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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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69년에 실시되었으며, 중선거구제를 기반으로 치러졌다. 자유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며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연임에 성공했고, 오키나와 반환을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사회당은 의석수를 대폭 잃으며 참패했고, 공명당, 민사당, 일본공산당은 의석을 늘리며 약진했다. 이번 선거는 훗날 일본의 주요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의 국회 진출과 자민당의 장기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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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 |
![]() | |
선거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1967년 일본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1967 |
선거일 | 1969년 12월 27일 |
다음 선거 | 1972년 일본 총선 |
다음 선거 연도 | 1972 |
선출 의석 | 중의원 전체 486석 |
과반 의석 | 244 |
투표율 | 68.51% (5.47pp) |
총리 | |
선거 전 총리 | 사토 에이사쿠 |
선거 전 정당 | 자유민주당 |
선거 후 총리 | 사토 에이사쿠 |
선거 후 정당 | 자유민주당 |
주요 정당 및 지도자 | |
정당 1 | 자유민주당 |
지도자 1 | 사토 에이사쿠 |
지난 선거 1 | 48.80%, 277석 |
의석 1 | '288' |
의석 변동 1 | 11 |
득표수 1 | '22,381,570' |
득표율 1 | '47.63%' |
득표율 변동 1 | 1.17pp |
![]() | |
정당 2 | 일본사회당 |
지도자 2 | 나리타 도모미 |
지난 선거 2 | 27.88%, 140석 |
의석 2 | 90 |
의석 변동 2 | 50 |
득표수 2 | 10,074,101 |
득표율 2 | 21.44% |
득표율 변동 2 | 6.44pp |
![]() | |
정당 3 | 공명당 |
지도자 3 | 다케이리 요시카쓰 |
지난 선거 3 | 5.38%, 25석 |
의석 3 | 47 |
의석 변동 3 | 22 |
득표수 3 | 5,124,666 |
득표율 3 | 10.91% |
득표율 변동 3 | 5.53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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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4 | 민주사회당 |
지도자 4 | 니시무라 에이치 |
지난 선거 4 | 7.40%, 30석 |
의석 4 | 31 |
의석 변동 4 | 1 |
득표수 4 | 3,636,591 |
득표율 4 | 7.74% |
득표율 변동 4 | 0.34pp |
![]() | |
정당 5 | 일본공산당 |
지도자 5 | 미야모토 겐지 |
지난 선거 5 | 4.76%, 5석 |
의석 5 | 14 |
의석 변동 5 | 9 |
득표수 5 | 3,199,032 |
득표율 5 | 6.81% |
득표율 변동 5 | 2.05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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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2. 1. 1960년대 일본의 정치 상황
2. 2. 오키나와 반환 문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던 오키나와는 1969년 당시 일본 반환을 앞두고 있었다. 오키나와 반환 문제는 일본의 주권 회복과 동아시아 안보 질서 재편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 선거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오키나와 반환은 한국의 안보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였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는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도 주일미군의 역할과 동북아 안보 지형 변화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높았다.2. 3. 국내 정치 상황
3. 선거 제도
3. 1. 중선거구제
1969년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중선거구제를 기반으로 시행되었다. 각 선거구에서 3~5명의 의원을 선출하였으며, 3인 선거구는 43개, 4인 선거구는 39개, 5인 선거구는 40개였다. 소선거구제는 1인 선거구 1개가 있었다. 중선거구제는 여러 정당이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군소 정당의 원내 진출에 유리했지만, 과도한 경쟁 및 파벌 정치 심화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투표는 비밀투표로, 단기투표, 1표제로 진행되었다. 선거권은 만 20세 이상의 일본 국민에게 주어졌고,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의 일본 국민에게 주어졌다. 당시 유권자 수는 69,260,424명으로, 남성은 33,461,344명, 여성은 35,799,080명이었다.
