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즈 미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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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즈 미치쓰라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보신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주요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그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보신 전쟁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육군 소장, 중장, 대장을 거쳐 원수까지 승진했다. 유럽과 청나라에 파견되어 군사 제도를 연구하기도 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고, 남작, 자작,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에 기여한 측면과 함께, 근대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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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즈 미치쓰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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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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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노즈 미치쓰라 (野津 道貫) |
출생 | 1840년 12월 17일 |
출생지 | 가고시마, 사쓰마번, 일본 |
사망 | 1908년 10월 18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61년–1906년 |
최종 계급 | 원수 육군대장 [[File:元帥徽章.svg|25px]] [[File:帝國陸軍の階級―肩章―大将.svg|38px]] |
주요 참전 | 보신 전쟁 사쓰마 반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
훈장 | |
훈장 내역 | 금치훈장 (1등) 대훈위 국화장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File:JPN Daikun'i kikkasho BAR.svg|38px]] [[File:JPN Toka-sho BAR.svg|38px]] |
작위 | |
작위 | 후작 |
2. 생애
가고시마에서 사무라이 신분으로 낮은 계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고시마성 아래 고라이마치의 하급 번사 노즈 시즈카의 셋째 아들 이었다.[1] 가명은 시치지, 휘는 미치쓰라였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그는, 사쓰마 번의 저명한 교관인 야쿠마루 가네요시 밑에서 일본 검술을 배웠다.[1] 보신 전쟁에는 6번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쟁, 니혼마츠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
가고시마 출신 노즈 미치쓰라는 보신 전쟁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1] 전쟁 이후, 1871년 3월 육군 소좌로 임명되었고, 1872년 8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874년 1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근위 참모장 직무 대행을 맡았다.[1] 1876년 7월부터 10월까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1]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1877년 2월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군 제2여단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같은 해 5월부터 8월까지는 분고국 지휘관을 맡아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1]
1884년 2월, 노즈 미치쓰라는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를 동반하여 여러 유럽 국가의 군사 시스템을 조사하기 위해 1년간의 유럽 순방에 나섰다.[1] 1884년 7월에는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화족 작위 시스템에서 남작(''단샤쿠'')의 작위를 받았다.[1] 1885년 2월부터 4월까지 노즈는 청나라 중국의 베이징에 무관으로 파견되었다.[1]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노즈 미치쓰라는 제5사단장에 임명되어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 이후 제1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만주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다.[1]
1904년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 제4군 사령관을 맡아 봉천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 특히, 봉천 회전에서 노즈가 이끄는 제4군은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여 회전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1884년 7월 7일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화족 작위 시스템에서 남작(''단샤쿠'')의 작위를 받았다.[1] 청일 전쟁 종전 후인 1895년 8월 5일 자작(''시샤쿠'')으로 승작되었으며,[23] 러일 전쟁 이후인 1907년 9월 21일에는 후작(''고샤쿠'')으로 승작되었다.[27]
1882년 12월 29일 훈2등 욱일중광장을 수여받았고,[19] 1893년 5월 26일에는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22] 청일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1895년 8월 5일 욱일대수장과 공2급 금계훈장을 받았다.[23] 1906년 4월 1일에는 공1급 금계훈장과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으며,[26] 1908년 10월 6일에는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29]
