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FIFA 월드컵
1. 개요
1930년 FIFA 월드컵은 FIFA가 주최한 최초의 FIFA 월드컵으로,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1928년 FIFA 총회에서 결정되었으며,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한 우루과이가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총 13개국이 참가했으며, 유럽에서는 4개국이 참가하기 위해 쥘 리메 FIFA 회장의 설득이 있었다.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를 결승전에서 4-2로 꺾고 우승했으며, 기예르모 스타빌레(아르헨티나)가 8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 대회 이름 | 1930년 FIFA 월드컵 |
|---|---|
| 다른 이름 | 제1회 축구 세계 선수권 대회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개최국 | 우루과이 |
|---|---|
| 개최 기간 | 1930년 7월 13일 ~ 7월 30일 |
| 참가 팀 | 13 |
| 대륙 | 3 |
| 경기장 수 | 3 |
| 도시 수 | 1 |
| 우승팀 | 우루과이 |
|---|---|
| 우승 횟수 | 1 |
| 준우승팀 | 아르헨티나 |
| 3위팀 | 미국 |
| 4위팀 | 유고슬라비아 |
| 총 경기 수 | 18 |
|---|---|
| 총 득점 | 70 |
| 총 관중 수 | 590549 |
| 최다 득점 선수 | 기예르모 스타빌레 (8골) |
| 최다 득점 선수 | 기예르모 스타빌레 |
|---|---|
| 득점 | 8 |
| 골키퍼 | 엔리케 바예스테로스 |
| 다음 대회 | 1934년 FIFA 월드컵 |
|---|---|
| 다음 대회 연도 | 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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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FIFA 월드컵 경기장 -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축구 경기장으로, 1930년 우루과이 헌법 제정 100주년과 제1회 FIFA 월드컵 개최를 기념하여 건설되었으며, FIFA에서 "축구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했고 월드컵, 코파 아메리카 등 주요 국제 대회를 개최했으며, 2030년 FIFA 월드컵 개막 경기가 열릴 예정이다. -
1930년 FIFA 월드컵 경기장 -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은 클럽 나시오날 데 풋볼의 홈 경기장이자 우루과이의 역사와 애국심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1900년 개장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약 34,000명을 수용하며 1930년 FIFA 월드컵을 포함한 주요 국제 대회를 개최하여 FIFA가 월드컵 역사상 첫 경기 개최 기념 명판을 설치했다. -
1930년 축구 -
라리가 1929-30
아틀레틱 빌바오가 무패 우승을 달성하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강등된 라리가 1929-30 시즌에서는 총 10개 팀이 참가하여 리그전을 치렀으며, 아틀레틱 빌바오의 기예르모 고로스티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 -
1930년 축구 -
세군다 디비시온 1930-31
세군다 디비시온 1930-31 시즌은 10개 팀이 참가하여 발렌시아 CF가 우승을 차지하고 이베리아 SC는 강등된 스페인 축구 리그의 두 번째 티어 시즌이다. -
1930년 FIFA 월드컵 -
1930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
1930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은 아르헨티나, 칠레, 프랑스, 멕시코, 유고슬라비아, 브라질, 볼리비아를 포함한 여러 국가 대표팀의 선수 정보, 감독 정보, 포지션, 생년월일, 출전 횟수, 소속 클럽 등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
1930년 FIFA 월드컵 -
1930년 FIFA 월드컵 1조
1930년 FIFA 월드컵 1조는 아르헨티나, 칠레, 프랑스, 멕시코로 구성되어 아르헨티나가 3전 전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하며 준결승에 진출했고, 뤼시앵 로랑의 월드컵 첫 골과 마누엘 로사스의 최초 자책골 및 페널티킥 득점 등 다양한 기록이 나왔다.
2. 배경
1914년, FIFA는 올림픽 축구 대회를 "세계 아마추어 축구 선수권"으로 공인했고,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세 번의 올림픽 대회를 관리했다. 그러나 193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축구 종목이 제외되었는데, 이는 FIFA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간의 아마추어 선수 자격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기간 중 5월 26일에 열린 FIFA 총회에서 쥘 리메 회장은 올림픽과는 별개로 프로 선수도 참가 가능한 FIFA 주최 축구 대회 개최를 제안했고, 이는 찬성 25표, 반대 5표로 가결되었다.