3. 2. 선거권 및 피선거권
3. 3. 선거 운동
이 선거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자들이 텔레비전을 선거 운동 수단으로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총선거였다.[2] 이전에는 일본의 엄격한 선거 운동법에 따라 금지되어 있었다.[2] 제61회 임시국회(1968년 12월 27일~1969년 8월 5일)에서 성립된 개정 공직선거법 제150조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한 정견방송이 실시되었다.[7] 정견방송은 텔레비전에서는 4회, 라디오에서는 2회 방송되었으며, NHK와 민영방송이 각각 절반씩 담당했다(단, 전력 소비가 많은 간토, 킨키, 주쿄 지역에서는 텔레비전이 2회, 라디오가 4회 방송되었다).[7]4. 주요 정당 및 후보
자유민주당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재, 카와시마 마사지로(川島正次郎) 부총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간사장,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총무회장, 네모토 류타로(根本龍太郎) 정무조사회장, 소노다 나오(園田直) 국회대책위원장, 군 유이치(郡祐一) 참의원 의원회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파벌별로는 슈잔카이(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파) 59명, 코케이카이(마에오 시게사부로(前尾繁三郎) 파) 43명, 정책담화회(미키 다케오(三木武夫) 파) 39명, 신정동지회(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파) 35명, 기오이카이(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파) 31명, 교우클럽(카와시마 마사지로(川島正次郎) 파) 20명, 수요회(이시이 코지로(石井光次郎) 파) 13명, 슌슈카이(소노다 나오(園田直) 파) 13명, 일신회(후나타 나카(船田中) 파) 12명, 일양회(무라카미 이사무(村上勇) 파) 10명, 아이세이카이(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郎) 파) 6명, 이일회(이시다 히로히데(石田博英) 파) 5명, 무파벌(구 마츠무라 켄조(松村謙三) G) 3명, 무파벌 11명이 있었다.
일본사회당은 나리타 토모미(成田知巳) 위원장, 미야케 쇼이치(三宅正一)·야스이 요시노리(安井吉典) 부위원장, 에다 사부로(江田三郎) 서기장, 타가야 신넨(多賀谷真稔) 정책심의회장, 타테 켄지로(楯兼次郎) 국회대책위원장, 카세 간(加瀬完) 참의원 의원회장 체제였다.
공명당은 타케이리 요시카츠(竹入義勝) 위원장, 아사이 미유키(浅井美幸)·타다 쇼고(多田省吾)·니노미야 몬조(二宮文造) 부위원장, 야노 켄야(矢野絢也) 서기장, 마사키 요시아키(正木良明) 정책심의회장, 와타나베 이치로(渡部一郎) 국회대책위원장, 니노미야 몬조(겸임) 참의원 의원단장 체제였다.
민사당은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栄一) 위원장, 소네 마사루(曽祢益) 부위원장, 카스가 카즈유키(春日一幸) 서기장, 타케모토 손이치(竹本孫一) 정책심의회장, 사사키 요우사쿠(佐々木良作) 국회대책위원장, 무카이 나가토시(向井長年) 참의원 의원회장,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상임고문 체제였다.
일본공산당은 노사카 산조(野坂参三) 의장, 미야모토 켄지(宮本顕治) 서기장, 후와 테츠조(不破哲三) 정책위원회 책임자, 하야시 히야쿠로(林百郎) 국회대책위원장, 이와마 마사오(岩間正男) 참의원 의원단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4. 1. 자유민주당 (자민당)
사토 에이사쿠 총재가 이끄는 자민당은 오키나와 반환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강조했다. 자민당은 당내 다양한 파벌 간의 경쟁 속에서도 단일 대오를 유지하며 선거에 임했다. 주요 파벌로는 사토파, 후쿠다파, 다나카파 등이 있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당시 자민당 간사장으로서, 자신의 파벌(목요 클럽) 소속 신인 의원들을 대거 당선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했다.4. 2. 일본사회당
일본사회당은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 체제하에 미일 안보 조약 자동 갱신 저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당내 노선 갈등과 학생 운동, 프라하의 봄 억압 등의 여파로 지지 기반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특히 도시 지역에서의 지지율 하락이 심각했다.4. 3. 공명당
4. 4. 민주사회당 (민사당)
4. 5. 일본공산당
4. 6. 무소속 및 기타 정당
5. 선거 결과
정당 | 득표수 | 의석수 | 의석 변동 |
---|---|---|---|
자유민주당 | 22,381,570 | 288 | +11 |
일본 사회당 | 10,074,101 | 90 | -50 |
공명당 | 5,124,666 | 47 | +22 |
민주사회당 | 3,636,591 | 31 | +1 |
일본 공산당 | 3,199,032 | 14 | +9 |
기타 정당 | 81,373 | 0 | 0 |
무소속 | 2,492,560 | 16 | +7 |
무효표 | 459,816 | ||
유권자 수 | 69,260,424 | ||
총 의석 변동 | 0 | ||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150215091026/http://www.stat.go.jp/data/chouki/27.htm 일본 통계국 |
자유민주당은 288석(추가 공인 포함 300석)을 획득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훨씬 넘는 수치였다.[3][4] 일본사회당은 90석으로 참패하며, 제1야당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의석수는 크게 줄었다. 공명당은 47석, 민사당은 31석, 일본공산당은 14석을 획득하며 약진했다. 무소속 의원은 16명이였다.
