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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 (15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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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구(154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조식과 이황에게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며, 강원도 관찰사, 안동 부사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냈으나,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 관련하여 사직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왕사부동례를 창시하여 예학 발전에 기여했고, 허목, 장현광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저서로는 《한강문집》, 《태극문변》 등이 있으며, 향토지 편찬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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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 (154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정구
한자 이름鄭逑
로마자 표기Jeong Gu
도가(道可), 가보(可父)
한강(寒岡), 회연야인(檜淵野人)
시호문목(文穆)
출생1543년 7월 9일, 조선 경상도 성주
사망1620년 1월 5일
국적조선
본관청주 정씨
정치 활동
당색남인, 후에 북인
주요 활동예송논쟁 관련 활동

2. 생애

정구는 경상북도 성주군 출신으로, 일찍부터 조식(남명)과 이황(퇴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처음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초당을 지어 후진 교육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선조에 의해 강릉 부사로 발탁되었다. 1594년 이후 강원도 관찰사, 성천 부사, 충주 목사, 안동 부사 등을 역임했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사헌부 대사헌과 세자보양관을 겸임했으나, 여러 차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인에 속했지만, 남명(조식)과 퇴계(이황) 두 학통의 심동도일(心同道一)을 주장하며 학문적 공존을 추구했다.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 「심경발휘(心経発揮)」,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礼説分類)」, 「태극문변(太極問弁)」,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録)」, 「역대기년(歴代紀年)」 등이 있다.

2. 1. 생애 초기

경상북도 성주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고,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이다. 조식(남명)과 이황(퇴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처음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가문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총정탁 형제의 후손이다.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 「심경발휘(心経発揮)」 등이 있다. 남인에 속했지만, 남명과 퇴계 두 학통의 심동도일(心同道一)을 주장하며 학문적 공존을 추구했다.

1555년 5촌 이모부 오건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짧은 시간에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도 나머지를 스스로 깨우쳤다. 1563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향시에 합격했으나 문과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1566년 조식성운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2. 1. 1. 초기 활동

1543년 7월 9일 경상북도 성주 유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총정탁 형제의 후손으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정사중이 충좌위 부사맹이라는 낮은 직책을 지내고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경상북도 성주에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어 5세에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이미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고 유창하게 설명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2] 1555년(명종 10년)에는 5촌 이모부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도 나머지 괘는 스스로 유추하여 깨달았다 한다.

1563년 이황의 문하에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글을 배웠다. 관직에 뜻이 없이 공부에만 전념하였으나, 주변의 권고로 1563년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문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66년에는 조식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아 그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얼마 뒤에는 대곡 성운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당대의 삼현인 퇴계, 남명, 대곡에게서 학문을 익혔지만 벼슬길을 외면하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2] 이후 학문에 구도의 일념으로 정진하였다.[3] 명종조에 여러 번 유일로서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1573년 이조에서 산림의 한사람으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해 11월 동문인 김우옹이 그의 사람됨됨이를 추천하였으나 포의에게 대간직을 임명하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며 선조가 거절하였다. 12월 김우옹이 다시 임금에게 그를 추천하며, 정구는 이황을 따라 글을 배웠고 전에 조식의 문하에 왕래하였으며 재식(才識)이 있는 데다가 학문도 있다고 하였다.[4]

조정에서 정구에게 여러 벼슬을 주어 불렀지만 모두 사양하고 백매헌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2] 이때 덕령부윤 장안세의 8대손 여헌 장현광이 그를 찾아왔는데, 여헌 역시 자신의 스승처럼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를 치루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었다.[2] 여헌은 훗날 정구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조카사위가 되었다.

제자이자 조카사위인 여헌 장현광

2. 1. 2. 성리학 수학

1555년(명종 10년) 무렵 5촌 이모부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도 나머지 괘는 스스로 유추하여 깨달았다.

