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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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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1892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축구 선수로, 독일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였다. 그는 1914년 백인이 아닌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었고, 1919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43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며, 통산 1329골을 기록하여 펠레의 기록을 넘어 역대 최다 골 기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득점 기록은 자료 부족으로 논란이 있다. 그는 '조고 보니토' 스타일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인종 차별 속에서도 브라질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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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리덴라이히와 브라질
본명알 수 없음
신장1.70m
포지션스트라이커
출생일1892년 7월 18일
출생지상파울루, 브라질
사망일1969년 9월 6일
사망지상파울루, 브라질
애칭치그리 (El Tigre)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알 수 없음
1909게르마니아 (1경기, 0골)
1910이피랑가 (2경기, 0골)
1911게르마니아 (13경기, 6골)
1912마켄지 콜레지 (11경기, 12골)
1913–1915이피랑가 (32경기, 21골)
1916파이산두 (6경기, 4골)
1917이피랑가 (6경기, 15골)
1918–1929파울리스타누 (252경기, 288골)
1930–1935상파울루 (124경기, 102골)
1933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알 수 없음)
1935플라멩구 (4경기, 0골)
총 경기 수451경기
총 득점 수448골
국가대표 경력
1914–1925브라질 (23경기, 10골)
1922–?상파울루 (알 수 없음)
수상
남미 챔피언십우승: 1919 브라질, 1922 브라질
준우승: 1925 아르헨티나
3위: 1916 아르헨티나

2. 생애

독일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였다.[1] 1914년 백인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었다.[1] 1919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는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 승리는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축구 강국 브라질이 만들어지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우루과이인들은 이때부터 그에게 '치그리'(호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4]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백인, 상류 계급 자녀들이었기에 프리덴라이히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당시 흑인 선수에 대한 반칙은 눈감아 주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포마드로 넘기고 그 위에 망사 모자를 쓰고 경기했다. 물라토였지만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1]

43세의 나이로 1934년 은퇴할 때까지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통산 1329골은 펠레의 1281골을 넘어 역대 최다 골 기록이다. 선수 생활 동안 거의 무보수로 뛰었고, 축구로 얻은 보상은 집 한 채뿐이었다. 축구 선수로서 생애 통산 최다 득점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어 있다.[1] 1969년에 사망했다. 펠레가 프리덴라이히에 이어 통산 1000골을 달성하기 3개월 전이었다.

2. 1. 유년 시절 및 개인사

어린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프리덴라이히는 상파울루에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프리덴라이히와 해방된 흑인 노예의 딸이자 흑인 브라질인 세탁부인 마틸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축구는 백인 브라질인에 의해 지배되고 흑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프리덴라이히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출신 최초의 프로 축구 선수였다. 그는 인종차별로 인해 많은 장벽에 직면했으며, 수영장, 테니스 코트, 파티 등 백인 선수들이 가는 곳에 갈 수 없었다.[1] 피부색 때문에 브라질 축구계에서 관계를 맺고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프리덴라이히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기술을 매우 지지했으며 그가 훌륭한 선수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아내 조나스와 결혼했고, 그들은 프리덴라이히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오스카라는 아들을 낳았다. 둘 다 프리덴라이히보다 오래 살았지만 돈이 없었다.[1]

2. 2. 선수 경력

독일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였다. 1914년 백인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었다. 1919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는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 승리는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축구 강국 브라질이 만들어지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우루과이인들은 이때부터 그에게 '치그리'(호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백인, 상류 계급 자녀들이었기에 프리덴라이히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당시 흑인 선수에 대한 반칙은 눈감아 주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포마드로 넘기고 그 위에 망사 모자를 쓰고 경기했다. 물라토였지만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1934년 은퇴할 때까지 43세의 나이로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통산 1329골은 펠레의 1281골을 넘어 역대 최다 골 기록이다. 선수 생활 동안 거의 무보수로 뛰었고, 축구로 얻은 보상은 집 한 채뿐이었다. 프리덴라이히는 축구 선수로서 생애 통산 최다 득점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어 있다.