3. 개최지 선정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축구에서 2회 연속 우승하여 당시 세계 최강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우루과이는 월드컵 개최를 위해 새로운 경기장(센테나리오 경기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모든 참가국에 대해 일체의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이탈리아, 스웨덴, 네덜란드, 스페인도 월드컵 유치를 신청했지만, 우루과이의 강력한 조건에 다른 국가들은 유치 신청을 철회했다.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우루과이가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우승 트로피인 "승리의 여신"은 프랑스 조각가 아벨 라플뢰르가 제작했다.
4. 참가
1930년 FIFA 월드컵은 예선전 없이 치러진 유일한 월드컵이었다. FIFA와 관계를 맺은 모든 국가들이 참가 요청을 받았고, 1930년 2월 28일까지 수락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미국, 멕시코,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페루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7개국이 참가하여, 월드컵 역사상 가장 많은 남미 팀이 본선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는 멀고 비싼 여정과 선수들의 장기간 차출 문제로, 유럽 팀들의 참가는 저조했다. 몇몇 국가들은 남아메리카로의 여행에 동의하지 않았고, 1930년 2월 마감일까지 단 한 팀도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우루과이 축구 협회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참가 요청 공문을 보냈으나, 1929년 11월 18일 잉글랜드 축구 협회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다. 대회 시작 2달 전까지도 유럽 팀의 참가는 없었다.
쥘 리메 FIFA 회장의 중재로 루마니아,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4개국이 참가를 결정했다. 루마니아는 카롤 2세 국왕, 프랑스는 쥘 리메의 개인적인 개입으로 참가했지만, 프랑스 유명 공격수 마누엘 아나토와 대표팀 코치 가스톤 바레아우는 불참했다. 벨기에는 FIFA 부회장 루돌프 세드라이데르스의 권유로 참가했다.
루마니아 선수단은 제노바에서 꽁뜨 베르드호, 프랑스 선수단은 1930년 6월 21일 빌프랑슈쉬르메르, 벨기에 선수단은 바르셀로나에서 이 배에 합류했다. 꽁뜨 베르드호에는 쥘 리메, 월드컵 트로피, 유럽 심판 3명도 함께 탑승했다. 브라질 선수단은 6월 29일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이 배에 탑승, 7월 4일 우루과이에 도착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마르세유에서 플로리다호를 이용했다.
일본도 초청받았지만, 1927년 쇼와 금융공황 이후 만성적인 불황과 쇼와 공황으로 인한 경제 악화, 대일본축구협회의 재정난으로 참가를 포기했다.
4.1. 참가국 목록
1930년 FIFA 월드컵은 예선전 없이 치러진 유일한 월드컵이었다. FIFA와 관계를 맺은 모든 국가들이 초청받았고, 1930년 2월 28일까지 참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미국, 멕시코,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페루 등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국가들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총 7개의 남미 국가가 참가했는데, 이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많은 남미 팀이 본선에 진출한 기록이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는 멀고 비싼 여정과 선수들의 장기간 차출 문제로 인해 유럽 팀들의 참가는 저조했다. 몇몇 유럽 국가들은 참가를 거부했고, 2월 마감일까지 단 한 팀도 신청하지 않았다. 우루과이 축구 협회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참가 요청 공문을 보냈으나, 1929년 11월 18일 잉글랜드 축구 협회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다. 대회 시작 2달 전까지도 유럽 팀의 참가는 없었다.
쥘 리메 FIFA 회장의 중재로 루마니아,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등 4개 유럽 팀이 참가를 결정했다. 루마니아는 카롤 2세 국왕의 개입으로, 프랑스는 쥘 리메의 개인적인 개입으로 참가하게 되었지만, 프랑스의 유명 공격수 마누엘 아나토와 대표팀 코치 가스톤 바레아우는 불참했다. 벨기에는 FIFA 부회장 루돌프 세드라이데르스의 권유로 참가했다.
루마니아 선수단은 제노바에서 꽁뜨 베르드호를 타고 출발했고, 프랑스 선수단은 1930년 6월 21일 빌프랑슈쉬르메르에서, 벨기에 선수단은 바르셀로나에서 이 배에 합류했다. 꽁뜨 베르드호에는 쥘 리메와 월드컵 트로피, 그리고 3명의 유럽 심판들도 함께 탑승했다. 브라질 선수단은 6월 29일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이 배에 탑승했고, 7월 4일 우루과이에 도착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플로리다호를 이용했다.