1563년 이황(李滉)의 문하에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글을 배웠다. 관직에 뜻이 없어 공부에만 전념하였으나, 주변의 권고로 1563년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후 문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66년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아 그의 문하에서도 글을 배웠다. 얼마 뒤에는 대곡 성운(成運)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당대의 삼현인 퇴계, 남명, 대곡에게서 학문을 익혔지만, 벼슬로 출세하는 길을 외면하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2] 이후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3]

2. 2. 정치 활동

1591년 12월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부임했다가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강원도의 험준한 산맥을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개마고원 이북으로의 상륙을 막아냈다.[5] 선조의 서왕자들이 피난 올 때 다른 수령들은 백성들의 습격과 반발을 우려하여 왕자들을 꺼렸으나, 그는 왕자들을 왕자의 예로써 대접하고 그들의 피신을 도왔다.

하릉군 시신을 찾은 공로로 특별히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5] 1594년 12월 특별히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어 피난 중인 조정에 합류하였다. 이어 명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문제를 상의하였고, 경연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다. 1595년 우부승지, 좌부승지, 경연참찬관 등을 거쳐 명나라의 사절을 맞이하였고, 그해 6월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9월 승정원 우승지, 10월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1597년 6월 성천 부사(成川府事)로 부임하였다. 10월 성실성을 인정받아 종2품으로 특별 가자되었으나 사간원이 부당하다 하여 계속 반대하였으나 선조가 이를 듣지 않았다.

1598년 전란이 끝난 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식 문하의 동문이었던 김우옹과 서애 류성룡이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번 천거하였으나, 거듭된 출사 요청에도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의 끈질긴 부탁으로 1600년 9월 의인왕후의 능지 후보지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같은 해 9월 행 부호군(行副護軍), 10월 행 충무위 사직(行忠武衛司直)이 되었으며 10월 관상감 제조로 능지 선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후 승정원우승지(右承旨)·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1월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2월 평창정선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을 신속히 보고하여 처결하였다. 4월에는 울진군의 효자인 幼學|어린 유학중국어 주경안(朱景顔)의 효행과 충의를 보고하여 포상을 건의하였다.[1]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그해 12월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7년 1월 우부승지(友副承旨)가 되었다.[3]

2. 2. 1. 관료 생활

1573년(선조 6년) 조식 문하의 동문이자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인 김우옹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다. 1574년 1월 다시 김우옹이 그를 추천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류성룡 등도 그를 천거하였고 이황, 조식의 문도들의 거듭된 권고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1578년 1월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78년 사포서주부(司圃署主簿)에 임명되어 출사하였다.

이후 삼가현감(三嘉縣監), 의흥현감(義興縣監),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 뒤 1580년(선조 13년) 4월 창녕현감(昌寧縣監)에 임명되자 사은숙배하고 부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갔다. 왕이 그에게 지방관으로서 해야 할 것을 묻자 그는 '학교의 정사(政事)를 먼저 닦아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왕은 그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라며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냈다. 창녕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까지 세워졌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일처리를 공정하게 진행하였고 한번의 사사로운 대접, 선물조차 받지 않았으며, 공정하게 판결을 내렸다. 그가 김우옹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듯 그 또한 우곡(愚谷) 송량(宋亮) 등의 숨어있는 선비들을 발견, 발탁하여 유일 또는 학덕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1581년 9월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자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1582년 군자감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583년 3월 다시 비변사 회의에서 인재를 천거할 때 이이가 그를 다시 천거하였다. 그해 10월 이조판서인 율곡 이이가 그를 선조에게 추천하였다.

1584년(선조 17년) 3월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했다가 1585년 소환되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다. 교정청낭청 재직 중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열, 교정에 참여하였다. 공조 정랑으로 삼았다가 곧바로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으나 수개월만에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587년 함안군수로 나갔다.

1591년 12월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부임했다가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로 재직하면서 창의문을 돌려 의병을 거병하여 통천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까지 쳐들어온 일본군과 상대하였다. 이어 강원도의 험준한 산맥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몰살시키거나 타격을 주어 일본군이 개마고원 이북으로 상륙하는 것을 막아냈다. 또한 선조의 서왕자들이 피난올 때 다른 수령들은 백성들의 습격과 반발을 우려하여 왕자들을 꺼렸으나, 그는 왕자들을 왕자의 예로써 대접하고 그들의 피신을 도왔다.