1906년 1월 31일에는 원수 칭호를 받았다.[25]
위계는 1874년 2월 18일 종5위를 시작으로,[13] 1885년 7월 25일 종4위,[14] 1886년 10월 20일 종3위,[15] 1894년 6월 30일 정3위,[16] 1899년 12월 20일 종2위를 거쳐,[17] 사망한 1908년 10월 18일 정2위에 올랐다.[18]
1889년 11월 25일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을 받았으며,[21] 1895년 11월 18일 메이지 278년 종군기장,[24] 1906년 4월 1일 메이지 378년 종군기장을 받았다.[26]
외국 훈장으로는 1905년 2월 27일 청나라의 두등 제3쌍룡보성,[30] 1906년 2월 13일 독일 제국의 호엔촐레른가 검부 제1등 훈장,[31] 1906년 7월 13일 프로이센 왕국의 검부 적수대수장을 받았다.[32] 그 외에도
노즈 미치쓰라는 1907년 9월 21일 후작으로 승작됨과 동시에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후작 의원으로 취임하여[6]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7] 1908년 10월 6일,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8] 같은 해 10월 18일, 유문 폐쇄로 인해 훙거했다.[8] 그의 묘는 형 시게오와 함께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보신 전쟁
노즈 미치쓰라는 가고시마에서 사무라이 신분으로 낮은 계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고시마성 아래 고라이마치의 하급 번사 노즈 시즈카의 셋째 아들 이었다.[1] 가명은 시치지, 휘는 미치쓰라였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그는, 사쓰마 번의 저명한 교관인 야쿠마루 가네요시 밑에서 일본 검술을 배웠다.[1] 보신 전쟁에는 6번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쟁, 니혼마츠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2. 2. 메이지 시대 군 경력
가고시마 출신 노즈 미치쓰라는 보신 전쟁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1] 전쟁 이후, 1871년 3월 육군 소좌로 임명되었고, 1872년 8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874년 1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근위 참모장 직무 대행을 맡았다.[1] 1876년 7월부터 10월까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1]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1877년 2월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군 제2여단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같은 해 5월부터 8월까지는 분고국 지휘관을 맡아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1]
2. 3. 유럽 순방과 청나라 파견
1884년 2월, 노즈 미치쓰라는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를 동반하여 여러 유럽 국가의 군사 시스템을 조사하기 위해 1년간의 유럽 순방에 나섰다.[1] 1884년 7월에는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화족 작위 시스템에서 남작(''단샤쿠'')의 작위를 받았다.[1] 1885년 2월부터 4월까지 노즈는 청나라 중국의 베이징에 무관으로 파견되었다.[1]2. 4.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노즈 미치쓰라는 제5사단장에 임명되어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 이후 제1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만주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다.[1]1904년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 제4군 사령관을 맡아 봉천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 특히, 봉천 회전에서 노즈가 이끄는 제4군은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여 회전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2. 5. 작위와 영전
1884년 7월 7일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화족 작위 시스템에서 남작(''단샤쿠'')의 작위를 받았다.[1] 청일 전쟁 종전 후인 1895년 8월 5일 자작(''시샤쿠'')으로 승작되었으며,[23] 러일 전쟁 이후인 1907년 9월 21일에는 후작(''고샤쿠'')으로 승작되었다.[27]1882년 12월 29일 훈2등 욱일중광장을 수여받았고,[19] 1893년 5월 26일에는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22] 청일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1895년 8월 5일 욱일대수장과 공2급 금계훈장을 받았다.[23] 1906년 4월 1일에는 공1급 금계훈장과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으며,[26] 1908년 10월 6일에는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29]
1906년 1월 31일에는 원수 칭호를 받았다.[25]
위계는 1874년 2월 18일 종5위를 시작으로,[13] 1885년 7월 25일 종4위,[14] 1886년 10월 20일 종3위,[15] 1894년 6월 30일 정3위,[16] 1899년 12월 20일 종2위를 거쳐,[17] 사망한 1908년 10월 18일 정2위에 올랐다.[18]
1889년 11월 25일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을 받았으며,[21] 1895년 11월 18일 메이지 278년 종군기장,[24] 1906년 4월 1일 메이지 378년 종군기장을 받았다.[26]
외국 훈장으로는 1905년 2월 27일 청나라의 두등 제3쌍룡보성,[30] 1906년 2월 13일 독일 제국의 호엔촐레른가 검부 제1등 훈장,[31] 1906년 7월 13일 프로이센 왕국의 검부 적수대수장을 받았다.[32] 그 외에도 , |50px]] 1등, |50px]] 2등, |50px]] 2등,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등을 수여받았다.