이번 총선에서 오자와 이치로가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3][4] 하타 쓰토무는 아버지의 사망 후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5]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낙선했다.[6]
정당 | 합계 | 내역 | 남성 | 여성 | |||
---|---|---|---|---|---|---|---|
전임 | 전직 | 신임 | |||||
자유민주당 | 288 | 241 | 14 | 33 | 285 | 3 | |
일본사회당 | 90 | 69 | 10 | 11 | 88 | 2 | |
공명당 | 47 | 24 | 0 | 23 | 45 | 2 | |
민사당 | 31 | 22 | 3 | 6 | 31 | 0 | |
일본공산당 | 14 | 4 | 2 | 8 | 13 | 1 | |
무소속 | 16 | 2 | 1 | 13 | 16 | 0 | |
합계 | 486 | 362 | 30 | 94 | 478 | 8 | |
출전: 『아사히 선거대관』(朝日選挙大観)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47.6%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중선거구제의 영향으로 의석수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3][4] 일본사회당의 득표율은 21.4%로 크게 하락했는데, 이는 도시 지역에서의 지지율 감소와 투표 기권 현상 때문으로 분석된다. 공명당(10.9%), 민주사회당(7.7%), 일본공산당(6.8%)은 각각 득표율을 늘리며 약진했다.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자유민주당 | 22,381,570 | 47.6% |
일본사회당 | 10,074,101 | 21.4% |
공명당 | 5,124,666 | 10.9% |
민주사회당 | 3,636,591 | 7.7% |
일본공산당 | 3,199,032 | 6.8% |
기타 | 81,373 | 0.2% |
무소속 | 2,492,560 | 5.3% |
총합 | 47,442,400 | 100.0% |
총 투표율은 68.51%로, 지난 총선거에 비해 5.48% 하락했다. 성별 투표율은 남성이 67.85%, 여성이 69.12%였다.
자유민주당은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농촌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으며, 아이치 13석, 지바 10석, 후쿠오카 9석 등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도시 지역에서도 선전하여, 도쿄에서 17석, 오사카에서 8석을 얻었다. 사회당은 도시 지역에서 참패했으며, 특히 수도권에서의 의석 상실이 컸다. 가나가와에서 3석, 교토에서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공명당과 공산당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의석을 확대했다. 공명당은 도쿄에서 10석, 오사카에서 6석을 확보했고, 공산당은 도쿄에서 6석, 교토에서 2석을 얻었다.
현(Prefecture) | 총 의석 수(Total seats) | 당선 의석 수(Seats won) | |||||
---|---|---|---|---|---|---|---|
자유민주당 | 사회당 | 공명당 | 민주사회당 | 공산당 | 무소속(I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
아이치 | 20 | 13 | 4 | 3 | |||
아키타 | 8 | 4 | 3 | 1 | |||
아오모리 | 7 | 4 | 1 | 1 | 1 | ||
지바 | 13 | 10 | 1 | 2 | |||
에히메 | 9 | 6 | 2 | 1 | |||
후쿠이 | 4 | 3 | 1 | ||||
후쿠오카 | 19 | 9 | 3 | 4 | 2 | 1 | |
후쿠시마 | 12 | 9 | 1 | 1 | 1 | ||
