가 왔고, 이에 따라 예센 제독은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 전대를 출격시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8월 5일 늦게, 비트게프트로부터 포트 아서와 함께 죽겠다는 전보가 도착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들은 작전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출항 지연으로 인해 쓰시마 해협의 결정적인 통과 시점에서 제1태평양 전대를 지원할 희망은 거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 전대의 군함들은 4nmi 간격으로 나란히 정렬하여 시속 14kn로 남쪽으로 향하며, 매시간 포트 아서 전대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까지 포트 아서 전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 전대가 부산에 접근하자, 예센은 함장들에게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고, 전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려보냈다.

가미무라 제독 휘하의 일본 제2함대는 4척의 장갑순양함 (이즈모, 아즈마, 토키와, 이와테)과 2척의 방호순양함 (나니와, 다카치호)으로 구성되었다. 일본 전대는 전날 밤 어둠 속에서 반대 방향으로 항해하며 러시아 전대와 매우 가까이 지나갔지만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상황은 일본 측에 이상적이었다. 맑은 여름날 새벽이었고, 적은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일본 전대는 러시아와 멀리 떨어진 기지 사이에 있었다.

''이즈모''


''이와테''


''토키와''


''아즈마''


''나니와''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양측 함대의 조우

가미무라가 이끄는 일본 제2함대는 4척의 장갑순양함 (이즈모, 아즈마, 토키와, 이와테)과 2척의 방호순양함 (나니와, 다카치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날 밤 서로 반대 방향으로 항해하다가 러시아 함대를 거의 스쳐 지나갔지만, 서로를 인지하지는 못했다.

1904년 8월 14일 새벽,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부산 인근에서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때 4척의 일본 장갑순양함을 발견했다.

1904년 8월 14일 오전 4시 25분, 울산 남쪽을 지나던 일본 제2전대는 좌현 전방에서 등불을 발견했고, 4시 50분에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임을 확인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 역시 4시 30분에 북쪽에서 일본 함대를 발견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남쪽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남쪽에서 북상하는 "나니와"를 발견하고 전투가 불가피함을 깨달아 북북서로 방향을 틀었다. 이에 일본 제2전대도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전 5시 23분, 양 함대 간 거리가 8,400m로 좁혀지자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5시 36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함대 후미에 있던 류리크가 집중 포화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류리크 함장 예브게니 트루소프 대령이 전사했다. 6시, 그로모보이로시야는 뱃머리를 류리크와 함께 북서쪽으로 돌렸고, 일본 제2전대도 북서쪽으로 약간 서쪽으로 변침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6시 30분, 류리크는 조타 장치 손상으로 대열에서 이탈했다.

3. 2. 류리크의 분전과 격침

8월 14일 오전 4시 25분, 울산광역시 남쪽을 지나던 가미무라가 이끄는 일본 제2전대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발견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남쪽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남쪽에서 접근해 오는 일본 해군 나니와를 발견하고 전투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 북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5시 23분, 양 함대는 8400m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류리크


포격전 중,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함대 후미에 있던 류리크는 일본 함대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함장 예브게니 트루소프 대령이 전사하고, 6시 30분에는 조타 장치 손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15] 다른 러시아 순양함들이 류리크를 엄호하려 했지만, 피해가 커지자 예센 소장은 류리크 구원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우류 소장이 이끄는 나니와다카치호는 8시 42분에 류리크에 포격을 시작했다. 류리크는 어뢰 발사, 충각 공격 시도 등 저항을 계속했지만, 10시경 침묵했다. 지휘를 맡았던 콘스탄틴 이바노프-트리나트사티 대위는 자침을 명령했고, 류리크는 침몰했다.

일본 해군은 류리크 침몰 후 구조 작업을 실시하여 626명을 구조했다. 류리크는 짧은 시간 안에 대부분의 장교를 잃고 심각한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대포를 계속 발사하며 일본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정 러시아 해군 기록에 따르면, 류리크는 함미에 포탄을 맞아 조타 장치가 파괴되어 최대 속도가 크게 감소했다. 예센 소장은 일본 장갑순양함 4척을 분산시키고, 류리크가 나니와와 다카치호에 맞설 수 있기를 바랐지만, 류리크의 상태는 매우 나빴다. 결국, 이바노프 소위(지휘관 중 13번째)는 류리크에 자침 명령을 내렸다.