일본도 초청받았지만, 1927년의 쇼와 금융공황 이후 만성적인 불황과 쇼와 공황으로 인한 경제 악화, 대일본축구협회의 재정난으로 인해 참가를 포기했다.
| 대륙 연맹 | 출전 국가 수 | 출전 국가・지역 | 비고 |
|---|---|---|---|
| CONMEBOL | 7 | 개최국 | |
| UEFA | 4 | ||
| CONCACAF | 2 | ||
| AFC | 2 | 출전 철회 | |
| CAF | 1 | 폭풍으로 배를 탈 수 없었다 |
5. 개최 도시 및 경기장
모든 경기는 몬테비데오에 있는 세 개의 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축구 경기 용도 뿐만 아니라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용도로도 건축되었다. 후안 스카소가 디자인 한 이 경기장은 주로 축구 대회 용도로 쓰였으며, 쥘 리메는 이 경기장을 "축구의 신전"이라 칭했다. 9만 명의 수용 인원을 갖춘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영국 제도의 경기장을 제외한 경기장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축구 경기장이었다. 이 경기장에서는 준결승 경기와 결승전 경기를 포함한 10경기가 열렸다. 그러나 성급하게 진행된 건축 일정과 장마철로 인한 지연으로 인해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대회 5일 전까지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회 초반의 경기들은 클루브 나시오날 데 풋볼의 홈 구장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2만 명 수용)과 페냐롤의 홈 구장 포시토스 경기장(1만 명 수용)에서 열렸다.
| 경기장 | 수용 인원 |
|---|---|
| 센테나리오 경기장 | 90,000명 |
|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 | 20,000명 |
| 포시토스 경기장 | 10,000명 |
6. 심판진
총 15명의 심판이 대회에 참여했다. 유럽 출신 심판은 프랑스 1명, 벨기에 2명, 루마니아 1명으로 총 4명이었고, 아메리카 출신 심판은 우루과이 6명, 브라질 1명, 볼리비아 1명, 아르헨티나 1명, 칠레 1명으로 총 11명이었다. 심판 간 경기 규칙 적용 차이를 줄이기 위해 짧은 미팅이 열렸다.
가장 이목을 끌었던 심판은 브라질의 길베르투 데 알메이다 레구와 볼리비아의 울리세스 사우세도였다. 알메이다 레구는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경기에서 6분 일찍 휘슬을 불었고, 사우세도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에서 세 개의 페널티킥을 주었다.
다음은 주심과 부심으로 참가한 심판진 명단이다. 부심만 본 심판은 (*) 표시가 되어 있다.
| 유럽 | 북아메리카 | 남아메리카 |
|---|---|---|
7. 대회 방식
13개 팀은 4개 조(1개 조 4개 팀, 3개 조 3개 팀)로 나뉘어 조별 리그를 진행했다. 각 조는 모든 팀이 같은 경기 수를 치르는 라운드로빈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승리 시 승점 2점, 무승부 시 승점 1점이 주어졌다. 각 조 1위 4개 팀은 녹아웃 방식의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준결승전부터는 정규 시간 90분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연장전을 치렀다.
1차 리그와 토너먼트를 결합한 이 대회 방식은 1934년, 1938년, 1950년 대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1954년 대회부터 다시 채택되었다. 이후 1974년, 1978년, 1982년 대회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9. 대회
The 1930 FIFA World Cup영어은 FIFA 월드컵의 첫 번째 대회로, 국제 축구 연맹(FIFA) 회원국들의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들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30년 7월 13일부터 7월 30일까지 우루과이에서 개최되었다.
4조는 벨기에, 파라과이, 미국으로 구성되었다. 경험이 적은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팀은 첫 경기에서 벨기에를 3-0으로 완파했다. 이 경기는 폭우와 폭설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벨기에 언론은 경기장 상태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표하며 두 번째 골이 오프사이드였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는 강풍 속에서 치러졌으며, 버트 페이트노드가 대회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미국이 승리했다. FIFA는 2006년에 이 해트트릭을 공식 인정했다. 미국은 이미 조별 예선을 통과했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에서 파라과이가 벨기에를 1-0으로 이긴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9.1. 조별 리그
1930년 FIFA 월드컵은 4개 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를 진행했으며, 각 조 1위 팀이 준결승에 진출했다.