2. 2. 1. 초기 경력 (1909-1916)

프리덴라이히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일 이민자들로 구성된 브라질 축구팀인 SC 게르마니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3] 1910년부터 상파울루의 여러 클럽에서 활약했다.[3] 그는 매우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엘리트 클럽에 처음 합류했을 때는 17세였다. 이후 프리덴라이히는 여러 클럽을 전전하다가 브라질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CA 파울리스타누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1]

그의 초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클럽
1909SC 제르마니아
1910CA 이피랑가
1911SC 제르마니아
1912AA 매켄지
1913-1915CA 이피랑가
1916CA 파울리스타노


2. 2. 2. 전성기 (1917-1929)

1917년부터 1929년까지 프리덴라이히는 CA 파울리스타누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CA 파울리스타누에서 12년간 활약하며 1917년, 1918년, 1919년, 1921년, 1927년, 1929년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5][6]

그는 1919년과 1922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10골을 기록했다.[3] 특히 1919년 대회(1919년 남미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는 결승골을 넣어 대회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 골로 브라질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하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축구 강국 브라질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4] 우루과이인들은 이때부터 그에게 '치그리'(호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925년 브라질의 유럽 투어에서 그는 '축구의 왕'으로 칭송받았다.[5]

2. 2. 3. 후기 경력 (1930-1935)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는데, 이는 리우데자네이루주와 상파울루주 축구 리그 간의 심각한 오해 때문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주 선수들만 우루과이로 떠났고, 38세의 프리덴라이히를 비롯해 필루(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34년 FIFA 월드컵 우승), 페이티소와 같은 상파울루의 스타들은 우루과이로 가지 않았다.[1]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덜 엘리트 클럽에서 뛰게 되었다. 1934년 이후, 그는 지역 리그에서만 뛰었으며 해당 클럽들에서 경쟁했다. 1935년, 선수 경력 말년에 은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뛴 팀은 리우데자네이루의 CR 플라멩구였다.[1]

2. 3. 은퇴 이후

1930년대에 브라질 축구는 프로화 과정을 시작했고, 1933년에 현실화되었다.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의 프로화에 반대하여, 43세의 나이로 플라멩구에서 뛰는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35년 7월 21일 플루미넨세와의 경기였다(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그는 이날 득점하지 못했다). 은퇴 후 그는 주류 회사에서 일하다가 은퇴했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을 앓았으며, 치료비로 대부분의 돈을 잃었다. 1969년 9월 6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상파울루 축구 클럽이 제공한 집에서 살았다.[1]

3. 플레이 스타일

프리덴라이히는 '조고 보니토' 또는 '아름다운 축구'로 불리는 브라질 축구 스타일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이 스타일은 짧은 패스와 빠른 터치, 연계를 통해 매우 빠르게 경기를 진행하는 것을 포함했다. 또한, 많은 중거리 슛을 시도하고, 2~3명의 빠른 공격수를 활용하여 수비를 혼란시키는 데 의존했다. 그는 키가 작은 선수(5피트 7인치)였지만, 그의 속도, 힘, 그리고 뛰어난 기술적 드리블로 유명했다.[2]

