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카하라 도시오
1. 개요
쓰카하라 도시오는 1910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도메이 통신사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0선 의원을 지냈으며, 요시다 시게루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보수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후쿠다 다케오 파벌에 속해 건설정무차관, 중의원 예산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제1차 사토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장관,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노동대신을 지냈다. 1975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하고, 오키나와 반환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등 보수 정치 세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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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쓰카하라 도시오 |
|---|---|
| 원어명 | 塚原 俊郎 (つかはら としお) |
| 출생일 | 1910년 10월 2일 |
| 출생지 | 일본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 |
| 사망일 | 1975년 12월 7일 |
| 사망지 | 일본 이바라키현 |
| 출신 학교 |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 |
| 정당 | 민주자유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
| 칭호/훈장 | 정3위 훈1등 |
| 친족 (정치인) | 장남 쓰카하라 슌페이 |
| 직책 | 제32대 노동대신 |
|---|---|
| 내각 | 제3차 사토 개조내각 |
| 임기 시작 | 1972년 1월 28일 |
| 임기 종료 | 1972년 7월 7일 |
| 퇴임 이유 | 내각 총사직 |
| 직책 | 제14-15대 총리부 총무장관 |
| 내각 |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내각 제2차 사토 내각 |
| 임기 시작 | 1966년 12월 3일 |
| 임기 종료 | 1967년 11월 25일 |
| 퇴임 이유 | 내각 개조 |
| 직책 | 중의원 의원 |
| 선거구 | 이바라키 2구 |
| 당선 횟수 | 10회 |
| 임기 시작 | 1949년 1월 24일 |
| 임기 종료 | 1975년 12월 7일 |
| 퇴임 이유 | 사망 |
| 기타 직책 | (총재: 사토 에이사쿠) |
| 임기 시작 | 1970년 |
| 임기 종료 | 1971년 |
| 전직 | 운수대신 비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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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노동대신 -
지바 사부로
지바 사부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석유 및 에너지 관련 기업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미야기현 지사와 중의원 의원, 노동대신을 역임하고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다가 1979년 사망했다. -
일본의 노동대신 -
이시다 히로히데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시다 히로히데는 이시바시 단잔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자유민주당에서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여러 내각의 관방장관, 노동상, 운수상을 역임하며 노동 문제 해결에 힘썼고, 자민당의 위기를 경고하기도 했으나 소련 간첩 의혹 속에 정계를 은퇴했다. -
도쿄 대학 동문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도쿄 대학 동문 -
김상협
김상협은 삼양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의 조카로, 도쿄대 졸업 후 고려대 교수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며,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
중의원 의원 -
아사누마 이네지로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으로서 일본 노농당 창립, 도쿄 시의회 의원, 국회 의원, 사회당 재건, 헌법 9조 개정 및 재군사화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반대 투쟁 중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
중의원 의원 -
오히라 마사요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6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외무대신 시절 한일 및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총리 재임 중 환태평양 연대 구상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총선 직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 생애
쓰카하라 도시오는 1910년 10월 2일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에서 태어났다. 이바라키 교육계에서 명교장으로 알려진 교육자 쓰카하라 스에키치의 차남으로, 이바라키현립 미토 제1고등학교, 미토 고등학교를 거쳐 1935년에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도메이 통신사에 입사해 10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전후에는 관계에 입성해 정보국 정보관, 내무성 지방국 여론조사과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에 마스다 가네시치 운수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1949년 총선에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아 구 이바라키 2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연속 10회 당선되었다. 당내에서 아소 다카키치, 후쿠나가 겐지 등과 함께 요시다 시게루의 측근 그룹에 속했다.
보수합동 이후 자유민주당 소속이 되었고 사토 에이사쿠-후쿠다 다케오 파벌에서 활동했다. 건설정무차관, 중의원 예산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위원장을 거쳐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에서 총리부 총무장관으로 첫 입각했다. 1970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어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반환 문제에 대처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에서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상으로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당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2월 7일, 나카미나토시 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현 연합 나카미나토 지부 확대 총회에서 연설하던 중 급성 심부전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사후 정3위 훈1등에 추서되었다. 그의 지반은 장남 쓰카하라 슌페이가 계승했다.
3. 정치 경력
쓰카하라 도시오는 1949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구 이바라키 2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이케다 하야토, 오카자키 가쓰오, 마에오 시게사부로, 하시모토 류고 등도 함께 당선되었다. 이후 10회 연속 당선되었다. 당내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측근 그룹의 일원이었다.
보수 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파 - 후쿠다 다케오 파에 소속되었다. 건설 정무 차관, 중의원 예산 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1970년에는 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 대신에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당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2월 7일, 이바라키현 나카미나토시 공회당에서 열린 자유민주당 현 연합 나카미나토 지부 확대 총회에서 연설 도중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정삼위훈1등에 추서되었다. 1975년 12월 1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이시노 히사오가 추도 연설을 했다.
쓰카하라 도시오는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 그룹 중 한 명으로,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오키나와 반환 협상 과정에서 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일본의 보수 정치 세력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1. 중의원 의원 활동
쓰카하라 도시오는 1949년 (쇼와 24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구 이바라키 2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이케다 하야토, 오카자키 가쓰오, 마에오 시게사부로, 하시모토 류고 등도 함께 당선되었다. 이후 10회 연속 당선되었다. 당내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측근 그룹의 일원이었다.
보수 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파 - 후쿠다 다케오 파에 소속되었다. 건설 정무 차관, 중의원 예산 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1970년에는 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 대신에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당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2월 7일, 이바라키현 나카미나토시 공회당에서 열린 자유민주당 현 연합 나카미나토 지부 확대 총회에서 연설 도중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정삼위훈1등에 추서되었다. 1975년 12월 1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이시노 히사오가 추도 연설을 했다.
3.2. 주요 정책 및 활동
쓰카하라 도시오는 요시다 시게루 측근 그룹의 일원으로, 보수 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파 - 후쿠다 다케오 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건설 정무 차관, 중의원 예산 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1970년에는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 대신에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내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하며 주요 직책을 맡았다.
4. 역대 선거 기록
| 선거명 | 회차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
| 1949년 총선 | 24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민주자유당 | 27,502표 | 15.1%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2년 총선 | 25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당 (1950년) | 37,268표 | 18.7%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3년 총선 | 26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당 (1953년) | 47,063표 | 22.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5년 총선 | 27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일본민주당 | 40,343표 | 18.3%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8년 총선 | 28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6,717표 | 23.5%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0년 총선 | 29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9,526표 | 24.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3년 총선 | 30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64,062표 | 25.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7년 총선 | 31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69,557표 | 28.3%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9년 총선 | 32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0,268표 | 29.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2년 총선 | 33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6,511표 | 27.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쓰카하라 도시오는 모리 기요시의 후임으로 1966년 12월 3일부터 1967년 11월 25일까지 14·15대 총리부 총무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1972년 1월 28일부터 1972년 7월 7일까지 32대 노동대신을 역임했고, 후임자는 다무라 하지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