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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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영지는 1177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 동해안 일부를 점령한 후 막내아들 존에게 하사한 작위에서 유래한다. 1169년 노르만족의 아일랜드 도래 이후, 헨리 2세는 아일랜드 교회 개혁을 명분으로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1175년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 존이 1199년 잉글랜드 국왕이 되면서 아일랜드 영주령은 잉글랜드 왕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13세기에 봉건제도가 도입되고 아일랜드 의회가 소집되었지만, 노르만인과 게일족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1315년에서 1318년까지 에드워드 브루스의 스코틀랜드 침략과 대기근, 흑사병 등으로 인해 영지 정부는 약화되었다. 1542년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왕관법을 통해 아일랜드 국왕 칭호를 사용하면서 아일랜드 영지는 아일랜드 왕국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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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영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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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아일랜드 |
상태 | 교황령으로 잉글랜드 왕이 봉토로 보유 |
시대 | 중세 |
시작 연도 | 1177년 |
시작 날짜 | 5월 |
종료 연도 | 1542년 |
종료 날짜 | 6월 |
사건 시작 | 설립 |
사건 종료 | 아일랜드 왕위 법 |
이전 국가 | 게일 아일랜드 |
계승 국가 | 아일랜드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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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더블린 |
공용어 | "영어: 중세 영어(15세기까지), 초기 근대 영어(15세기부터)" "고대 노르만어: (행정, 법원, 정부에서 12세기 초까지 널리 사용됨)" "앵글로노르만어: (행정 언어로 사용되었고, 앵글로-노르만 엘리트에 의해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 사용됨)" "라틴어: (행정 및 전례 목적으로 널리 사용됨)중세 라틴어(11-14세기), 르네상스 라틴어(14세기부터)" "아일랜드어: 중세 아일랜드어(13세기까지), 초기 근대 아일랜드어(13세기부터)" 핑갈어(15세기부터) 욜라어(15세기부터)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현재 국가 | 아일랜드 공화국 영국 북아일랜드 |
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 군주제 |
지도자 칭호 | 영주 |
첫 번째 지도자 | 존 |
첫 번째 지도자 재임 기간 | 1177년–1216년 |
마지막 지도자 | 헨리 8세 |
마지막 지도자 재임 기간 | 1509년–1542년 |
대리 칭호 | 로드 리utenant |
첫 번째 대리 | 휴 드 레이시 |
첫 번째 대리 재임 기간 | 1177년–1181년 |
마지막 대리 | 헨리 피츠로이 |
마지막 대리 재임 기간 | 1529년–1534년 |
의회 | 의회 |
상원 | 귀족원 |
하원 | 하원 |
경제 | |
통화 | 아일랜드 파운드 |
2. 역사
아일랜드 영지(Lordship of Ireland영어)의 역사는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렌스터의 지배자였던 디아르마이트 맥 머르카다는 아일랜드 고왕에게 폐위된 후, 리처드 드 클레어(별칭 '스트롱보우')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헨리 2세는 스트롱보우가 자신의 왕국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아일랜드를 침략했다.
1155년, 헨리 2세는 교황 아드리아누스 4세로부터 아일랜드 교회 개혁을 명분으로 아일랜드를 장악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4] 1171년 헨리 2세는 아일랜드를 침략하여 게일족 왕들의 충성을 받고, 카셸 공의회를 통해 아일랜드 교회를 영국과 유럽의 규범에 맞추었다. 1175년에는 아일랜드 고왕 루아이드리 우아 콘호바이르와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5]
헨리 2세는 아들 존에게 아일랜드 영토를 하사했고, 존은 1177년 아일랜드 영주(Dominus Hiberniaela)가 되었다.[6] 헨리 2세는 존을 아일랜드 국왕으로 즉위시키려 했으나, 교황 루키우스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 존은 1199년 잉글랜드 국왕이 되면서 아일랜드 영주령은 앙주 제국 왕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아일랜드 영주령은 봉건제 도입과 아일랜드 의회 소집(1297년) 등으로 번영했다. 그러나 게일인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브루스의 스코틀랜드 침략(1315년~1318년)과 대기근, 흑사병(1348년~1350년) 등으로 영주령은 큰 타격을 입었다. 킬케니 법령(1366년)은 게일 문화를 억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왕실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플랜태저넷 정부의 군사력 의존은 아일랜드 족장들의 반발을 샀다. 오코너 팔리 왕국, 맥머러-카바나 왕조, 번 족, 릭스의 오모어 등 여러 부족들이 잉글랜드에 저항했다. 오닐 왕조와 오도넬 왕조와 같은 토착 족장들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1350년에서 1500년 사이에는 게일 부흥이 일어나 왕실 통치 지역은 더 페일로 축소되었다.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왕관법(1542년)을 통해 "아일랜드 국왕" 칭호를 사용하고, 아일랜드를 아일랜드 왕국으로 개칭했다. 이는 교황청과의 관계 단절 및 항복 및 재양여 정책 추진을 위한 조치였다. 메리 1세는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2. 1. 노르만족의 아일랜드 도래
