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텐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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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텐 공작은 역사적으로 아키텐 지역을 다스렸던 지배자들의 칭호이다. 로마 시대 이후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시대를 거치며 아키텐은 여러 차례 공작의 지배를 받았으며, 특히 프랑크 왕국 시대에는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가 아키텐 공작을 임명했다. 8세기에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침입을 막아낸 우드 공작이 등장했고, 이후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거쳐 아키텐 공국이 형성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푸아티에 백작가가 공작위를 세습했으며, 12세기에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재혼하며 잉글랜드 왕실의 영토가 되었고, 플랜태저넷 왕가가 아키텐 공작위를 소유하며 백년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백년 전쟁 이후 아키텐은 프랑스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프랑스 왕가의 구성원에게 공작 작위가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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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 공작 | |
---|---|
개요 | |
국가 | 프랑스 |
존속 기간 | 7세기 ~ 15세기 |
이전 국가 | 서고트 왕국 |
후계 국가 | 프랑스 왕국 |
정치 | |
정치 체제 | 공국 |
작위 | 공작 |
역사 | |
주요 사건 | 툴루즈 전투 (721년) 부브네 전투 (1364년) |
해체 | 프랑스 왕국에 합병 |
인물 | |
초대 공작 | 펠릭스 |
마지막 공작 | 샤를 드 발루아 |
2. 역사
메로빙거 왕조 시대 아키텐 공작들은 툴루즈를 수도로 사용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더 북쪽에 위치한 여러 수도를 사용했다. 765년, 피핀 3세는 와이페르로부터 빼앗은 황금 깃발을 리모주에 있는 생 마르티알 수도원(Abbey of Saint Martial, Limoges)에 하사했다. 피핀 1세(Pepin I of Aquitaine)는 푸아티에에 묻혔고, 샤를 3세(Charles the Child)는 리모주에서 대관식을 치렀으며 부르주에 묻혔다. 샤를 3세(Charles the Fat) 사후 아키텐이 잠시 독립을 선언했을 때, 푸아투의 라눌프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0세기 후반, 게으른 루이는 브리우드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2세기 후반 리모주의 생테티엔(Saint-Étienne)에서 나온 오르도(의식서)에 따르면, 공작은 비단 망토, 작은 왕관, 깃발, 칼, 박차, 그리고 성녀 발레리의 반지를 받았다.
2. 1. 로마 시대 이전
본래 아키텐 지역에는 켈트족 계열의 아퀴타니족이 살고 있었다.2. 2. 로마 시대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 제국의 속주 갈리아 아퀴타니아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아키텐은 번영을 누렸으며, 포도주 생산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2. 3. 프랑크 왕국 시대
507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족이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아키텐을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여러 왕국으로 분할되었다가 통합되기를 반복했다.메로빙거 왕조 시대 아키텐 공작들은 툴루즈를 수도로 사용했다.[2]
아키텐 지역은 6세기 초까지 서고트 왕국의 영토였으나, 507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가 피레네 산맥까지의 영토를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클로비스 1세 사후, 그의 왕령은 여러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어 왕가에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클로타르 2세 사후, 현지 백작이 이끄는 독립 세력이 프랑크 왕권과 여러 차례 대립했다.
729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알가피키가 이끄는 우마이야 칼리파국 군세가 아키텐을 침입하여 우드는 이슬람 군대에 패했다. 우드는 카를 마르텔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카를 마르텔은 이슬람 군대를 격파했다. 760년,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아키텐 공 와이파르에게 그가 불법으로 탈취한 교회령의 반환을 명령했지만, 와이파르는 오히려 오툉, 샤롱, 투르 등의 지역까지 침략해왔다.
768년 와이파르는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아키텐 공의 저항은 일단 종결되었다.[5] 769년 와이파르의 아들 우나르 2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카를 1세는 동생 카를만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6] 778년, 카를 1세는 히스파니아에 원정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 3. 1. 메로빙거 왕조
- '''크람''' (555년 ~ 560년): 클로타르 1세의 아들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 데지데리우스 (583년 ~ 587년): 힐페리히 2세와 군트람 시대에 파견된 관료로 블라다스트와 공동 통치하였다.
- 블라다스트 (583년 ~ 587년): 힐페리히 2세와 군트람 시대에 파견된 관료로 데지데리우스와 공동 통치하였다.
- '''군도알드''' (584년/585년): 클로타르 1세의 서자였다.
- 아우스트로발드 (587년 ~ 589년)
- 세레우스 (589년 ~ 592년)
- '''클로타르 2세''' (592년 ~ 629년)
- '''카리베르트 2세''' (629년 ~ 632년)
- '''힐페리크''' (632년): 살해됨.