기후 | 9 | 7 | 2 | ||||
군마 | 10 | 8 | 2 | ||||
히로시마 | 12 | 8 | 1 | 1 | 1 | 1 | |
홋카이도 | 22 | 12 | 7 | 2 | 1 | ||
효고 | 19 | 9 | 4 | 3 | 2 | 1 | |
이바라키 | 12 | 9 | 2 | 1 | |||
이시카와 | 6 | 5 | 1 | ||||
이와테 | 8 | 4 | 4 | ||||
가가와 | 6 | 4 | 1 | 1 | |||
가고시마 | 11 | 8 | 1 | 2 | |||
가나가와 | 14 | 5 | 3 | 3 | 3 | ||
고치 | 5 | 3 | 1 | 1 | |||
쿠마모토 | 10 | 8 | 1 | 1 | |||
교토 | 10 | 4 | 1 | 2 | 1 | 2 | |
미에 | 9 | 7 | 2 | ||||
미야기 | 9 | 6 | 3 | ||||
미야자키 | 6 | 4 | 1 | 1 | |||
나가노 | 13 | 7 | 4 | 1 | 1 | ||
나가사키 | 9 | 5 | 2 | 1 | 1 | ||
나라 | 5 | 3 | 1 | 1 | |||
니가타 | 15 | 9 | 6 | ||||
오이타 | 7 | 5 | 1 | 1 | |||
오카야마 | 10 | 6 | 2 | 2 | |||
오사카 | 23 | 8 | 2 | 6 | 6 | 1 | |
사가 | 5 | 4 | 1 | ||||
사이타마 | 13 | 8 | 2 | 1 | 2 | ||
시가 | 5 | 3 | 1 | 1 | |||
시마네 | 5 | 4 | 1 | ||||
시즈오카 | 14 | 9 | 3 | 1 | 1 | ||
토치기 | 10 | 6 | 2 | 1 | 1 | ||
토쿠시마 | 5 | 3 | 1 | 1 | |||
도쿄 | 39 | 17 | 2 | 10 | 4 | 6 | |
돗토리 | 4 | 3 | 1 | ||||
토야마 | 6 | 4 | 2 | ||||
와카야마 | 6 | 3 | 2 | 1 | |||
야마가타 | 8 | 3 | 3 | 2 | |||
야마구치 | 9 | 6 | 1 | 2 | |||
야마나시 | 5 | 3 | 2 | ||||
합계(Total) | 486 | 288 | 90 | 47 | 31 | 14 | 16 |
이 선거에서는 훗날 일본 총리대신이 되는 하타 쓰토무와 모리 요시로를 비롯하여, 자유민주당에서 두 번의 정권 교체를 이끈 오자와 이치로, 1989년 참의원 내각총리지명선거에서 지명된 도이 다카코, 일본공산당 위원장을 역임한 후와 테쓰조 등 주요 정치인들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이들은 "화려한 쇼와 44년생"으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정당 | 이름 |
---|---|
자민당 | 아베 후미오 |
이시이 케이 | |
이시이 하지메 | |
고코노기 히코사부로 | |
오자와 이치로 | |
오쿠다 케이와 | |
카사오카 쿄 | |
카지야마 시즈로 | |
카토 요조 | |
카라사와 슌지로 | |
코사카 도쿠사부로 | |
사이토 시게후미 | |
사카모토 치카오 | |
사토 메구미 | |
시오자키 준 | |
타카토리 오사무 | |
나카지마 겐타로 | |
나카무라 히로우미 | |
나카야마 토시오 | |
나카야마 마사테루 | |
하타 쓰토무 | |
하타노 타다후미 | |
하마다 코이치 | |
하야시 요시로 | |
베츠카와 유키오 | |
마쓰모토 주로 | |
무라타 케이지로 | |
모리 요시히데 | |
야스다 키로쿠 | |
야마자키 헤이하치로 | |
야마시타 노리오 | |
요시다 미노루 | |
와타누키 타미스케 | |
일본 사회당 | 아베 미키오 |
이노 마사키 | |
카와마타 켄지로 | |
키지마 키헤이 | |
사토 미키 | |
타나카 쓰네토시 | |
도이 다카코 | |
하세베 시치로 | |
마쓰우라 도시나오 | |
마쓰자와 토시아키 | |
요코지 타카히로 | |
공명당 | 아이자와 무네히코 |
아라이 아키유키 | |
오쿠보 나오히코 | |
오니키 쇼리 | |
카이누마 지로 | |
쿠와나 요시지 | |
코데라 히로시 | |
사카이 코이치 | |
세노 에이지로 | |
타다 토키코 | |
츠루오카 히로시 | |
토리이 카즈오 | |
나카가와 요시미 | |
니시나카 키요시 | |
하야시 타카노리 | |
후타미 노부아키 | |