렌스터의 지배자 디아르마이트 맥 머르카다는 아일랜드 고왕이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폐위된 후, 왕위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서 도움을 받고자 웨일스에 거점을 둔 노르만 기사인 리처드 드 클레어(별칭 '스트롱보우')를 데려왔다. 헨리 2세는 스트롱보우가 자신의 왕국 서쪽 변방의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두려워하여 아일랜드를 침략했다. (1066년 이후 앵글로색슨 난민들이 아일랜드나 플랑드르를 역공을 위한 거점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이전부터 있었다). 후대 플랜태저넷 왕조의 남웨일스 통합의 상당 부분은 아일랜드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2. 2. 헨리 2세와 교황의 인가 (Laudabiliter)
1155년, 헨리 2세는 교황 아드리아누스 4세가 아일랜드 교회 개혁을 위해 아일랜드를 장악할 권한을 부여했다고 주장했다.[4] 당시 아일랜드의 종교적 관행과 교회 조직은 교황청의 직접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유럽 지역과는 다르게 발전했지만, 1155년 교황령이 발표될 무렵에는 이러한 차이점 대부분이 제거되거나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전의 아일랜드 교회는 로마에 십일조를 보낸 적이 없었다. 헨리 2세가 1171년 아일랜드를 침략한 주된 동기는 스트롱보우와 다른 노르만 영주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171년 11월 더블린에서 게일족 왕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이고, 1172년 카셸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일랜드 교회를 영국과 유럽의 규범에 맞추었다.1175년 헨리 2세와 아일랜드 고왕 루아이드리 우아 콘호바이르는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5]
교황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현재 위조로 알려짐)을 근거로 섬에 대한 주권을 여러 군주에게 부여할 권리를 주장했다. 19세기에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Laudabiliter|라우다빌리테르la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알렉산데르 3세의 서한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이 부여할 권한은 Dictatus papae|딕타투스 파파에la (1075–1087)의 범위 내에도 있었다. Laudabiliter|라우다빌리테르la는 아일랜드의 "왕국"을 언급했지만, 교황청은 1185년 초부터 그것을 왕국으로 계속 묘사하는 것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2. 3. 존 왕과 아일랜드 영주
헨리 2세는 아일랜드 동해안 일부를 점령한 후,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었다. 막내아들 존은 다스릴 땅이 없어 '존 무지(Johan sanz Terre)'라는 별명을 얻었다. 1177년 5월 옥스퍼드 의회에서 헨리 2세는 존에게 아일랜드 영토를 하사했고, 존은 10세의 나이로 1177년 아일랜드 영주(Dominus Hiberniaela)가 되었다.[6] 이 영토는 아일랜드 영주령으로 알려졌다.헨리 2세는 1185년 존의 첫 방문 때 존을 아일랜드 국왕으로 즉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교황 루키우스 3세는 교황 아드리아누스 4세가 주장했던 의심스러운 주장을 이유로 허락을 거부했다.[6] Dominusla(일반적으로 '영주'로 번역됨)는 아직 즉위하지 않은 국왕의 칭호였는데, 이는 헨리 2세의 의도를 보여준다. 루키우스 3세가 사망하자, 헨리 2세는 우르바누스 3세에게서 승인을 얻어 존을 위한 금과 공작 깃털 왕관을 주문했다. 1185년 말 왕관이 준비되었지만, 존의 아일랜드 방문이 실패로 끝나면서 헨리 2세는 즉위식을 취소했다.[7]
존은 형들이 사망한 후 1199년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 영주령은 앙주 제국 왕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존의 후계자들의 법률 용어에서 "아일랜드 영주령"은 잉글랜드 왕관에 부여된 주권을 의미했고, 해당 영토는 "아일랜드 땅"으로 불렸다.[8]
2. 4. 게일족과의 갈등
영주권은 중세 온난기에 번영하였다. 봉건제가 도입되었고, 아일랜드 의회는 1297년에 처음 소집되었다. 일부 카운티는 행정 구역 설정(shiring)을 통해 만들어졌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성이 풍경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노르만인들이 "순수 아일랜드인"(mere Irish)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유럽 주류 생활과의 교류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mere"는 라틴어 merus|순수한la에서 유래한다.[6] 이 기간 동안 환경 훼손과 삼림 벌채는 계속되었고, 잉글랜드 이주민의 증가와 인구 증가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노르만 엘리트와 성직자들은 노르만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했다. 많은 가난한 정착민들은 영어, 웨일스어, 플랑드르어를 사용했다. 게일어 지역에서는 아일랜드 방언을 사용했다. 웨스포드 카운티의 요라어는 초기 영어 방언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1350년경의 킬데어 시는 중세 영어로 쓰인 드문 유쾌한 지역 문화의 예이다.
