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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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흑태자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으로, 1330년에 태어났다. 그는 1337년 콘월 공작에 봉해졌고, 1343년에는 웨일스 공이 되었다.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가터 훈장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362년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어 통치했으나, 과도한 세금 부과로 불만을 샀다. 스페인 원정에서 승리했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건강 악화로 1371년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1376년 사망했다. 흑태자라는 별칭은 그의 검은 방패 또는 잔혹한 군사적 명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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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흑태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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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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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330년 6월 15일 |
출생지 |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 잉글랜드 |
사망일 | 1376년 6월 8일 (향년 45세) |
사망지 |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잉글랜드 |
매장일 | 1376년 9월 29일 |
매장지 | 켄트, 캔터베리 대성당 |
배우자 | 조앤 오브 켄트 (1361년 10월 10일 결혼) |
자녀 | 에드워드 오브 앙굴렘 리처드 2세 로저 클라렌던 (사생아) |
가문 | 플랜태저넷 가문 |
아버지 | 에드워드 3세 |
어머니 | 필리파 오브 에노 |
작위 | |
웨일스 공 | 1343년 5월 12일 - 1376년 6월 8일 |
콘월 공작 | 1337년 - 1376년 |
아키텐 공작 | 1362년 - 1372년 |
체스터 백작 | 해당 정보 없음 |
별칭 | |
별칭 | 흑태자 |
로마자 표기 | Edward, the Black Prince |
기타 | |
칭호 |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에드워드 4세로 불리기도 함 |
2. 유년기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 드 애노의 장남으로, 1330년 6월 15일 옥스퍼드셔의 우드스톡 궁전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내 영토와 프랑스 왕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이는 백년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1330년 9월 10일, 에드워드 3세는 장남의 양육비로 체스터 백작령 수입 중 매년 500 마르크를 책정했고, 1331년 2월 25일에는 이 수익 전체를 왕비 필리파와 왕의 누이 엘리너에게 위탁했다.[98][1] 같은 해 7월,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딸과 정혼하자는 제안이 있었다.[99][2]
에드워드 흑태자의 군사 경력은 16세의 나이로 백년 전쟁에 참전하면서 시작되었다. 1346년 아버지 에드워드 3세를 따라 프랑스 원정에 나서 크레시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지휘하며 첫 전투를 치렀고,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며 용맹을 떨쳤다.[84][85][108] 이후 칼레 공방전 (1346년-1347년)과 1350년 윈첼시 해전 등 주요 전투에 연이어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109][111] 또한 1348년 아버지가 창설한 가터 훈장의 초기 기사단원으로 선출되었다.[86] 1353년에는 체스터 백작으로서 체셔주에서 발생한 소요를 랭커스터 공작 헨리 그로스몬트와 함께 진압하였다.[112]
1333년 3월 18일, 에드워드는 체스터 백작이 되었고,[3] 1337년 2월 9일 잉글랜드 의회는 그를 콘월 공작으로 임명하기로 의결하여 3월 17일 정식으로 공작에 봉해졌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공작 작위 창설이었으며, 에드워드는 최연소 콘월 공작이 되었다. 이후 콘월 공작위는 잉글랜드 국왕의 장남에게 계승되는 작위가 되었다.[100][3]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머턴 컬리지의 월터 버레이 박사에게 교습을 받았다.[101][4] 모후가 관리하던 에드워드의 수입은 1334년 3월경 바닥을 드러냈는데, 이는 그와 이후 태어난 두 여동생 이사벨라와 조안의 양육비로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101][4] 1335년 8월, 프랑스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자 에드워드와 그의 가족은 노팅엄 성으로 피신하라는 왕명을 받았다.[102][5]
