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미셴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파벨 미셴코는 러시아의 군인으로, 1853년 다게스탄에서 태어나 1917년 사망했다. 그는 1871년 파블로프스크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전쟁에 참전했으며, 러일 전쟁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하여 훈장을 받았고, 투르키스탄 총독, 돈 카자크 아타만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단장으로 복무했으나 2월 혁명 이후 해임되었고, 볼셰비키에 의해 자택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적색 테러 피해자 - 알렉산드르 콜차크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러시아 제국의 해군 장교이자 북극 탐험가로, 러시아 혁명 이후 백군을 이끌고 볼셰비키에 대항했으나 처형되었으며, 군사적 업적과 가혹한 통치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 적색 테러 피해자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러시아 제국의 대공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며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이었으나, 평민 여성과의 결혼으로 황실의 분노를 샀고 러시아 혁명 이후 살해당했다. - 러시아의 러일 전쟁 참전 군인 - 라브르 코르닐로프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러시아 제국 군인으로,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러시아 혁명 당시 쿠데타 시도 실패 후 백군에 가담하여 의용군을 지휘하다 전사했고, 그의 사건은 러시아 혁명의 주요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 러시아의 러일 전쟁 참전 군인 - 아나톨리 스테셀
아나톨리 스테셀은 러시아 제국 장군으로 러일 전쟁 당시 뤼순 요새 사령관을 지냈으며,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의화단 운동에도 참전했으나 뤼순 요새 항복 후 러시아에서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일본에서는 초기 방어 성공을 인정받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 러시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라브르 코르닐로프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러시아 제국 군인으로,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러시아 혁명 당시 쿠데타 시도 실패 후 백군에 가담하여 의용군을 지휘하다 전사했고, 그의 사건은 러시아 혁명의 주요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 러시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은 핀란드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핀란드 독립에 기여하고 섭정과 대통령을 역임하며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을 이끌었으며 핀란드 원수 칭호를 받았다.
파벨 미셴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파벨 이바노비치 미셴코 |
로마자 표기 | Pavel Ivanovich Mishchenko |
우크라이나어 표기 | Павло Іванович Міщенко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853년 1월 22일 |
출생지 | 테미르-한-슈라, 다게스탄 |
사망일 | 1918년 |
사망지 | 테미르-한-슈라, 다게스탄 |
군 경력 | |
소속 | 러시아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71년 - 1917년 |
최종 계급 | 포병대장 |
주요 참전 | |
전투 |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의화단의 난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853년 다게스탄의 테미르한슈라에서 태어났다. 1871년 포병 장교로 제1파블롭스크(파벨)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제38 포병 여단에 배속되었다. 1873년 히바 칸국 원정과 1877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제2 척탄 포병 여단의 중대를 지휘했다. 1899년에는 동청 철도 경비 대장 보좌관으로 만주에 있었다.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자 동청 철도 남부 과장으로 활약했고, 성 게오르기 훈장(4등)을 수여받았다. 1901년 6월부터 1902년 3월까지 관동주의 제39 보병사단 제1여단장을 역임했다.
