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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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마 9세는 1946년부터 2016년까지 70년 이상 태국을 통치한 국왕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 중 한 명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형의 죽음으로 인해 왕위를 계승했다. 푸미폰 국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군부와 민주화 운동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했으며, 농촌 개발, 빈곤 퇴치, 환경 보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실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2016년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태국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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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9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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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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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푸미폰 아둔야뎃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
로마자 표기 | Phumiphon Adunyadet |
풀 네임 | 프라밧 솜뎃 프라 보로민트라 마하 푸미폰 아둔야뎃 마히탈라티벳 라마티보디 차크리 나리보딘 사야민타라티랏 보로마낫보핏 |
사후 이름 | 프라밧 솜뎃 프라 보롬차낙 아디페쉬라 마하 푸미폰 아둔야뎃 마하랏 보로마낫보핏 |
즉위 | 1946년 6월 9일 |
대관식 | 1950년 5월 5일 |
출생일 | 1927년 12월 5일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
사망일 | 2016년 10월 13일 |
사망지 | 태국 방콕 |
매장일 | 2017년 10월 26일 |
매장지 | 왓 보원니웻 위하라, 왓 랏차보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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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군주 | 태국 국왕 |
재위 기간 | 1946년 6월 9일 - 2016년 10월 13일 |
즉위 이전 | 아난다 마히돌 (라마 8세) |
즉위 이후 | 와치랄롱꼰 (라마 10세) |
가족 관계 | |
왕조 | 차크리 왕조 |
가문 | 마히돌 가문 |
아버지 | 마히돌 아둔야뎃 |
어머니 | 상완 탈라팟 |
배우자 | 시리낏 키티야카라 (1950년 4월 28일 결혼) |
자녀 | 우본 라타나 공주 와치랄롱꼰 (라마 10세) 시린톤 공주, 왕녀 쭐라폰 공주, 스리사왕가와타나 |
종교 |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기타 정보 | |
왕실 스타일 | 폐하 (His Majesty the King,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ชนกาธิเบศร) |
2. 생애
푸미폰은 1927년 12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케임브리지 병원(현 마운트 오번 병원)에서 그의 숙부 라마 7세(Prajadhipok) 국왕의 재위 기간 동안 태어났다.[22] 그는 송클라 공작 마히돈 아둔야뎃과 평민 출신 부인 맘 상완(후에 스리나가린타라 왕세자비, 왕대비)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교 공중 보건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푸미폰은 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23] 푸미폰에게는 누나 칼라야니 바타나 공주와 형 아난타 마히돈 왕자가 있었다.
그의 미국 출생 증명서에는 "베이비 송클라"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부모가 길한 이름을 짓기 위해 당시 차크리 왕가의 수장이었던 삼촌 프라자디포크 국왕과 상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왕은 산스크리트어 기원의 이름인 ''푸미폰 아둔야뎃''(भूमिबल अतुल्यतेज, IAST: ''Bhūmibala Atulyateja'')을 선택했는데, 이는 "땅"을 의미하는 ''Bhūmi'' (भूमि), "힘" 또는 "권력"을 의미하는 ''Bala'' (बल), "비교할 수 없는"을 의미하는 ''Atulya'' (अतुल्य), "권력"을 의미하는 ''Tej'' (तेज)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Bhūmibala Atulyateja'', 즉 태국어로 음역된 ''Bhumibol Adulyadej''는 문자 그대로 "땅의 힘, 비할 데 없는 권력"으로 번역될 수 있다.[22]
푸미폰은 아버지가 하버드에서 증서를 받은 후 1928년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푸미폰이 두 살이 되기 전인 1929년 9월 신부전으로 사망했다.[23] 그는 잠시 방콕의 마테르 데이 학교에 다녔지만, 1933년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가서 로잔의 에콜 누벨 드 라 스위스 로망드에서 교육을 계속했다. 1934년 푸미폰은 평생 동안 사진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카메라를 받았다.[23] 푸미폰의 자녀가 없던 삼촌 프라자디포크가 1935년에 퇴위하자, 그의 아홉 살 된 형 아난타 마히돈이 라마 8세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은 스위스에 머물렀고 국가 원수의 업무는 섭정 회의에서 처리되었다. 그들은 1938년에 단 두 달 동안 태국으로 돌아왔다. 1942년 푸미폰은 재즈 애호가가 되었고, 평생 동안 열정을 쏟았던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23] 그는 로잔의 Gymnase Classique Cantonal에서 ''바칼로레아 데 레트르'' (프랑스 문학, 라틴어, 그리스어를 전공한 고등학교 졸업장)를 받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가족이 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1945년까지 로잔 대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22]
1946년 형 아난다 마히돈이 석연찮은 죽음을 당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학업을 위해 스위스로 돌아가 정치학을 공부하며 통치자로서의 준비를 했다. 1948년 교통사고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기도 했지만, 1950년 시리낏 끼띠야꼰과 결혼했다.
