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수근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자 중종의 장인이다. 성종 때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연산군 시대에는 권세를 누렸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에게 피살되었으나, 영조 시대에 이르러 충신으로 평가받아 사당이 세워졌다.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50년 출생 - 히에로니무스 보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15-16세기 네덜란드 출신 화가로, 종교적 주제를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며 삼면 제단화 형식을 즐겨 사용했고, 후대 화가와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1450년 출생 - 존 캐벗
존 캐벗은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로, 헨리 7세의 후원을 받아 북미 대륙을 탐험하여 뉴펀들랜드에 상륙, 영국령을 선포했으며, 1498년 탐험 중 실종되었다. - 1506년 사망 - 안드레아 만테냐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는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에게 사사하여 고대 로마 미술에 대한 관심과 원근법 사용을 특징으로 하며, 만토바 궁정 화가로서 곤차가 가문 묘사, 〈카이사르의 개선〉,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등의 작품을 남겨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1506년 사망 -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초기 국방 강화와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자행하여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폭정, 한글 탄압, 사찰 훼손, 방탕한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거창 신씨 - 신성범
신성범은 KBS 기자 출신으로 제18대, 19대, 2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현재 제22대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 거창 신씨 - 신후담
신후담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성리학자로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서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했고,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서학변》을 저술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인 공서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 신수근 | |
|---|---|
| 신수근 | |
![]() | |
| 기본 정보 | |
| 출생 | 1450년 |
| 사망 | 1531년 6월 20일 (향년 81세) |
|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
| 본관 | 고령 신씨 |
| 자 | 입지(立之) |
| 호 | 소한당(所閒堂) |
| 관력 | |
| 주요 관직 | 영의정 좌리공신 영중추부사 |
| 가족 관계 | |
| 부 | 신전(申㷓) |
| 모 | 정부인 안동 권씨 |
| 배우자 | 정부인 청송 심씨 |
| 자녀 | 4남 1녀 |
| 장남 | 신상 |
| 차남 | 신항 |
| 3남 | 신사헌 |
| 4남 | 신응 |
| 딸 | 정숙옹주 |
| 사돈 | 장경왕후, 심정 |
| 기타 | |
| 신도비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위치 |
2. 생애
신승선의 아들로 어머니 중모현주는 임영대군의 딸이자 조선 세종대왕의 손녀딸이었다. 성종 때 음서를 통해 장령이 되어 조정에 입문하였고, 누이동생이 연산군의 비가 된 뒤로 우승지, 도승지, 이조 판서,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진성대군(중종)이 그의 사위가 되었다.[1]
최종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이고, 익창군(益昌君)에 봉해졌다. 1506년 가을 박원종, 성희안 등은 그에게 꾸준히 사람을 보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권고했으나 신수근은 자신의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1]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가 보낸 이심,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1]
《중종실록》은 신수근이 폐비 신씨(愼氏)의 오빠로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세력과 지위가 극히 융성하여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으며, 오랫동안 이조(吏曹)를 맡아 거리낌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輻湊)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고 기록하고 있다.[2] 또한 주인을 배반한 노비(奴婢)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豪奢)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고 한다.[2]
그러나 <영조실록>은 임금이 ‘고금 동충(古今同忠)’이라는 4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愼守勤) 은 포은 정몽주(圃隱)과 함께 충의(忠義)가 같다."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閣)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
1739년(영조 15년) 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익창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1]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1] 그와 그의 동생은 처형되었지만 아들 신홍조와 손자 신사헌은 연좌되지 않고 관직에 나갈수 있었다.
