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르-벨-칼라
1. 개요
아슈르-벨-칼라는 기원전 1073년부터 1056년까지 중기 아시리아 제국을 통치한 군주였다. 그의 치세는 서쪽 레반트 지역이 아람인에게 점령당하는 등 제국의 쇠퇴기였다. 그는 바빌론 왕과 우호 관계를 맺고, 건설 사업과 동물 수집 활동을 벌였으며, 《부서진 오벨리스크》를 통해 그의 업적이 전해진다. 아슈르-벨-칼라는 북쪽의 우라르투와 아람 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으나, 아람 족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국경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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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세기 통치자 -
티그라트-필레세르 1세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는 아시리아 중기 시대의 왕으로, 정복 활동을 통해 아시리아의 위세를 떨쳤으며 중기 아시리아 법전 편찬, 건축 및 문화 부흥을 이끌었으나 말년에는 기근과 아람인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었다. -
기원전 11세기 통치자 -
아슈르-나시르-팔 1세
아슈르-나시르-팔 1세는 아슈르-라비 1세의 뒤를 이어 고대 아시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아슈르 신전 재건과 도시 방어 시설 강화, 그리고 왕실 찬가들을 통해 그의 업적과 권위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다. -
중동의 국가원수 -
코르도바 칼리파국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756년 우마이야 왕조의 후예가 건국하여 929년 칼리파국으로 발전, 10세기 서유럽 최대 도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다 1031년 멸망한 이슬람 왕국이다. -
중동의 국가원수 -
무아위야 1세
우마이야 칼리파 왕조의 창시자인 무아위야 1세는 메카 출신으로 이슬람으로 개종 후 무함마드의 서기관으로 활동, 시리아 총독을 거쳐 칼리프에 올라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으나, 권력 세습화와 시아파와의 대립을 초래했다. -
아시리아의 왕 -
아슈르나시르팔 2세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를 통치하며 정복 사업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잔혹한 통치로 악명을 떨쳤으며, 칼후를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고 예술 발전을 이끌었다. -
아시리아의 왕 -
샬마네세르 3세
샬마네세르 3세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으로서 영토 확장과 지배력 안정에 기여했으며, 잦은 원정과 카르카르 전투, 예후로부터의 조공, 중앙집권적 통치, 도시 재건 및 예술 장려 등의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아슈르-벨-칼라는 아버지 투쿨티-아필-에사라 1세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기간은 북방 민족 및 아람족과의 끊임없는 전쟁, 그리고 남쪽 바빌로니아와의 복잡한 외교 관계로 특징지어진다.
즉위 초반, 그는 북쪽의 우라르투를 공격하는 등 군사 활동에 집중했으며, 이후 서쪽 국경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아람족과의 전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슈르-벨-칼라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카르케미쉬까지 진격하여 아람족과 싸우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아람족의 압박으로 일부 영토를 잃기도 했다. 이러한 초기 활동의 일부는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부서진 오벨리스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바빌로니아와는 초기 마르두크-샤피크-제리 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바빌로니아의 왕위 계승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아다드-아플라-이디나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그의 딸과 결혼하여 양국 간의 관계를 안정시키려 했다.
2.1. 즉위 초, 북방 원정과 아람족과의 전쟁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부서진 오벨리스크》는 아슈르-벨-칼라의 통치 초기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비문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지만, 바이드너, 야리츠, 보르거 등 학자들은 여러 근거를 들어 아슈르-벨-칼라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근거로는 아버지 투쿨티-아필-에사라 1세의 원정을 모방하여 지중해(아무루 땅의 "상부 바다")에서 나히루(해마)를 사냥했다고 기록한 점, 바빌로니아식 달 이름을 사용한 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이슈타르 여신상과 함께 발견된 점, 그리고 아람족을 KUR 아-레-메에 사는 민족으로 지칭하며 이들이 아시리아 영토로 진출했음을 명확히 기록한 점 등이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1853년 8월 아시리아 고고학자 호르무즈 라삼이 "산헤립의 궁전과 아슈르바니팔의 궁전 사이"에서 발견했으며, 5개의 신성한 상징 아래 왕이 포로들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아슈르-벨-칼라의 통치 초반 사건들은 이 유물이 그의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재구성된다.