3. 3. 그로모보이와 로시야의 후퇴

8월 14일 오전 6시, 그로모보이로시야는 류리크를 엄호하기 위해 일본 제2전대와 교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로시야의 피해가 커지고, 류리크도 구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자, 7시 54분경 그로모보이로시야는 북쪽으로 도주했다.[15] 8시 8분경, 다시 제2전대와 교전했지만, 예센은 류리크 구원을 포기하고 8시 22분에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16]

가미무라그로모보이로시야를 추격했지만, 이즈모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고 10시 4분에 추격을 중단했다.[16] 당시 소음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어려워, 참모는 칠판에 '남은 탄약 없음'이라고 써서 전달했고, 이를 본 가미무라는 분한 마음에 칠판을 바닥에 던지고 짓밟았다는 일화가 있다.[16] 그러나 실제로는 탄약고의 탄약은 줄었지만, 대부분 탄약 통로에 남아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제2전대의 추격 중단으로 그로모보이로시야는 이틀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예센의 보고에 따르면 두 함선의 인적 피해는 전사 140명, 부상 319명이었던 반면, 제2전대의 피해는 전사 45명, 부상 55명이었다.[15]

4. 해전의 결과

울산 해전의 결과,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가 침몰하고 다른 함선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 러시아 순양함 '로시야'와 '그로모보이'는 선체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갑판이 뚫려 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05년에 수리를 마치고 다시 출항했으나, '그로모보이'는 또다시 어뢰 공격을 받아야 했다.[17]

태평양에서 별도로 행동하던 러시아 보조순양함 '레나'는 황해 해전과 울산 해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까지 도주하다 억류되었다.

일본 함대의 사령관이었던 히코노조는 대파되어 침몰하면서도 포격을 멈추지 않는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를 보고 "적이지만 훌륭하다"라며 극찬하고, 퇴함한 승무원들의 구조와 보호를 명령했다.[1]

4. 1. 러시아 함대의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 장갑순양함 '로시야'와 '그로모보이'는 선체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갑판이 뚫려 파공이 발생했다. 이로 인한 수리는 물자와 노동력 부족으로 지지부진했다. 1905년에 수리를 마친 두 척은 1905년 4월 25일에 일본 열도 근해로 군사 임무를 띠고 출항했다. 그러나 '그로모보이'는 5월 11일에 어뢰를 맞고 다시 수리를 받게 되었다.[17]

이러한 피해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의 활동은 부진해졌고, 대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에 소속되어 태평양에서 별도로 행동하던 보조순양함 '레나'는 황해 해전, 울산 해전 등의 소식을 듣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까지 도주하다가 억류되었다.

해전에서 러시아 측의 사상자가 매우 컸던 이유는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일본 포탄의 폭발 장약은 폭발 시 포탄을 매우 많은 파편으로 만드는 시모세 화약(트리니트로페놀)이었다. 둘째, 러시아 함선에는 승무원을 위한 방어 포 방패가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시각에서 볼 때, '류리크'는 예센 제독의 결정이 아닌, 승무원(자 crew)에 의해 자침되었다. '류리크'는 비장갑 함미에 포탄을 맞아 조타 장치가 파괴되어, 조타기가 위로 올라간 상태로 고정되었다. 그래서 '류리크'의 최대 속도는 크게 감소했고, 각 프로펠러의 회전수를 줄여 조타를 해야 했다. 예센은 4척의 일본 장갑순양함을 모두 성공적으로 분산시켰고, '류리크'가 '나니와'와 '다카치호'에 맞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류리크'의 상태는 매우 나빴다. 트루소프 1급 함장과 모든 선임 장교들이 사망했다. 결국, 이바노프 소위(지휘관 중 13번째)는 '류리크'에 자침 명령을 내렸다.

