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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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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록강 회전은 1904년 4월 30일부터 5월 1일까지 압록강에서 벌어진 러일 전쟁의 첫 번째 육상 전투이다. 러시아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한 증원 전까지 방어적인 지연 작전을 펼치려 했고, 일본군은 제물포 해전 승리 후 압록강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기만 작전과 정보 우위를 바탕으로 러시아군을 격파하며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036명의 전사자를, 러시아군은 2,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압록강 회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만주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러일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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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회전
개요
일본 기병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
일본 기병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
전투명압록강 전투
일부러일 전쟁의 일부
날짜1904년 4월 30일 – 1904년 5월 1일
장소의주 근처, 한국과 중국 국경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교전국 2러시아 제국
지휘관
일본 제국구로키 다메모토
러시아 제국미하일 자술리치
니콜라이 카시탈린스키
병력 규모
일본 제국42,000명
러시아 제국약 25,000명
피해 규모
일본 제국사상자 1,036명 (사망, 부상, 실종)
러시아 제국사상자 2,172명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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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러시아 제국 극동 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충분한 병력이 증원될 때까지 방어적인 지연 전술로 일본 제국군과 교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부왕으로부터 조선을 통한 일본군의 진격을 방해하지 말고 압록강에서 전선을 유지하여 일본군이 만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은 제물포 해전에서 승리한 후, 구로키 다메모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해군 제1군이 조선에 배치되어 빠르게 북진했다. 일본군은 청일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인 인부를 고용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했고, 진남포(현재의 남포) 항구를 함락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1904년 4월 22일, 쿠로팟킨은 미하일 자술리치 소장이 지휘하는 동방파견대를 파견했지만, 러시아군은 넓게 분산 배치되었고 일본군을 과소평가했다. 일본군은 첩보활동을 통해 러시아군의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위장 전술을 통해 자신들의 진지를 숨겼다.

결과적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군이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러시아군 병사가 일본군 병사보다 우수하다고 과신한 자수리치 장군의 실책을 이용하여 충분한 화포를 가지고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또한 러시아 육군이 전군을 동원한 결전을 피하고 조기에 퇴각했기 때문에 일본 육군은 도하를 별다른 피해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

지우롄청 산 정상에는 "압록강 전적"이라고 명명된 일종의 충령탑이 단둥 시에 남아 있다. 전적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일부 파괴되었지만 일본으로부터 받은 굴욕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지방 정부에 의해 보수되었다. 산은 "일본 산"이라고도 불리며 벚꽃도 핀다.[7]

2. 1. 러시아군의 상황

알렉세이 쿠로팟킨 러시아 극동 사령관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충분한 증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방어적 지연 전술로 일본군과 교전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증원에 최소 6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부왕으로부터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압록강에서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8]

1904년 4월 22일, 쿠로팟킨은 미하일 자술리치 소장에게 16,000명의 보병, 5,000명의 기병, 62문의 포병을 주어 압록강 북쪽에서 지연 작전을 펼치게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274km에 걸쳐 분산 배치되었고, 자술리치 장군은 일본군을 과소평가했다. 대부분의 러시아군은 의주 근처에 배치되어 조선에서 만주로 가는 주요 도로를 봉쇄했고, 소규모 부대만이 강 상류와 하류를 방비했다.[8]

2. 2. 일본군의 상황

1904년 2월 9일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승리한 후, 구로키 다메모토 남작 휘하의 일본 제국 육군 제1군은 제2사단, 제12사단, 근위사단을 조선에 배치했다. 일본군 총 병력은 약 42,500명이었다. 일본 제1군은 제물포(오늘날의 인천)에서 북쪽으로 빠르게 진군해 1904년 2월 21일에는 평양에, 3월 18일에는 안주에 이르렀다. 청일 전쟁에서 병참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군은 10,000명에 이르는 조선인 인부를 고용했고, 그들이 현지에서 받는 임금보다 높게 책정하여 현지에서 마련한 음식과 보급품도 지급했다. 이는 러시아군이 조선 북부에서 행했던 행위와는 크게 달랐다.[8]