1337년 말,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 사이의 평화를 주선하기 위해 두 명의 추기경이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콘월 공작 에드워드는 시티오브런던 외곽에서 이들을 영접하고 귀족들과 함께 부왕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103][6] 1338년 7월 11일,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로 떠나면서 당시 8세였던 에드워드를 처음으로 '왕국의 수호자'(Keeper of the Realm)로 임명했다. 이는 국왕 부재 시 왕권을 대리하는 명목상의 섭정직으로, 이후 1340년 5월 27일과 1342년 10월 6일에도 같은 직책에 임명되었다.[104][7] 하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실제 국정 운영은 추밀원에서 담당했다.[7] 1339년, 에드워드 3세는 브라반트 공작 존 3세를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딸 마거렛과 아들 에드워드의 정혼을 제안했다. 이 정혼을 위해 1345년 봄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관면(dispensation)을 요청했으나, 결국 무효가 되었다.[105][8]
1343년 5월 12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는 웨일스 공으로 책봉되었고, 작위를 상징하는 관모, 금반지, 은제 홀(silver rod)을 수여받았다.[106][9] 1345년 7월 3일,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플랑드르의 슬뢰이스로 가서 부왕의 군대와 합류했다. 에드워드 3세는 헨트, 브뤼허, 이퍼르의 뷔르거마이스터(시장)들에게 아들을 그들의 영주로 인정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플랑드르의 지도자 야콥 반 아르테벨드가 암살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06][9] 그해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프랑스 침공을 위한 군대를 자신의 공국과 백작령에서 모집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부왕에게 참전을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또한 전쟁 중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유언장을 작성하고, 자신의 연수입을 관리할 유언집행자를 지정하도록 허락받았다.[106][9]
3. 군사 경력
1355년, 흑태자는 아키텐 지역의 군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프랑스 남부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셰보셰)을 전개했다.[113] 그는 가스코뉴에서 시작하여 랑그도크 지역까지 진격하며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115][116] 이듬해인 1356년에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수적으로 압도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는 백년 전쟁의 판도를 잉글랜드에 유리하게 만들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87][88]
잉글랜드로 귀환한 후 흑태자는 여러 축제와 토너먼트에 참여했으며,[127] 1359년에는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랭스 전역을 지휘했다. 브레티니 조약 체결 이후에도 프랑스에 남아 조약 이행 문제를 처리하고 1360년 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130][131]
1362년, 흑태자는 브레티니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에 할양된 아키텐 공국의 공작(Prince of Aquitaine)으로 임명되어 보르도에 자신의 궁정을 세웠다.[89] 그는 화려한 궁정 생활을 유지하며 연회와 토너먼트를 자주 열었으나, 이러한 사치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과도한 세금 징수, 특히 1368년 부과된 난로세(爐稅)는 아키텐 주민들과 귀족들의 큰 불만을 샀다.[89][92]
1367년, 흑태자는 카스티야 왕국의 내전에 개입하여 페드로 1세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나헤라 전투에서 프랑스가 지원하는 엔리케 2세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90] 그러나 이 원정에서 심각한 이질(혹은 페스트)에 걸려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페드로 1세가 약속한 원정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 막대한 빚만 지게 되었다.[90][91] 페드로 1세는 결국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패사하여 카스티야는 프랑스 편에 서게 되었고, 아키텐은 서쪽에서 카스티야 해군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91]
아키텐 귀족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알마냐크 백작 장 1세 등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흑태자의 과세에 대해 항소했다. 흑태자가 파리 고등법원의 소환 명령을 거부하자 샤를 5세는 아키텐 공국 몰수를 선언했고, 1369년 백년 전쟁이 재개되었다.[92][93]
병석에 누워 있던 흑태자는 제대로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고, 잉글랜드가 장악했던 프랑스 내 영토는 점차 프랑스군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1370년,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리모주 포위전에 나서 함락에는 성공했지만, 이전에 프랑스군에 항복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주민 3,000명을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94] 이 사건은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결국 건강 악화로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된 흑태자는 1371년 잉글랜드로 귀국했다.[95] 그가 떠난 아키텐에서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공세를 펼쳐 대부분의 영토를 되찾았고, 잉글랜드는 보르도와 바욘 주변 지역만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95]
