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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봉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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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순항 봉쇄 작전은 러일 전쟁 중 일본이 뤼순 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대를 봉쇄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시도한 작전이다. 1904년 2월부터 5월까지 진행되었으나, 러시아군의 탐조등과 해안 포대에 막혀 세 번 모두 실패했다. 작전 실패로 일본 해군은 상당한 인명 및 장비 피해를 입었고, 뤼순 함대를 완전히 봉쇄하는 데 실패하여 육군이 뤼순 요새를 공략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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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봉쇄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여순항 봉쇄 작전
러시아 선박을 격침시키는 일본 전함
러시아 선박을 격침시키는 일본 전함
작전 개요
분쟁여순항 봉쇄 작전
관련 전쟁러일 전쟁
여순항 해전
날짜1904년 2월 8일 ~ 2월 9일
장소만주 뤼순커우 구와 주변 해역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러시아 제국 지휘관오스카 빅토로비치 스탁
스테판 마카로프
일본 제국 지휘관도고 헤이하치로
데와 시게토
병력 규모
러시아 제국 병력노급전함 7척
방호순양함 5척
일본 제국 병력노급전함 6척
장갑순양함 9척
사상자 규모
러시아 제국 사상자150명 전사
전함 7척 대파
일본 제국 사상자90명 전사
전함 약간 손상

2. 배경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상정하고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주 전장이 될 만주 지역에 육군 병력을 보급하는 것은 해상 수송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해상에서의 우위 확보가 중요했다. 당시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던 발트 함대가 여순 함대(태평양 함대)와 합류할 경우, 일본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1]

아키야마 사네유키미국 유학 시절 미국-스페인 전쟁을 참관하며 해상 봉쇄 작전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다.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함대를 이용한 근접 봉쇄와 산티아고 데 쿠바 해전을 관전하며 해상 전력에 대한 이론을 연구했다. 아키야마는 봉쇄가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2등 전함 진원을 이용하여 만구를 봉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1] 아리마 료키쓰 중좌는 1903년, 뤼순항의 지형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낡은 선박에 밸러스트를 가득 채워 침몰시켜 폭 273m의 뤼순 항 입구를 봉쇄하는 작전을 군령부에 제출했다.[1]

연합 함대 사령부는 초기에는 봉쇄 작전을 보류했으나, 여순 함대가 항구 내에 머무르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어뢰정을 이용한 기습과 기뢰를 이용한 공격과 함께 봉쇄 작전을 검토하게 되었다.[1]

3. 작전 경과

제2차 여순항 봉쇄 작전을 그린 삽화. 러시아군은 서치라이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1904년 2월 18일, 도고는 3차에 걸쳐 여순항 봉쇄 작전 발동을 명령했다.

제1차 봉쇄 작전은 1904년 2월 24일에 실행되었다. 5척의 노후 선박과 77명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봉쇄 선단이 여순항 근처의 노철산(라오톄산) 아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러시아 군의 해안 포대와 탐조등에 의해 발각되어 공격을 받았다. 호고쿠마루는 전함 레트비잔으로부터 포격을 받으면서도 거의 만구의 등대 아래에 자침할 수 있었지만, 다른 봉쇄선은 만 입구 앞에서 자침하여 봉쇄는 실패했다.

제2차 봉쇄 작전은 1904년 3월 27일 새벽에 결행되었다. 4척의 봉쇄 선박을 투입하여 실행되었지만, 또 다시 러시아 군에 포착되어 실패했다. 이 작전에서는 봉쇄선 후쿠이마루를 지휘한 히로세 다케오 소령(이후 중령 특진)이 전사했다.

제3차 봉쇄 작전은 1904년 5월 2일 밤, 12척의 봉쇄선을 동원한 최대 규모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총지휘관 하야시 미츠오 중좌는 작전 중지를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지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봉쇄선 8척과 수용대가 그대로 뤼순항으로 돌입했다. 이들 봉쇄선은 결국 연안 포대의 공격을 받아 만 입구에서 침몰했다.

3. 1. 제1차 봉쇄 작전 (1904년 2월 24일)

2월 18일, 도고는 3차에 걸쳐 진행된 여순항 봉쇄 작전 발동을 명령했다. 5척의 노후 선박과 77명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봉쇄 선단이 조직되었다. 2월 23일 23시 50분, 경계와 습격을 임무로 하는 제5구축대(사령: 마노 이와타로 중좌, 가게로, 시라누이, 무라쿠모, 유우기리)와 봉쇄 선단은 여순항 근처의 노철산(라오톄산) 아래까지 진출했다.