일본군의 남포 상륙


봄 해빙기에 평양 외부에 있는 대동강 어귀의 진남포(현재의 남포) 항구를 함락함으로써, 일본군은 3월 29일까지 제1군단의 잔여 부대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1904년 4월 21일경, 일본 제국 육군 1군은 의주 남쪽에 집결하여 은신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894년 8월 청일 전쟁압록강 전투에서의 바로 그 압록강 남안의 똑같은 위치에 포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인 어부로 변장한 정찰대에 의한 첩보활동을 통해 러시아군이 배치된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고, 러시아군도 자신들의 진지를 굳이 은닉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8] 4월 23일 경, 일본군은 러시아 참호선의 개략과 단둥 지역 주변의 방어 진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효과적인 첩보활동을 통해 일본군이 추정하는 러시아 부대 병력은 1,000명이 넘지 않았으며, 대포 수도 실제 수보다 2문 적은 정도의 정확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일본군은 진지를 숨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활동과 도로, 대포, 그리고 다른 장비를 숨기기 위해 나무와 기장, 관목을 이용한 위장을 했다.

3. 전투 경과

러시아군일본군보다 병사 개개인의 능력이 우수하다고 과신하여 병력을 분산 배치하였다. 그러나 자술리치 장군의 이러한 판단과 달리, 일본 육군은 충분한 화포를 동원하여 러시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러시아 육군은 전군을 동원한 결전을 회피하고 조기에 퇴각함으로써, 일본 육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압록강 도하를 완료할 수 있었다.[7]

단둥 시 주롄청 산 정상에는 "압록강 전적"이라 불리는 일종의 충령탑이 남아 있다. 이 전적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일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일본으로부터 받은 굴욕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지방 정부에 의해 보수되었다. 이 산은 "일본 산"이라고도 불리며 벚꽃이 피기도 한다.[7]

3. 1. 전초전

1904년 4월 25일 밤 9시 45분, 일본 제2사단의 두 개 대대가 압록강의 관전도(긴테이 섬), 구류도(규리 섬), 오세키 섬을 저항 없이 점령했다.[4] 4월 26일 새벽 4시, 근위사단 증원 병력이 도착했고, 짧은 교전 후 러시아 전방 관측소는 북쪽 강둑의 러시아 주 방어선으로 철수했다.[4]

일본 공병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1,630야드(1490.5m) 길이의 다리 10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중 3분의 1은 각각 약 45.36kg 무게의 강철 조립식 부교였다.[4] 나머지는 현지 자재로 만들어졌다. 러시아 진지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일본군은 적 포병의 공격을 유도하고 노출시키기 위해 관전도까지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제방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계략은 성공하여 두 개의 러시아 포대가 즉시 다리를 공격했다. 러시아군이 이 작전에 집중하는 동안, 일본군은 다른 지점에서 강을 빠르게 건너기 위해 10개의 다른 다리를 준비했다.[4]

강 중간의 섬들을 확보하는 동안, 쿠로키 다메모토(구로키 다메모토) 대장은 일본 포격함이 강 어귀에서 코사크 부대와 교전하는 동안 압록강 하류에서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이로 인해 자술리치 장군은 일본군의 주 공격이 단둥 인근에 가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병력을 그곳에 집중시켰다.[4]

러시아군은 이러한 움직임을 우려하며 지켜봤고, 카슈탈린스키 장군은 자술리치 장군에게 일본군이 대규모로 공격하려 하며 자신의 위치가 측면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자술리치 장군은 공격이 기만책일 뿐이라고 생각하여 이 보고를 무시하고 단지 4문의 포를 갖춘 한 개 대대만 재배치했다. 그는 일본군의 주 공격이 단둥에 가해질 것이라고 확신했고, 주력 부대와 예비 병력을 그곳에 유지했다.[4]

3. 2. 본 전투

일본군의 주 공격은 1904년 4월 27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날이 밝을 무렵, 근위 사단은 중앙으로 이동하여 위치를 잡았다. 그들은 아이허강과 압록강의 합류 지점을 내려다보는 전략적인 호랑이 언덕에서 준비되지 않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번개와 같은 공격을 시작했다.[7] 이틀 후, 러시아군은 호랑이 언덕에서 근위 사단을 공격하여 위치를 되찾으려 했지만 참혹하게 실패했다. 그 후, 일본 근위병과 제2사단은 크루프사의 독일제 4.7인치 곡사포를 킨테이 섬에 설치하고, 자연 잎으로 숨길 수 있었다. 4월 30일까지, 제12사단의 나머지 부대는 수구진이라는 마을에서 강을 건너 3개 열로 진격했다. 일본 제1군은 3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했고, 자정까지 압록강을 건너는 데 거의 저항이 없었다. 제한된 시야로 인해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없었다.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0500시경이 되자, 일본 포병대가 러시아군에게 포격을 시작했다.[7]