후루카와 마사시 | |
마쓰오 마사요시 | |
마쓰오 노부토 | |
마루야마 유 | |
미야이 야스요시 | |
와다 이치로 | |
와타나베 미치코 | |
민사당 | 카와바타 후미오 |
코미야 타케키 | |
칸가와 키이치 | |
니시다 하치로 | |
와다 하루오 | |
와타나베 타케조 | |
일본공산당 | 아오야기 모리오 |
우라이 히로시 | |
코바야시 마사코 | |
츠가와 타케이치 | |
테라마에 이와오 | |
히가시나카 미츠오 | |
후와 테쓰조 | |
야마하라 켄지로 | |
무소속 | 아이자와 사카에 |
아리마 모토하루 | |
이나무라 토시유키 | |
에토 타카미 | |
사토 모리요시 | |
나카무라 타쿠도 | |
노나카 에이지 | |
홋타 마사타카 | |
마쓰나가 히카루 | |
무카야마 히토토 | |
모리 요시로 | |
토요나가 히카루 | |
와타나베 고조 |
- 최연소 당선자: 오자와 이치로(자민당, 이와테 2구) 27세 7개월
- 최고령 당선자: 마스야 히데츠구(자민당, 이시카와 2구) 81세 11개월
- 최다 득표 당선자: 하라다 켄(자민당, 오사카 3구) 190,407표
- 최소 득표 당선자: 츠루오카 요(공명당, 지바 2구) 31,899표
5. 1. 정당별 의석 분포
정당 | 합계 | 내역 | 남성 | 여성 | |||
---|---|---|---|---|---|---|---|
전임 | 전직 | 신임 | |||||
자유민주당 | 288 | 241 | 14 | 33 | 285 | 3 | |
일본사회당 | 90 | 69 | 10 | 11 | 88 | 2 | |
공명당 | 47 | 24 | 0 | 23 | 45 | 2 | |
민사당 | 31 | 22 | 3 | 6 | 31 | 0 | |
일본공산당 | 14 | 4 | 2 | 8 | 13 | 1 | |
무소속 | 16 | 2 | 1 | 13 | 16 | 0 | |
합계 | 486 | 362 | 30 | 94 | 478 | 8 | |
출전: 『아사히 선거대관』(朝日選挙大観) | |||||||
자유민주당은 288석(추가 공인 포함 300석)을 획득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훨씬 넘는 수치였다.[3][4] 일본사회당은 90석으로 참패하며, 제1야당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의석수는 크게 줄었다. 공명당은 47석, 민사당은 31석, 일본공산당은 14석을 획득하며 약진했다. 무소속 의원은 16명이였다.
이번 총선에서 오자와 이치로가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3][4] 하타 쓰토무는 아버지의 사망 후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5]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낙선했다.[6]
5. 2. 득표율 분석
wikitext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47.6%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중선거구제의 영향으로 의석수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3][4] 일본사회당의 득표율은 21.4%로 크게 하락했는데, 이는 도시 지역에서의 지지율 감소와 투표 기권 현상 때문으로 분석된다. 공명당(10.9%), 민주사회당(7.7%), 일본공산당(6.8%)은 각각 득표율을 늘리며 약진했다.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자유민주당 | 22,381,570 | 47.6% |
일본사회당 | 10,074,101 | 21.4% |
공명당 | 5,124,666 | 10.9% |
민주사회당 | 3,636,591 | 7.7% |
일본공산당 | 3,199,032 | 6.8% |
기타 | 81,373 | 0.2% |
무소속 | 2,492,560 | 5.3% |
총합 | 47,442,400 | 100.0% |
총 투표율은 68.51%로, 지난 총선거에 비해 5.48% 하락했다. 성별 투표율은 남성이 67.85%, 여성이 69.12%였다.
