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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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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15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로이자 리미니의 군주였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13세에 군인이 되었으며, 페자로의 영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 15세에 리미니의 영주가 되었으며, 이후 교황군 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여러 세력과 갈등을 겪었다. 말라테스타는 예술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 건축을 후원했다. 하지만 교황 비오 2세에게 파문당하고, 폭군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는 1468년 사망했으며, 그의 삶은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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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초상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초상화
출생일1417년 6월 19일
출생지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
사망일1468년 10월 7일
사망지카스텔 시스몬도
국적이탈리아
직업군사 지도자, 예술 후원자
가족
아버지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
어머니안토니아 다 바리냐니
자녀갈레오토 로베르토 노벨로 (1438, 제네브라 데스테의 아들)
조반나 (1444, 폴리세나 스포르차의 딸)
로베르토 (1441, 바네타 데이 토스키의 아들)
살루스티오 (적자이자 후계자)
친척갈레오토 로베르토 말라테스타 (이복형)
도메니코 말라테스타 (형제)
갈레오토 로베르토 (형제)

2. 생애

### 초기 생애와 가문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브레시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토니아 다 바리냐니였으며, 말라테스타 노벨로로 알려진 도메니코는 그의 이복동생이었다. 또 다른 이복 형제로는 갈레아초 로베르토가 있었다.[1]

아버지 판돌포 3세가 사망한 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13세에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페자로의 영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그의 동맹자인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맞서 싸웠다. 카를로 2세는 리미니, 체세나, 파노 등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2]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시지스몬도는 형제들과 함께 교황 대리로 임명되었다. 1431년에 페자로의 말라테스타 가문이 다시 공격해왔지만, 적은 병력으로 이를 격퇴했다. 얼마 후 형이 퇴위하면서 15세의 나이에 리미니의 영주가 되었다.

thumb 작 - 코레르 미술관(Museo Correr)]]

1434년, 페라라 후작 니콜로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파리시나 말라테스타 사이의 딸인 지네브라 데스테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갈레아초 로베르토 노벨로가 태어났지만 1438년에 요절했고, 1440년 10월 12일에는 아내 지네브라도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시지스몬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1] 2년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생녀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먼저 1442년에 아들 갈레아초가 태어났지만, 생후 몇 달 만에 죽었다. 1444년에는 딸 조반나가 태어났다.

시지스몬도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애첩을 두었다. 그중 한 명이 바네타 데이 토스키였고, 1441년에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로베르토를 낳았다. 또한 이소타 델리 아티와의 사이에 조반니(요절), 마르게리타(카를로 디 포르테브라치오와 결혼), 살스티오, 안토니아(카스티글리오네 영주 로돌포 곤자가와 결혼)의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 군사 경력 초기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와 안토니아 다 바리냐니(Antonia da Barignani) 사이에서 태어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13세에 군인으로 데뷔했다.[19] 그는 리미니, 체세나의 합병을 노리던 페사로의 군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19] 이 승리로 시지스몬도는 그의 형제 갈레오토 로베르토와 도메니코가 지녔던 도시들의 교황 대리 작위를 차지했다.[19]

1431년, 시지스몬도는 페사로의 말라테스타 친척의 침입을 격퇴해냈다.[19] 곧 형 갈레오토 로베르토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시지스몬도는 15세의 나이에 리미니의 군주가 되었다.[19]

### 리미니 군주 즉위와 통치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세에 군인으로 데뷔했다. 친척인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맞서 승리한 후, 형제들과 함께 리미니, 체세나 등의 도시의 교황 대리 작위를 받았다.[18] 1431년에는 페사로의 말라테스타 가문의 침입을 격퇴했고, 얼마 후 형 갈레오토 로베르토 말라테스타가 퇴위하면서 15세의 나이로 리미니의 군주가 되었다.

thumb와 함께 있는 시지스몬도(왼쪽, 베노초 고촐리 작품)]]

1432년 교황군 사령관이 된 시지스몬도는 스페인 출신 콘도티에로 산테 키릴로를 격퇴하고, 안토니오 1세 오르델라피의 포를리 점령 시도를 좌절시켰다(1435-36).[18] 그러나 이듬해 체르비아를 점령하여 파문당했다가 사면받고 다시 교황군 사령관이 되었다.[18] 이후 로마냐마르케에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함께 싸웠다.[18]

1434년, 니콜로 3세 데스테의 딸 지네브라 데스테와 결혼했으나, 1440년 그녀가 사망하면서 시지스몬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1] 2년 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생아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재혼했다.