1950년 5월 5일 방콕 대궁전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시암 국민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정의롭게 통치할 것"을 맹세했다. 같은 해 시리낏 끼띠야꼰과 결혼했다. 그의 대관일은 매년 5월 5일 태국에서 대관일로 기념되며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왕실 부부는 스위스로 돌아가기 전 후아힌에서 신혼여행을 보냈고, 그곳에서 국왕은 대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들은 1951년 태국으로 돌아왔다.[26]
1956년에는 타이 불교 전통에 따라 왓 보원니웻에서 15일간 승려 생활을 했다. 이때 시리킷 왕비가 섭정을 맡았다.[26][35]
1992년에는 5월 항쟁 당시 수친다 크라프라윤 총리와 참롱 시리므앙을 중재하여 유혈 사태를 종식시키는 등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27년 12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마히돈 아둔야뎃 왕자는 당시 하버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26] 1928년 태국으로 귀국하였고, 1929년에 부친이 사망했다.[26] 1933년 모친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하여 로잔에서 학교를 다녔다.[26] 1935년 형 아난타 마히돈이 라마 8세로 즉위하면서 왕족 신분이 '프라옹짜오'에서 '짜우파'로 상승했다.[26] 1942년 로잔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법학을 전공했다.[2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가족과 함께 태국으로 귀국했다.[26]2. 2. 왕위 계승과 결혼
1946년 푸미폰은 라마 8세에 즉위했던 형 아난다 마히돈이 석연찮은 죽음을 당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왕위를 계승한 다음 푸미폰은 삼촌(큰아버지)인 차이낫 랑싯 프라유라삭디를 섭정 및 대리청정에 임명하고 학업을 마치기 위해 1947년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전공을 법학에서 정치학으로 전환하여 통치자로서의 준비를 했다.[28]1948년 10월 4일 푸미폰은 제네바 - 로잔 도로를 운전하다가 로잔 시외 10 km 지점에서 트럭의 뒤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그는 척추를 다치고, 찰과상을 입었으며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고, 결국 의안을 하게 된다.[28][29]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시리낏 끼띠야꼰이 자주 방문을 하여 두 사람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1949년 7월 19일 조용한 약혼식을 올리고, 1950년 4월 28일 즉위식 일주일 전에 결혼을 하였다.