잉글랜드로 돌아온 흑태자는 동생 존 곤트가 장악했던 국정 운영에 관여하여 1376년 선량 의회 개최를 지원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같은 해 6월 8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오랜 투병 끝에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6][97] 그의 죽음으로 잉글랜드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를 잃었으며, 이는 이후 백년 전쟁의 전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3. 1. 초기 군사 활동 (1346년 ~ 1353년)
1346년 7월,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를 따라 프랑스 원정에 참여하여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현지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107] 그는 곧바로 백년 전쟁의 주요 전투에 투입되었다. 같은 해 8월에 벌어진 크레시 전투에서는 1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익 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첫 전투 경험을 쌓았고, 이 전투는 잉글랜드의 대승으로 끝났다.[108] 이 전투에서의 용맹함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크레시 전투 이후 에드워드는 칼레 공방전 (1346년-1347년)에도 참여하여 도시 함락에 기여했다.[109] 1347년 잉글랜드로 귀환한 뒤, 1348년에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가 창설한 가터 훈장의 초기 기사단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349년 말에는 칼레 전투에 참전하여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하는 데 기여했으며,[110][23] 1350년에는 프랑스를 지원하던 스페인 함대와의 윈첼시 해전에 참전하여 직접 배를 지휘하며 싸웠다. 이 해전에서 그가 탄 배가 침몰 직전에 이르렀으나, 랭커스터 공작 헨리 그로스몬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111][24]
1353년에는 체셔주에서 소요가 발생하자, 체스터 백작으로서 헨리 그로스몬트와 함께 이를 진압했다. 그는 항복한 이들에게 대역죄를 적용하고 자산을 몰수했으며 많은 벌금을 부과하여 백작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했다.[112]
3. 1. 1. 크레시 전투 (1346년)
1346년 7월 11일,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 국왕과 함께 프랑스 라 호그에 상륙했고, 현지 교회에서 아버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107][10] 이후 그는 코탕탱반도를 지나며 닥치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약탈했으며, 캉을 함락시키는 등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또한 솜강의 블랑셰타크 여울을 건너려는 영국군을 막으려던 고드마르 1세 뒤 파이의 군대와의 전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108][11]
1346년 8월 26일 토요일 아침 일찍 크레시 전투가 시작되기 전,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크레시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우익(선봉)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워윅 백작, 옥스퍼드 백작, 조프리 드 아르코르 경, 존 샨도스 경 등과 함께 800명의 중기병, 2,000명의 궁수, 1,000여 명의 웨일스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었다.[108] 프랑스군의 제노바 석궁 부대가 공격을 시작하고 영국군 선두가 잠시 혼란에 빠졌을 때, 알랑송 백작 샤를 2세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가 에드워드의 부대를 맹렬히 공격하여 그를 큰 위험에 빠뜨렸다. 에드워드 휘하의 지휘관들은 상황이 위급함을 알리고 에드워드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108]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들에게 "승리의 박차"를 얻을 기회를 주겠다며 지원군 파견을 거절했다. 에드워드가 전투 중 말에서 떨어지자, 그의 기수였던 리처드 피츠사이먼 경은 깃발을 땅에 내려놓고 쓰러진 에드워드 위에서 그를 보호하며 공격자들을 막아냈다.[108][11] 이후 아룬델 백작 리처드 핏츠앨런의 도움으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11]