하릉군 시신을 찾은 공로로 특별히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이후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등을 지냈다. 한편 영남에서는 그의 동문들과 문하생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적하였다.

1594년 12월 특별히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어 피난중인 조정에 합류하였다. 이어 명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문제를 상의하였고, 경연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다. 1595년 우부승지, 좌부승지, 경연참찬관 등을 거쳐 명나라의 사절을 맞이하였고, 그해 6월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9월 승정원 우승지, 10월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1597년 6월 성천 부사(成川府事)로 부임하였다. 10월 성실성을 인정받아 종2품으로 특별 가자되었다. 이후 사간원이 그의 가자를 부당하다 하여 계속 반대하였으나 선조가 이를 듣지 않았다.

1598년 전란이 끝난 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뜻을 두었으며, 조식 문하의 동문이었던 김우옹 역시 정구에게 여러번 나와서 꿈을 펼칠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조용히 사양하였다. 서애 류성룡 역시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번 천거하였다. 거듭된 추천으로 선조는 그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출사하라는 선조와 조정의 끈질긴 부탁, 권고를 이기지 못해 결국 출사하였다. 1600년 9월에는 의인왕후가 죽자 길지를 택해 의인왕후의 능지 후보지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00년 9월 행 부호군(行副護軍), 10월 행 충무위 사직(行忠武衛司直)이 되었으며 10월 관상감 제조로 능지 선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후 승정원우승지(右承旨)·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2. 2. 2. 임진왜란 전후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창의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강원도의 험준한 산맥을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개마고원 이북으로의 상륙을 막아냈다.[5] 또한 선조의 서왕자들이 피난 올 때 다른 수령들은 백성들의 습격과 반발을 우려하여 왕자들을 꺼렸으나, 그는 왕자들을 왕자의 예로써 대접하고 그들의 피신을 도왔다.

금강산으로 피난갔다가 통천군으로 숨었던 선조의 형 하릉군(夏陵君)은 관북(關北)의 토적(土賊)들이 왜적을 인도하여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 끌려가 핍박당할까 근심하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런데 사망한 하릉군의 시체가 사라졌다. 1592년 9월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 염습하고 초상 치르는 일을 의식대로 하였으며, 왜군과 내통한 백성을 체포하여 처벌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1592년 10월 통정대부로 특별 승진하였다.[5]

임진왜란이 일어나 군무(軍務)로 매우 바쁜 시기에 조금의 여가라도 있으면 관동지방의 지지(地誌)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 최현이 그 이유를 묻자, "완급은 진실로 다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겨를이 없다고 해서 놓아두고 지나칠 수는 없다. 지금 서적이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니, 만약 보고 들은 것을 (누군가) 수습해두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에 보일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고 답했다.[5]

1594년 12월 특별히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어 피난 중인 조정에 합류하였다.

2. 2. 3. 강원 감사 재직 시절

1596년 1월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2월 평창정선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을 신속히 보고하여 처결하였다. 4월에는 울진군의 효자인 幼學|어린 유학중국어 주경안(朱景顔)의 효행과 충의를 보고하여 포상을 건의하였다.[1]

주경안은 아버지 주세홍(朱世弘)이 학질로 위독해지자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태워 약에 타서 드려 즉시 효험을 보게 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중풍과 부종으로 전신을 쓰지 못하게 되자, 의원이 지렁이 즙이 약이라 하여 얼어붙는 겨울에 땅을 파 지렁이를 잡아 바쳐 병을 낫게 하였다. 아우 주경삼(朱景參)이 일찍 죽자 기년(期年) 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고, 부모 상에는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제사에 쓸 고기가 없어 말총으로 그물을 만들어 밭에 설치했는데 산비둘기 6마리가 스스로 걸려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인성대비(仁聖大妃)·인순대비(仁順大妃)상과 및 명종 대왕(明宗大王) 국상 때는 상복을 입고 3년 동안 복상(服喪)하였다.[1]

병으로 체직을 청하는 춘천 부사(春川府使) 이준의 정고(呈告)를 받아들여 체차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간원은 이준의 사직을 업무 회피로 보아 탄핵하고 추고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심한 바람으로 곡식이 손상되자 바로 보고하여 조치하였다.[2]

