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난타 마히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난타 마히돈은 1925년 독일에서 태어난 태국의 국왕으로, 라마 5세의 손자이자 마히돈 아둔야뎃 왕자의 아들이다. 1935년 라마 7세의 퇴위로 9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스위스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938년 태국을 처음 방문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위스에 머물렀다. 1946년 6월, 방콕 왕궁에서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자살, 사고, 타살 등 다양한 설로 논란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6년 살인 사건 - 존 보드킨 애덤스
    존 보드킨 애덤스는 부유한 노년층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며 유산을 상속받아 재산을 모았으나, 환자 사망 관련 의혹으로 살인 혐의를 받았고, 그의 재판은 영국 법률 시스템에 이중 효과의 원칙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며 의료 윤리 논쟁을 야기했다.
  • 태국 국왕 - 프라차티뽁
    라마 5세의 아들이자 라마 7세인 프라차티뽁은 영국에서 교육받고 군 복무 후 왕위에 올라 재정난과 민주화 요구 속에서 입헌군주제를 수용하려 했으나 인민당과의 갈등으로 퇴위, 망명하여 생을 마감하며 태국 절대군주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 태국 국왕 - 라마 1세
    라마 1세는 차크리 왕조의 창시자이자 초대 국왕으로, 탁신 왕 휘하의 맹장에서 왕위에 올라 방콕 천도, 버마의 침입 격퇴, 관료 제도 정비, 문학 작품 복원, 왓 프라깨오 건립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 살해된 20세기 군주 - 요르요스 1세
    요르요스 1세는 1863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를 통치한 덴마크 왕자 출신의 국왕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영토 확장을 추진하다가 1913년 암살당했다.
  • 살해된 20세기 군주 - 압둘라 1세
    압둘라 1세는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을 수립하고 요르단의 초대 국왕으로 재위했으나, 확장주의적 야망과 이스라엘과의 협상 시도로 암살당했다.
아난타 마히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6년 공식 초상화
1946년 공식 초상화
칭호태국 국왕
재위 기간1935년 3월 2일 – 1946년 6월 9일
즉위대관식: 1946년 8월 13일 (사후)
이전 국왕쁘라차티뽁 (라마 7세)
다음 국왕푸미폰 아둔야뎃 (라마 9세)
출생일1925년 9월 20일
출생지하이델베르크, 독일
사망일1946년 6월 9일
사망지방콕, 태국
장례일1950년 3월 29일
장례 장소방콕, 사남루앙 왕실 화장터
사후 칭호파바트 솜뎃 프라 포라멘트라 마하 아난다 마히돌 프라 앗타마라마티보딘
왕가마히돌 (짜끄리 왕조)
아버지마히돌 아둔야뎃
어머니상완 탈라팟
종교테라바다 불교
서명Singnature of Ananda Mahidol.svg
태국어 표기
스타일
군사 정보
소속태국군
복무 기간1935년 ~ 1946년
계급[[파일:RTA OF-10 (Field Marshal).svg|15px]] 원수
[[파일:RTN OF-10 (Admiral of the Fleet).svg|15px]] 원수
[[파일:RTAF OF-10 (Marshal of the Royal Thai Air Force).svg|15px]] 원수
지휘총사령관
참전프랑스-태국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정치
섭정아누왓 짜뚜론 공 오스카르누팃 왕자 (1935)
아팃 팁아파 왕자 (1935~1944)
짜오프라야 욤마랏 (1935~1938)
짜오프라야 피차옌트라요틴 (1935~1942)
쁘리디 파놈용 (1941~1945)
총리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쁠랙 피분송크람
쿠앙 아파이웡
타위 분야껫
몸라차웡 세니 쁘라못
쁘리디 파놈용
훈장
기타
위키미디어 공용위키미디어 공용에 라마 8세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2. 어린 시절