니콜로 피치니노와의 전투에서 1437년 칼치나라 술롤리오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이후 몬텔루로에서 피치니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말라테스타 노벨로가 이끄는 교황군을 격퇴하고 페사로의 일부 영토를 획득했다.[19] 그러나 페사로는 페데리코의 군대에 함락되었고,[19] 이후 페사로의 영주권을 둘러싸고 스포르차와 적대 관계가 심화되었다.[2]

1449년 두 번째 부인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시지스몬도는 이소타 델리 아티를 포함한 여러 정부를 두었다. 1449년 이후 베네치아, 피렌체, 시에나 공화국, 나폴리, 스포르차 등 여러 세력을 위해 복무했으나, 로디 조약(1454)에서 제외되면서 주요 이탈리아 세력들의 침략을 받았다.[20] 1456년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고 아들 살루스티오 말라테스타를 후계자로 선언했다.

1460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파문당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으며,[20] 교황,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연합한 성전이 선포되었다. 1461년 카스텔레오네디수아사에서 교황군을 물리치고 1462년 세니갈리아를 점령했으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에게 패배하고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이 끝나면서[19] 리미니와 그 주변 8km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베네치아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싸웠다.[19]

### 결혼과 가족 관계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우)와 함께 그려진 프레스코화(베노초 고촐리 작)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1434년 니콜로 3세 데스테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파리시나 말라테스타 사이의 딸인 지네브라 데스테와 결혼했다.[1]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갈레오토 로베르토 노벨로가 태어났지만 1438년에 요절했고, 1440년 10월 12일에는 지네브라도 사망했다. 시지스몬도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1] 2년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생녀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1442년에 아들 갈레오토를 낳았지만 몇 달 만에 사망했고, 1444년에는 딸 조반나를 낳았다.

1449년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시지스몬도의 부하들이 그녀를 익사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불명이다. 시지스몬도는 두 명의 아내 외에도 많은 애첩을 두었는데, 그중 바네타 데이 토스키는 1441년에 아들 로베르토 말라테스타를 낳았다. 이소타 델리 아티와의 사이에서는 조반니(요절), 마르게리타(카를로 디 포르테브라초와 결혼), 살루스티오 말라테스타, 안토니아(카스티글리오네 영주 로돌포 곤차가와 결혼)의 네 자녀를 낳았다.

1456년, 오랜 애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의 아이들을 적출로 인정하고, 살루스티오를 후계자로 선포했다.

### 스포르차 가문과의 갈등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처음에는 로마냐마르케에서 스포르차와 함께 싸웠으며, 1434년에는 그의 사생녀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1445년, 시지스몬도가 병합을 노리던 페사로를 스포르차가 매입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인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11]

이후 시지스몬도는 스포르차에 대항하기 위해 에우제니오 4세와 밀라노 공작과 동맹을 맺었다. 1449년, 두 번째 아내인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시지스몬도의 부하들이 그녀를 익사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1454년로디 조약에서 시지스몬도가 제외되자, 이탈리아의 강대국들은 그에게 칼날을 돌렸고, 그의 영토는 아라곤, 베네치아, 교황군의 침략을 반복적으로 받게 되었다.

### 교황 비오 2세와의 갈등과 파문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아버지의 사망 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13세에 군인으로 데뷔했다. 그는 페사로의 영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맞서 싸워 승리하고 형제들과 함께 교황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431년 페사로의 재침을 격퇴하고, 형의 퇴위로 15세에 리미니의 영주가 되었다.

thumb(우)와 함께 그려진 프레스코화(베노초 고초리 작)]]

1432년 교황군 사령관이 되어 안토니오 1세 오르델라피의 포를리 공략을 저지했으나, 이듬해 체르비아 점령으로 파문되었다가 사면받고 다시 교황군을 지휘했다. 이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함께 로마냐, 마르케에서 싸웠다. 1445년, 스포르차가 페자로를 매입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인 적대 관계가 되었다.[11]

1449년, 두 번째 아내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시지스몬도는 많은 애첩을 두었다. 1456년 오랜 애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고 그들의 자녀를 적출로 인정했다.