2월 24일 0시 30분부터 달이 사라지고, 황금산(황진산), 성두산(청터우산), 백은산(바이인산)의 러시아 포대에서 탐조등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제5구축대는 탐조등을 피하면서 노철산 동쪽 연안을 따라 천천히 서진했지만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1시 30분에 탐조등이 꺼진 틈을 타서 정찰을 한 결과, 구축함 2척과 함종 불명의 한 척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했다.

습격을 가한 후 어뢰정을 이용하여 항로 정찰을 했지만, 탐조등에 의해 발각되어 포격을 받았다. 육상 포대가 포격을 중지하고 항로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노철산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5척의 봉쇄 선단은 4시 15분부터 덴신마루(톈진마루), 호고쿠마루(호국마루), 인초마루(인천마루), 다케아키마루(무양마루), 부슈마루(무주마루) 순으로 돌입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의 해안 포대에서 탐조등과 격렬한 포격을 받아 봉쇄선단의 위치 파악도 곤란해졌다. 호고쿠마루는 전함 레트비잔으로부터 포격을 받으면서도 거의 만구의 등대 아래에 자침할 수 있었지만, 다른 봉쇄선은 만 입구 앞에서 자침하여 봉쇄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다.

어뢰정 부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봉쇄선을 탈출한 돌입대를 태웠다. 덴신마루, 호고쿠마루, 다케아키마루의 승무원은 제14정 부대에 태워졌지만, 제9정대 엔케쓰(燕欠)는 공격을 했기 때문에 인초마루와 부슈마루의 승무원을 태우지 못했다. 24일 동안 인초마루와 부슈마루의 승무원을 태우지 못했기 때문에, 도고 장관은 25일에 지하야와 다쓰다를 뤼순에 파견해 수색을 계속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한편, 두 배의 승무원들은 포화를 피해 숨어서 해상을 떠다니다가 우연히 만나서 합류를 하게 된다. 그들은 정크선 등을 사용하여 청나라의 연대에 도착했다. 미즈노 고키치 영사와 모리 요시타로 중령과 연락하는데 성공하면서 귀환을 했다. 또한, 이 때 해외 언론이 수송선을 격침한 것을 보도하면서, 육군이 숨기고 있던 봉쇄 작전이 표면화되었다.

이 작전에서는 기관병 1명이 사망했다.[5]

3. 2. 제2차 봉쇄 작전 (1904년 3월 27일)



제2차 봉쇄 작전은 3월 27일 새벽에 결행되었다. 4척의 봉쇄 선박을 투입하여 실행되었지만, 또 다시 러시아 군에 포착되어 실패했다. 이 작전에서는 봉쇄선 후쿠이마루를 지휘한 히로세 다케오 소령(이후 중령 특진)이 전사하고 나중에 군신으로 추앙받았다. 스기노 마고시치 상등병조[6](사후, 병조장[7]), 신호 병조, 기간병 등 총 4명이 전사했다.[5]

3. 3. 제3차 봉쇄 작전 (1904년 5월 2일)



5월 2일 밤, 일본 해군은 12척의 봉쇄선을 동원한 최대 규모의 제3차 봉쇄 작전을 실행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총지휘관 하야시 미츠오 중좌는 작전 중지를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지 명령이 후속 함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봉쇄선 8척과 수용대가 그대로 뤼순항으로 돌입했다. 이들 봉쇄선은 결국 연안 포대의 공격을 받아 만 입구에서 침몰했다.

이 작전에서 노무라 벤 소좌, 무카이 키쿠타로 소좌, 시라이시 요시에 소좌, 유아사 타케지로 소좌, 타카야나기 나오오 소좌, 우치다 히로 대위, 이토야마 사다지 대위, 야마모토 친조 대위, 카사하라 사부로 대위, 타카하시 시즈카 대위, 테라시마 사다타로 기관소감[4], 야노 켄이치 기관소감, 이와세 타다시 기관소감, 시미즈 기관소감, 아오키 코지 대기관사 등 다수의 준사관, 하사관,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1]