푸미폰 왕과 시리낏 왕비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
우본라따나 라자칸야 공주 | 1951년 4월 5일 스위스 로잔 |
마하 와치랄롱꼰 왕세자 (현 라마 10세) | 1952년 7월 28일 |
마하 짜끄리 시린톤 공주 | 1955년 4월 2일 |
쭐라폰 왈라일락 공주 | 1957년 7월 4일 |
푸미폰의 손자 중 한 명은 2004년 인도양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사망하였으며, 우본라따나 라자칸야 공주의 아들 품 젠슨이었다.[31][32]
2. 3. 즉위와 통치
1950년 5월 5일, 방콕 왕궁에서 푸미폰 아둔야뎃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그는 입헌 군주제 하에서 태국 국왕으로 즉위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179] 1956년에는 타이 불교 전통에 따라 출가하였고, 이 기간 동안 시리낏 왕비가 섭정을 맡았다.[173]푸미폰 국왕의 통치 초기에는 플렉 피분송크람을 비롯한 군부 정권의 영향을 받았다. 1957년 군부 쿠데타 이후, 푸미폰 국왕은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나,[37] 1979년 BBC 인터뷰에서 국왕은 중립적인 입장을 강조했다.[23]
1990년대 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푸미폰 국왕은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992년 '5월 항쟁' 당시 수친다 총리와 민주화 운동 지도자 참롱을 중재하여 유혈 사태를 종식시켰다.[176]
2006년 군부 쿠데타 이후에도 푸미폰 국왕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2014년 쁘라윳 짠오차에 의해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승인하기도 하였다.
3. 정치적 역할과 위기 중재
푸미폰 국왕은 입헌 군주로서, 태국의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군부 정권을 옹호하기도 했으나, 1990년대 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46년 6월 9일, 형 아난다 마히돈 국왕이 의문의 총상으로 사망하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초기 정부는 아난다 국왕의 사인을 자살로 발표했으나, 조사 위원회는 이를 부인했다.[28] 세 명의 궁정 보좌관(칫 싱하세니, 붓 파탐사린, 찰라오 파툼롯)이 국왕 시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으나,[24][28]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왕위를 이은 푸미폰 국왕은 스위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국가 원수로서의 임무를 위해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의 삼촌인 차이나트 공 랑싯이 섭정으로 임명되어, 1947년 군사 쿠데타를 승인하고 1949년 헌법에 서명하여 왕실의 권한을 강화했다.[28]
1948년, 푸미폰 국왕은 피아트 토폴리노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28][29] 이 사고로 왕실 화장과 대관식이 연기되기도 했다.
사릿 정권 기간 동안 군주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푸미폰 국왕은 공개 행사와 지방 순방에 적극 참여하고 개발 프로젝트를 후원했으며,[43][44] 1960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2014년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에 의한 군사 쿠테타를 승인하였다.
3. 1. 군부와의 관계
쁠랙 피분송크람, 사릿 타나랏, 타놈 끼띠카쫀 등 초기 군부 정권과의 관계는 복잡했다. 1957년 사릿 타나랏의 쿠데타 당시 푸미폰 국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릿을 '수도 군사 방어자'로 임명했다.[40][41] 사릿 정권 하에서 왕실의 권위는 회복되었고, 왕실 의례가 부활했다.[43][44][45]1973년 민주화 운동 당시, 푸미폰 국왕은 학생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고, 이후 타놈 총리의 사임을 발표했다.[50] 그러나 1976년 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 당시에는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고 타닌 크라이위치엔을 총리로 임명했다.[52][53]
1981년과 1985년의 군사 쿠데타는 승인하지 않았다.
3. 2. 민주화 운동과 중재
1992년 5월 항쟁 당시, 푸미폰 국왕은 수친다 총리와 민주화 운동 지도자 참롱을 왕궁으로 불러 "그런 일로 타이 국민을 위해 된다고 생각하는가, 쌍방 모두 적당히 해라"라고 꾸짖어 유혈 사태를 종식시켰다.[176][177][178] 이 사건으로 수친다 내각은 해산되었고, 이후 2014년까지 태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다.[179]2006년 4월, 야당이 불참한 하원 총선에 대해 "민주주의적이지 않다"며 재선거를 시사했고, 헌법 재판소도 재선거를 명령하여 여야 모두 따랐다.[181]
2014년 군부 쿠데타 당시,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를 승인하였다.