1460년 12월 25일, 교황 비오 2세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의 불화, 시에나 배신 혐의, 그리고 근친상간, 남색 등의 죄목으로 시지스몬도를 파문하고 이단자로 선언했다.[20] 로마에서 그의 초상화가 불태워졌고, 교황,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몬테펠트로가 연합한 반(反) 말라테스타 동맹이 결성되어 사실상의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1461년 7월 2일, 카스텔레오네디수아사에서 교황군을 격파하고 1462년 세니갈리아를 점령했으나, 몬테펠트로에게 체사노 강 전투에서 대패했다. 1463년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10] 시지스몬도는 리미니와 그 주변 8km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었으며, 남은 영토도 사후 교황령에 반환될 예정이었다. 이후 베네치아의 장군으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1464~1466).[10]

1468년, 교황 바오로 2세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리미니로 돌아와 카스텔 시지스몬도에서 사망했다.

### 베네치아와의 동맹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야전 사령관으로 복무했다(1464-1466).[2] 이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시지스몬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리미니와 그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15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2] 그는 1454년로디 조약에서 제외되어, 주요 이탈리아 세력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의 영토는 아라곤, 베네치아, 교황군에 의해 반복적으로 침략을 받았다.[11][10]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은 1463년에 끝났고,[10] 시지스몬도는 리미니와 그 주변 약 8킬로미터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었다. 게다가 남은 영토도 그의 사후 교황령으로 돌아갈 것으로 정해졌다.

### 말년과 죽음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브레시아에서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449년 이후 베네치아, 피렌체, 시에나, 나폴리, 스포르차 가문 등 다양한 세력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1454년로디 조약에서 제외되자 이탈리아의 강대국들은 그에게 칼날을 돌리고, 그의 영토는 아라곤, 베네치아, 교황군의 침략을 반복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456년 그는 오랜 애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의 아이들을 적출로 인정했다. 이로써 살스티오가 그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1460년 12월 25일, 로마에서 시지스몬도에 대한 유명한 결석 재판이 열렸다.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의 오랜 악연으로 인한 시에나에 대한 배신 행위가 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이 재판에서 교황 비오 2세는 그를 파문하고 이교도 신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아들 로베르토 등에 대한 근친상간, 남색죄를 고발했다. 이로 인해 시지스몬도의 명성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손상되었다. 이어서, 그를 저주와 함께 지옥으로 "canonize"하는 특이한 의식이 행해졌다.

말라테스타의 초상화는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태워졌고, 그에 대한 사실상의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그 반 말라테스타 포위망에는 교황,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몬테펠트로가 가담했다. 그는 나폴레오네 오르시니가 이끄는 첫 번째 토벌군을 카스텔레오네 디 수아자에서 물리쳤고, 1462년에는 세니갈리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랜 라이벌인 몬테펠트로의 도래로 파노로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1462년 8월 12일, 세니갈리아 근처 체자노 강 하구에서 몬테펠트로와 싸워 대패했다.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은 1463년에 끝났고,[19] 시지스몬도는 리미니와 그 주변 약 8킬로미터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남은 영토도 그의 사후 교황령으로 돌아갈 것으로 정해졌다.