영주권은 1315년부터 1318년까지 에드워드 브루스의 스코틀랜드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이는 경제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고 1315년부터 1317년까지의 대기근과 일치했다. 올스터 백작령은 1333년에 끝났고, 1348년부터 1350년까지의 흑사병은 남은 게일족보다 도시에 거주하는 노르만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노르만과 잉글랜드 식민 주민들은 토착 문화와 언어를 많이 채택하는 경향을 보였고, "게일화(Gaelicized)"되었거나,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아일랜드인들보다 더 아일랜드적인" 사람이 되었다. 1366년 킬케니 법령은 게일 문화의 여러 측면을 노르만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배제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노르만 영주권이 점점 게일화되고 힘이 꾸준히 증가하는 토착 족장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왕실의 통제력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플랜태저넷 정부는 종종 군사력에 의존했던 아일랜드 족장들과 백성들을 점점 소외시켰다. 노르만 영주권과 정부군 모두 동맹을 맺었거나 잉글랜드가 통제하는 지역( 린스터는 미스와 오소리 왕국을 포함하고, 먼스터와 콘노트의 일부 지역)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원주민들을 모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당시 아일랜드 원주민들에게는 강한 국가 정체성이 없었고 용병과 변덕스러운 동맹에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족장들은 잉글랜드 정부의 억압적인 조치에 점점 소외되어 왕실에 공개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협력했지만 점점 소외되어 노르만 반대파가 되고 더블린 행정부의 골칫거리가 된 부족들 중 더욱 주목할 만한 부족들로는 오코너 팔리 왕국, 맥머러-카바나 왕조(린스터 왕국), 번 족, 릭스의 오모어가 있었다. 이러한 부족들은 비대칭 게릴라전과 식민지 주민들이 점유한 땅에 대한 파괴적인 습격을 통해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공격으로부터 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오닐 왕조와 오도넬 왕조와 같이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지 않은 토착 족장들의 권력은 꾸준히 증가하여 다시 한번 아일랜드 정치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13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게일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하는데, 그 무렵 왕실이 통치하는 지역인 "더 페일"은 더블린 주변의 작은 지역으로 줄어들었다.
2. 5. 아일랜드 왕국으로의 전환
아일랜드 의회가 1542년에 통과시킨 아일랜드 왕관법에 따라,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영주"라는 칭호 대신 "아일랜드 국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고,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왕국으로 개칭되었다. 헨리 8세가 칭호를 변경한 이유는, 이전의 아일랜드 영주 지위가 교황청에 의해 노르만 왕가에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상태였고, 자신의 칭호가 교황청에 의해 박탈될 것을 우려했다.[9] 또한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완전한 왕국으로 만들어, 일부 아일랜드 신하들이 그의 항복 및 재양여 정책에 참여하는 등, 신하들 사이에서 더 큰 충성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더 큰 안보를 위해 왕립 아일랜드 군대가 창설되었다.헨리 8세의 딸인 메리 1세는 1553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교황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파울루스 4세는 1555년 메리의 남편인 필립 2세와 메리에게 아일랜드 국왕과 여왕의 칭호를 부여하여, 튜더 왕조가 아일랜드의 정당한 군주임을 승인했다.[9] 그러나 이러한 승인은 파울루스 4세의 예상과는 달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메리는 1558년 사망했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여왕 자리는 그의 이복 여동생이자 신교도였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계승되었다.
3. 아일랜드 의회
아일랜드 의회는 더블린에 있었지만, 의원들은 더블린이나 킬케니 등 어디에서든 소집될 수 있었다.
연도 | 장소 |
---|---|
1310 | 킬케니 |
1320 | 더블린 |
1324 | 더블린 |
1327 | 더블린 |
1328 | 킬케니 |
1329 | 더블린 |
1330 | 킬케니 |
1331 | 킬케니 |
1331 | 더블린 |
1341 | 더블린 |
1346 | 킬케니 |
1350 | 킬케니 |
1351 | 킬케니 |
1351 | 더블린 |
1353 | 더블린 |
1357 | 킬케니 |
1359 | 킬케니 |
1359 | 워터포드 |
1360 | 킬케니 |
1366 | 킬케니 |
1369 | 더블린 |
참조
[1]
서적
British Flags. Their Early History and their Development at Sea; with an Account of the Origin of the Flag as a National Devi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Chambers's Encyclopædia: A Dictionary of Universal Knowledge
[3]
웹사이트
The Norman Feudal System
https://spartacus-ed[...]
2021-06-02
[4]
서적
From Domesday book to Magna Carta, 1087–1216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Early Medieval Ireland, 400-1200
Routledge
[6]
서적
Pope Adrian IV, a Friend of Ireland
Browne and Nolan
[7]
서적
King John
Eyre & Spottiswoode
[8]
학술지
Ireland and the English Crown, 1171–15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05
[9]
웹사이트
The papal bull of 1555 conferring the title of king of Ireland on Philip II of Spain
http://www.heraldica[...]
200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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