프랑스군은 알랑송 백작과 퐁티외 백작을 선두로 측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언덕 위에 강력하게 진지를 구축한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지형적 이점을 살려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라울 드 로렌 공작, 알랑송 백작, 블루아 백작 등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전사했다.[108][11] 특히 에드워드 흑태자의 부대는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얀을 죽였다.[108]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본대가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기도 전에 프랑스군의 전열은 무너졌고, 에드워드 흑태자는 예비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가 끝난 후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을 만나 포옹하며 칭찬했고, 흑태자는 무릎을 꿇고 깊이 머리를 숙여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했다. 다음 날, 흑태자는 아버지와 함께 전사한 보헤미아 국왕 얀의 장례를 치렀다.[108][11]
흑태자가 크레시 전투에서 죽인 보헤미아 국왕 얀에게서 '''타조 깃털 세 개''' 문장과 "''Ich dien''"(나는 섬긴다)이라는 모토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타조 깃털은 흑태자 사후 그의 고유한 휘장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보헤미아 국왕 얀의 공식 문장은 독수리 날개였지만, 타조는 그의 가문(예: 보헤미아의 안나 여왕,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스 4세)에서 사용된 휘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4][15] 흑태자는 유언에서 이 깃털을 '평화를 위해'(즉, 무술대회를 위해) 사용한다고 명시하며 문장이 아닌 휘장으로 지칭했다. 이 깃털 휘장은 왕실의 다른 구성원들이나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 같은 귀족들도 사용했다.[17] "''Ich dien''" 모토는 흑태자가 사용한 또 다른 모토인 "''Houmout''"(고양된 정신)와 함께 그의 인장에 사용되었으며, 둘 다 플랑드르어나 저지 독일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0][21] 초기 기록에는 이 모토가 보헤미아 국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언급은 없다. 역사가 캠든은 이를 고대 영어 "''Ic þien''"으로 해석하며 흑태자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와 연결시키기도 했다.[18][19]
3. 1. 2. 칼레 공방전과 윈첼시 해전
크레시 전투 이후 흑태자는 칼레 공방전에 참여하였다. 도시가 항복하자 주변 약 48.28km 지역을 모두 불태우고 약탈하며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109] 에드워드는 부왕 에드워드 3세와 함께 1347년 10월 12일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1348년 에드워드 3세는 가터 훈장을 창설하고 크레시 전역에 참여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수여하였다.
1349년 말, 흑태자는 칼레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부왕을 구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고, 에드워드 3세가 포로로 잡은 프랑스 귀족들을 위해 연회를 열자 흑태자는 다른 영국 기사들과 함께 왕과 손님들에게 첫 번째 코스를 제공한 후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110][23]
1350년 8월 28일, 잉글랜드 함대는 프랑스를 지원하던 스페인의 라세르다 가 함대와 윈첼시 해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흑태자가 그의 동생인 젊은 랭커스터 공작 존 곤트와 함께 탄 배는 큰 스페인 함선에 붙잡혔고, 너무 많은 구멍이 나서 침몰할 위기에 처했다. 그와 그의 기사들이 용감하게 적을 공격했지만, 배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이때 랭커스터 공작 헨리 그로스몬트가 구출하러 와 스페인 배의 다른 쪽을 공격했고, 곧 함선은 함락되었으며 승무원들은 바다에 던져졌다. 왕자와 그의 부하들이 스페인 배에 올라타자 그들의 원래 배는 침몰했다.[111][24]
3. 2. 아키텐 전역 (1355년 ~ 1364년)
1355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흑태자에게 아키텐 원정군 지휘를 맡겼다. 이는 약탈을 원했던 가스코뉴 귀족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7월 10일,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를 가스코뉴의 부왕으로 임명하고 대리 통치권을 부여했으며, 8월 4일에는 충성 맹세를 받을 권한까지 주었다.[26] 흑태자는 6월 30일 런던을 떠나 플리머스에 도착했으나 역풍으로 인해 9월 8일에야 약 3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 그의 군대는 워릭 백작, 서퍽 백작, 솔즈베리 백작, 옥스퍼드 백작 등 4명의 백작과 기사 1,000명, 궁수 2,000명, 그리고 대규모의 웨일스 보병으로 구성되었다.[27] 보르도에 도착하자 가스코뉴 귀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27]