4. 인종 차별과 브라질 축구

프리덴라이히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출신 혼혈이었다. 브라질은 1888년 노예 제도를 폐지한 마지막 국가 중 하나였다. 이는 프리덴라이히가 태어나기 4년 전이었다. 이로 인해 프리덴라이히는 평생 동안, 특히 선수 경력에서 차별의 압력을 느꼈다. 1921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선수권 대회 출전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프리덴라이히는 차별에 반대하는 대변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지만, 축구 선수로서 많은 장벽을 깼다. 또한, 자신의 문화를 극단적으로 옹호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더 백인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많은 백인 선수들처럼 옷을 입고 행동했다. 많은 흑인 브라질 선수들은 더 하얗게 보이려고 얼굴에 밀가루나 쌀가루를 발랐으며, 프리덴라이히는 "백인"처럼 보이기 위해 경기 전에 머리를 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다른 선수들이 백인 상류 계급 자녀들뿐이었던 가운데, 프리덴라이히는 심한 차별을 계속 받았고 (당시, 흑인 선수에 대한 반칙은 눈감아 주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그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포마드로 넘기고, 그 위에 망사 모자를 쓰고 플레이했다.[1] 이러한 상황은 물라토였고,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1]

5. 득점 기록 논란

프리덴라이히의 정확한 득점 기록은 자료 부족으로 인해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넣은 골의 수를 특정할 수 있는 정확한 숫자는 없으며, 수년에 걸쳐 몇 가지 추정치만 제시되었을 뿐이다. 가장 유명한 추정치는 프리덴라이히가 1,239경기에 출전하여 1,329골을 넣었다는 것이다.[7][8] 프리덴라이히의 아버지와 그의 전 팀 동료 마리오 데 안드라데는 그의 득점 기록을 모두 정리했지만, 프리덴라이히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던 1960년대 중반에 자료가 사라졌다.[9]

6. 주요 경력

독일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로, 1914년 백인 외에는 처음으로 브라질 대표팀에 선출되었다.[1] 1919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을 꺾는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 승리는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축구 강국 브라질이 건설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치그리'(호랑이)라는 별명은 이때 우루과이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1]

당시 다른 선수들은 백인, 상류층 자녀들뿐이었던 상황에서 프리덴라이히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당시 흑인 선수에 대한 반칙은 묵인되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포마드로 넘기고 망사 모자를 쓰고 경기했다.

43세까지 선수로 활동하며 1934년 은퇴했다. 통산 1329골은 펠레의 1281골을 넘어 역대 최다 골 기록이다. 선수 생활 동안 거의 무보수로 뛰었고, 축구로 얻은 보상은 집 한 채뿐이었다.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1969년 사망했다.

6. 1. 클럽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일 이민자들로 구성된 브라질 축구팀인 SC 게르마니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부터 상파울루의 여러 클럽에서 활약했다.[3] 프리덴라이히는 매우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엘리트 클럽에 처음 합류했을 때는 17세였다. 이후 여러 클럽을 전전하다가 브라질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CA 파울리스타누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CA 파울리스타누에서 12년간 활약한 후, 클럽이 해체되자 상파울루 다 플로레스타에 합류했다.[1]

소속팀기간
SC 게르마니아1909년, 1911년
CA 이피랑가1910년, 1913년~1915년, 1917년
AA 매켄지1912년
CA 파울리스타노1916년, 1918년~1929년
상파울루 FC1929년~1931년
CR 플라멩구1931년~1935년



1931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가 속한 상파울루 FC 선수단


그는 1912년, 1914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1년, 1927년, 1929년에 상파울루 리그에서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5][6] 또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1918년, 1919년, 1921년, 1926년, 1927년, 1929년, 1931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6. 2. 국가대표

1914년 백인 외에 처음으로 브라질 대표팀에 선출되었다.[1]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1919년 및 1922년 우승을 차지하였다.[1] 1919년 대회 결승전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우루과이 대표팀을 꺾는 결승골을 넣어 대회 첫 우승에 기여했다.[1] 이 승리는 브라질 사람들의 시선을 본격적으로 축구에 쏟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축구 강국 브라질이 건설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1] '''치그리'''(호랑이)라는 별명은 이 당시에 우루과이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1]

6. 3. 개인

수상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MVP (1919),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득점왕 (1919)
선정IFFHS 선정 20세기 브라질 선수 5위, IFFHS 선정 20세기 남아메리카 선수 13위