4. 작전 실패 원인

일본군이 뤼순항 봉쇄 작전에 실패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정보 부족: 일본군은 뤼순항의 지형과 러시아군의 방어 태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특히 뤼순항의 수심, 해저 지형, 조류 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침몰선을 정확한 위치에 가라앉히기 어려웠다.[1]
  • 러시아군의 효과적인 방어: 러시아군은 탐조등과 해안 포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일본군의 봉쇄 시도를 저지했다. 탐조등은 야간에 일본 함정을 탐지하는 데 사용되었고, 해안 포대는 일본 함정에 포격을 가하여 접근을 막았다.[1]
  • 일본군 봉쇄선의 취약성: 일본군의 봉쇄선은 노후한 상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공격에 취약했다. 러시아군의 포격과 어뢰 공격으로 인해 봉쇄선이 쉽게 파괴되거나 침몰했다.[1]
  • 악천후 및 지휘 계통 혼선: 3차 작전에서는 악천후와 지휘 계통의 혼선으로 인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강풍과 높은 파도로 인해 침몰선이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고, 통신 두절로 인해 함정 간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1]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본군의 뤼순항 봉쇄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5. 결과 및 영향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관은 '제3차 봉쇄 작전이 근본적으로 성공했다'라고 대본영에 보고했지만, 뤼순 함대는 여전히 출입항이 가능한 상태였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1,000톤 이상 상선 197척 중 10%에 해당하는 21척이 투입된 이 봉쇄 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를 파견하여 연합 함대를 뤼순에서 떼어 놓으려 했고, 발틱 함대의 회항을 결정했다.

일본 해군은 뤼순 함대 무력화에 집중했지만, 거듭된 봉쇄 작전 실패와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의 통상파괴 작전에 대처해야 했다. 6척의 전함 중 하쓰세와 야시마5월 15일에 기뢰로 잃고 더욱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2] 발트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없자, 일본 해군은 육군에 뤼순 요새 공략을 요청했다. 육군은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3군을 편성하여 뤼순 공방전을 시작했고, 뤼순 전투는 육상전으로 전환되었다.[3]

뤼순 공방전에서 일본 육군은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지만 뤼순을 공략했고, 항구에 정박한 함선은 킹스턴 밸브를 열어 자침하여 뤼순 함대는 완전히 전멸했다.[5]

6. 작전 참가 전력

2월 18일, 도고는 3차에 걸쳐 진행될 여순항 봉쇄 작전 발동을 명령했다. 봉쇄 작전에는 노후 선박과 지원병들이 동원되었다.

제1차 봉쇄 작전에 참가한 봉쇄선과 승무원은 다음과 같다.

선박명지휘관승무원 수
덴신마루(天津丸)아리마 료키쓰 중좌16명
호고쿠마루(報国丸)히로세 다케오 소좌15명
인초마루(仁川丸)사이토 시치고로 대위15명
다케아키마루(武揚丸)마사키 요시모토 대위13명
부슈마루(武州丸)도리사키 야스조 대위13명



제2차 봉쇄 작전에는 다음의 봉쇄선과 승무원이 참가하였다.

선박명지휘관승무원 수
지요마루아리마 료키치 중좌16명
후쿠이마루히로세 다케오 소좌16명
야히코마루사이토 시치고로 대위14명
요네야마마루마사키 요시모토 대위14명



제3차 봉쇄 작전은 5월 2일 밤에 실시되었는데, 12척의 봉쇄선이 동원되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총지휘관 하야시 미츠오 중좌는 작전 중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중지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8척의 봉쇄선이 그대로 돌입, 연안 포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6. 1. 제1차 봉쇄 작전

2월 18일, 도고는 3차에 걸쳐 진행될 여순항(뤼순커우) 봉쇄 및 항내 간접 사격 작전 발동을 명령했다. 5척의 노후 선박과 77명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봉쇄 선단이 조직되었다. 2월 23일 23시 50분, 경계와 습격을 임무로 하는 제5구축대(사령: 마노이와 오타로 중좌, 가케로, 시라누이, 무라쿠모, 유우기리)와 봉쇄 선단은 여순항 근처의 노철산(라오톄산) 아래까지 진출했다.[5]

2월 24일 0시 30분부터 달이 사라지자, 황금산(황진산), 성두산(청터우산), 백은산(바이인산)의 러시아 포대에서 탐조등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제5구축대는 탐조등을 피해 노철산 동쪽 연안을 따라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했지만 결국 발각되었다. 1시 30분에 탐조등이 꺼진 틈을 타 정찰한 결과, 구축함 2척과 함종 불명의 1척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했다.[5]