2. 6. 말년과 사망
노즈 미치쓰라는 1907년 9월 21일 후작으로 승작됨과 동시에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후작 의원으로 취임하여[6]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7] 1908년 10월 6일,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8] 같은 해 10월 18일, 유문 폐쇄로 인해 훙거했다.[8] 그의 묘는 형 시게오와 함께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3. 평가
보신 전쟁에서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며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였다.[1] 청일 전쟁에서는 제5사단장으로 평양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만주에서는 일본 제1군 사령관을 맡는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군을 지휘했다.[1] 전쟁 후에는 근위사단 사령관, 군사 훈련 감찰부 감찰관 등을 역임하며 일본 제국 육군 발전에 기여했다.[2] 이러한 군사적 업적과 더불어,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4군 사령관으로서 봉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원수로 진급하고, 후작 작위를 받는 등[1]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노즈 미치쓰라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에서 주요 직책을 거치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등 일본의 주요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1][2] 특히, 청일 전쟁에서 평양 전투에 참전하고,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 제4군 사령관으로 봉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등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벌이는데 앞장섰다.[1] 이러한 그의 군사 활동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노즈 미치쓰라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걸쳐 활약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가고시마 현 출신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보신 전쟁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1]
전쟁 이후, 노즈는 일본 제국 육군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소장, 중장, 대장을 거쳐 원수까지 올랐다.[1][2] 그는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여 서구 군사 제도를 연구하고, 청나라에 무관으로 파견되는 등 국제적인 경험도 쌓았다.[1] 특히, 프로이센 출신 군사 고문 야코프 메켈의 조언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을 사단으로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1]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노즈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1][2]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고, 봉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등 그의 군사적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1]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남작, 자작, 후작으로 작위가 격상되었고, 금계훈장 1등급과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1][2]
그러나 노즈 미치쓰라의 생애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과정에는 제국주의적인 침략 행위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당시 국제 정세와 일본 국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노즈 미치쓰라는 근대 일본의 군사력 강화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능력과 근대화 노력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제국주의 침략 행위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노즈 미치쓰라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3. 1. 긍정적 평가
노즈 미치쓰라는 보신 전쟁에서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며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였다.[1] 청일 전쟁에서는 제5사단장으로 평양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만주에서는 일본 제1군 사령관을 맡는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군을 지휘했다.[1] 전쟁 후에는 근위사단 사령관, 군사 훈련 감찰부 감찰관 등을 역임하며 일본 제국 육군 발전에 기여했다.[2] 이러한 군사적 업적과 더불어,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4군 사령관으로서 봉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원수로 진급하고, 후작 작위를 받는 등[1]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3. 2. 부정적 평가
노즈 미치쓰라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에서 주요 직책을 거치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등 일본의 주요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1][2] 특히, 청일 전쟁에서 평양 전투에 참전하고,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 제4군 사령관으로 봉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등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벌이는데 앞장섰다.[1] 이러한 그의 군사 활동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3.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종합적 평가
노즈 미치쓰라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걸쳐 활약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가고시마 현 출신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보신 전쟁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도바-후시미 전투, 아이즈 전투, 하코다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1]전쟁 이후, 노즈는 일본 제국 육군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소장, 중장, 대장을 거쳐 원수까지 올랐다.[1][2] 그는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여 서구 군사 제도를 연구하고, 청나라에 무관으로 파견되는 등 국제적인 경험도 쌓았다.[1] 특히, 프로이센 출신 군사 고문 야코프 메켈의 조언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을 사단으로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1]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노즈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1][2]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고, 봉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등 그의 군사적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1]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남작, 자작, 후작으로 작위가 격상되었고, 금계훈장 1등급과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1][2]
그러나 노즈 미치쓰라의 생애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과정에는 제국주의적인 침략 행위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당시 국제 정세와 일본 국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노즈 미치쓰라는 근대 일본의 군사력 강화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능력과 근대화 노력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제국주의 침략 행위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노즈 미치쓰라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일화
노즈 미치쓰라는 가고시마 출신의 사무라이로, 메이지 유신과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서 활약한 군인이다.[1] 소년 시절에는 도둑을 잡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나라하라 시게루의 집에서 서생으로 지낼 때, 떡 56인분을 해치워 나라하라를 놀라게 했다.
