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 (1625년)
1. 개요
신무(1625년)는 조선 시대의 문인으로, 신승선의 6대손이자 신수근의 5대손이다. 허후, 장현광에게 학문을 배우고, 1666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이익은 그의 학문적 사상을 실천궁행, 공경, 질박함으로 평가했으며, 만년에는 영동에서 여생을 보냈다.
-
한성부 출신 -
신구중 (1682년)
신구중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168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사헌부, 병조 등을 역임하며 강직한 면모를 보였고, 사후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한성부 출신 -
현상건
현상건은 1875년에 태어나 1926년에 사망한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독립운동가이며, 고종의 측근으로서 황제권 강화와 중립 외교에 힘썼고,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윤휴 -
경신환국
-
윤휴 -
권시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권시는 효종 때 공조좌랑으로 등용되어 승정원 승지,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했으나, 상복 문제 당쟁으로 파직 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고 사후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
조선의 교육인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교육인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2. 생애
한성부 출신이며,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6대손이자 신도공 신수근(愼守勤)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신수근의 아들 신홍필(愼弘弼)이고, 증조부는 신사영(愼思永)이며, 할아버지는 진위장군 행충좌위부사과 신수이다. 아버지는 사직서령과 오위장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와 제창군(濟昌君)에 추증된 신득의(愼得義)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향의 후손이나 서출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득의의 서자였다. 그가 서자인 것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중 48권과 60권, 그리고 이익이 쓴 신구중의 묘갈명인 병조정랑신공묘갈명 등에 수록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적형 중의 한명인 신희(愼喜)는 서사, 사헌부감찰, 금오랑 등을 지내고 심기원(沈器遠), 권억(權澺) 등의 모반 진압에 참여한 공로로 영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영평현령 겸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처음 선우협(鮮于浹)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관설 허후(觀雪 許厚)를 찾아과 글과 학문을 배웠다. 허후는 미수 허목의 8촌 종형으로, 허목과 같이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나중에는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글과 학문을 배웠다.
그뒤 허통(許通)이 허락되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1666년(현종 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그의 적형 신희의 양손자 신구중도 있었고, 하빈 신후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후에 왕의 구언에 응하여 보민편(保民篇)을 지어 올렸다.
성호 이익은 그에게서 직접 수학하지는 않았지만, 신무의 학문적 사상을 평할 때, 실천궁행(實踐躬行)과 공경(恭敬), 질박함 등이 그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밖에 식견과 행실이 탁월하여 당대에 이름이 있었다는 평도 있다. 만년에는 영동(嶺東)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처음 묘소는 거창(居昌) 장생동(長生洞)이었으나 뒤에 2004년 5월 27일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수근의 묘소 아래 증조부, 조부 묘소 아래편 왼쪽으로 이장되었다.
2.1. 출생과 가계
한성부 출신이며,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6대손이자 신도공 신수근(愼守勤)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신수근의 아들 신홍필(愼弘弼)이고, 증조부는 신사영(愼思永)이며, 할아버지는 진위장군 행충좌위부사과 신수이다. 아버지는 사직서령과 오위장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와 제창군(濟昌君)에 추증된 신득의(愼得義)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향의 후손이나 서출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득의의 서자였다. 그가 서자인 것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중 48권과 60권, 그리고 이익이 쓴 신구중의 묘갈명인 병조정랑신공묘갈명 등에 수록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적형 중 한 명인 신희(愼喜)는 서사, 사헌부감찰, 금오랑 등을 지내고 심기원(沈器遠), 권억(權澺) 등의 모반 진압에 참여한 공로로 영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영평현령 겸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처음 선우협(鮮于浹)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관설 허후(觀雪 許厚)를 찾아가 글과 학문을 배웠다. 허후는 미수 허목의 8촌 종형으로, 허목과 같이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나중에는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글과 학문을 배웠다.
2.2. 수학과 과거
한성부 출신이며,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6대손이자 신도공 신수근(愼守勤)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신수근의 아들 신홍필(愼弘弼), 증조부는 신사영(愼思永), 할아버지는 진위장군 행충좌위부사과 신수, 아버지는 사직서령과 오위장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와 제창군(濟昌君)에 추증된 신득의(愼得義)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향의 후손이나 서출이었다. 그러나 신무는 신득의의 서자였다. 그가 서자인 것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중 48권과 60권, 그리고 이익이 쓴 신구중의 묘갈명인 병조정랑신공묘갈명 등에 수록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적형 중 한 명인 신희(愼喜)는 서사, 사헌부감찰, 금오랑 등을 지내고 심기원(沈器遠), 권억(權澺) 등의 모반 진압에 참여한 공로로 영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영평현령 겸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처음 선우협(鮮于浹)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관설 허후(觀雪 許厚)를 찾아가 글과 학문을 배웠다. 허후는 미수 허목의 8촌 종형으로, 허목과 같이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나중에는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글과 학문을 배웠다.