아난타 마히돈 왕자는 1925년 9월 20일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쭐랄롱꼰 대왕의 아들인 송클라의 왕자 마히돈 아둔야뎃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유학 중이던 시나카린(당시 이름 상완)이었다. 그는 태국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삼촌인 와치라웃 왕(라마 6세)은 1925년 10월 13일 전보를 보내 그의 이름을 '아난타 마히돈'(อานันทมหิดล|아난타마히돈th, '마히돈의 기쁨'이라는 뜻)이라고 지어주었다. 당시 그는 태국 왕자 중 가장 낮은 계급인 '몸 짜오'(หม่อมเจ้า|몸 짜오th)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이름인 '마히돈'을 성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그의 전체 이름과 칭호는 '몸 짜오 아난다 마히돈 마히돈'(หม่อมเจ้าอานันทมหิดล มหิดล|몸 짜오 아난타마히돈 마히돈th)이었다.

왕자는 아버지를 따라 파리, 로잔을 거쳐 1927년 미국 매사추세츠로 이주했다. 같은 해, 그의 또 다른 삼촌인 프라차디폭 왕(라마 7세)은 왕실 칙령을 내려 그를 '프라 워라웡 트 프라옹 짜오'(พระวรวงศ์เธอ พระองค์เจ้า|프라 워라웡 트 프라옹 짜오th)라는 더 높은 왕족 계급으로 격상시켰다. 이 칙령은 왕족 남성과 평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다른 '몸 짜오'들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누나인 갈리아니 와다나와 그해 말에 태어난 남동생 푸미폰 아둔야뎃도 포함되었다.

1928년 아버지 마히돈 왕자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후, 가족은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9년 마히돈 왕자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당시 네 살이었던 아난타 마히돈은 어머니 시나카린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는 방콕의 뎁시린 학교에 잠시 다니기도 했다.

1932년 시암 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프라차디폭 왕의 퇴위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의 할머니인 사왕 와다나 왕비는 왕위 계승자 중 한 명이었던 아난타 마히돈의 안전을 염려했다. 이에 따라 1933년 어머니 시나카린은 아난타 마히돈과 그의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스위스 로잔으로 다시 이주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왕자들의 건강과 더 나은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정치적 상황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아난타 마히돈은 유년기의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프라차디폭 왕의 퇴위가 임박해지자, 태국 정부 관계자는 그의 어머니에게 접근하여 아난타 마히돈의 왕위 계승에 대한 의사를 묻기도 했다.

3. 즉위와 섭정

프라차티폭 국왕(라마 7세)은 1935년 새로운 준민주주의 정부와의 정치적 갈등과 건강 문제로 인해 퇴위하였다. 국왕은 왕위 계승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왕위 계승 문제는 1924년 궁정 계승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 법은 출랄롱꼰 국왕의 왕비 중 사오바파 퐁스리 왕비의 자녀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는데, 프라차티폭 국왕은 사오바파 왕비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었다. 따라서 왕위는 다음 서열인 사왕 바다나 왕비의 후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사왕 바다나 왕비의 손자이자 마히돌 아둔야뎃 왕자의 아들인 아난타 마히돈 왕자가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계승 과정에서 논쟁이 있었다. 차크라봉세 부바나트 왕자의 아들인 출라 차크라봉세 왕자 역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외국인과 결혼했다는 점 때문에 계승법에 따라 자격이 제한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왕국이 입헌군주제로 전환됨에 따라 최종 결정권은 내각에 있었다. 당시 내각의 핵심 인물이었던 프리디 바노미옹은 계승법이 출라 차크라봉세 왕자의 계승을 배제한다고 해석하고, 아난타 마히돈 왕자가 다음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내각을 설득했다. 스위스에서 유학 중인 9세의 어린 군주를 세우는 것이 당시 정부에게 정치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35년 3월 2일, 국민의회와 태국 정부는 아난타 마히돈을 차크리 왕조의 8번째 국왕으로 선출했다.