기록에 따르면, 아슈르-벨-칼라는 즉위 첫 해에 북쪽의 우라르투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으며, 연대기 관직(림무) 임명은 이듬해로 미루었다. 그의 통치 두 번째 해에는 힘메, 하브후, 그리고 마리 지역에 관심을 돌렸는데, 당시 마리는 아시리아 왕위를 노리던 투쿨티-메르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주된 관심사는 국경을 계속해서 압박해오는 아람족과의 전쟁이었다. 그는 아람족을 끈질기게 추격했으며, 심지어 "염소 가죽으로 만든 뗏목을 타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카르케미쉬까지 진격하여 아람족과 싸우고 도시를 약탈했으며, 《부서진 오벨리스크》에 따르면 하르부르 계곡에서도 최소 15차례 이상 원정을 벌였다. 고대 두누-사-우지비였던 기리카노에서 발견된 문서는 그의 통치 5년 또는 6년째(일리-이디나의 연대기, 기원전 1069/68년)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 문서 중 하나는 그 전 해(아슈르-렘-니셰슈의 연대기)에 시나무 지역의 두누-사-리술-살라-아슈르에서 벌어진 전투를 언급하며, 이 전투에서 영토를 잃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 전체가 아람족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2.2. 바빌로니아와의 관계
아슈르-벨-칼라는 즉위 후 당시 바빌론의 왕이었던 마르두크-샤피크-제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마르두크-샤피크-제리는 아시리아를 방문했다가 십파르로 돌아갔다. 이는 아슈르-벨-칼라의 아버지 투쿨티-아필-에샤라와 마르두크-샤피크-제리의 전임자 마르두크-나딘-아헤가 서로 적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우호 관계는 공동의 적인 아람인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동맹의 필요성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르두크-샤피크-제리가 약 5년 뒤 사망하자, 아슈르-벨-칼라는 바빌로니아의 왕위 계승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왕위에 앉히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아슈르-벨-칼라는 특정 해 세바트 달에 군대를 이끌고 두르-쿠리갈주 지역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곳의 총독이었던 이티-마르두크-발라투의 아들 카다슈만-부리아시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후 아슈르-벨-칼라는 아다드-아플라-이디나를 새로운 바빌론의 왕으로 세웠다. 연대기적 역사에 따르면 아다드-아플라-이디나는 아슈르-벨-칼라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며, 아슈르-벨-칼라는 그의 딸과 결혼하고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그녀를 아시리아로 데려갔다"고 한다. 한편, 선별 연대기는 아다드-아플라-이디나의 아버지가 앞서 언급된 이티-마르두크-발라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대기적 역사는 이 시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백성들이 서로 평화롭게 섞여 살았다"고 기록하며 당시 두 나라의 관계가 안정되었음을 시사한다.
3. 건설 사업과 동물 수집
아슈르-벨-칼라는 도시 건설에도 힘썼는데, 도시의 해자를 다시 파고 공공 정원의 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활동을 했다. 그는 자신의 도시 아슈르에 삼나무, 회양목, 테레빈스, 타마리스크 나무를 이용한 궁전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단 1세가 팠으나 수원지가 무너져 30년간 물이 흐르지 않던 운하의 수원지를 다시 파고 물을 대어 정원을 가꾸었다고 밝혔다. 그는 궁궐 창고를 완전히 재건했으며, 니네베의 신 궁전에 테라스를 건설하고 자신이 사냥한 '나히루'라는 동물의 형상을 본뜬 문지기를 세웠다. 또한 아다드-니라리 1세(기원전 1307–1275년)가 건설했던 부두 벽을 수리하기도 했다.
아시리아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하듯, 이집트로부터 이국적인 동물들을 선물받기도 했다. 그는 이 동물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는데(
4.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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