狂風|미친 바람중국어이 불며 큰비가 내려 영월군의 화곡(禾穀)이 손상되었다. 평해군은 4∼5월엔 가물었고 7월에는 흐리고 비가 오며 흙비가 개이지 않았는데 천둥과 번개가 치며 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 홍수가 넘치면서 들판이 모래로 덮였다. 간성군은 5월부터 한 달 동안 흐리고 비가 내려 화곡이 썩었다. 통천군은 철 아닌 바람과 쓸데없는 비로 화곡이 손상되었다. 금성현은 7월부터 동풍(東風)이 크게 불어 곡식 이삭이 손상되었다.[2]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그해 12월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7년 1월 우부승지(友副承旨)가 되었다.[3]

2. 3. 사퇴와 낙향, 후학 양성

1598년 전란이 끝난 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식 문하의 동문이었던 김우옹과 서애 류성룡이 여러 번 천거하였으나, 그는 모두 사양하였다. 거듭된 추천으로 선조는 그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고향에서 성리학을 가르치면서 그는 자신이 스스로 주자의 가례대로 제자들을 대하였고, 제자들에게도 존대를 하고 예의를 갖추었다.[1] 그 뒤 행 부호군(行副護軍)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1]

그러나 선조와 조정의 끈질긴 부탁, 권고를 이기지 못해 결국 출사하였다. 1600년 9월 의인왕후가 죽자 길지를 택해 의인왕후의 능지 후보지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1] 1600년 9월 행 부호군, 10월 행 충무위 사직이 되었으며, 10월 관상감 제조로 능지 선정 작업에 참여하였다.[1] 이후 승정원우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1]

1601년 9월 영월 군수를 거쳐 1602년 1월 청주 목사로 부임하여, 교육시설 확장을 원하는 지역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중수, 지원하여 운곡서원으로 개편하였다.[1] 1603년 3월 홍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그해 8월 사직하고 동지(同知)로 전임되었다.[1]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치중하였다.[1]

1604년 3월 공조참판을 거쳐 그해 8월 광주 목사로 나갔다.[1] 1607년 1월 안동 부사로 부임하였다.[1] 선조가 사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1]

1608년 광해군 즉위 초 북인 조정에서 그를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였다.[1] 그해 3월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어 정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3월 말 상경하여 출사하였다.[1] 그러나 곧 사직소를 올리고 내려갔고, 조정에서는 계속 출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1] 4월 세자 보양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1]

2. 4.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

1608년 광해군 즉위 초 북인 조정에서 임해군이 유배된 뒤, 임해군에 대한 논의가 있자, 정구는 사헌부대사헌을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광해군이 형제간의 은의(恩義)를 온전하게 하는 쪽으로 처리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사직을 청하였다. 이 일로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고 파직당하였다.[1]

이후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10년 7월 그의 문인인 성주(星州)의 생원 정준민(鄭俊敏) 등이 상소를 올려 그를 복권시킬 것을 주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정준민 등이 다시 그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당했고, 그해 9월 성주의 생원 송원기(宋遠器) 등이 다시 그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당했다.[1]

2. 5.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그는 임진왜란으로 사회 질서가 무너진 것에 대한 대안으로 예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왕실은 제왕의 가문이므로 제왕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백성들과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는 후일 북인남인의 이념이기도 한 왕사부동례설(王士不同禮) 창시로 이어진다.[7] 1602년(선조 35년) 1월 청주 목사로 부임하여 교육 시설 확장을 원하는 지역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중수, 지원하여 운곡서원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치중하였다.[7]

그는 관료 생활 중에도, 지방관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퇴청 후에는 서당을 열고 지역 후학을 가르쳤다. 1603년부터 스승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南冥集)》 편찬에 적극 참여하였다.[7] 광해군 즉위 후 《남명집》을 편찬하던 도중, 조정에 오현의 문묘 종사 여론이 나올 때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대상에서 빠진 것을 불쾌히 여겨 이황이언적을 비판, 배척하자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정인홍이 남명집의 발문을 작성하는 것을 반대하여 정인홍과의 감정 싸움 끝에 그와 절교를 선언하였다.[7]

인목대비 폐모론까지 나타나자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백매원(百梅園)을 설립하고 후학 유생들을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과 가까워졌지만, 그의 문하생들은 남인북인에 두루 폭넓게 진출해 있었고, 그 역시 이황의 문인이자 조식의 문인으로 남인북인 모두에 동문수학한 동지들을 두고 있었다.[7]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 서경덕의 문인들, 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다.