4. 업적 및 사회 공헌
짜끄리 왕조의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1946년 6월 9일부터 2016년 10월 13일까지 70년 126일 동안 재위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되었다.[59] 푸미폰 국왕은 19번의 쿠데타 속에서도 태국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국민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1988년에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59]
1992년, 푸미폰 아둔야뎃은 태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태국 쿠데타로 군사 독재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1992년 3월 태국 총선거 이후 쿠데타 주도자 중 한 명인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총리로 추대되면서 5월 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군경의 시위대 진압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도 방콕은 혼란에 빠졌다.[59]
내전의 위기 속에서 푸미폰 아둔야뎃은 수친다와 민주주의 운동 지도자 참롱 시리므앙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면담에 소환하여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두 사람이 왕실 의전에 따라 무릎을 꿇고 함께 나타난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푸미폰 아둔야뎃은 수친다의 사면령에 서명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다.[60] 수친다는 곧 사임했고, 이후 총선거를 통해 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61]
200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은 푸미폰 국왕에게 총리 교체를 요청했으나, 국왕은 "비민주적"이라며 거절했다.[62] 탁신 친나왓은 4월 총선에서 승리 후 국왕과 면담하고 정치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푸미폰 국왕은 선거 결과가 비민주적이라고 이례적으로 언급했다.[63]
2006년 5월, 매니저 데일리 신문은 탁신과 전 태국 공산당 당원들이 국왕을 전복하려 했다는 "핀란드 음모"를 주장하는 기사를 게재했으나,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탁신과 그의 타이 락 타이 당은 혐의를 부인하고 고소인들을 고소했다.
푸미폰 국왕은 고위 판사들에게 정치 위기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고,[62] 태국 헌법 재판소는 2006년 5월 8일, 4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선거를 명령했다.[64]
7월 14일, 추밀원 의장 쁘렘 띤라술라논다는 태국 군대가 국가와 국왕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67] 7월 20일, 푸미폰 국왕은 새로운 하원 선거를 승인하는 왕령에 서명하고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했다.[68]
2006년 6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 행사가 열렸다. 왕실 예선 행렬, 불꽃놀이, 미술 전시회, 25,000명의 죄수 사면,[69] 콘서트, 무용 공연 등이 포함되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푸미폰 국왕에게 유엔 개발 계획의 첫 번째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6월 9일과 12일~13일에는 국경일이 거행되었고, 국왕과 왕비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난다 사마콤 궁전 발코니에 나타났다.
푸미폰 국왕은 "왕실 프로젝트"를 통해 농업을 시작으로 하는 지방 경제 활성화 프로그램을 직접 지도하고, 토지 개혁 운동을 위해 왕실 소유지를 제공하거나, 농촌 개발이나 가뭄 대책의 인공 강우 등 각종 왕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방 시찰도 적극적으로 행하며 국민과 가까운 입장을 유지하여 태국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매년 생일 전에는 전국 각지에 초상화가 걸리고, 국왕의 색인 노란색 셔츠[193]를 착용한 시민들로 가득 찼다.
고령으로 입원했을 때는 건강과 장수를 의미하는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국왕의 쾌유를 기원했다. 2016년 10월 13일 서거 후에는 검은 옷을 착용한 많은 국민들이 방콕 도심에서 목격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즉위 초기에는 사릿 독재 정권의 왕실 숭배 캠페인에 영향을 받았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군사 내각과 시민 운동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73년 10월 14일 타놈 키티카쫀(Thanom Kittikachorn) 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 시위 개입(10월 14일 학살 사건), 1976년 10.6 학살 사건(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194], "5월의 암흑 사건" 등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점이 많다.