1조는 아르헨티나, 칠레, 프랑스, 멕시코로 구성되었다. 뤼시앵 로랑은 프랑스와 멕시코의 개막전에서 월드컵 첫 골을 기록했다. 프랑스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눈이 내리는 가운데 0-1로 패했는데, 이 경기에서 심판은 경기 종료 6분 전에 종료 휘슬을 부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르헨티나는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페널티킥이 선언되는 등 난타전 끝에 6-3으로 승리했다.
2조는 브라질, 볼리비아, 유고슬라비아로 구성되었다.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에 1-2로 패했다. 볼리비아는 국제 경기 경험 부족으로 유고슬라비아와 브라질에 모두 크게 졌다.
3조는 개최국 우루과이와 페루, 루마니아로 구성되었다. 루마니아와 페루의 경기에서는 월드컵 사상 첫 퇴장 기록이 나왔다. 센테나리오 경기장 건설 지연으로 우루과이는 대회 시작 5일 후에 첫 경기를 치렀고, 페루와 루마니아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4조에서는 미국이 벨기에와 파라과이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에서는 버트 페이트노드가 월드컵 사상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각 조의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9.1.1. 1조
1조는 아르헨티나, 칠레, 프랑스, 멕시코로 구성되었다. 프랑스는 멕시코를 4-1로 이겼지만,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0-1로 졌다. 이 경기에서 심판은 경기 종료 6분 전에 종료 휘슬을 부는 실수를 저질렀다. 칠레는 멕시코와 프랑스를 꺾고 2승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는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6-3으로 승리했는데, 이 경기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칠레와의 최종전에서 3-1로 승리하며 조 1위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9.1.2. 2조
1930년 FIFA 월드컵 2조는 브라질, 볼리비아, 유고슬라비아로 구성되었다. 브라질이 유력한 4강 진출 후보로 예상되었으나, 첫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에 1-2로 패했다. 볼리비아는 월드컵 이전 국제 경기 경험이 전무했다. 볼리비아는 경기 초반에는 좋은 경기력을 보이다가 후반에 무너지는 패턴을 보이며 유고슬라비아와 브라질에 모두 대패했다.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한 시간 동안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이후 30분 동안 네 골을 허용하며 패했다. 몇몇 득점이 인정되지 않는 불운도 겪었다.
유고슬라비아가 2승으로 4강 진출을 확정지은 상황에서 브라질과 볼리비아가 만났다. 브라질은 프리지뉴의 두 골을 포함, 4-0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가 2승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9.1.3. 3조
개최국 우루과이가 속한 3조에는 페루와 루마니아가 편성되었다. 3조 첫 경기인 루마니아와 페루의 경기에서 페루의 플라시도 갈린도가 퇴장을 당해 월드컵 사상 첫 퇴장 기록이 나왔다. 루마니아는 수적 우세를 이용해 3-1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월드컵 사상 최소 관중이 입장했는데, 공식 기록은 2,459명이지만 실제로는 300명이 입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센테나리오 경기장 건설 지연으로 우루과이는 대회 시작 5일 후에 첫 경기를 치렀다. 경기 전 우루과이 헌법 제정 1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우루과이는 페루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우루과이는 이어 루마니아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9.1.4. 4조
미국은 4조를 지배하였다. 많은 신인 선수들을 데리고 있던 미국은 프랑스 대표단의 익명의 사람에 의해 "투포환 선수들"(en)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국은 벨기에를 3-0으로 꺾었다. 당초 전문가들은 미국에게 큰 기대치를 두지 않았는데, 경기가 끝나고 우루과이 신문인 《임파르시알》은 "미국이 큰 점수차로 승리한 것은 많은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고 할 정도로 아무도 미국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다. 벨기에의 언론은 경기장의 상태와 심판의 판단에 대해서 크게 아쉬워했는데, 특히 미국의 두 번째 골은 오프사이드였다고 주장했다. 4조의 두 번째 경기는 강풍의 기후 조건에서 치러진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였는데, 미국의 버트 페이트노드가 월드컵 사상 첫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2006년 11월 10일까지 FIFA가 공인한 월드컵 첫 해트트릭 기록은 아르헨티나의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기록이었지만, 사실 스타빌레는 페이트노드가 기록을 세운 7월 17일에서 이틀 뒤인 7월 19일에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FIFA는 2006년에 미국 팀 동료인 탐 플로리가 기록한 득점을 페이트노드의 득점으로 인정하며 페이트노드가 월드컵 사상 첫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로 공인했다. 미국이 준결승전에 진출하는 것이 확정되자, 탈락한 두 팀의 최종전은 시시하게 진행되었다. 파라과이가 벨기에를 1-0으로 눌렀다.