겨울이 오기 전 단기 원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0일 흑태자는 기병 1,500명, 궁수 2,000명, 경보병 3,000명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 원정은 사실상 대규모 약탈 행위(셰보셰)였다.[27][28] 그는 쥘리아크, 아르마냐크, 아스타라크, 콩밍주 일부 지역을 거치며 혹독한 약탈을 자행했고, 툴루즈 북쪽 생트마리에서 가론강을 건넜다. 당시 그곳에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가 상당한 병력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지 않았다.[28] 흑태자는 로라게 지역으로 진격하여 몽지스카르를 불태우고 많은 주민을 학살했으며, 아비뇽네와 카스텔노다리를 점령하고 약탈했다.[28] 흑태자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매우 부유하고 비옥했으며", 사람들은 "착하고 순박하며 전쟁에 무지"했기에 막대한 전리품, 특히 카펫, 직물, 보석 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행한 가스코뉴 병사들은 특히 탐욕스럽게 약탈에 가담했다.[29] 유일하게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낸 곳은 몽제 성이었는데, 성주 부인이 벌집을 던져 공격자들을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카르카손 시가지는 함락되어 약탈당했지만, 견고한 요새는 점령하지 못했다.[30] 우르메(혹은 몽)와 트레브 같은 곳은 돈을 지불하고 약탈을 피했다. 흑태자는 나르본 약탈도 고려했으나 방어가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나르본에 머무는 동안 교황청 사절이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을 알기 전에는 결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30] 이후 흑태자는 보르도로 귀환하는 길을 택했다. 아르마냐크 백작이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소규모 교전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남은 병력은 툴루즈로 후퇴했고, 흑태자는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무사히 보르도로 돌아왔다.[31] 이듬해인 1356년 1월까지 그의 부하들은 5개의 도시와 17개의 성을 추가로 함락시켰다.[32]
1356년에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포로로 잡는 큰 공을 세웠다.[87][88] 이 승리는 백년 전쟁의 판도를 잉글랜드에 유리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푸아티에 전투 후 보르도에서 겨울을 보낸 흑태자는 막대한 전리품으로 축제를 벌였고, 1357년 3월 23일 2년간의 휴전을 체결했다. 가스코뉴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0만 프랑스 프랑을 지불하고, 5월 4일 플리머스에 상륙하여 잉글랜드로 귀환했다.[38]
이후 1359년부터 1360년까지 이어진 랭스 전역에도 참전하여 프랑스를 압박했고, 이는 결국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아키텐을 포함한 프랑스 내 광대한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확보하게 되었다.[129][87][88] 흑태자는 조약 체결 후에도 프랑스에 남아 장 2세의 몸값 처리 및 호송 문제 등을 마무리하고 1360년 11월에야 잉글랜드로 귀환했다.[130][131]
1361년 10월 10일, 31세의 흑태자는 그의 친척이자 제1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문드의 딸인 켄트의 조안과 윈저성에서 결혼했다.[132] 장 프루아사르는 이 결혼이 국왕의 승인 없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는데, 조안이 이미 두 번의 결혼 경력이 있고 혼인 유효성 문제로 재판까지 치렀던 점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132] 부부는 하트퍼드셔주의 버컴스테드에 거처를 마련했다.
1362년, 브레티니 조약에 따라 할양받은 아키텐 공국의 공작(Prince of Aquitaine)으로 정식 임명되어 프랑스 남부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89] 그는 보르도에 화려한 궁정을 세우고 연회와 토너먼트를 자주 열어 마치 왕궁과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처음에는 아키텐 주민들도 그를 환영했지만, 점차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한 과도한 세금 부담과 중요한 관직을 잉글랜드인들에게만 나눠주는 등 아키텐 귀족들을 소외시키는 통치 방식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89]
3. 2. 1. 푸아티에 전투 (1356년)
1356년 7월 6일, 에드워드 흑태자는 프랑스를 가로질러 노르망디로 가서 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노르망디 동맹군(나바라 왕과 조프리 드 아르코르가 이끄는 세력)을 지원하려는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아버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33] 8월 4일 베르제라크에서 도르도뉴강을 건너[34] 오베르뉴, 리무쟁, 베리 지역을 지나면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부르주에 이르러서는 교외를 불태웠지만 도시 자체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이수됭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샤르트르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켜 루아르강의 통로를 방어하고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 요새에 병력을 파견했다. 이수됭에서 실패한 흑태자는 이전 진군로로 돌아와 비에르종을 점령했다. 그곳에서 루아르 강을 건너거나 브르타뉴에 있던 랭커스터 공작과 합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푸아티에를 경유하여 보르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비에르종 성의 수비대 대부분을 처형한 후 8월 29일 로모랑탱랑트네로 향했다.