푸미폰 국왕은 정기적인 공식 담화나 발언을 통해 국민들에게 시기에 맞는 이야기나 생활에 대해 언급했으며, 1970년대 초 학생 운동의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대해서는 "데모에 사용하는 핸드 스피커는 일본제, 경비를 담당하는 순찰차는 일본차"라며 현실을 지적하고 학생들의 지나친 행동을 꾸짖는 발언을 남겼다. 청렴한 인품과 공적으로 국민들의 자발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국내외에서 높이 칭찬받았다.[196]
4. 1. 왕실 프로젝트
푸미폰 국왕은 농촌 개발, 빈곤 퇴치, 환경 보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특히 2004년 이후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유사한 '자족 경제' 이론을 농촌 지역에 적극적으로 장려했다.[131]
1974년 7월 19일 카세르삿 대학교 졸업식에서 푸미폰 국왕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국가의 발전은 단계적으로 육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프라 구축, 즉 경제적이고 신중하며 원칙에 맞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음식과 기본적인 필수품을 제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단 기반이 확고하게 구축되면 진보는 지속적이고 신중하며 경제적으로 추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실수와 실패를 방지하고 목표를 확실하고 완전하게 달성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130]
푸미폰 국왕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분야 | 주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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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강우 | 태국 왕립 강우 프로젝트 하의 샌드위치와 슈퍼샌드위치 인공 강우 프로젝트[152][153][154] |
폐수 처리 | 차이 파타나 폐수 폭기기 (2000년 브뤼셀 유레카에서 BKU 금메달 수상) |
농업 | 충분 경제 이론, 새로운 농업 이론, 쌀 생산량 증가[132] 및 유전자원 수집 개선[134] (2007년 최초의 보를로그 메달 수상)[133] |
토양 개선 | 베티버 풀 사용[132][134] (IECA 국제 공로상 수상), 산성 토양 처리(끌랭 딘 프로젝트)[136] |
수자원 관리 | 깽 링 프로젝트 (저류지 형성)[135], 파이 매오 프로젝트 (사방댐 형성), 쿤 단 프라칸촌 댐 (나콘나욕 주), 파삭 졸라시드 댐 (롭부리 주), 파삭강 유역 개선 프로젝트, 클롱 랏 포 프로젝트 (방콕 홍수 방지를 위한 물길 변경) |
기타 | 라마 8세교, 랏차다피섹 로드, 방콕 산업 순환 도로/품미폰 대교, 후아이 옹콧 토지 재건 프로젝트 (깐짜나부리 주), 카오 힌 손 왕립 개발 연구 센터 (차층사오 주), 피쿤 통 왕립 개발 연구 센터 (나라티왓 주), 후아이 사이 왕립 개발 연구 센터 (펫차부리 주), 왕실 의료 팀[137] |
유엔은 토양 과학 분야에서의 푸미폰 국왕의 업적을 기려 그의 생일인 12월 5일을 세계 토양의 날로 기념하며, 첫 번째 기념일은 2014년이었다.[138][139]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1993년 "차이 파타나(Chai Pattana)"라는 폐수 폭기기에 대한 특허를 받았고, 1955년 이후 인공 강우에 대한 여러 특허를 받는 등 특허를 보유한 유일한 태국 군주였다.[151]
푸미폰 국왕은 "왕실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농업을 시작으로 하는 지방 경제 활성화 프로그램을 직접 지도하고, 스스로 토지 개혁 운동을 위해 왕실 소유지를 제공하거나, 농촌 개발이나 가뭄 대책의 인공 강우 등 각종 왕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4. 2. 기타 업적
짜끄리 왕조의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1946년 6월 9일부터 2016년 10월 13일까지 70년 126일 동안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하였다.[59] 태국 국민들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국민의 아버지로 존경했으며, 19번의 쿠데타 속에서도 태국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88년에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59]1992년, 푸미폰 아둔야뎃은 태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태국 쿠데타로 군사 독재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1992년 3월 태국 총선거 이후 쿠데타 주도자 중 한 명인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총리로 추대되면서 5월 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군경의 시위대 진압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도 방콕은 혼란에 빠졌다.[59]
내전의 위기 속에서 푸미폰 아둔야뎃은 수친다와 민주주의 운동 지도자 참롱 시리므앙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면담에 소환하여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두 사람이 왕실 의전에 따라 무릎을 꿇고 함께 나타난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푸미폰 아둔야뎃은 수친다의 사면령에 서명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다.[60] 수친다는 곧 사임했고, 이후 총선거를 통해 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61]
200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은 푸미폰 국왕에게 총리 교체를 요청했으나, 국왕은 "비민주적"이라며 거절했다.[62] 탁신 친나왓은 4월 총선에서 승리 후 국왕과 면담하고 정치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푸미폰 국왕은 선거 결과가 비민주적이라고 이례적으로 언급했다.[63]
2006년 5월, 매니저 데일리 신문은 탁신과 전 태국 공산당 당원들이 국왕을 전복하려 했다는 "핀란드 음모"를 주장하는 기사를 게재했으나,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탁신과 그의 타이 락 타이 당은 혐의를 부인하고 고소인들을 고소했다.