그는 수많은 문하들을 배출하였으며, 한강문인록(寒岡門人錄)에는 문인이 모두 34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7] 그의 제자로는 문위, 장현광, 장흥효, 이윤우, 서사원, 이천봉, 이천배, 최항경, 송원기, 손처눌, 허목, 황종해 등이 있다. 이 중 장현광허목은 그의 제자들 중 특히 이름이 높았으며, 허목광해군 때의 혼란기에 관직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그의 문하에서 오래 수학하던 중 정구가 사망하자 그의 고제자였던 문위와 장현광을 찾아가 그들의 문하에서도 수학한다. 허목은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고, 조선 후기 남인 성리학의 거두이자 실학파의 기원이 된다.[7] 또한 그의 문하생들 중 한준겸 등 소수는 특이하게도 서인의 당원이 된다.[8]

3. 사상과 학문적 치적

정구는 철저한 주자학자였지만, 성리학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이황조식에게서 모두 배운 그는 두 학문을 절충하여 한강학 또는 한려학(寒旅學)이라는 새로운 학파를 창설했다. 한려학파에서는 근기남인의 시조격인 허목, 윤휴 등이 배출되었다. 그는 예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예의가 아니라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의 이론과 가례를 철저하게 지켰으나, 문인과 주변인들에게 이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주자를 존경할 유학자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다른 학자들의 견해 외에 주자의 견해를 직접 해석했고, 공자, 맹자, 순자 등의 견해도 선학자들의 주장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해석하여 가르쳤다.

1603년 스승 이황정민정의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비판한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육구연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정이, 정호,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했다.[11] 《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이황학파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도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를 분류해 ≪개정주자서절요총목 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 聖賢風範》, 《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 《염락갱장록 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11]

그는 시에도 주자성리학의 영향을 담아 현실의 경치와 경관을 묘사했다. 〈무휼구곡시〉는 회연서원 뒤편 봉비암에서부터 대가천 물줄기를 따라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 용추까지 아홉 구비를 노래한 것이다.[10] 이 시의 서시에서 "주부자께서 일찍이 깃들었던 곳,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라고 밝힌 것처럼, 그는 조선 땅에서 주자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다.[10] 무휼구곡시의 첫 수는 다음과 같다.[10]

> 첫째 구비 여울목에 고깃배 띄우니

>

> 석양 부서지는 냇가 실 같은 바람 감도네

>

> 뉘 알리오. 인간 세상의 근심 다 버리고.[10]

>

> 박달 나무 삿대 잡고 저문 연기 휘저을 줄을.[12]

이 시에는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수양 논리로 이해하는 성리학적 자연관이 담겨 있다.[12]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며 인간의 욕망을 막고 물의 근원을 찾아 인간 심성의 근원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12]

동양 역사 지식도 해박했던 그는 《역대기년 歷代紀年》, 《고금충모 古今忠謨》, 《치란제요 治亂提要》 등을 저술했다. 기자조선-신라 위주로 편찬되던 기존 역사와 달리 단군조선의 중요성도 지적했는데, 이는 허목, 이익, 안정복 등에게 영향을 주어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역사서 편찬에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의 영향을 받았고, 연표 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 등 동양 여러 국가들의 역사를 정리했다. 강목체 서술을 하면서도 정통론의 특징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독자적인 역사로 규정했으며, 이는 허목동사, 안정복동사강목 등에 영향을 준다.

정구는 안질환을 진맥할 수 있었고, 의학서 《의안집방》을 간행했다. 또한 집에 소장한 의학서들을 참고하여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광사속집》 등을 편찬하여 시골과 산골 백성들에게 보급했다.