1903년 3월부터 미셴코는 러시아군 혼성 코사크 바이칼 여단장이 되었고, 러일 전쟁에 종군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 기간에는 사하 전투, 산데푸 전투에서 활약하면서, 러시아군 최일선의 기병 지휘관에게 명성을 얻었다.[4] 1905년 2월 17일부터 혼성 우랄, 바이칼, 코자크 사단장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30일 극동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놓인다. 그 해에 성 게오르기 골드 소드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06년 9월부터 제11 코카시안 군단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08년 5월부터 1909년 3월까지, 투르키스탄 총독,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4] 1910년에 장군으로 승진되었고, 1911년부터 12년까지 돈 카자크의 아타만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에 군단장을 대신하여 제2 코카시안 군단을 지휘했다. 1915년 3월 남서 전선의 제31군단장이 되었다. 2월 혁명 후 고급지휘관 숙청 시 군단장에서 파면되었고, 1917년 4월 질병을 이유로 퇴역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 후에도 항상 계급장과 훈장을 지니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미셴코의 집에 침입하여 강제로 계급장과 훈장을 박탈해 가자 그는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4]
2. 1. 출생 및 교육
다게스탄의 테미르-한-슈라 출신이다. 1871년, 제1 파블로프(파벨)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여단에 배속되었다. 1873년 히바 칸국 원정과 1877년 러-투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제2 척탄 포병 여단의 중대를 지휘했다.2. 2. 초기 군사 작전 참여
미셴코는 1853년 다게스탄 오블라스트의 코카서스 총독부에 있는 러시아 요새 정착지 테미르-칸-슈라에서 태어났다. 1871년 파블로프스크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임관하여 제38 포병 여단에 배속되었다. 그는 1873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에 참여했다.그는 이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과 미하일 스코벨레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정복에 참여했다. 1899년부터 미셴코는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에 중국 동청 철도의 보안 부관으로 배속되었다. 의화단 운동 당시 동청 철도 남부 과장으로 활약하여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01년 6월부터 1902년 3월까지 관동주의 제39 보병 사단 제1 여단장을 지냈다.
1903년부터 미셴코는 자바이칼 코사크 여단의 사령관이었다. 1904-1905년 러일 전쟁 동안 그는 많은 전투에서 활약한 별도의 동바이칼 코사크 여단을 지휘했다. 처음에는 그의 부대가 한국에 배치되어 일본 제1군의 상륙과 만주로의 진격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 후 미셴코는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그는 압록강 전투의 측면에서 작은 역할을 했으며, 해성 전투, 득리쓰 전투에서도 러시아 방어군의 일원이었다. 요양 전투와 사하 전투에서 그는 러시아 후퇴의 후위 부대를 담당하는 러시아 기병 부대를 지휘했다. 1904년 10월 중장으로 진급했고, 사하 전투, 흑구대 전투에서 활약하여 러시아군 최고의 기병 지휘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1905년 2월 17일부터 우랄 자바이칼 혼성 코사크 사단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8월 30일, 극동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놓였다. 금제 무기를 수여받았다. 1904년 12월 새로운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05년 1월 6일 6,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우장에 비축된 일본 보급품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규모 기습을 감행했다. 이 임무는 재앙이었고, 부대는 12일 후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돌아왔다. 그는 사데푸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1905년 3월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복귀했지만 봉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 3. 의화단 운동 진압
미셴코는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중국 동청 철도의 보안 부관으로 배속되어 있었으며, 동청 철도 남부 과장으로 활약했다. 이 공로로 그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성 게오르기 훈장 (4급)을 받았다. 1901년 6월부터 1902년 3월까지는 관동주의 제39 보병 사단 제1 여단장을 지냈다.3. 러일 전쟁
다게스탄의 테미르-한-슈라 출신. 1871년, 제1 파블로프(파벨)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여단에 배속되었다. 1873년 히바 칸국 원정과 1877년 러-투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제2 척탄 포병 여단의 중대를 지휘했다. 1899년, 동청 철도 경비대장 보좌관을 역임했다. 의화단 운동 당시 동청 철도 남부 과장으로 활약하여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01년 6월부터 1902년 3월까지 관동주의 제39 보병 사단 제1 여단장을 지냈다.
1903년 3월부터 독립 자카스피 코사크 여단장을 맡아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사하 전투, 흑구대 전투에서 활약하여 러시아군 최고의 기병 지휘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4] 1905년 2월 17일부터 우랄 자바이칼 혼성 코사크 사단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8월 30일, 극동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놓였다. 금제 무기를 수여받았다.