푸미폰 국왕은 고위 판사들에게 정치 위기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고,[62] 태국 헌법 재판소는 2006년 5월 8일, 4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선거를 명령했다.[64]
7월 14일, 추밀원 의장 쁘렘 띤라술라논다는 태국 군대가 국가와 국왕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67] 7월 20일, 푸미폰 국왕은 새로운 하원 선거를 승인하는 왕령에 서명하고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했다.[68]
2006년 6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 행사가 열렸다. 왕실 예선 행렬, 불꽃놀이, 미술 전시회, 25,000명의 죄수 사면,[69] 콘서트, 무용 공연 등이 포함되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푸미폰 국왕에게 유엔 개발 계획의 첫 번째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6월 9일과 12일~13일에는 국경일이 거행되었고, 국왕과 왕비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난다 사마콤 궁전 발코니에 나타났다.
"왕실 프로젝트"를 통해 농업을 시작으로 하는 지방 경제 활성화 프로그램을 직접 지도하고, 토지 개혁 운동을 위해 왕실 소유지를 제공하거나, 농촌 개발이나 가뭄 대책의 인공 강우 등 각종 왕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방 시찰도 적극적으로 행하며 국민과 가까운 입장을 유지하여 태국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매년 생일 전에는 전국 각지에 초상화가 걸리고, 국왕의 색인 노란색 셔츠[193]를 착용한 시민들로 가득 찼다.
고령으로 입원했을 때는 건강과 장수를 의미하는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국왕의 쾌유를 기원했다. 2016년 10월 13일 서거 후에는 검은 옷을 착용한 많은 국민들이 방콕 도심에서 목격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즉위 초기에는 사릿 독재 정권의 왕실 숭배 캠페인에 영향을 받았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군사 내각과 시민 운동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73년 10월 14일 타놈 키티카쫀(Thanom Kittikachorn) 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 시위 개입(10월 14일 학살 사건), 1976년 10.6 학살 사건(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194], "5월의 암흑 사건" 등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점이 많다.
푸미폰 국왕은 정기적인 공식 담화나 발언을 통해 국민들에게 시기에 맞는 이야기나 생활에 대해 언급했으며, 1970년대 초 학생 운동의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대해서는 "데모에 사용하는 핸드 스피커는 일본제, 경비를 담당하는 순찰차는 일본차"라며 현실을 지적하고 학생들의 지나친 행동을 꾸짖는 발언을 남겼다. 청렴한 인품과 공적으로 국민들의 자발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국내외에서 높이 칭찬받았다.[196]
태국 국민들로부터 널리 존경받고 있지만, 반 왕정 사상(군주제 폐지론)[197]을 가진 외국인 등에게 비판받기도 하며, 불경죄로 처벌받는 경우도 있다. 2007년 국왕 포스터에 검은 페인트를 칠한 스위스인 남성은 금고 10년(최고형 75년)[198], 저서에서 왕실을 비판한 호주인 남성은 2009년 징역 3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다.[199] 하지만 다른 나라 정부나 국민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NHK 『라디오 심야편』 등에서 소개될 때도 "(태국 국민이) 존경하는 푸미폰 국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5. 서거와 장례
2016년 10월 13일 오후 3시 52분(현지 시간), 시리랏 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재위 기간은 70년 4개월로, 역사적으로도 드물게 긴 기간이었다.[186][187][188]。
붕어 이후, 태국 총리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189]
발표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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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공 장소, 국영 기업, 정부 관련 기관 및 교육 기관은 10월 14일부터 30일간 조기를 게양한다. |
모든 공무원 및 국영 기업 직원, 정부 기관 직원은 10월 14일부터 1년간 상복을 입는다. |
일반 국민은 상식적인 선에서 애도한다. |
붕어 이후, 태국 국민들은 상을 표명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었다. 각국의 주 태국 대사관, 태국 정부 관광청, 타이 항공 등은 웹사이트를 모노크롬, 그레이스케일로 변경했으며, 라인도 모노크롬으로 변경되었다.