그는 관직에 임명될 때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지방관을 자원했는데, 이는 당쟁에 얽힌 중앙정계보다 지방에서 학문을 융성시키고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는 신념 때문이었다.[3]

3. 1. 왕사부동례 창시

그는 왕가례(王家禮)와 사가례(士家禮)의 차별성을 강조하여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의 왕은 중국의 신하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의 국왕은 조선에서의 국왕이므로 왕가의 가례를 적용해야 된다고 보았다. 이는 《의례경전통해》의 체재를 기본으로 하고 사마광, 장재, 정호, 정이, 주자 등의 예설을 바탕으로 가(家)·향(鄕)·방국(邦國)·왕조례(王朝禮)를 복원한 《오선생예설분류》에 설명되어 있다. 이는 허목의 방국왕조례로 계승되었고,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왕가 예절과 일반 사대부 예절이 다르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7]

3. 2. 학문 연구와 남인, 북인 학자 양성

(말년에 얻은 제자로, 남인의 당수이자 실학으로 이어지는 중간고리였으며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백호 윤휴
(정구의 문인 윤효전의 아들로 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정구는 경학, 산수, 음양오행, 풍수지리, 의약, 병진(兵陣)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했다.[7] 허목(許穆), 장현광(張顯光), 배상룡(裵尙龍), 윤효전(尹孝) 등 남인과 북인의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다. 특히, 허목은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주요 논객으로 활약했으며, 조선 후기 남인 성리학실학의 기원이 되었다.[7]

그는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으며, 기록에 전하는 문인만 300여명이다. '한강문인록(寒岡門人錄)'에는 문인이 모두 34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7]

유명 문인으로는 초기의 제자인 문위, 장현광, 장흥효(張興孝), 이윤우(李潤雨), 서사원(徐思遠) 등과 이천봉(李天封), 이천배(李天培), 최항경(崔恒慶), 송원기(宋遠器), 손처눌(孫處訥), 그리고 후기의 제자인 허목(許穆), 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이중 장현광허목은 특히 이름이 높았으며, 허목광해군 때의 혼란기에 관직을 단념하고 정구의 문하에서 오래 수학했다. 정구 사망 후에는 그의 고제자였던 문위와 장현광을 찾아가 그들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허목은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고, 조선 후기 남인 성리학의 거두이자 실학파의 기원이 된다.

그의 문하생들 중 한준겸(韓浚謙) 등 소수는 특이하게도 서인의 당원이 되었다.[8]

그의 사상은 허목, 윤휴, 윤선도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을 통해 후대의 남인성리학자와 남인실학자들에게로 계승되었다. 그의 학통은 제자 윤효전허목을 통해 유형원, 이서우를 거쳐 이익, 오상렴, 강박, 신후담, 안정복, 채제공, 정약용 등에게로 이어진다.

3. 3. 향토지 편찬

1580년 《창산지》를 편찬한 정구는 자신이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직접 답사하거나 자료를 수집하여 《동복지》, 《관동지》, 《영가지》, 《평양지》, 《함주지》 등 지역 향토지를 간행하였다.[1]

정구가 향토지를 편찬한 목적은 향약 외에도 지역 전통을 기록하여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풍속을 순화하며 교육과 교화를 이루는 것이었다.[1] 정구가 편찬한 각 지역 향토지 중 기록에 남은 것은 7종이며, 그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함주지》뿐이다.[1]

3. 4. 주자학에 대한 관점

주자학에 깊이 몰두하였다. 주자와 관련된 운곡(雲谷)·무이산(武夷山)·백록동(白鹿洞)·회암(悔庵)에서 마지막 글자를 따 《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를 편찬하고, 〈무이구곡도 武夷九谷圖〉를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하기도 하고, 《무이지 武夷志》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10] 특히 주자의 〈무이구곡지〉에 차운을 한 〈무이구곡시〉 10수는 그가 얼마나 주자를 그리워하면서 주자학을 철저하게 체현하려 했는지를 알게 한다.[10]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였음에도 주자의 생각만이 진실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주자를 존경할 유학자로 인정하되 그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뒤 다른 학자들의 견해 외에 주자의 견해를 직접 해석하였고, 공자맹자, 순자의 견해 등도 선학자들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직접 해석하여 문인,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1603년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비판한 스승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저술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이정(二程, 정이, 정호)과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11]

《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잘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이황학파의 하나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 역시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를 분류해 ≪개정주자서절요총목 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 聖賢風範》·《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염락갱장록 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11]

3. 5. 시의 작품성

그는 작품에서 현실의 경치, 경관을 주로 묘사했다. 그러나 시에도 주자성리학적 영향이 함축되어 있다.