9.2. 결선 토너먼트
1930년 FIFA 월드컵의 결선 토너먼트는 4강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각 조 1위를 차지한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우루과이, 미국이 진출했다. 준결승전 두 경기 모두 6-1이라는 동일한 점수로 끝났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경기는 비에 젖은 경기장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며, 미국은 경기 초반 라파엘 트레이시 선수가 다리 부상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아르헨티나는 전반 중반 몬티의 골로 앞서나갔고, 후반전에 경기를 지배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1924년 하계 올림픽에서 맞붙었던 유고슬라비아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부야디노비치의 선제골로 기선을 제압했으나, 우루과이가 곧바로 경기를 뒤집었다. 전반 종료 직전 유고슬라비아의 득점이 오프사이드로 판정되면서 취소되는 논란이 있었다. 결국 우루과이는 후반전에 세아의 해트트릭을 포함하여 세 골을 추가하며 승리했다.
1934년 FIFA 월드컵 이전에는 3·4위전이 없었기 때문에 1930년 월드컵은 3위와 4위를 구별하지 않은 유일한 대회였다. 1984년 FIFA 공보 등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을 3-1로 이겨 3위에 올랐다는 잘못된 정보가 나오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가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전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3·4위전을 보이콧했다는 기록도 있다. 1986년 FIFA 월드컵에 관한 FIFA 기술위원회 보고서에는 미국이 3위, 유고슬라비아가 4위로 기록되어 있으며, FIFA의 정기 보고서에도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201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수장이었던 코스타 하지의 아들이 유고슬라비아가 동메달을 받았고, 그의 가족이 80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가 우루과이에 패했지만, 우루과이가 우승하면서 자동적으로 3위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9.2.1. 준결승전
1930년 FIFA 월드컵 준결승전에는 네 개의 조 1위 팀인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우루과이, 미국이 진출했다. 두 준결승전에서는 모두 6-1이라는 똑같은 점수가 나왔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경기는 비에 흠뻑 젖은 그라운드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경기 시작 10분 만에 라파엘 트레이시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전반 중반 몬티의 골로 1-0으로 앞서나간 아르헨티나는 후반전에 경기를 지배하며 6-1 대승을 거두었다.
1924년 하계 올림픽에서 맞붙었던 유고슬라비아와 우루과이의 두 번째 준결승전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부야디노비치의 득점으로 먼저 앞서갔으나, 우루과이가 곧바로 경기를 뒤집었다. 전반 종료 직전 유고슬라비아의 득점이 나왔지만, 논란이 있는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득점이 취소되었다. 후반전에 우루과이는 세아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세 골을 더 추가하며 6-1로 승리했다.
9.2.2. 3·4위전
오늘날 치러지는 3·4위전은 1934년 FIFA 월드컵 전에는 존재하지 않아 1930년 FIFA 월드컵은 유일하게 3위와 4위를 구별하지 않았던 대회가 되었다. 1984년에 FIFA가 발행한 공보와 같이 가끔씩은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을 3-1로 이겨 3위에 올랐다는 잘못된 정보가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3·4위전이 당초에 계획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른 기록들이 존재한다. 하이더 자와드가 2009년에 발간한 책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가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전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3·4위전을 보이콧 했다고 한다.
1986년 FIFA 월드컵에 관한 FIFA 기술위원회의 보고서에는 모든 월드컵 대회의 모든 팀들의 기록들을 정리해 만든 순위표가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을 3위로, 유고슬라비아를 4위로 기록하였고, FIFA가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보고서에도 모두 같은 내용이 들어가있다. 2010년에는 1930년 월드컵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수장이자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의 부회장이었던 코스타 하지의 아들이 유고슬라비아가 동메달 하나를 수여받았고, 하지가 스스로 관리해 자신의 가족이 80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가 자신을 꺾었던 우루과이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자동적으로 3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메달이 어떤 단체에서 주어졌는지나 메달의 진위 여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9.2.3. 결승전
1928년 하계 올림픽 축구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다시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 우루과이는 재경기 끝에 아르헨티나를 2-1로 꺾었었다.