2016년 10월 14일, 시신은 관례적인 목욕 의식을 위해 차량 행렬을 통해 대궁전으로 옮겨졌다.[114] 수천 명의 시민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애정을 표했다. 왕실 행렬은 17시에 위셋 차이시 문을 통해 대궁전에 도착했다. 왕세자 마하 와치라롱꼰이 피만 랏타야 옥좌 홀에서 목욕 의식을 주재했다.[115]
왕실 화장 의식은 2017년 10월 말에 걸쳐 5일 동안 거행되었다. 실제 화장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지 않았으며, 2017년 10월 26일 늦은 저녁에 거행되었다.[116][117] 화장 후 유해는 대궁전 짜크리 마하 쁘라삿 옥좌 홀(왕실 유해), 왓 랏차보핏 왕실 묘지, 왓 보원니웻 위한 왕실 사원(왕실 유골)에 안치되었다.[118]
2017년 10월 30일 자정에 공식적인 애도 기간이 종료되었으며, 태국인들은 2019년 5월 4일에서 6일 사이에 거행된 와치라롱꼰 국왕 대관식을 기다리면서 일반적인 색상의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119][120]
국왕 서거 약 1년 후인 2017년 10월 26일 (현지 시각), 방콕 왕궁 앞 광장에 설치된 시설에서 화장 의식이 거행되어 다비에 들어갔다.[190] 태국 정부는 10월 29일을 기해 복상 기간 종료를 선언하고, 11월 2일부터 30일까지 화장 시설을 일반에 공개했다.[191] 일반 공개는 12월 31일까지 연장되었다.[192]
6. 유산 및 평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태국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과 사회 통합에 기여했으며,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16]
1992년, 푸미폰 국왕은 태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태국 쿠데타 이후 1992년 3월 태국 총선거에서 쿠데타 주도자 중 한 명인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총리로 선출되자, 5월 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푸미폰 국왕은 수친다와 친민주주의 운동 지도자인 참롱 시리므앙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면담에 소환하여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했고, 이는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수친다는 사임하고 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59][60][61]
2008년 정치 위기 당시,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연합(PAD)은 군주제를 옹호한다고 주장했지만, 푸미폰 국왕은 침묵을 지켰다. PAD 지지자가 사망한 후, 시리킷 왕비가 그의 화장을 주관했고, 시린톤 공주는 PAD가 군주제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84]
푸미폰 국왕은 농촌 경제 활성화 프로그램인 "왕실 프로젝트"를 직접 지도하고, 토지 개혁 운동을 위해 왕실 소유지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왕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왕비와 함께 지방을 시찰하며 국민들과 가까운 입장을 유지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193]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와 정치적 격변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불경죄 법률을 이용하여 언론 및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163] 2005년 생일 연설에서 비판을 허용했지만,[38] 불경죄 기소 건수는 급증했다.[164]
7. 가족 관계
(1998년 이혼)
(1991년 8월 12일 이혼)
(1996년 이혼)
(2014년 12월 11일 이혼)
(1996년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