그의 부대는 한국에 배치되어 일본 제1군의 상륙과 만주로의 진격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몇 차례 소규모 교전 후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1] 압록강 전투에서 작은 역할을 했고,[2] 해성 전투, 득리쓰 전투에서도 러시아 방어군의 일원이었다. 요양 전투와 사하 전투에서 그는 러시아 후퇴의 후위 부대를 담당하는 러시아 기병 부대를 지휘했다.[1][3] 1904년 10월 중장으로 진급했고, 1904년 12월에는 새로운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05년 1월 6일, 6,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우장에 비축된 일본 보급품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규모 기습을 감행했으나, 이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고 부대는 12일 후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돌아왔다.[1] 사데푸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1905년 3월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복귀했지만 봉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3. 1. 참전 경위
파벨 미셴코는 1853년 다게스탄 오블라스트의 코카서스 총독부에 있는 러시아 요새 정착지 테미르-칸-슈라에서 태어났다.[1] 1871년 파블로프스크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임관하여 제38 포병 여단에 배속되었다.[1] 그는 1873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에 참여했다.[1] 이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과 미하일 스코벨레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정복에 참여했다. 1899년부터 미셴코는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에 중국 동청 철도의 보안 부관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의화단 운동 동안 싸웠고,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여 성 게오르기 훈장 (4급)을 받았다.3. 2. 주요 전투 활약
미셴코는 러일 전쟁 동안 많은 전투에서 활약한 별도의 동바이칼 코사크 여단을 지휘했다.[1] 그의 부대는 한국에 배치되어 일본 제1군의 상륙과 만주로의 진격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몇 차례 소규모 교전 후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1] 압록강 전투에서 작은 역할을 했고,[2] 해성 전투, 득리쓰 전투에서도 러시아 방어군의 일원이었다. 요양 전투와 사하 전투에서 그는 러시아 후퇴의 후위 부대를 담당하는 러시아 기병 부대를 지휘했다.[1][3] 1904년 10월 중장으로 진급했고, 1904년 12월에는 새로운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05년 1월 6일, 6,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우장에 비축된 일본 보급품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규모 기습을 감행했으나, 이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고 부대는 12일 후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돌아왔다.[1] 사데푸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1905년 3월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복귀했지만 봉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사하 전투와 흑구대 전투에서 활약하여 러시아군 최고의 기병 지휘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1905년 2월 17일부터 우랄 자바이칼 혼성 코사크 사단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8월 30일, 극동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놓였다. 금제 무기를 수여받았다.3. 3. 잉커우 습격 작전
1904년 12월, 미셴코는 새로운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05년 1월 6일 6,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우장에 비축된 일본 보급품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규모 기습을 감행했다.[1] 이 작전은 러일 전쟁 기간 중 러시아군이 수행한 주요 작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임무는 재앙이었고, 부대는 12일 후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돌아왔다.[1]4. 러일 전쟁 이후
1903년 3월부터 독립 자카스피 코사크 여단장을 맡아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사하 전투, 흑구대 전투에서 활약하여 러시아군 최고의 기병 지휘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4] 1905년 2월 17일부터 우랄 자바이칼 혼성 코사크 사단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8월 30일, 극동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놓였다. 금제 무기를 수여받았다.
1906년 9월부터 제11 카프카스 군단장을 지냈다. 1908년 5월부터 1909년 3월까지 투르키스탄 총독,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4] 1910년에 장군으로 승진했고, 1911년부터 12년까지 돈 카자크의 아타만이 되었다.
4. 1. 투르키스탄 총독 재임
1908년 5월 2일부터 1909년 3월 17일까지 미셴코는 투르케스탄 군관구의 사령관이자 투르케스탄 총독이었다. 그는 또한 세미레치예 코사크 군의 수장이기도 했다. 1906년 9월부터 제11 카프카스 군단장을 지냈다. 1908년 5월부터 1909년 3월까지 투르케스탄 총독, 투르케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4.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파벨 미셴코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단장 V. 일마이오프를 대신하여 제2 카프카스 군단을 지휘했다. 1915년 3월에는 남서부 전선의 제31 군단장을 역임했다.2월 혁명 이후, 새 정부는 친군주제주의자로 알려진 인물들을 숙청했는데, 미셴코 역시 이때 군단장에서 해임되었다. 1917년 4월, 질병을 이유로 퇴역하였다.