이 패전 후, 베네치아의 장군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서 1464년부터 1466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기간에 베네치아는 150명의 병사를 리미니에 파견하여 영주가 없는 땅을 지켰다고 한다.[19]

나중에 옛 영토의 회복을 도모하여 비오 2세의 후계자인 바오로 2세의 암살을 1468년에 계획했지만, 겁먹고 리미니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몇 달 후, 시지스몬도는 거성인 카스텔 시지스몬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리는 아내 이소타의 섭정 1년을 거쳐 적자인 살루스티오가 이어받았다. 사생아인 로베르토도 콘도티에로로서 훈련을 받아, 리미니를 잠시 통치했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브레시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토니아 다 바리냐니였으며, 말라테스타 노벨로로 알려진 도메니코는 그의 이복동생이었다. 또 다른 이복 형제로는 갈레아초 로베르토가 있었다.[1]

아버지 판돌포 3세가 사망한 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13세에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페자로의 영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그의 동맹자인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맞서 싸웠다. 카를로 2세는 리미니, 체세나, 파노 등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2]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시지스몬도는 형제들과 함께 교황 대리로 임명되었다. 1431년에 페자로의 말라테스타 가문이 다시 공격해왔지만, 적은 병력으로 이를 격퇴했다. 얼마 후 형이 퇴위하면서 15세의 나이에 리미니의 영주가 되었다.

thumb 작 - 코레르 미술관(Museo Correr)]]

1434년, 페라라 후작 니콜로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파리시나 말라테스타 사이의 딸인 지네브라 데스테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갈레아초 로베르토 노벨로가 태어났지만 1438년에 요절했고, 1440년 10월 12일에는 아내 지네브라도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시지스몬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1] 2년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생녀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먼저 1442년에 아들 갈레아초가 태어났지만, 생후 몇 달 만에 죽었다. 1444년에는 딸 조반나가 태어났다.

시지스몬도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애첩을 두었다. 그중 한 명이 바네타 데이 토스키였고, 1441년에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로베르토를 낳았다. 또한 이소타 델리 아티와의 사이에 조반니(요절), 마르게리타(카를로 디 포르테브라치오와 결혼), 살스티오, 안토니아(카스티글리오네 영주 로돌포 곤자가와 결혼)의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2. 2. 군사 경력 초기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와 안토니아 다 바리냐니(Antonia da Barignani) 사이에서 태어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13세에 군인으로 데뷔했다.[19] 그는 리미니, 체세나의 합병을 노리던 페사로의 군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19] 이 승리로 시지스몬도는 그의 형제 갈레오토 로베르토와 도메니코가 지녔던 도시들의 교황 대리 작위를 차지했다.[19]

1431년, 시지스몬도는 페사로의 말라테스타 친척의 침입을 격퇴해냈다.[19] 곧 형 갈레오토 로베르토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시지스몬도는 15세의 나이에 리미니의 군주가 되었다.[19]

2. 3. 리미니 군주 즉위와 통치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세에 군인으로 데뷔했다. 친척인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맞서 승리한 후, 형제들과 함께 리미니, 체세나 등의 도시의 교황 대리 작위를 받았다.[18] 1431년에는 페사로의 말라테스타 가문의 침입을 격퇴했고, 얼마 후 형 갈레오토 로베르토 말라테스타가 퇴위하면서 15세의 나이로 리미니의 군주가 되었다.

thumb와 함께 있는 시지스몬도(왼쪽, 베노초 고촐리 작품)]]

1432년 교황군 사령관이 된 시지스몬도는 스페인 출신 콘도티에로 산테 키릴로를 격퇴하고, 안토니오 1세 오르델라피의 포를리 점령 시도를 좌절시켰다(1435-36).[18] 그러나 이듬해 체르비아를 점령하여 파문당했다가 사면받고 다시 교황군 사령관이 되었다.[18] 이후 로마냐마르케에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함께 싸웠다.[18]

1434년, 니콜로 3세 데스테의 딸 지네브라 데스테와 결혼했으나, 1440년 그녀가 사망하면서 시지스몬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1] 2년 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생아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재혼했다.

니콜로 피치니노와의 전투에서 1437년 칼치나라 술롤리오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이후 몬텔루로에서 피치니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말라테스타 노벨로가 이끄는 교황군을 격퇴하고 페사로의 일부 영토를 획득했다.[19] 그러나 페사로는 페데리코의 군대에 함락되었고,[19] 이후 페사로의 영주권을 둘러싸고 스포르차와 적대 관계가 심화되었다.[2]

1449년 두 번째 부인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시지스몬도는 이소타 델리 아티를 포함한 여러 정부를 두었다. 1449년 이후 베네치아, 피렌체, 시에나 공화국, 나폴리, 스포르차 등 여러 세력을 위해 복무했으나, 로디 조약(1454)에서 제외되면서 주요 이탈리아 세력들의 침략을 받았다.[20] 1456년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고 아들 살루스티오 말라테스타를 후계자로 선언했다.