'로시야'와 '그로모보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가미무라의 순양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제정 러시아 해군(IRN)의 선원들은, 여전히 포화를 받으면서도, 주포 203mm를 수리하고 계속 교전할 수 있었다. 러시아 순양함의 화력 증가와 탄약 부족에 직면한 가미무라 제독은 추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1905년 4월 26일 촬영된 장갑순양함 로시야와 일본의 아이야마루

4. 2. 일본 해군의 전략적 승리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 러시아 장갑순양함 2척은 선체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갑판에 구멍(파공)이 생겨 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자와 노동력 부족으로 수리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1905년에 수리를 마친 두 척은 1905년 4월 25일 일본 열도 근해에 군사 임무를 띠고 출항했으나, '그르모보이'는 5월 11일 어뢰 공격을 받아 다시 수리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러시아 함대의 활동 부진은 일본군이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에서 별도로 행동하던 보조순양함 '레나'는 황해 해전과 울산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까지 도주하다가 억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 해군이 러일전쟁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울산 해전은 일본 해군이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러시아 함대의 활동을 억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3. 전쟁 포로와 인도적 대우

히코노조 가미무라는 '배를 탄 장군'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맹장이었지만, 대파되어 침몰하면서도 여전히 포격을 멈추지 않는 러시아 순양함 류리크를 보고 "적이지만, 훌륭하다"라고 극찬하면서, 퇴함한 승무원의 구조와 보호를 명령했다.[1]

5. 해전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의의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이전 출력을 제공해주시면 수정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6. 전투 서열

함선 서열은 함대 내에서의 위치에 따른다.

울산 해전에 참전한 양측의 함선과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울산 해전 전투 서열
러시아 제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
카를 예센 소장이 지휘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장갑순양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3]가미무라 히코노조 부제독이 지휘한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24]


6. 1. 러시아 제국 해군

카를 예센 소장이 지휘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장갑순양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3]

함선명피해사상자
로시야 (기함)대파전사 48명, 부상 165명
그로모보이대파전사 91명, 부상 182명
류리크침몰전사 204명, 부상 305명


6. 2. 일본 제국 해군

가미무라 히코노조 부제독이 지휘한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24]

함대전대함종함명피해사상자
제2함대제2전대장갑순양함이즈모 (기함)경미한 손상, 20발 피격전사 2명, 부상 17명
아즈마경미한 손상, 10발 피격부상 8명
도키와경미한 손상, 소수 피격부상 3명
이와테경미한 손상, 10발 이상 피격전사 40명, 부상 47명
제4전대방호순양함나니와피격 횟수 불명
다카치호피격 횟수 불명[4]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Russia Against Japan
[3] 서적 Korabli Russko-Yaponskoy voyny. Chast 1. Rossiyskiy flot
[4] 서적 Korabli Russko-Yaponskoy voyny. Chast 2. Yaponskiy flot
[5] 서적 大日本分県地図併地名総覧 昭和十二年 昭和礼文社 1989-12
[6] 기타
[7] 웹사이트 蔚山 http://dictionary.go[...] 小学館 デジタル大辞泉
[8] 서적 大辞林 三省堂 1988
[9] 서적 コンサイス外国地名事典 第3版 三省堂 1998
[10] 서적 海戦からみた日露戦争 角川oneテーマ21신서 2010
[11] 웹사이트 China, Korea & Japan at War, 1592–1598: Eyewitness Accounts https://books.google[...]
[12] 웹사이트 蔚 https://dictionary.g[...] 日本漢字能力検定協会 漢字ペディア
[13] 웹사이트 蔚 https://kotobank.jp/[...] 小学館 中日辞典 第3版
[14] 서적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15] 서적 参戦二十提督 日露大海戦を語る
[16] 서적 別冊宝島 激闘!日露戦争 宝島社刊 2003-12
[17] 간행물 日露戦争時の海軍軍楽隊 : 海軍軍楽長・吉本光蔵の明治37・38年日記から http://id.nii.ac.jp/[...] 東京藝術大学音楽学部 2014
[18] 기타
[19] 서적 日露海戦新史
[20] 서적 日露旅順海戦史
[21] 서적 日露旅順海戦史
[22] 서적 日露海戦新史
[23] 서적 Korabli Russko-Yaponskoy voyny. Chast 1. Rossiyskiy flot
[24] 서적 Korabli Russko-Yaponskoy voyny. Chast 2. Yaponskiy f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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