습격 후 어뢰정을 이용해 항로 정찰을 했지만, 탐조등에 발각되어 포격을 받았다. 육상 포대가 포격을 중지하고 항로가 확인되자, 노철산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5척의 봉쇄 선단은 4시 15분부터 덴신마루(天津丸), 호고쿠마루(報国丸), 인초마루(仁川丸), 다케아키마루(武揚丸), 부슈마루(武州丸) 순으로 돌입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의 해안 포대는 탐조등과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고, 봉쇄선단의 위치 파악조차 곤란해졌다. 호고쿠마루는 전함 레트비잔으로부터 포격을 받으면서도 거의 만구의 등대 아래에 자침할 수 있었지만, 다른 봉쇄선은 만 입구 앞에서 자침하여 봉쇄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5]

어뢰정 부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봉쇄선을 탈출한 돌입대를 태웠다. 덴신마루, 호고쿠마루, 다케아키마루의 승무원은 제14정 부대에 태워졌지만, 제9정대 엔케쓰(燕欠)는 공격을 했기 때문에 인초마루와 부슈마루의 승무원을 태우지 못했다. 2월 24일 동안 인초마루와 부슈마루의 승무원을 태우지 못했기 때문에, 도고 장관은 2월 25일에 지하야와 다쓰다를 뤼순에 파견해 수색을 계속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5]

한편, 두 배의 승무원들은 포화를 피해 숨어서 해상을 떠다니다가 우연히 만나 합류했다. 그들은 정크선 등을 사용하여 청나라의 연대에 도착했다. 미즈노 고키치 영사와 모리요 시타로 중령과 연락하는데 성공하면서 귀환했다. 또한, 이 때 해외 언론이 수송선을 격침한 것을 보도하면서, 육군이 숨기고 있던 봉쇄 작전이 표면화되었다.[5]

이 작전에서 기관병 1명이 사망했다.[5]

제1차 봉쇄 작전에 참가한 봉쇄선과 승무원은 다음과 같다.

선박명지휘관승무원 수
덴신마루(天津丸)아리마 료키쓰 중좌16명
호고쿠마루(報国丸)히로세 다케오 소좌15명
인초마루(仁川丸)사이토 시치고로 대위15명
다케아키마루(武揚丸)마사키 요시모토 대위13명
부슈마루(武州丸)도리사키 야스조 대위13명


6. 2. 제2차 봉쇄 작전

제2차 봉쇄 작전은 3월 27일 새벽에 결행되었다. 봉쇄선 4척을 투입하여 실행되었지만, 또다시 러시아군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 작전에서 봉쇄선 후쿠이마루를 지휘한 히로세 다케오 소좌(후에 중좌로 특진)가 전사하여, 후에 군신으로 추앙받았다. 스기노 마고시치 상등병조[6](사후, 병조장[7]), 신호병조, 기관병 등 총 4명도 전사했다.[5]

배 이름지휘관승조원 수
지요마루아리마 료키치 중좌16명
후쿠이마루히로세 다케오 소좌16명
야히코마루사이토 시치고로 대위14명
요네야마마루마사키 요시모토 대위14명


6. 3. 제3차 봉쇄 작전

5월 2일 밤, 제3차 봉쇄 작전이 실시되었다. 12척의 봉쇄선을 동원한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총지휘관인 하야시 미츠오 중좌는 작전 중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중지 명령이 후속 함대에 전달되지 않아 봉쇄선 8척 및 수용대가 그대로 돌입했다. 결국 이들 봉쇄선도 연안 포대에 의해 저지당해 만 입구에서 침몰했다.

이때 노무라 벤 소좌, 무카이 키쿠타로 소좌, 시라이시 요시에 소좌, 유아사 타케지로 소좌, 타카야나기 나오오 소좌, 우치다 히로 대위, 이토야마 사다지 대위, 야마모토 친조 대위, 카사하라 사부로 대위, 타카하시 시즈카 대위, 테라시마 사다타로 기관소감[4], 야노 켄이치 기관소감, 이와세 타다시 기관소감, 시미즈 기관소감, 아오키 코지 대기관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준사관, 하사관 및 병사들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되었다.[1]

참조

[1] 아카이브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레퍼런스 코드 C09050849600
[2] 문서 당시 해군 상등병조는 준사관. 일본군 계급 참조
[3] 문서 당시 해군 병조장은 해군 소위에 해당하는 장교
[4] 문서 당시 해군기관소감은 소좌에 해당하는 기관장
[5] 아카이브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레퍼런스 코드 C09050849600
[6] 문서 당시 해군 상등병조는 준장교였다. 일본군 계급 참조
[7] 문서 당시 해군 병조장은 해군 소위에 해당하는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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