1939년 국왕의 사진


즉위 당시 아난타 마히돈은 9세의 어린 나이였고 스위스 로잔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직후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이에 국민의회는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할 섭정단을 임명했다. 섭정단은 아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름직위
아누왓짜뚜롱 왕자대령
아디탸 디바바 왕자중위
차오 프라야 욤마랏 (Pun Sukhum)



1938년, 13세가 된 아난타 마히돈은 국왕으로서 처음으로 시암(당시 국호)을 방문했다. 이 방문에는 어머니 시나카린트라 왕태후와 남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동행했다. 당시 총리는 쁠랙 피분송크람 원수였으며, 그는 아난타 마히돈의 짧은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실권을 쥐고 있었다.

1938년 방콕 사란롬 공원에서 13세의 시암 국왕 아난다 마히돌(왼쪽)과 그의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 왕자(오른쪽)가 선물받은 기차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태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아난타 마히돈 국왕은 계속해서 중립국인 스위스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갔다.

4. 태국 통치와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13세의 나이로 아난타 마히돈은 왕으로서 처음으로 시암을 방문했다. 이 방문에는 그의 어머니 시나카린과 남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동행했다. 당시 총리는 군부 독재자였던 쁠랙 피분송크람 원수였으며, 그는 아난타 마히돈의 짧은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총리직을 유지했다. 피분송크람은 1939년 국가명을 '시암'에서 '태국'으로 변경하였다.

1940년 말, 피분송크람 정권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비시 프랑스 군대에 맞서 프랑스-태국 전쟁을 일으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태국을 침공했고, 남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5시간 만에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귀국한 아난타 마히돈 국왕(가운데). 프리디 파놈용(왼쪽)과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오른쪽)과 함께 방콕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 참석했다.


전쟁 기간 동안 아난타 마히돈 국왕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위스에 머물렀고, 프리디 파놈용이 섭정으로서 국왕을 대리했다. 1942년 1월 24일부터 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 피분송크람 정권은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섭정 프리디 파놈용은 선전포고 서명을 거부하여 법적으로는 무효가 되었다. 한편, 일본 주재 태국 대사관을 포함한 많은 태국 정부 관리들은 연합국 측 세리 타이(자유 태국 운동) 지하 조직에서 활동하며 영국 정보부와 미국의 전략사무국(OSS)에 비밀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저항 활동을 벌였다.

1944년이 되자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고, 연합군의 방콕 폭격과 경제난으로 인해 전쟁과 피분송크람 정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졌다. 결국 7월, 피분송크람은 세리 타이가 침투한 정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소집된 국회는 자유주의 성향의 법률가인 꾸앙 아파이웡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국에 대한 연합군의 군사적 책임은 영국에게 넘어갔다.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난다 마히돈 국왕과 마운트배튼 1946년 1월 19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아난다 마히돈은 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1945년 12월 법학 학위를 받고 두 번째로 태국을 방문했다. 젊고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격동 속에서도 군주제를 존경해 온 태국 국민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태국 국민들은 다시 한번 국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했다. 그의 기억에 남는 활동 중 하나는 방콕의 차이나타운 삼펭 거리( ซอยสำเพ็ง|사암펭 거리th )를 방문하여, 전쟁 이후 방콕의 중국계 태국인과 태국인 사이에 남아 있던 긴장을 성공적으로 완화하려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국 관찰자들은 아난다 마히돈이 국왕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그의 통치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동남아시아의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은 1946년 1월 방콕을 방문하여 국왕을 "겁에 질린, 근시안적인 소년"으로 묘사하며, "그의 처진 어깨와 얇은 가슴에는 화려한 다이아몬드 장식이 걸려 있었고, 전반적으로 비참하고 외로운 모습"이었다고 기록했다. 마운트배튼은 한 공개 행사에서 "[국왕의] 불안감은 너무나도 심각하게 증가하여 그가 기절할 경우를 대비하여 내가 그를 지지할 뻔했다"고 적기도 했다.