독일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였다. 1914년 백인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브라질 대표팀에 선출되었다. 1919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우루과이 대표팀을 꺾는 결승골을 넣어 대회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 승리는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축구 강국 브라질이 만들어지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치그리'''(호랑이)라는 별명은 이때 우루과이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백인, 상류 계급 자녀들뿐이었던 상황에서 프리덴라이히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당시 흑인 선수에 대한 반칙은 묵인되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포마드로 넘기고, 그 위에 망사 모자를 쓰고 경기했다. 물라토였고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43세까지 선수로 활동하며 1934년 은퇴했다. 통산 1329골은 펠레의 1281골을 넘어 역대 최다 골 기록이지만, 선수 생활 동안 거의 무보수로 뛰었고, 축구로 얻은 보상은 집 한 채뿐이었다. 프리덴라이히는 축구 선수로서 생애 통산 최다 득점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어 있다. 1969년에 사망했는데, 펠레가 프리덴라이히에 이어 통산 1000골을 달성하기 3개월 전이었다.

7. 소속 클럽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일 이민자들로 구성된 브라질 축구팀인 SC 게르마니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부터 상파울루의 여러 클럽에서 활약했다.[3] 프리덴라이히는 여러 클럽을 전전하다가 브라질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CA 파울리스타누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CA 파울리스타누에서 12년간 활약한 후, 클럽이 해체되자 상파울루 다 플로레스타에 합류했다.[1]

연도클럽
1909SC 게르마니아
1910CA 이피랑가
1911SC 게르마니아
1912AA 매켄지
1913CA 이피랑가
1913아메리카누 (산투스 소속)
1913–14파울리스타 (확인되지 않음)
1914아틀라스* (산투스의 아틀라스 플라멩구 FC) (확인되지 않음)
1914–15CA 이피랑가
1915–16파이산두 (상파울루 시의 클럽, 파라 주의 파이산두와는 다름)
1916CA 파울리스타누
1917CA 이피랑가
1917플라멩구
1917–29CA 파울리스타누
1929인테르나시오날*
1929아틀레치쿠 산티스타*
1930산투스*
1930–35상파울루
1933두이스 지 율류 (BA)*
1933아틀레치쿠*
1935산투스
1935플라멩구



* 단 한 경기에만 해당.

참조

[1] 간행물 Arthur Friedenreich (1892–1969): a Brazilian biography 2014
[2] 서적 Friedenreich, Arthur Oxford University Press 2005-04-07
[3] 웹사이트 Profiles Of The Great and Good: Arthur Friedenreich: The Original "Black" Pearl. https://bleacherrepo[...] 2020-04-18
[4] 웹사이트 Magical feeling of a hat-trick: Friedenreich, Pele, McDougall, Pontikas, Patenaude, Lee Wai https://90soccer.com[...] 90soccer.com 2021-06-21
[5] 웹사이트 Profiles Of The Great and Good: Arthur Friedenreich: The Original "Black" Pearl. https://bleacherrepo[...] 2023-05-04
[6] 웹사이트 Ranking the Top 60 Strikers of All Time https://bleacherrepo[...] 2023-11-24
[7] 웹사이트 Prolific Scorers Data https://www.rsssf.or[...] 2022-02-07
[8] 웹사이트 Who scored the most goals in history? https://90soccer.com[...] 90soccer.com 2021-10-31
[9] 웹사이트 Profiles Of The Great and Good: Arthur Friedenreich: The Original "Black" Pearl. https://bleacherrepo[...] 2020-04-18
[10] 서적 Almanaque Do Futebol https://books.google[...] Casa da Palavra 2006
[11] 간행물 Placar Magazine https://books.google[...] Editora Abril 1999-06
[12] 웹사이트 Campeonato Paulista: Artilheiros da história http://www1.folha.uo[...] Folha de S.Paulo 2014-07-10
[13] 웹사이트 IFFHS' Century Elections https://www.rsss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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