5. 3. 지역별 결과
자유민주당은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농촌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으며, 아이치 13석, 지바 10석, 후쿠오카 9석 등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도시 지역에서도 선전하여, 도쿄에서 17석, 오사카에서 8석을 얻었다. 사회당은 도시 지역에서 참패했으며, 특히 수도권에서의 의석 상실이 컸다. 가나가와에서 3석, 교토에서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공명당과 공산당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의석을 확대했다. 공명당은 도쿄에서 10석, 오사카에서 6석을 확보했고, 공산당은 도쿄에서 6석, 교토에서 2석을 얻었다.현(Prefecture) | 총 의석 수(Total seats) | 당선 의석 수(Seats won) | |||||
---|---|---|---|---|---|---|---|
자유민주당 | 사회당 | 공명당 | 민주사회당 | 공산당 | 무소속(I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
아이치 | 20 | 13 | 4 | 3 | |||
아키타 | 8 | 4 | 3 | 1 | |||
아오모리 | 7 | 4 | 1 | 1 | 1 | ||
지바 | 13 | 10 | 1 | 2 | |||
에히메 | 9 | 6 | 2 | 1 | |||
후쿠이 | 4 | 3 | 1 | ||||
후쿠오카 | 19 | 9 | 3 | 4 | 2 | 1 | |
후쿠시마 | 12 | 9 | 1 | 1 | 1 | ||
기후 | 9 | 7 | 2 | ||||
군마 | 10 | 8 | 2 | ||||
히로시마 | 12 | 8 | 1 | 1 | 1 | 1 | |
홋카이도 | 22 | 12 | 7 | 2 | 1 | ||
효고 | 19 | 9 | 4 | 3 | 2 | 1 | |
이바라키 | 12 | 9 | 2 | 1 | |||
이시카와 | 6 | 5 | 1 | ||||
이와테 | 8 | 4 | 4 | ||||
가가와 | 6 | 4 | 1 | 1 | |||
가고시마 | 11 | 8 | 1 | 2 | |||
가나가와 | 14 | 5 | 3 | 3 | 3 | ||
고치 | 5 | 3 | 1 | 1 | |||
쿠마모토 | 10 | 8 | 1 | 1 | |||
교토 | 10 | 4 | 1 | 2 | 1 | 2 | |
미에 | 9 | 7 | 2 | ||||
미야기 | 9 | 6 | 3 | ||||
미야자키 | 6 | 4 | 1 | 1 | |||
나가노 | 13 | 7 | 4 | 1 | 1 | ||
나가사키 | 9 | 5 | 2 | 1 | 1 | ||
나라 | 5 | 3 | 1 | 1 | |||
니가타 | 15 | 9 | 6 | ||||
오이타 | 7 | 5 | 1 | 1 | |||
오카야마 | 10 | 6 | 2 | 2 | |||
오사카 | 23 | 8 | 2 | 6 | 6 | 1 | |
사가 | 5 | 4 | 1 | ||||
사이타마 | 13 | 8 | 2 | 1 | 2 | ||
시가 | 5 | 3 | 1 | 1 | |||
시마네 | 5 | 4 | 1 | ||||
시즈오카 | 14 | 9 | 3 | 1 | 1 | ||
토치기 | 10 | 6 | 2 | 1 | 1 | ||
토쿠시마 | 5 | 3 | 1 | 1 | |||
도쿄 | 39 | 17 | 2 | 10 | 4 | 6 | |
돗토리 | 4 | 3 | 1 | ||||
토야마 | 6 | 4 | 2 | ||||
와카야마 | 6 | 3 | 2 | 1 | |||
야마가타 | 8 | 3 | 3 | 2 | |||
야마구치 | 9 | 6 | 1 | 2 | |||
야마나시 | 5 | 3 | 2 | ||||
합계(Total) | 486 | 288 | 90 | 47 | 31 | 14 | 16 |
5. 4. 주요 당선자
이 선거에서는 훗날 일본 총리대신이 되는 하타 쓰토무와 모리 요시로를 비롯하여, 자유민주당에서 두 번의 정권 교체를 이끈 오자와 이치로, 1989년 참의원 내각총리지명선거에서 지명된 도이 다카코, 일본공산당 위원장을 역임한 후와 테쓰조 등 주요 정치인들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이들은 "화려한 쇼와 44년생"으로 불리며 주목받았다.정당 | 이름 |
---|---|
자민당 | 아베 후미오 |
이시이 케이 | |
이시이 하지메 | |
고코노기 히코사부로 | |
오자와 이치로 | |
오쿠다 케이와 | |
카사오카 쿄 | |
카지야마 시즈로 | |
카토 요조 | |
카라사와 슌지로 | |
코사카 도쿠사부로 | |
사이토 시게후미 | |
사카모토 치카오 | |
사토 메구미 | |
시오자키 준 | |
타카토리 오사무 | |
나카지마 겐타로 | |
나카무라 히로우미 | |