그 뒤 허통(許通)이 허락되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1666년(현종 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그의 적형 신희의 양손자 신구중도 있었고, 하빈 신후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후에 왕의 구언에 응하여 보민편(保民篇)을 지어 올렸다.
성호 이익은 그에게서 직접 수학하지는 않았지만, 신무의 학문적 사상을 평할 때, 실천궁행(實踐躬行)과 공경(恭敬), 질박함 등이 그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밖에 식견과 행실이 탁월하여 당대에 이름이 있었다는 평도 있다.
2.3.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한성부 출신이며,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6대손이자 신도공 신수근(愼守勤)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신수근의 아들 중 신홍필(愼弘弼)이고, 증조부는 신사영(愼思永)이며, 할아버지는 진위장군 행충좌위부사과 신수이고 아버지는 사직서령과 오위장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와 제창군(濟昌君)에 추증된 신득의(愼得義)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향의 후손이나 서출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득의의 서자였다. 그가 서자인 것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중 48권과 60권, 그리고 이익이 쓴 신구중의 묘갈명인 병조정랑신공묘갈명 등에 수록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 선우협(鮮于浹)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관설 허후(觀雪 許厚)를 찾아가 글과 학문을 배웠다. 허후는 미수 허목의 8촌 종형으로, 허목과 같이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나중에는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글과 학문을 배웠다.
그뒤 허통(許通)이 허락되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1666년(현종 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그의 적형 신희의 양손자 신구중도 있었고, 하빈 신후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후에 왕의 구언에 응하여 보민편(保民篇)을 지어 올렸다.
성호 이익은 그에게서 직접 수학하지는 않았지만, 신무의 학문적 사상을 평할 때, 실천궁행(實踐躬行)과 공경(恭敬), 질박함 등이 그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밖에 식견과 행실이 탁월하여 당대에 이름이 있었다는 평도 있다.
2.4. 평가
2.5. 만년
한성부 출신이며,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6대손이자 신도공 신수근(愼守勤)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신수근의 아들 중 신홍필(愼弘弼)이고, 증조부는 신사영(愼思永)이며, 할아버지는 진위장군 행충좌위부사과 신수이고 아버지는 사직서령과 오위장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와 제창군(濟昌君)에 추증된 신득의(愼得義)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향의 후손이나 서출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득의의 서자였다. 그가 서자인 것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중 48권과 60권, 그리고 이익이 쓴 신구중의 묘갈명인 병조정랑신공묘갈명 등에 수록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1666년(현종 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그의 적형 신희의 양손자 신구중도 있었고, 하빈 신후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후에 왕의 구언에 응하여 보민편(保民篇)을 지어 올렸다.
성호 이익은 그에게서 직접 수학하지는 않았지만, 신무의 학문적 사상을 평할 때, 실천궁행(實踐躬行)과 공경(恭敬), 질박함 등이 그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밖에 식견과 행실이 탁월하여 당대에 이름이 있었다는 평도 있다. 만년에는 영동(嶺東)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처음 묘소는 거창(居昌) 장생동(長生洞)이었으나 뒤에 2004년 5월 27일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수근의 묘소 아래 증조부, 조부 묘소 아래편 왼쪽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 관계
할아버지는 신수(1554년 5월 14일 ~ 1592년 5월 15일)이고, 할머니는 청송 심씨(1553년 7월 17일 ~ 1634년 4월 27일)로, 평시서령 심응록(沈應祿)의 딸이자 망세당 심선의 5대손이며 첨정 심광록의 증손이다. 백부는 신득인(愼得仁), 숙부는 신득례(愼得禮)와 신득지(愼得智)이며, 고모부는 변호의(邊好誼)이다.
아버지 신득의(愼得義, 1615년 10월 5일 ~ 1679년 9월 6일)는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번째 부인은 강화 최씨(1614년 10월 5일 ~ 1648년 3월 27일)로 통례원상례 최시량의 딸이며 1남 3녀를 두었다. 이복 적형은 신희(愼憙)이고, 이복 누이들은 동래 정씨와 혼인한 이극인(李克仁, 문과 지평)과 정행숙(鄭行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두번째 부인은 한양 조씨(1628년 11월 20일 ~ 1706년 2월 27일)이다.
생모는 순흥 안씨이다. 형은 신유(愼愈)이고, 동생은 신헌(愼憲)이며, 제수는 연일 정씨로 병마절도사 정전현(鄭傳賢)의 딸이다. 동생 신헌의 장남 신휘국(愼徽國)을 양자로 들였고, 양며느리는 전주 이씨로 군수 이명빈(李明彬)의 딸이다. 신헌의 다른 아들로는 신휘언(愼徽言), 신휘유(愼徽猷), 신휘공(愼徽恭)이 있고, 조카사위는 김일태(金日泰)이다. 부인은 본관 미상의 박씨로, 수군절도사 박상준(朴尙俊)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