- 보기스 (632년 ~ 660년): 카리베르트 2세의 아들.
- 펠릭스 (660년 ~ 670년)
- 루푸스 1세 (670년 ~ 676년)
- 오도 대왕 (688년 ~ 735년): 보기스의 아들. 그의 통치는 692년, 700년 또는 715년 이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출생에 대한 기록이 불확실하다.
- 위날드 1세 (735년 ~ 745년): 오도 대왕의 아들로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 와이페르 (745년 ~ 768년): 위날드 1세의 아들.
- 위날드 2세 (768년 ~ 769년): 와이페르의 아들로 추정.
- 루포 2세 (768년 ~ 781년): 가스코뉴 공작으로, 샤를마뉴의 통치와 위날드의 친척들에게 반대하였다.
2. 4. 아키텐 공국
507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가 피레네 산맥까지의 영토를 정복하여 서고트 왕국의 영토였던 아키텐 지역은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클로비스 1세 사후, 그의 왕령은 여러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어 왕가에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클로타르 2세 사후, 현지 백작이 이끄는 독립 세력이 프랑크 왕권과 여러 차례 대립했다.8세기 초에는 보르도 백작 우드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지배를 확립하고 있었다. 729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압드 알라흐만 알가피키가 이끄는 우마이야 칼리파국 군세가 아키텐에 침입하여 우드는 이슬람 군대에 패했다. 그래서 우드는 카를 마르텔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카를 마르텔은 이슬람 군대를 격파했다.
760년,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아키텐 공 와이파르에게 그가 불법으로 탈취한 교회령의 반환을 명령했지만, 와이파르는 오히려 오툉, 샤롱, 투르 등의 지역까지 침략해왔다. 결국, 와이파르는 768년 부하에 의해 암살당하고, 아키텐 공에 의한 저항은 일단 종결되었다.[5] 다음 해 769년에는 와이파르의 아들 우나르 2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카를 1세는 동생 카를만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6]
778년, 카를 1세는 히스파니아에 원정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히스파니아와 접하는 지역이자, 그동안 왕권과 대립해 온 아키텐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들 루트비히(후의 루트비히 1세)를 왕으로 하는 아키텐 왕국을 건설하는 한편, 아키텐 지역의 9명의 백작을 모두 프랑크인으로 선출하여 많은 수도승들과 함께 파견했다.[7][8]
아키텐 왕국은 루트비히 1세의 아들 피핀 1세, 피핀 2세에게 계승되었고, 피핀 2세 이후에는 서프랑크 왕가가 그 영토를 상속받아 서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키텐 공작위는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후반에 걸쳐 푸아투 백작가, 오베르뉴 백작가, 툴루즈 백작가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으나, 10세기 후반 푸아투 백작 윌렘 3세가 아키텐 공작이 된 이후로는 푸아투 백작가가 12세기까지 공작위를 계승했다.[9] 11세기 중반에는 푸아투 백작가가 가스코뉴 공국도 계승했고,[9] 당시 아키텐 공작의 권력은 루아르 강에서 피레네 산맥 기슭까지, 그리고 오베르뉴의 중앙 산악 지대에서 대서양까지 미쳐 프랑스 왕의 영토보다 훨씬 광대하고 부유했다.[10]
2. 4. 1. 카롤링거 왕조
- 카를로만 (768년 ~ 771년)
- 루포 2세 (771년 ~ 781년), 샤를마뉴가 파견한 가스코뉴 공작
- 크로손 (787년 ~ 791년), 샤를마뉴가 파견한 토르손 백작
- 프랑크의 루트비히 1세 (790년 ~ 806년)
- 기욤 드 젤론 (790년 ~ 806년), 샤를마뉴가 파견
- 로타르 1세 (806년 ~ 814년)
- 아키텐의 피핀 1세 (814년 ~ 832년)
- 서프랑크의 카를 2세 (832년 ~ 834년)
- 아키텐의 피핀 1세 (834년 ~ 838년)
- 아키텐의 피핀 2세 (838년 ~ 852년)
- 서프랑크의 카를 2세 (838년 ~ 845년) : 아키텐 왕위 요구자
- 아키텐의 피핀 2세 (854년 ~ 864년)
- 아키텐의 샤를 3세 (864년 ~ 866년)
- 프랑크의 루이 2세 (866년 ~ 879년)
- 샤를로망 (879년 ~ 884년)
- 카를 3세 (884년 ~ 888년)
- 라눌프 2세 (888년 ~ 890년) - 아키텐 귀족들에 의해 추대됨
- 에발루스 (890년 ~ 892년)
- 윌리엄 1세 (893년 ~ 918년) - 클루니 수도원 설립
- 샤를 3세 (898년 ~ 922년) - 서프랑크 군주 겸임
- 윌렘 3세 (935년 ~ 963년)
2. 5. 중세 시대
루이 5세는 브리우드에서 대관식을 치렀다.[3] 12세기 후반 리모주의 생테티엔(Saint-Étienne)에서 나온 오르도(의식서)에 아키텐 공작의 대관식 절차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이전의 로마-게르만 오르도를 기반으로 한다. 13세기 초 이 오르도에 주석이 추가되었는데, 리모주를 아키텐의 수도로 강조하고 있다. 오르도에 따르면, 공작은 비단 망토, 작은 왕관, 깃발, 칼, 박차, 그리고 성녀 발레리의 반지를 받았다.[3]이후 아키텐 공작위는 여러 가문이 소유했다.