1460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파문당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으며,[20] 교황,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연합한 성전이 선포되었다. 1461년 카스텔레오네디수아사에서 교황군을 물리치고 1462년 세니갈리아를 점령했으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에게 패배하고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이 끝나면서[19] 리미니와 그 주변 8km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베네치아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싸웠다.[19]

2. 4. 결혼과 가족 관계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1434년 니콜로 3세 데스테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파리시나 말라테스타 사이의 딸인 지네브라 데스테와 결혼했다.[1]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갈레오토 로베르토 노벨로가 태어났지만 1438년에 요절했고, 1440년 10월 12일에는 지네브라도 사망했다. 시지스몬도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1] 2년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생녀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1442년에 아들 갈레오토를 낳았지만 몇 달 만에 사망했고, 1444년에는 딸 조반나를 낳았다.

1449년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시지스몬도의 부하들이 그녀를 익사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불명이다. 시지스몬도는 두 명의 아내 외에도 많은 애첩을 두었는데, 그중 바네타 데이 토스키는 1441년에 아들 로베르토 말라테스타를 낳았다. 이소타 델리 아티와의 사이에서는 조반니(요절), 마르게리타(카를로 디 포르테브라초와 결혼), 살루스티오 말라테스타, 안토니아(카스티글리오네 영주 로돌포 곤차가와 결혼)의 네 자녀를 낳았다.

1456년, 오랜 애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의 아이들을 적출로 인정하고, 살루스티오를 후계자로 선포했다.

2. 5. 스포르차 가문과의 갈등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처음에는 로마냐마르케에서 스포르차와 함께 싸웠으며, 1434년에는 그의 사생녀인 폴리세나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1445년, 시지스몬도가 병합을 노리던 페사로를 스포르차가 매입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인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11]

이후 시지스몬도는 스포르차에 대항하기 위해 에우제니오 4세와 밀라노 공작과 동맹을 맺었다. 1449년, 두 번째 아내인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시지스몬도의 부하들이 그녀를 익사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1454년로디 조약에서 시지스몬도가 제외되자, 이탈리아의 강대국들은 그에게 칼날을 돌렸고, 그의 영토는 아라곤, 베네치아, 교황군의 침략을 반복적으로 받게 되었다.

2. 6. 교황 비오 2세와의 갈등과 파문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아버지의 사망 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13세에 군인으로 데뷔했다. 그는 페사로의 영주 카를로 2세 말라테스타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맞서 싸워 승리하고 형제들과 함께 교황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431년 페사로의 재침을 격퇴하고, 형의 퇴위로 15세에 리미니의 영주가 되었다.

thumb(우)와 함께 그려진 프레스코화(베노초 고초리 작)]]

1432년 교황군 사령관이 되어 안토니오 1세 오르델라피의 포를리 공략을 저지했으나, 이듬해 체르비아 점령으로 파문되었다가 사면받고 다시 교황군을 지휘했다. 이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함께 로마냐, 마르케에서 싸웠다. 1445년, 스포르차가 페자로를 매입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인 적대 관계가 되었다.[11]

1449년, 두 번째 아내 폴리세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시지스몬도는 많은 애첩을 두었다. 1456년 오랜 애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고 그들의 자녀를 적출로 인정했다.

1460년 12월 25일, 교황 비오 2세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의 불화, 시에나 배신 혐의, 그리고 근친상간, 남색 등의 죄목으로 시지스몬도를 파문하고 이단자로 선언했다.[20] 로마에서 그의 초상화가 불태워졌고, 교황,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몬테펠트로가 연합한 반(反) 말라테스타 동맹이 결성되어 사실상의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1461년 7월 2일, 카스텔레오네디수아사에서 교황군을 격파하고 1462년 세니갈리아를 점령했으나, 몬테펠트로에게 체사노 강 전투에서 대패했다. 1463년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10] 시지스몬도는 리미니와 그 주변 8km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었으며, 남은 영토도 사후 교황령에 반환될 예정이었다. 이후 베네치아의 장군으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1464~1466).[10]

1468년, 교황 바오로 2세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리미니로 돌아와 카스텔 시지스몬도에서 사망했다.