〈무휼구곡시〉는 정구가 배향되어 있는 회연서원 뒤편 봉우리인 봉비암에서부터 대가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의 용추에 이르기까지 아홉 구비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이다.[10] 이 시의 서시에서 "주부자께서 일찍이 깃들었던 곳,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라고 한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땅에서 주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10]

무휼구곡시의 첫 수는 이러하다.[10]

:첫째 구비 여울목에 고깃배 띄우니

:석양 부서지는 냇가 실 같은 바람 감도네

:뉘 알리오. 인간 세상의 근심 다 버리고.[10]

:박달 나무 삿대 잡고 저문 연기 휘저을 줄을.[12]

이 시에는 정구의 성리학적 자연관이 내포되어 있다.[12] 성리학적 자연관이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수양 논리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면서 인간의 다양한 감각적 욕망에서 발생하는 인욕(人慾)을 막고 물의 근원을 찾아 인간 심성의 근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12] 인간 세상의 모든 근심을 버리고자 한 것이다.[12]

3. 6. 역사서 편찬

그는 《역대기년》, 《고금충모》, 《치란제요》 등을 저술하여 역사 지식을 정리하고 평가했다.[1] 기자조선-신라 위주로 편찬되던 기존의 역사와는 다르게 단군조선의 중요성도 지적했는데, 허목, 이익, 안정복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아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영향을 받아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연표 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 등 동양 여러 국가들의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강목체 서술을 하면서도 정통론의 특징도 보이기 시작하였다.[1] 그의 역사 서술은 강목론 형식과 이후 나타나는 정통론으로 넘어가는 중간 연결고리를 형성하였다.[1]

그는 조선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독자적인 역사로 규정하였다.[1] 이는 허목동사, 안정복동사강목 등에 영향을 주었다.[1]

3. 7. 의학서 편찬

간단한 민간요법 외에도 안질환을 진맥할 수 있었다.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학서 《의안집방》을 간행하였으며, 집에 소장한 의학서와 기타 의학서들을 참고하여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한 《광사속집》 등의 의서를 편찬하여 시골과 산골의 백성들에게 보급하기도 했다.

3. 8. 남인과 북인 당원 양성

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남인북인에 폭넓게 진출하였다.[7] 허목은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고, 조선 후기 남인 성리학의 거두이자 실학파의 기원이 된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한준겸과 같이 특이하게도 서인 당원이 된 경우도 있었다.[8] 그의 학통은 제자 윤효전허목을 통해 유형원, 이서우를 거쳐 이익, 안정복, 정약용 등에게로 이어진다.

4. 저서

정구는 《한강문집》, 《태극문변》, 《심경발휘》, 《오선생예설분류》, 《수사언인록》, 《역대기년》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4. 1. 저서


  • 《한강문집》
  • 《태극문변》
  •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 《갱장록(羹墻錄)》
  • 《심경발휘(心經發揮)》
  •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
  •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 《오복연혁도(五福沿革圖)》
  • 《퇴계상제례문답(退溪喪祭禮問答)》
  • 《개정주자서절요총목(改定朱子書節要總目)》
  • 《성현풍(聖賢風)》
  • 《성현풍범(聖賢風範)》
  •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 《관의(冠儀)》
  • 《혼의(婚儀)》
  • 《장의(葬儀)》
  • 《계의(稧儀)》
  • 《역대기년(歷代紀年)》
  • 《고금충모(古今忠謨)》
  • 《치란제요(治亂提要)》
  • 《와룡지(臥龍誌)》
  • 《의안집방(醫眼集方)》
  • 《광사속집(廣嗣續集)》
  • 《창산지(昌山誌)》
  • 《동복지(同福志)》
  • 《관동지(關東志)》
  • 《영가지(永嘉誌)》
  • 《평양지(平壤志)》
  • 《함주지(咸州誌)》
  •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 《고금회수(古今會粹)》


정구의 저서로는 《한강집》, 《심경발휘》, 《오선생예설분류》, 《태극문변》, 《수사언인록》, 《역대기년》 등 다수가 있다.