제2사단은 중앙에 위치하여 위주에서 새로 건설된 둑길로 진격하여 압록강 건너 만주 쪽에 있는 주롄청 마을에서 러시아군을 포위 공격했다. 1000시경, 러시아군은 북쪽 봉황성으로 도주하려는 일본군의 시도에 따라 완전히 후퇴했다.[7]

이때, 일본군은 킨테이 섬의 포대를 다시 사용하여 노출된 러시아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러한 전개 상황을 고려하여, 자술리치 장군은 참모진으로부터 더욱 방어 가능한 위치로 철수하라는 강력한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자술리치 장군은 완강하게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니콜라이 2세에게 곧 승리가 확실할 것이라는 전보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그는 쿠로파트킨 장군의 단계적 철수 명령(쿠로파트킨의 참모장인 사카로프 장군이 확인)을 무시하기로 했다.[7]

쿠로키 장군은 제12사단의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군의 좌익을 포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 적의 포병이 무력화되었으므로, 그는 근위병과 제2사단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일본군은 러시아군으로부터 첫 번째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제2사단의 진격은 잠시 혼란을 겪었으며, 만약 러시아 포병 중 일부라도 살아남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참호에서 쫓겨났으며, 생존자들은 자술리치의 고문관들이 앞서 철수하라고 설득했으나 실패했던 언덕 꼭대기로 후퇴했다. 후퇴하는 동안, 러시아 제12동시베리아 소총 연대의 부대가 반격을 가했지만, 궤멸되어 러시아군 전열에 더 큰 틈이 생겼다.[7]

러시아군의 위치는 이제 완전히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남은 부대는 포위될 위험에 놓였다. 자술리치 장군은 철수 명령을 받았다. 후퇴를 엄호하던 제11동시베리아 소총 연대는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다른 러시아군으로 돌파하는 과정에서 큰 사상자를 냈다. 일본 제12사단의 출현에, 러시아 좌익은 공황 상태에 빠져 붕괴되었다.[7]

1904년 5월 1일 17시 30분, 러시아 동부 부대의 잔존 병력은 항복하거나 북쪽의 봉황성으로 탈출했고, 압록강 전투는 막을 내렸다.[7] 러시아군 병사가 일본군 병사보다 우수하다고 과신하여 병력을 분산 배치한 자수리치 장군에 대해 일본 육군은 충분한 화포를 가지고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또한 러시아 육군이 전군을 동원한 결전을 피하고 조기에 퇴각했기 때문에 일본 육군은 도하를 별다른 피해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7]

주롄청 산 정상에는 "압록강 전적"이라고 명명된 일종의 충령탑단둥시에 남아 있다. 전적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일부 파괴되었지만 일본으로부터 받은 굴욕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지방 정부에 의해 보수되었다. 산은 "일본 산"이라고도 불리며 벚꽃도 핀다.[7]

4. 결과 및 영향

압록강 회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1군은 병력 42,500명 중 1,036명이 전사했다.[9] 러시아군은 전사자 500명, 부상자 1,000명, 포로 600명 등 총 2,7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야전포 24문 중 21문을 잃었다.

압록강 회전은 러일 전쟁 최초의 육상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패배하면서 일본군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전쟁이 단기간에 러시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10]

단둥 시 구련성 정상에는 '압록강 전적'이라 불리는 일종의 기념탑이 남아 있다. 이 전적비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일부 파괴되었으나, 일본으로부터 받은 굴욕의 역사를 후세에 기억시키기 위해 지방 정부에 의해 보수되었다.

5. 갤러리

현지에서 "아국분(俄国坟)"이라고 불리는 구련성의 러시아인 묘지

참조

[1] 간행물 Russian Main Military Medical Directorate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statistical report 1914
[2] 웹사이트 日露戦争-鴨緑江渡河戦 http://www.sakanouen[...]
[3] 서적 Connaughton, p.75
[4] 서적 Connaughton, p.76
[5] 서적 Connaughton, p.64
[6] 서적 Connaughton, p.65
[7] 뉴스 読売新聞 2009-04-14
[8] 서적 Connaughton, p.55
[9] 서적 Connaughton, p.64
[10] 서적 Connaughton,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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