보신 전쟁의 우쓰노미야성 전투에서는 오토리 게이스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병력을 물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보신전쟁에는 내키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등 과거 동료들과 싸우며 많은 부하를 잃었고, 전사한 부하들을 추모하는 족자를 만들어 매일 조문했다고 한다. 니혼마쓰 전투에서는 자신을 습격한 야마오카 에이지에이코와 아오야마 스케노조 마사요시를 칭찬하며 전사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대신해 제1군 사령관을 맡는 등 활약했고[1], 러일 전쟁에서는 알렉세이 크로팟킨의 철수 전술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봉천 회전에서는 예비병 없이 진격하겠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노기 마레스케가 가쿠슈인 학장 시절 개최한 "명문가의 숙녀 사진 콘테스트"에서 스에히로 히로코가 퇴학 처분을 받자, 노기는 노즈에게 중매를 제안했고, 노즈는 자신의 장남과의 혼담을 제안하여 노기의 체면을 살렸다.
5. 가족 관계
노즈 미치쓰라는 가고시마에서 사무라이 신분으로 낮은 계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 노즈 시즈카는 1846년에, 어머니 카시와기 미요는 1851년에 사망했다.[33] 계모는 노즈 쿠니코(형 노즈 시즈오의 아내)이며 1918년에 사망했다. 형제로는 숙부 오리타 씨의 양자가 된 오리타 산노조(1834년 사망)와 노즈 시즈오(육군 중장)가 있었다.[33]
아내는 高島喜兵衛의 딸이자 육군 중장 타카시마 토모노스케의 여동생인 노즈 토시코(1919년 사망)이다.[33] 장남 노즈 시즈토라는 1876년에 태어나 1900년에 사망했다.[33] 차남 노즈 시즈오는 육사 12기[34] 기병 대위였으며(1878년생), 1907년 1월 4일에 사망했다.[35] 삼남 노즈 시즈노스케는 후작이자 육사 15기 포병 소좌였고(1883년생), 장인은 스에히로 나오카타였다.[33] 사남 노즈 시즈히코는 육사 22기 포병 소좌였다(1888년생).[33]
장녀는 원수 육군 대장 우에하라 유사쿠의 아내인 우에하라 마키코(1873년생)이다.[33] 차녀는 일본우선 전무 하야시 타미오의 아내인 하야시 에이코(1880년생)이다.[33] 삼녀 노즈 토미코는 요절했다(1882년 사망).[33] 사녀는 일청생명보험 사장 이케다 류이치의 아내인 이케다 테루코(1885년생)이다.[33] 오녀는 나고야 전등 초대 사장·미우라 에미 장남·에이치의 아내인 미우라 미토코(1889년생)이다.[36]
손자 중에는 실업가 오하라 소이치로의 아내 오하라 마사코와 히게타 간장 전 사장11대 하마구치 키치에몬 히사츠네의 아내 하마구치 미치코가 있다.[33]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Military Biography
[2]
문서
Portraits of Modern Historical Figures
National Diet Library
[3]
웹사이트
野津道貫
https://jahis.law.na[...]
人事興信録データベース
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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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津道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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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貴族院要覧(丙)
1946-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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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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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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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웹사이트
陸軍少将黒川通軌外六名勲二等ニ進叙
A15110025500
아시아역사자료센터
[20]
뉴스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884-07-08
[21]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889-11-30
[22]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893-05-27
[23]
뉴스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895-08-06
[24]
뉴스
辞令
官報
1896-05-01
[25]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6-02-01
[26]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6-12-30
[27]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7-09-23
[28]
뉴스
帝国議会 - 貴族院 - 議員就職
官報
1907-09-28
[29]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8-10-07
[30]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5-03-07
[31]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6-02-20
[32]
뉴스
叙任及辞令
官報
1906-07-23
[33]
서적
元帥上原勇作伝上巻
元帥上原勇作伝記刊行會
1937
[34]
서적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明治36年7月1日調 539頁
陸軍省
1903
[35]
뉴스
官報
1907-01-08
[36]
간행물
野津鎭之助 (男性)
http://jahis.law.nag[...]
人事興信録データベース
19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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