영국 선봉대와 소규모 접전을 벌였던 일부 프랑스 기사들이 로모랑탱으로 후퇴하자, 에드워드 흑태자는 "저곳으로 가자. 저들을 좀 더 가까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요새를 정찰하고 친구 존 챈더스를 보내 수비대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장 르 멩그르(별칭 부시코) 등이 지키던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자, 흑태자는 8월 31일 공격을 시작했다. 포위 공격은 3일간 지속되었고, 친구의 죽음에 격분한 흑태자는 요새를 함락시키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결국 그는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여 요새 지붕에 불을 질러 9월 3일 함락시켰다.
9월 5일, 영국군은 베리 지방을 통과하며 진군했다. 9월 9일, 이제 대규모 군대를 모은 장 2세는 블루아에서 루아르 강을 건너 영국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9월 12일 로슈에 도착했을 때 왕의 군대는 무장 병력만 2만 명에 달했고, 이들을 이끌고 쇼비니로 진격했다. 9월 16일과 17일, 프랑스 군대는 비엔강을 건넜다.
한편, 흑태자는 프랑스군과 거의 평행하게,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진군하고 있었다. 프루아사르는 흑태자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몰랐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믿기 어렵다.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그는 샤텔로에 머물렀고, 다음 날인 토요일 푸아티에로 진군하던 중 프랑스 무장병들과 영국 선봉대 사이에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프랑스 병사들은 영국군 본대까지 추격당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왕은 흑태자를 앞질렀고, 그의 퇴로는 최소 5만 명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대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반면 흑태자의 병력은 기껏해야 중기병 2천 명, 궁수 4천 명, 경보병 1천 5백 명 정도였다. 랭커스터 공작이 그를 구원하려 했으나 퐁드세에서 프랑스군에게 저지되었다.[35]
흑태자는 프랑스군이 자신과 푸아티에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도시 남동쪽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은 미오송 강 우안과 고대 로마 도로 사이, 현재 미냐르누보부아르 코뮌의 라 카르디네리 농장 근처로 추정된다. 다음 날인 일요일(9월 18일), 엘리 드 탈레랑페리고르 추기경은 장 2세로부터 평화 협상을 시도할 허락을 받았다. 흑태자는 협상에 응하여, 정복한 모든 도시와 성을 포기하고, 모든 포로를 석방하며, 7년 동안 프랑스 왕에게 대항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심지어 을 지불하겠다고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장 2세는 흑태자와 그의 기사 100명이 스스로 포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흑태자는 이를 거부했다. 추기경의 협상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장 2세는 추가 증원군이 합류할 시간을 벌고자 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프랑스군은 흑태자의 소규모 군대를 포위하여 굶주리게 하거나, 유리한 진지에서 끌어내어 야전에서 싸우도록 강요하여 쉽게 승리할 수도 있었다. 장 2세가 흑태자에게 일요일 휴전을 허용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흑태자는 군대를 동원해 진지를 더욱 강화했다. 영국군 전선은 포도밭과 울타리로 잘 가려져 있었고, 좌측과 후방은 미오송 계곡과 험준한 지형이, 우측은 누아이예 숲과 수도원이 측면을 보호해주었다. 군대는 하루 종일 참호를 파고 울타리를 만들며 크레시 전투 때와 유사한 참호 진지를 구축했다.[36]
흑태자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제1부대는 워릭 백작과 서퍽 백작이, 제2부대는 흑태자 자신이, 후방은 솔즈베리 백작과 옥스퍼드 백작이 지휘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네 부대로 나뉘어 배치되어 수적 우세의 이점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흑태자는 제1부대 앞과 진지로 이어지는 좁은 길 양쪽에 울타리로 보호받는 궁수들을 배치했고, 프랑스 제2부대(도팽 샤를 5세)의 측면을 공격할 중기병 300명과 기마 궁수 300명으로 구성된 매복 부대를 숨겨두었다.