4. 2. 예학서


  •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 《갱장록》
  • 《심경발휘(心經發揮)》
  •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
  •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 《오복연혁도(五福沿革圖)》
  • 《퇴계상제례문답(退溪喪祭禮問答)》
  • 《개정주자서절요총목(改定朱子書節要總目)》
  • 《성현풍(聖賢風)》
  • 《성현풍범(聖賢風範)》
  •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4. 3. 편저

《冠儀|관의중국어》, 《婚儀|혼의중국어》, 《葬儀|장의중국어》, 《稧儀|계의중국어

4. 4. 역사서


  • 《역대기년》[1]
  • 《고금충모》[1]
  • 《치란제요》[1]
  • 《와룡지》[1]

4. 5. 의학서


  • 《의안집방》
  • 《광사속집》

4. 6. 향토사료집


  • 《창산지》
  • 《동복지》
  • 《관동지》
  • 《영가지》
  • 《평양지》
  • 《함주지》

4. 7. 소설


  • 《주자시분류》
  • 《고금회수》

5. 가계

항목내용
조부정응상(鄭應祥)
아버지정사중(鄭思中)
어머니성주 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
정곤수(鄭崑壽)
본인정구
아들정장(鄭樟)


6. 사후

1623년 남인계 제자들과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 등이 그의 학문적 공적을 기려 포상을 건의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인조 3년) 문하생인 이윤우(李潤雨)가 왕에게 시호를 상주하는 상소를 올려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려졌다. 뒤에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이 가증(加贈)되었다.

사후에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평안북도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강원도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대구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충청북도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전라남도 화순의 도원서원, 경북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경남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7. 기타

정구는 몸단속을 매우 엄하게 하였으며 예학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14] 성품은 한가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으나, 왕조실록에는 '성품이 진중하지 못했다.[15]'는 비평이 실려있기도 하다.

퇴계 이황의 사당에 정구와 그의 제자이자 조카사위인 장현광 중 누구를 먼저 배향하느냐를 놓고 정구의 다른 후학들과 장현광의 후학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해군이여빈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상소한 회퇴 변척소를 한강 정구가 내용을 첨삭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다.[16]

함안 출신 학자 간송 조임도는 이여빈의 상소문을 입수하여 읽고 박백화(무민당 박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임도는 박인에게 '이 찰방의 종사와 관계된 상소는 지난해 제가 직접 보고 물어보니, 한강이 첨삭했다는 설은 크게 허황된 것입니다. 이미 지은 뒤에 한 번 훑어봤을 따름이라고 하니, '필삭' 두 글자는 무함에 가까우므로 제가 손수 지워 없애버렸습니다. 편지 쓸 종이를 마주하니 멍하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16]

참조

[1] 웹사이트 Jeong gu http://100.daum.net/[...]
[2] 서적 청백리 열전 매일경제신문사 1993
[3] 웹인용 정구:네이트 https://web.archive.[...] 2012-01-09
[4] 기사 주강에 김우옹이 정구에 대해 아뢰다 1573-12-22
[5] 서적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6] 문서
[7] 웹인용 한강 정구 https://web.archive.[...] 2012-01-09
[8] 문서
[9] 서적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10] 서적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11] 웹사이트 정구 https://terms.naver.[...]
[12] 서적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13] 서적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14] 기사 정구를 창녕 현감으로 삼다 1580-04-01
[15] 기사 정구·이호의·민여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604-03-12
[16] 간행물 《간송속집 제3권》 서간(書)편, 박백화(朴伯和)인(絪) 에게 주는 편지 세 통(與朴伯和 絪○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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