2. 1. 초기 생애
신수근은 신승선의 아들이고, 어머니 중모현주는 임영대군의 딸이자 세종대왕의 손녀였다.[1] 성종 때 음서로 장령이 되어 조정에 입문했고, 누이동생이 연산군의 비가 되면서 우승지, 도승지, 이조 판서,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1] 또한 진성대군이 그의 사위가 되었다.[1] 최종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이고, 익창군(益昌君)에 봉해졌다.[1]1506년 가을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권고했으나, 신수근은 자신의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1]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가 보낸 이심,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1]
《중종실록》은 신수근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으며, 오랫동안 이조(吏曹)를 맡아 뇌물이 폭주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고 기록하고 있다.[2] 그러나 영조실록은 신수근을 포은과 함께 충의(忠義)가 같다고 평가하며, 사우(祠宇)와 각(閣)을 세우라고 명하였다.[3]
1739년 (영조 15년) 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익창부원군으로 추증되었고,[1]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1] 그와 그의 동생은 처형되었지만, 아들 신홍조와 손자 신사헌은 연좌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2. 2. 연산군 시대의 활동
신승선의 아들이며, 어머니 중모현주는 임영대군의 딸이자 조선 세종대왕의 손녀였다. 성종 때 음서를 통해 장령이 되어 조정에 입문하였고, 누이동생이 연산군의 비가 된 뒤로 우승지, 도승지, 이조 판서,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진성대군(중종)이 그의 사위가 되었다.[1]최종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이고, 익창군(益昌君)에 봉해졌다. 1506년 가을 박원종, 성희안 등은 그에게 꾸준히 사람을 보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권고했으나 신수근은 자신의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가 보낸 이심,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1]
《중종실록》은 신수근이 폐비 신씨(愼氏)의 오빠로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세력과 지위가 극히 융성하니,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랫동안 이조(吏曹)를 맡아 거리낌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輻湊)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 주인을 배반한 노비(奴婢)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豪奢)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고 한다.[2]
그러나 영조는 신수근은 포은 정몽주(圃隱)과 함께 충의(忠義)가 같다고 평가하며 그를 기리는 사우를 짓게 하였다.[3]
2. 3. 중종반정과 죽음
신승선의 아들로 어머니 중모현주는 임영대군의 딸이자 조선 세종대왕의 손녀딸이었다. 성종 때 음서를 통해 장령이 되어 조정에 입문하였고, 누이동생이 연산군의 비가 된 뒤로 우승지, 도승지, 이조 판서,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진성대군(중종)이 그의 사위가 되었다.최종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이고, 익창군(益昌君)에 봉해졌다. 1506년 가을 박원종, 성희안 등은 그에게 꾸준히 사람을 보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권고했으나 신수근은 자신의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가 보낸 이심,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
《중종실록》은 신수근이 폐비 신씨(愼氏)의 오빠로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세력과 지위가 극히 융성하여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으며, 오랫동안 이조(吏曹)를 맡아 거리낌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輻湊)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주인을 배반한 노비(奴婢)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豪奢)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실록>은 임금이 ‘고금 동충(古今同忠)’이라는 4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愼守勤) 은 포은(圃隱)과 함께 충의(忠義)가 같다."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閣)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739년(영조 15년) 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익창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와 그의 동생은 처형되었지만 아들 신홍조와 손자 신사헌은 연좌되지 않고 관직에 나갈수 있었다.
2. 4. 사후 복권
1506년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이 보낸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1]《중종실록》은 신수근이 폐비 신씨의 오빠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렸으며, 뇌물을 받고 원수를 갚는 등 방자한 행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 반면, 《영조실록》은 영조가 신수근에게 ‘고금 동충(古今同忠)’이라는 글을 내리고 포은 정몽주와 충의가 같다고 평가하며 사당을 짓도록 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
1739년(영조 15년) 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익창부원군으로 추증되었으며,[1]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와 그의 동생은 처형되었지만, 아들 신홍조와 손자 신사헌은 연좌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3. 가족 관계
신수근은 중종의 장인이며, 연산군의 처남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외증손자로, 사돈인 성종은 그의 외재종형이 된다. 성종은 두 아들들을 신수근의 누이와 딸에게 각각 장가들게 해 이중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다.
4. 관련 작품
4. 1. 드라마
- 1984년부터 1985년까지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설중매에서는 배우 박영태가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 1994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이기철이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 1995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배우 임병기가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 1998년부터 2000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 2007년부터 2008년까지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김상원이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 2011년부터 2012년까지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유정석이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 2017년 KBS2에서 방영된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장현성이 신수근 역을 연기했다.
4. 2. 영화
5. 기타
그의 장인 권람의 아호도 소한당(所閑堂)이다.
참조
[1]
서적
영조실록
1739-03-30
[2]
간행물
중종실록
민족문화추진회
[3]
서적
영조실록
1776-08-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