나카야마 토시오 | |
나카야마 마사테루 | |
하타 쓰토무 | |
하타노 타다후미 | |
하마다 코이치 | |
하야시 요시로 | |
베츠카와 유키오 | |
마쓰모토 주로 | |
무라타 케이지로 | |
모리 요시히데 | |
야스다 키로쿠 | |
야마자키 헤이하치로 | |
야마시타 노리오 | |
요시다 미노루 | |
와타누키 타미스케 | |
일본 사회당 | 아베 미키오 |
이노 마사키 | |
카와마타 켄지로 | |
키지마 키헤이 | |
사토 미키 | |
타나카 쓰네토시 | |
도이 다카코 | |
하세베 시치로 | |
마쓰우라 도시나오 | |
마쓰자와 토시아키 | |
요코지 타카히로 | |
공명당 | 아이자와 무네히코 |
아라이 아키유키 | |
오쿠보 나오히코 | |
오니키 쇼리 | |
카이누마 지로 | |
쿠와나 요시지 | |
코데라 히로시 | |
사카이 코이치 | |
세노 에이지로 | |
타다 토키코 | |
츠루오카 히로시 | |
토리이 카즈오 | |
나카가와 요시미 | |
니시나카 키요시 | |
하야시 타카노리 | |
후타미 노부아키 | |
후루카와 마사시 | |
마쓰오 마사요시 | |
마쓰오 노부토 | |
마루야마 유 | |
미야이 야스요시 | |
와다 이치로 | |
와타나베 미치코 | |
민사당 | 카와바타 후미오 |
코미야 타케키 | |
칸가와 키이치 | |
니시다 하치로 | |
와다 하루오 | |
와타나베 타케조 | |
일본공산당 | 아오야기 모리오 |
우라이 히로시 | |
코바야시 마사코 | |
츠가와 타케이치 | |
테라마에 이와오 | |
히가시나카 미츠오 | |
후와 테쓰조 | |
야마하라 켄지로 | |
무소속 | 아이자와 사카에 |
아리마 모토하루 | |
이나무라 토시유키 | |
에토 타카미 | |
사토 모리요시 | |
나카무라 타쿠도 | |
노나카 에이지 | |
홋타 마사타카 | |
마쓰나가 히카루 | |
무카야마 히토토 | |
모리 요시로 | |
토요나가 히카루 | |
와타나베 고조 |
- 최연소 당선자: 오자와 이치로(자민당, 이와테 2구) 27세 7개월
- 최고령 당선자: 마스야 히데츠구(자민당, 이시카와 2구) 81세 11개월
- 최다 득표 당선자: 하라다 켄(자민당, 오사카 3구) 190,407표
- 최소 득표 당선자: 츠루오카 요(공명당, 지바 2구) 31,899표
6. 선거 이후의 영향
6. 1. 사토 내각의 연임과 오키나와 반환
제2차 사토 내각의 사토 에이사쿠 내각총리대신(자유민주당 총재)은 이번 총선거의 압승으로 연임에 성공하였다. 1970년 1월 14일 제63회 국회(특별회)에서 진행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사토 에이사쿠는 297표를 얻어 나리타 토모미(일본사회당) 후보 등을 제치고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후나타카 슈이치(자민당)가 중의원 의장으로, 아라후네 세이쥬로(자민당)가 중의원 부의장으로 각각 선출되었다.이후 제3차 사토 내각은 1972년 오키나와 반환을 실현했다. 1972년 1월 29일 제68회 국회(정기회)에서 하세가와 시로(자민당)가 새로운 중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6. 2. 자민당의 장기 집권 지속
자민당은 이 선거를 통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 기반을 확보하며 장기 집권 체제를 이어갔다. 하지만 도시 지역에서의 지지율 하락과 파벌 정치 심화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6. 3. 야당의 재편과 다당화
6. 4. 한국에 미친 영향
참조
[1]
웹사이트
統計局ホームページ/第27章 公務員・選挙
http://www.stat.go.j[...]
2012-12-19
[2]
논문
The 1969 General Election in Japan
https://www.jstor.or[...]
1970
[3]
뉴스
Japan's Kingmaker Bids to Seize the Crown
https://www.wsj.com/[...]
2020-09-08
[4]
뉴스
Ichiro Ozawa: Reformer at Bay
https://www.foreigna[...]
2020-09-08
[5]
웹사이트
Hata: Japan's Hope to End Paralysis
https://www.latimes.[...]
2020-09-08
[6]
뉴스
Koizumi Urges Constitutional Revision For Direct Election of Japanese Premier
https://www.wsj.com/[...]
2020-09-08
[7]
간행물
朝日年鑑 1970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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