2. 7. 베네치아와의 동맹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야전 사령관으로 복무했다(1464-1466).[2] 이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시지스몬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리미니와 그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15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2] 그는 1454년로디 조약에서 제외되어, 주요 이탈리아 세력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의 영토는 아라곤, 베네치아, 교황군에 의해 반복적으로 침략을 받았다.[11][10]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은 1463년에 끝났고,[10] 시지스몬도는 리미니와 그 주변 약 8킬로미터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었다. 게다가 남은 영토도 그의 사후 교황령으로 돌아갈 것으로 정해졌다.

2. 8. 말년과 죽음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브레시아에서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449년 이후 베네치아, 피렌체, 시에나, 나폴리, 스포르차 가문 등 다양한 세력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1454년로디 조약에서 제외되자 이탈리아의 강대국들은 그에게 칼날을 돌리고, 그의 영토는 아라곤, 베네치아, 교황군의 침략을 반복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456년 그는 오랜 애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의 아이들을 적출로 인정했다. 이로써 살스티오가 그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1460년 12월 25일, 로마에서 시지스몬도에 대한 유명한 결석 재판이 열렸다.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의 오랜 악연으로 인한 시에나에 대한 배신 행위가 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이 재판에서 교황 비오 2세는 그를 파문하고 이교도 신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아들 로베르토 등에 대한 근친상간, 남색죄를 고발했다. 이로 인해 시지스몬도의 명성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손상되었다. 이어서, 그를 저주와 함께 지옥으로 "canonize"하는 특이한 의식이 행해졌다.

말라테스타의 초상화는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태워졌고, 그에 대한 사실상의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그 반 말라테스타 포위망에는 교황,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몬테펠트로가 가담했다. 그는 나폴레오네 오르시니가 이끄는 첫 번째 토벌군을 카스텔레오네 디 수아자에서 물리쳤고, 1462년에는 세니갈리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랜 라이벌인 몬테펠트로의 도래로 파노로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1462년 8월 12일, 세니갈리아 근처 체자노 강 하구에서 몬테펠트로와 싸워 대패했다.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전쟁은 1463년에 끝났고,[19] 시지스몬도는 리미니와 그 주변 약 8킬로미터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남은 영토도 그의 사후 교황령으로 돌아갈 것으로 정해졌다.

이 패전 후, 베네치아의 장군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서 1464년부터 1466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기간에 베네치아는 150명의 병사를 리미니에 파견하여 영주가 없는 땅을 지켰다고 한다.[19]

나중에 옛 영토의 회복을 도모하여 비오 2세의 후계자인 바오로 2세의 암살을 1468년에 계획했지만, 겁먹고 리미니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몇 달 후, 시지스몬도는 거성인 카스텔 시지스몬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리는 아내 이소타의 섭정 1년을 거쳐 적자인 살루스티오가 이어받았다. 사생아인 로베르토도 콘도티에로로서 훈련을 받아, 리미니를 잠시 통치했었다.

3. 예술 후원과 명성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신앙심이 깊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의 셋째 아내이자 연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를 기리기 위해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산 프란체스코)를 건립했다.[12] 이 건물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설계하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아고스티노 디 두초 등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장식했다.[12]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는 로마 개선문을 구조에 처음으로 사용한 교회로서, 획기적인 르네상스 건축물로 평가받는다.[1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 프레스코화.