가문 | 아키텐 공작 |
---|---|
푸아투 백작가 | |
오베르뉴 백작가 | |
카르카손 백작가(라세스 백작)가 | |
뤼에르그 백작가 (툴루즈 백작가) | |
푸아투 백작가 | |
카페 왕조 |
1152년부터 아키텐 공국은 플랜태저넷 가문이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잉글랜드를 독립적으로 통치했으며, 별도의 상속을 통해 프랑스의 다른 영토들도 소유했다(플랜태저넷 제국 참조). 플랜태저넷 가문은 프랑스 국왕보다 종종 더 강력했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프랑스 국왕에게 봉신 의식을 거행하려는 그들의 꺼림칙함은 중세 서유럽의 주요 갈등 원인 중 하나였다.
2. 5. 1. 앙주 왕가 (플랜태저넷 왕가)
- 리처드 1세 (1189–1199), 잉글랜드 국왕,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권리로 공작.[3]
- 존 (1199–1216), 잉글랜드 국왕, 1204년 어머니 사망까지 어머니의 권리로 공작.[3]
- 헨리 3세 (1216–1272), 잉글랜드 국왕.[3]
- 에드워드 1세 (1272–1307), 잉글랜드 국왕.[3]
- 에드워드 2세 (1307–1325), 잉글랜드 국왕.[3]
- 에드워드 3세 (1325–1362), 잉글랜드 국왕[3]
- 에드워드 흑태자 (1362-1372), 아키텐 공[3]
- 리처드 2세 (1377-1390), 잉글랜드 국왕[3]
-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1390-1399)[3]
- 헨리 4세 (1399-1400)[3]
- 헨리 5세 (1400-1422)[3]
- 헨리 6세 (1422-1453)[3]
2. 6. 백년전쟁과 프랑스 왕국의 통합
14세기,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발발하면서 아키텐은 주요 분쟁 지역이 되었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로부터 아키텐 봉토를 탈환하려 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외조부인 프랑스의 필리프 4세로부터 계승받은 권리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였고, 이는 플랑타지네트 가문과 발루아 왕가 모두 아키텐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원인이 되었다.[3]1360년, 양측은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하여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아키텐의 군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1369년 조약이 파기되면서 잉글랜드의 주장과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장남인 에드워드 흑태자를 아키텐 공으로 임명하였다.
1390년, 에드워드 흑태자의 아들인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삼촌인 존 오브 곤트를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 작위는 공작의 사망과 함께 소멸되었고 공작령은 왕관으로 환원되었다.
헨리 4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한 후, 그의 아들 헨리 5세에게 아키텐 공작령을 양도하였다.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략하여 1415년 아르플뢰르 공성전과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관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헨리 5세 사후,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프랑스 지배는 점차 약화되었다.
2. 6. 1. 발루아 왕가
- 장 2세 (1345–1350):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아들로, 1350년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 샤를 (1392?–1401): 프랑스의 샤를 6세의 아들이자 도팽.
- 루이 (1401–1415): 프랑스의 샤를 6세의 아들이자 도팽.
- 베리 공작 샤를 (1469–1472):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2. 6. 2. 부르봉 왕가
- 자비에르 (1753–1754): 프랑스 도팽 루이의 차남.[1]
- 곤잘로 (1972–2000):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는 알폰소 13세의 아들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합법주의자 중 한 명으로, 곤잘로에게 아키텐 공작 작위를 수여하였다. 곤잘로는 합법적인 자녀가 없었다.[1]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Women: Book II Silences of the Middle Age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2]
서적
Ruricius of Limoges and Friends: A Collection of Letters from Visigothic Gaul
https://books.google[...]
Liverpool University Press
1999
[3]
웹사이트
Would the grant of Aquitaine to John of Gaunt in 1399 have been inherited by Henry Bolingbroke had the latter not been exiled by Richard II?
https://www.research[...]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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