결승전은 1930년 7월 30일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열렸다. 경기장 주변은 이 경기에 대한 대중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약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의 아르헨티나 팬들이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으나, 몬테비데오 항구는 사람들로 꽉 차서 많은 사람들이 경기 시작 전에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기장에서는 서포터즈들의 무기 소지 여부를 수색했다. 입구는 경기 시작 6시간 전인 오전 8시에 열렸고, 정오가 되자 경기장은 9만 3천 명의 관중으로 가득 찼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경기 공 사용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FIFA는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의 공을,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사용하도록 중재했다. 우루과이는 준결승전 선발 명단에서 안셀모를 카스트로 대신 선발로 내세웠다. 아르헨티나의 몬티는 경기 전날 살해 협박을 받았다. 벨기에의 장 랑게뉘가 경기 시작 몇 시간 전에 주심을 맡기로 결정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기 후 1시간 안에 항구에서 떠날 수 있는 배를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홈팀 우루과이는 파블로 도라도의 선제골로 앞서나갔다. 아르헨티나는 8분 만에 카를로스 페우셀레의 동점골로 응수했다. 전반전 종료 직전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역전골로 아르헨티나가 2-1로 앞서갔다. 우루과이 주장 호세 나사시는 스타빌레의 오프사이드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의 경기력이 살아났고, 페드로 세아의 동점골로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10분 후 산토스 이리아르테의 역전골과 경기 종료 직전 카스트로의 쐐기골로 우루과이가 4-2 승리를 거두었다.
쥘 리메는 쥘 리메 컵을 우루과이 축구 협회 회장 라울 후데에게 전달했다. 우루과이 정부는 다음 날인 7월 31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군중들이 우루과이 영사관에 돌을 던졌다.
우승국 우루과이의 마지막 생존 선수였던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는 1984년 7월 3일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회 참가 선수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프란시스코 바라요로, 2010년 8월 30일에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 우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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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는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1. 득점 선수
| 득점 | 선수 | 국가 |
|---|---|---|
| 8 | 기예르모 스타빌레 | Guillermo Stábile스페인어 |
| 5 | 페드로 세아 | Pedro Cea스페인어 |
| 4 | 베르트 페이트노드 | Bert Patenaude영어 |
| 3 | 카를로스 페우세예 | Carlos Peucelle스페인어 |
| 프리지뉴 | Preguinho포르투갈어 | |
| 페레그리노 안셀모 | Peregrino Anselmo스페인어 | |
| 이반 베크 | Ivan Bek세르보크로아트어 | |
| 2 | 루이스 몬티 | Luis Monti스페인어 |
| 아돌포 주멜주 | Adolfo Zumelzú스페인어 | |
| 모데라토 | Moderato포르투갈어 | |
| 기예르모 수비아브레 | Guillermo Subiabre스페인어 | |
| 카를로스 비달 | Carlos Vidal스페인어 | |
| 앙드레 마시노 | André Maschinot프랑스어 | |
| 마누엘 로사스 | Manuel Rosas스페인어 | |
| 엑토르 카스트로 | Héctor Castro스페인어 | |
| 파블로 도라도 | Pablo Dorado스페인어 | |
| 1 | 마리오 에바리스토 | Mario Evaristo스페인어 |
|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 Alejandro Scopelli스페인어 | |
| 프란시스코 바라요 | Francisco Varallo스페인어 | |
| 마르셀 랑지예르 | Marcel Langiller프랑스어 | |
| 뤼시앵 로랑 | Lucien Laurent프랑스어 | |
| 후안 카레뇨 | Juan Carreño스페인어 | |
| 로베르토 가욘 | Roberto Gayón스페인어 | |
| 루이스 바르가스 페냐 | Luis Vargas Peña스페인어 | |
| 루이스 소우자 페헤이라 | Luis de Souza포르투갈어 | |
| 슈테판 바르부 | Ştefan Barbu루마니아어 | |
| 애덜버트 데수 | Adalbert Deșu루마니아어 | |
| 콘스탄틴 스탄키우 | Constantin Stanciu루마니아어 | |
| 짐 브라운 | Jim Brown영어 | |
| 엑토르 스카로네 | Héctor Scarone스페인어 | |
|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 Blagoje Marjanović세르보크로아트어 | |
| 브라니슬라프 세큘리치 | Branislav Sekulić세르보크로아트어 | |
|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 | Aleksandar Tirnanić세르보크로아트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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