또한 시지스몬도는 자신의 로마냐 영토에 여러 요새들을 구축했는데, 리미니와 파노의 "로카" 등이 대표적이다.[12]

시지스몬도의 군사적 능력은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고 대담한 군인이었으며, 평생 동안 이탈리아 최고의 사령관으로 여겨졌다.[21][3][12] 그러나 시지스몬도의 평판은 교황 비오 2세의 부정적인 인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2] 당대 연대기 작가들과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그를 폭군이자 "모든 평화의 적"[23][5][13]으로 묘사하며, 그의 행위와 정치적 움직임은 폭력, 음모, 배신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특유의 교묘함으로 특정지어졌다. 시지스몬도는 자신의 죄악(폭력, 음모, 배신, 문란한 사생활 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소타를 향한 사랑 소네트를 통해 이를 해명하려 했다.[4]

1906년 에드워드 허턴은 시지스몬도를 동정적으로 묘사한 역사 소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를 출판했고, 이는 1926년 《리미니의 마스티프》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었다. 허턴의 소설과 샤를 에밀 이리아르테의 《Un condottiere au XV Siècle》(1882)는 에즈라 파운드의 말라테스타 캔토스(캔토스 8-11)의 주 자료가 되었으며, 군인, 연인, 후원가로서 말라테스타의 인생을 찬양하는 단편적 설명을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시지스몬도는 예술을 후원하고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와 같은 르네상스 건축물을 통해 문화 발전에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과, 폭력적인 통치와 문란한 사생활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3. 1. 예술 후원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신앙심이 깊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의 셋째 아내이자 연인인 이소타 델리 아티를 기리기 위해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산 프란체스코)를 건립했다.[12] 이 건물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설계하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아고스티노 디 두초 등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장식했다.[12]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는 로마 개선문을 구조에 처음으로 사용한 교회로서, 획기적인 르네상스 건축물로 평가받는다.[12]

또한 시지스몬도는 자신의 로마냐 영토에 여러 요새들을 구축했는데, 리미니와 파노의 "로카" 등이 대표적이다.[12]

3. 2. 명성과 평가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의 군사적 능력은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고 대담한 군인이었으며, 평생 동안 이탈리아 최고의 사령관으로 여겨졌다.[21][3][12] 그는 신앙심이 깊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설계하고 아고스티노 디 두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의 예술가들이 장식에 참여한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산 프란체스코)를 건립하여 그의 연인이자 셋째 아내인 이소타 델리 아티를 기념했다. 이는 로마 개선문을 구조에 처음으로 사용한 교회로서, 획기적인 르네상스 건축물이다. 시지스몬도는 그의 로마냐 영토에 여러 요새들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지스몬도의 평판은 교황 비오 2세의 부정적인 인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2] 당대 연대기 작가들과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그를 폭군이자 "모든 평화의 적"[23][5][13]으로 묘사하며, 그의 행위와 정치적 움직임은 폭력, 음모, 배신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특유의 교묘함으로 특정지어졌다. 시지스몬도는 자신의 죄악(폭력, 음모, 배신, 문란한 사생활 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소타를 향한 사랑 소네트를 통해 이를 해명하려 했다.[4]

1906년 에드워드 허턴은 시지스몬도를 동정적으로 묘사한 역사 소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를 출판했고, 이는 1926년 《리미니의 마스티프》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었다. 허턴의 소설과 샤를 에밀 이리아르테의 《Un condottiere au XV Siècle》(1882)는 에즈라 파운드의 말라테스타 캔토스(캔토스 8-11)의 주 자료가 되었으며, 군인, 연인, 후원가로서 말라테스타의 인생을 찬양하는 단편적 설명을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시지스몬도는 예술을 후원하고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와 같은 르네상스 건축물을 통해 문화 발전에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과, 폭력적인 통치와 문란한 사생활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4. 후대에 미친 영향

1906년, 에드워드 해튼(Edward Hutton)은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동정적으로 묘사한 역사 소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Sigismondo Malatesta)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약간 수정되어 1926년에 『The Mastiff of Rimini』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다.

해튼의 소설과 샤를 이리아르트(Charles Emile Yriarte)의 『Un condottiere au XV Siècle』(1882년)은 1923년에 출판된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말라테스타 칸토스」(칸토스 8-11편)의 주요 출처가 되었다. 그 중에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시지스몬도의 군인이자 후원자로서의 경력과 연애 편력이 칭찬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파운드에게 큰 영향을 받은 비평가 에이드리언 스톡스(Adrian Stokes)는 그의 궁정에서 탄생한 예술에 관한 『The Stones of Rimini』를 1934년에 발표했다.