9월 19일 새벽, 에드워드 흑태자는 그의 작은 군대 앞에서 연설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정예 중기병 300명이 좁은 길을 통해 영국군 진지를 돌파하려 했지만, 양쪽에서 쏟아지는 장궁병들의 화살에 쓰러졌다. 독일 용병들과 뒤따르던 프랑스 제1부대가 혼란에 빠지자, 매복해 있던 영국군이 프랑스 제2부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제2부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영국 중기병들은 미리 준비해둔 말에 올라타 언덕 아래로 돌격했다. 흑태자는 존 챈더스를 곁에 두고 싸웠으며, 돌격 직전 그는 "존, 앞으로 나가라. 너는 오늘 내가 등을 돌리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선두에 있을 것이다."라고 외치고는 자신의 깃발병에게 "깃발을 들어 올려라, 하느님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라고 소리쳤다. 선봉대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군은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웠는데, 이미 흔들리고 있던 노르망디 공작(도팽 샤를)의 부대는 영국군의 돌격을 견디지 못하고 혼란 속에 도망쳤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이끄는 다음 부대도 도망쳤지만, 장 2세가 직접 지휘하는 후방 부대는 매우 용감하게 싸웠다. "사자의 용기를 가진" 흑태자는 그날의 전투를 매우 즐겼다고 전해진다. 전투는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끝났고, 완전히 패배한 프랑스군은 11,000명의 사망자를 남겼는데, 그중 2,426명이 귀족이었다. 거의 100명의 백작, 남작, 배너렛 기사와 2,000명의 중기병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포로가 되었으며, 국왕 장 2세와 그의 막내아들 필리프도 포로 신세가 되었다. 영국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장 2세가 흑태자에게 끌려왔을 때, 흑태자는 그를 정중하게 맞이하여 갑옷 벗는 것을 돕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포로로 잡힌 왕족과 귀족들을 접대했다. 그는 직접 왕의 식사 시중을 들었으며, 왕과 함께 앉지 않고 "그렇게 위대한 왕이나 용감한 사람과 식탁에 함께 앉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 프랑스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37] 다음 날 흑태자는 보르도로 후퇴를 재개했고, 신중하게 행군했지만 아무도 감히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10월 2일 에드워드 흑태자가 도착한 보르도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축제가 열렸고, 그와 그의 군대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얻은 막대한 전리품으로 축제를 벌였다. 1357년 3월 23일, 흑태자는 귀국을 원했기 때문에 2년간의 휴전을 체결했다. 가스코뉴 귀족들은 장 2세가 잉글랜드로 끌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흑태자는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을 주었다. 그는 4명의 가스코뉴 귀족에게 통치를 맡기고 11일간의 항해 끝에 5월 4일 플리머스에 상륙하여 잉글랜드에 도착했다.[38] 5월 24일 런던에서 열린 개선식에서, 포로인 장 2세는 값비싼 백마를 타고 있었지만, 흑태자 자신은 작은 검은색 해크니 말을 타고 있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흑태자의 이러한 겸손한 모습은 다소 가식적으로 보일 수 있으며, 한 피렌체 연대기 작가는 장 2세에게 베푼 예우가 오히려 포로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에드워드 왕의 영광을 더욱 크게 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당시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쉽게 도달하기 어려웠을 세련된 감수성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39]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는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87][88]
3. 2. 2. 랭스 전역 (1359년 ~ 1360년)
1359년 5월, 부왕과 함께 런던에서 열린 기사 대회에 참가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40] 그러나 계속된 축제와 사치스러운 선물 증여로 인해 빚을 지게 되었다.[41] 1359년 8월 27일, 프랑스 원정을 준비하면서 부왕은 흑태자가 전사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의 재산을 4년간 집행자들이 관리하여 빚을 갚도록 허락했다.[41]
이 원정은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는 대승 이후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87][88] 이러한 군사 활동의 결과로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어 백년 전쟁의 첫 단계가 마무리되었다.[87][88]
4. 아키텐 통치와 스페인 원정
1362년 7월 19일,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통치권을 부여하여, 해마다 약간의 금을 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공국의 군주가 되도록 하였다.[133] 흑태자는 보르도와 앙굴렘을 중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였으나, 잉글랜드 출신 측근들을 중용하고 무력을 과시하는 등의 정책은 점차 현지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1365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페드로 1세가 이복 형제 엔리케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망명하자, 흑태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흑태자는 휘하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자가 적법한 왕을 몰아낸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페드로 1세의 복위를 돕기로 결정하였다. 페드로 1세는 복위 시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1367년, 흑태자는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여 카스티야로 원정을 떠나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흑태자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으나, 전투 이후 페드로 1세는 약속했던 원정 비용과 영토 할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60] 흑태자는 막대한 빚만 떠안게 되었고, 원정 중에 걸린 심각한 병(아마도 이질)으로 인해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이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61][62]
스페인 원정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과 건강 악화는 흑태자의 아키텐 통치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1368년 아키텐 공국에 새로운 세금인 노세(爐稅)를 부과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아르마냐크 백작 등 주요 귀족들이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청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149] 이는 결국 프랑스와의 백년 전쟁 재개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스페인 원정은 단기적인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흑태자의 재정 파탄, 건강 악화, 아키텐 통치 기반 약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4. 1. 아키텐 통치 (1362년 ~ 1370년)

1362년 7월 19일, 아버지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에게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통치권을 부여하고, 해마다 약간의 금을 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공국의 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다.[133] 에드워드는 그해 크리스마스까지 잉글랜드에 머물다가 아내 켄트의 조안과 가신들을 데리고 가스코뉴로 떠나 라 로세이유에 상륙했다.