6. 의문의 죽음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학업을 마친 아난타 마히돈은 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6년 6월 9일 아침, 그는 방콕 왕궁 내 보로마피만 궁전(

왕궁 내 보롬피만 옥좌당. 국왕의 침실은 윗층에 있다.
) 침실에서 이마에서 후두부로 총탄이 관통된 채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는 20세였으며, 스위스 로잔 대학교로 돌아가 법학 박사 학위를 마치려던 계획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옆에는 콜트 M1911A1 자동권총이 놓여 있었다.

사건을 처음 목격한 시종 칫 싱하세니(Chit Singhaseni)의 증언에 따르면, 오전 9시 20분경 국왕의 침실 근처에 있던 중 안에서 총성이 들렸고, 달려가 보니 국왕이 침대 위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2] 영국 법의학자 키스 심슨(Keith Simpson)이 재구성한 당일 상황은 다음과 같다.[2]

  • 06:00: 어머니 시나카린트라 왕비가 국왕을 깨움.
  • 07:30: 시종 부스 파타마사린(But Patthamasarin)이 국왕의 아침 식사 준비 시작.
  • 08:30: 부스가 국왕이 옷 갈아입는 방에 있는 것을 목격. 잠시 후 평소처럼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으나 국왕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마시지 않음.
  • 08:45: 다른 시종 칫 싱하세니가 국왕의 훈장 치수를 재러 왔다고 알림.
  • 09:00: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 왕자(훗날 라마 9세)가 방문하여 형이 침대에서 졸고 있는 것을 봄.
  • 09:20: 침실에서 총성 발생. 칫 싱하세니가 달려 들어가 확인 후, 복도를 달려 왕비에게 "국왕께서 자살하셨습니다!"라고 외침. 왕비가 따라 들어가 보니 국왕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음.[2]


사건 직후 왕궁과 경찰은 총기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으나, 당시 총리였던 쁘리디 파놈용 내각은 '라마 8세 서거 사건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사고, 자살, 타살 세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조사를 진행했다. 위원회는 시신 상황 등을 근거로 사고나 자살 가능성을 부정하고 타살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법의학자 키스 심슨 역시 국왕이 오른손잡이였음에도 권총이 왼편에서 발견된 점, 총상 위치가 일반적인 자살 위치가 아닌 점, 사망 당시 누워있던 자세 등을 근거로 자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2]

이후 국왕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여러 논란과 추측,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

6. 1. 의문의 죽음에 대한 논란과 재판

1946년 6월 9일 아난타 마히돈 국왕이 사망한 직후, 왕궁과 경찰은 총기 사고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3] 그러나 당시 총리였던 쁘리디 파놈용 내각이 설치한 "라마 8세 서거 사건 조사위원회"는 시신 상황 등을 근거로 사고나 자살 가능성을 낮게 보고 타살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편, 민주당은 좌익 성향의 쁘리디 총리가 국왕의 죽음 배후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4]

결국 1946년 8월, 쁘리디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으며, 타완 탐롱나와사왓 내각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 내각 역시 1947년 11월 쁠랙 피분송크람 원수가 주도한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민주당 지도자 쿠앙 아파이웡을 총리로 임명하고 국왕 시해 사건에 대한 재판을 명령했다. 쿠데타 이후 경찰은 국왕의 시종이었던 ชิต สิงหเสนี|칫 싱하세니th, บุศย์ ปัทมศริน|붓 파타마사린th, 그리고 국왕 비서이자 상원의원이었던 챌리야오 파툼롯(Chaliao Pathumrot) 등 세 명을 국왕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했다. 쁘리디 파놈용 전 총리 역시 살해 모의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쿠데타 당시 해외로 망명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한편, 쿠데타 이후 전 총리 루앙 타므롱나와사왓은 미국 대사 에드윈 F. 스탠튼(Edwin F. Stanton)에게 국왕 살해 사건 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증거가 당시 왕위 계승자였던 푸미폰 아둔야뎃 후왕을 연루시켰다고 비밀리에 털어놓기도 했다.[5]