E. M. 포스터(E. M. Forster)는 초기 시지스몬도와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Georgios Gemistos Plethon)에 관한 역사 소설을 구상했지만, 중도에 실패하여 출판되지 않았다. 나중에 포스터는 그 원고를 나오미 미치슨(Naomi Mitchison)에게 보여주었다.[7]

앙리 드 몽테를랑(Henri de Montherlant)의 희곡 『말라테스타』(Malatesta, 1946년)는 시지스몬도의 죽음과 교황 파울루스 2세에 대한 음모를 주제로 하고 있다.[8]

4. 1. 문학 작품

1906년, 에드워드 허턴(Edward Hutton)은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Sigismondo Malatesta)를 출판했으며, 1926년 《리미니의 마스티프》(The Mastiff of Rimini)라는 제목으로 약간 수정되어 재출판되었다.[6] 허튼의 소설과 샤를 에밀 이리아르트(Charles Emile Yriarte)의 《15세기의 콘도티에로》(Un condottiere au XV Siècle, 1882)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시 "말라테스타 칸토스 (칸토스 8-11)"(1923년 최초 출판)의 주요 자료였다.[6] 이 시는 전사이자 연인이자 후원자로서의 말라테스타의 경력에 대한 기록이다.

에이드리언 스토크스(Adrian Stokes)는 시지스몬도의 궁정에서 만들어진 예술에 대한 연구 《리미니의 돌》(The Stones of Rimini, 1934)을 헌정했다. E. M. 포스터(E. M. Forster)는 말라테스타와 게미스투스 플레톤(Gemistus Pletho)에 관한 역사 소설을 시도했지만,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출판하지 않았다.[7] 앙리 드 몽테를랑(Henry de Montherlant)의 희곡 《말라테스타》(Malatesta, 1946)는 말라테스타의 생애 말년과 교황 파울루스 2세(Paulus PP. II)와의 음모를 다루고 있다.[8]

4. 2. "리미니의 늑대" 별명

에드워드 허튼(Edward Hutton)의 1906년 소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Sigismondo Malatesta)는 1926년 『리미니의 마스티프』(The Mastiff of Rimini)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는데, 이 때문에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가 "리미니의 늑대"로 알려졌다는 인식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6] 그러나 그의 생전에 그러한 별명이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인터넷 이전 시지스몬도에 관한 주류 역사 또는 전기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다.[6][16]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1969년 저서 "문명"(Civilisation)에서 시지스몬도를 "리미니의 늑대"라고 칭하며, "그는 가장 앞선 연극 제작자조차도 무대에 올리는 것을 주저할 만한 일들을 했다"고 언급했다.[17]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MALATESTA (de Malatestis), Sigismondo Pandolfo http://www.treccani.[...] Enciclopedia Italiana 2011-04-27
[3]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New Advent http://www.newadvent[...]
[4] 서적 Erotic Love through the ages http://www.antiqbook[...] 2016-02-16
[5] 서적
[6] 서적 Il lupo di Rimini Pandozzo
[7] 서적 You May Well Ask: A Memoir 1920-1940 https://books.google[...] Fontana Paperbacks
[8] 서적
[9] 문서
[10] 웹사이트 MALATESTA (de Malatestis), Sigismondo Pandolfo http://www.treccani.[...] 이탈리아百科事典 2011-04-27
[11] 웹사이트 ルネッサンス期イタリアの傭兵隊長 その実像 https://www.waseda.j[...] 2022-08-19
[12]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New Advent http://www.newadvent[...]
[13] 서적
[14] 서적 You May Well Ask: A Memoir 1920-1940 https://books.google[...] Fontana Paperbacks
[15] 서적
[16] 서적 Il lupo di Rimini Pandozzo
[17] 서적
[18] 문서
[19] 웹인용 MALATESTA (de Malatestis), Sigismondo Pandolfo http://www.treccani.[...] Enciclopedia Italiana 2011-04-27
[20] 뉴스 The Spectator 2012-08-07
[21]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New Advent http://www.newadvent[...]
[22] 서적 Erotic Love through the ages http://www.antiqbook[...] 2016-02-16
[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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