5. 혁명과 죽음
1853년 다게스탄의 테미르한슈라(현재의 부이낙스크)에서 태어났다. 1871년 파블로프스크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임관하여 제38 포병 여단에 배속되었다. 1873년 히바 칸국 원정과 1877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제2 척탄 포병 여단의 중대를 지휘했다. 1899년에는 동청 철도 경비 대장 보좌관으로 만주에 있었다.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자 동청 철도 남부 과장으로 활약했고, 성 게오르기 훈장(4등)을 수여받았다. 1901년 6월부터 1902년 3월까지 관동주의 제39 보병사단 제1여단장을 역임했다.
1903년 3월부터 미셴코는 러시아군 혼성 코사크 바이칼 여단장이 되었고, 러일 전쟁에 종군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 기간에는 사하 전투, 산데푸 전투에서 활약하면서, 러시아군 최일선의 기병 지휘관에게 명성을 얻었다.[4] 1905년 2월 17일부터 혼성 우랄, 바이칼, 코자크 사단장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30일 극동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놓인다. 그 해에 성 게오르기 골드 소드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06년 9월부터 제11 코카시안 군단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08년 5월부터 1909년 3월까지, 투르키스탄 총독,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4] 1910년에 장군으로 승진되었고, 1911년부터 12년까지 돈 카자크의 아타만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에 군단장을 대신하여 제2 코카시안 군단을 지휘했다. 1915년 3월 남서 전선의 제31군단장이 되었다. 2월 혁명 후 고급지휘관 숙청 시 군단장에서 파면되었고, 1917년 4월 질병을 이유로 퇴역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 후에도 항상 계급장과 훈장을 지니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미셴코의 집에 침입하여 강제로 계급장과 훈장을 박탈해 가자 그는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4]
5. 1. 2월 혁명과 숙청
2월 혁명 이후, 미셴코는 친군주제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에 대한 새 정부의 숙청 대상이 되어 러시아 임시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는 군 복무에서 물러나 고향인 다게스탄 테미르-칸-슈라로 돌아갔지만, 제복과 휘장을 계속 착용했다. 10월 혁명 이후, 지역 볼셰비키 당국은 그에게 훈장과 견장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그가 저항하자 폭행을 당했다. 미셴코는 결국 자살했거나 볼셰비키에 의해 자택에서 살해되었다.5. 2. 볼셰비키 혁명과 죽음
2월 혁명 이후, 미셴코는 친군주제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에 대한 새 정부의 숙청의 일환으로 새로운 러시아 임시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군 복무에서 물러났다. 그는 고향인 다게스탄의 테미르-칸-슈라로 돌아가 제복과 휘장을 계속 착용했다. 10월 혁명 이후, 지역 볼셰비키 당국은 그에게 훈장과 견장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그가 저항하자 폭행을 당했다. 미셴코는 볼셰비키에 의해 자택에서 살해되었거나, 혹은 그들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권총 자살했다.6. 영전
파벨 미셴코는 여러 훈장을 수여받았다. 1873년에는 성 안나 훈장 3등급을 수여받았고, 검과 활이 포함되었다. 1881년에는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을 수여받았으며, 이 역시 검과 활이 포함되었다. 1887년에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을 받았다. 1893년에는 성 안나 훈장 2등급을 수여받았다.
1901년에는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과 성 블라디미르 훈장 3등급을 받았다. 1904년에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1등급을 수여받았다. 1905년에는 용기에 대한 금검과 성 안나 훈장 1등급을 받았으며, 후자는 검과 활이 포함되었다.
1908년에는 성 블라디미르 훈장 2등급을 수여받았다. 1911년과 1915년에는 백수리 훈장을 받았으며, 두 번 모두 검이 포함되었다. 1914년에는 성 알렉산더 넵스키 훈장을 받았고, 검이 포함되었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Russia's War with Japan
https://www.amazon.c[...]
Weidenfeld & Nicolson
2020-02-06
[3]
서적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Russia's War with Japan
https://www.amazon.c[...]
Weidenfeld & Nicolson
2020-02-06
[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