아난다 마히돌 국왕 암살 사건의 피고인 3명: , , 챌리야오 파툼롯(Chaliao Pathumrot)
]재판은 1948년 8월에 시작되었다. 재판 시작 전, 쿠데타를 주도한 쁠랙 피분송크람은 미국 대사에게 재판이 아난타 마히돈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시인하기도 했다.[4] 검찰은 124명의 증인과 방대한 문서를 증거로 제시했지만, 재판은 확고한 증거 없이 정황 증거에 크게 의존하여 진행되었다. 변호인단이 증거 검토 시간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일부 변호인이 사임하는 등 재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새로 선임된 변호인 중 두 명은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다른 한 명은 사임하여 결국 젊은 변호사 한 명과 재판 막바지에 합류한 챌리야오 파툼롯의 딸만이 변호를 맡게 되었다. 피고인들은 재판 내내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했다.

1951년 5월, 1심 법원은 아난타 국왕이 암살되었음은 인정했으나, 챌리야오와 붓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고 칫에게만 범죄 가담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칫의 항소를 기각하고 붓에게도 유죄를 선고했다. 1954년 10월 12일,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세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를 확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세 사람의 사면 요청은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에 의해 거부되었고, 1955년 2월 17일 방콕 인근 논타부리의 방크완 교도소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6][7][17] 그러나 라마 9세는 훗날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4]

국왕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불경죄에 저촉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태국 사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지만, 완전히 논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태국어로 된 관련 서적들도 출판되어 있다.

한편,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스티븐슨은 라마 9세의 협조를 받아 이 사건을 조사한 후, 그의 저서 《혁명의 왕》(The Revolutionary King)에서 옛 일본군 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증거와 함께 제시했다. 하지만 쓰지 마사노부 본인의 기록에 따르면 사건 당일 그는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18], 방콕으로 돌아와 범행을 저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아난다 마히돌 국왕 화장식, 1950년

6. 2. 의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설

1946년 6월 9일 아난타 마히돈 국왕이 방콕 왕궁 내 보로마피만 궁전 침실에서 이마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확한 원인은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사건 직후 왕궁과 경찰은 총기 사고의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으나,[17] 쁘리디 파놈용 내각이 설치한 공식 조사위원회는 시신의 상황 등을 검토한 결과 사고나 자살 가능성을 부정하고 타살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17] 이후 관련 조사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혼란스럽게 진행되었고, 명확한 증거나 결론 없이 여러 주장이 이어졌다.

'''자살 또는 사고설'''

  • 우발적 자살설: 저널리스트 레인 크루거(Rayne Kruger)는 그의 저서 ''악마의 원반(The Devil's Discus)''에서 아난타 국왕이 총기를 다루다 실수로 자신을 쏜 '우발적 자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13] 그는 이 비극적인 죽음이 정치적 보복의 빌미로 이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궁정 시종 세 명이 희생되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은 태국 내에서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14]
  • 자살 또는 동생에 의한 오발 사고설: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의 전기를 쓴 작가 폴 핸들리(Paul Handley)는 아난타 국왕의 죽음이 자살이거나, 혹은 동생인 푸미폰 왕자(훗날 라마 9세)가 장난 중에 실수로 총을 쏘아 발생한 사고일 수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15][16]
  • 법의학적 반론: 그러나 법의학자 키스 심슨은 국왕이 오른손잡이임에도 권총이 왼편에서 발견된 점, 총상 위치가 일반적인 자살 위치와 다른 점(왼쪽 눈 위, 접촉 발사 흔 없음), 사망 당시 똑바로 누워있던 자세 등을 근거로 자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2]


'''타살설'''

  • 쓰지 마사노부에 의한 타살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스티븐슨은 라마 9세의 협조를 받아 집필한 저서 《혁명의 왕》(The Revolutionary King)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국에서 활동했으며 전후 전범으로 기소될 것을 우려해 숨어 지내던 구 일본군 참모 쓰지 마사노부가 아난타 국왕을 암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2] 스티븐슨은 국왕이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안경을 쓰지 않고 누워있던 점, 사용된 M1911 권총이 오발되기 어렵고 국왕이 스스로 쏘기 어려운 자세였다는 점, 현장에서 탄피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12] (다만, 쓰지 마사노부가 사건 당시 태국이 아닌 중국에 있었다는 기록[18]도 존재하여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 쁘리디 파놈용 배후설: 사건 초기, 당시 총리였던 쁘리디 파놈용과 대립하던 세니 프라모지와 민주당 측은 프리디가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4] 하지만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쁠랙 피분송크람조차 프리디의 직접적인 연루 가능성은 낮게 보면서도, 후계자인 푸미폰 왕자를 보호하기 위해 프리디가 일부 증거를 은폐했을 가능성은 언급했다.[4]


'''진실 은폐 및 정치적 의혹'''

  • 저명한 보수 인사인 술락 시바락사는 프리디 파놈용이 사건 당시 왕족의 잘못을 은폐하고 증거 인멸을 도왔으며, 범인 체포를 막았다고 주장했다.[10][11]
  • 사건의 진실 규명은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동생인 푸미폰 국왕은 초기에는 형의 죽음이 사고라고 확신한다고 말했으나[4][8], 1980년 BBC와의 인터뷰에서는 "사고도 자살도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고 밝히며, 증거들이 사라졌고 국내외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진상 규명이 억압당했음을 시사했다.[9]
  • 이 사건은 여전히 태국 사회에서 민감한 주제로 남아 있으며, 불경죄에 저촉될 우려 때문에 공개적인 논의나 심층적인 탐구가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기타'''

  • 일각에서는 생전 사진의 귀 모양 등을 근거로 국왕이 실제로는 사망하지 않았다는 생존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7. 가족 관계



8. 유산 및 기념물

아난다 마히돈 국왕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다.

아난다 마히돈 국왕의 왕실 문장


왓 수탓 사원에 세워진 아난다 마히돈 국왕 동상.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1959년에 건립했다.


쭐라롱꼰 대학교 의과대학에 있는 아난다 마히돈 국왕 동상

참조

[1] 서적 The King Never Smiles: A Biography of Thailand's Bhumibol Adulyadej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06-01-01
[2] 서적 Forty Years of Murder: an Autobiography https://thaipolitica[...] Harrap 2016-12-15
[3] 웹사이트 Hua Hin Tourist Information, Biography of King Ananda Mahidol http://www.huahin-to[...] 2005-03-09
[4] 서적 Powers That Be: Pridi Banomyong through the rise and fall of Thai democracy 1999
[5] 문서 Confidential Memorandum of Discussion between Prime Minister Luang Thamrong and Ambassador Edwin F. Stanton http://thaipolitical[...] American Embassy Bangkok 1948-03-31
[6] 서적 Thailand: A Struggle for the Nation https://books.google[...] ISEAS Publishing
[7] 웹사이트 Has Rama X revived Thailand's death penalty? https://www.newmanda[...] 2018-06-22
[8] 뉴스 เมื่อข้าพเจ้าบินไปสืบกรณีสวรรคต ที่สวิตเซอร์แลนด์ แหลมสน 1948-06-24
[9] 방송 Soul of a Nation BBC 1980
[10] 서적 เรื่องปรีดี พนมยงค์ ตามทัศนะ ส.ศิวรักษ์ http://www.openbase.[...] สำนักพิมพ์มูลนิธิโกมลคีมทอง 2007
[11] 페이스북 https://m.facebook.c[...] 2015-06-27
[12] 서적 The Revolutionary King: the true-life sequel to the 'King and I Constable and Robinson 2001
[13] 서적 The Devil's Discus Cassell & Co.
[14] 웹사이트 The Devil's Discus flies away, page 156 http://geocities.com[...]
[15] 서적 The King Never Smiles Yale University Press 2006
[16] 뉴스 Nuanced Views of the King http://www.feer.com/[...] Far Eastern Economic Review 2006-11
[17] 서적 คดี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อบปลงพระชนม์ ร.๘ คำพิพากษาศาลฏีกา ฉบับสมบูรณ์
[18] 웹사이트 『潜行三千里』特集 http://www.mekong.n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