라 로세이유에서 부왕의 부관인 존 챈더스의 영접을 받은 흑태자는 푸아티에로 이동하여 푸아투와 상토뉴 영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여러 도시를 시찰한 후 보르도에 도착하여 1363년 7월 9일부터 30일까지 머물며 가스코뉴 지역 영주들의 충성을 확인했다. 이후 흑태자는 보르도와 앙굴렘을 번갈아 가며 거처로 삼았다.
흑태자는 존 챈더스에게 기사들을 맡겨 기옌 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게 했다.[134] 그러나 가스코뉴 영주들 중 상당수가 잉글랜드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흑태자는 자신과 같은 잉글랜드 출신 부하들을 더 신임하며 무력을 통해 불만을 억누르려 했다. 프랑스에 있던 알브레의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등이 흑태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1364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5세가 흑태자 영지 내의 반란을 조심스럽게 부추기면서 그의 입지는 점차 불안정해졌다.
1363년 4월, 흑태자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던 푸아 백작과 아르마냐크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다. 또한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샤를과 그의 경쟁자이자 작위 요구자였던 장 드 몽포르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사람 모두 푸아티에의 흑태자 궁정을 찾았지만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달인 5월, 흑태자는 앙굴렘에서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피에르 1세를 맞이하고 토너먼트를 열었다. 피에르 1세는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흑태자는 당시 상황을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해 여름, 알브레 영주는 파리에 있었고 다른 가스코뉴 영주들은 노르망디에서 나바라 군과 싸우고 있었다. 동시에 브르타뉴에서는 중재 실패 후 공작위를 둘러싼 내전(브르타뉴 계승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다. 흑태자는 장 드 몽포르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존 챈더스에게 병력을 주어 파견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 측이 승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 잉글랜드인과 가스코뉴인으로 구성된 용병단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정황상 흑태자가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6] 1364년 11월 14일, 에드워드 3세는 약탈을 중단시키기 위해 흑태자를 소환하기도 했다.[137]
흑태자가 아키텐으로 돌아온 직후, 약 6천 명의 용병이 아라곤 왕국을 거쳐 아키텐에 도착했다. 이들은 흑태자가 약속한 급료 지급을 요구하며 아키텐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흑태자가 용병 단장들에게 아키텐을 떠날 것을 명령하자, 이들은 루아르 강을 건너 프랑스 영토를 약탈하여 샤를 5세의 분노를 샀다.
한편, 흑태자는 제1차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하여 카스티야 왕국의 페드로 1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모았다. 이때 알브레 영주는 1천 명의 장창병을 이끌고 합류하려 했으나, 흑태자는 1366년 12월 8일 편지를 보내 2백 명만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이는 알브레 영주의 삼촌인 아르마냐크 백작과의 과거 악연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지만[135], 더 중요한 이유는 흑태자가 알브레 영주 휘하 병력의 급여를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알브레 영주가 프랑스 여왕의 자매와 혼담을 진행하는 것을 흑태자는 불편하게 여겼다. 당시 병에 시달리던 흑태자는 알브레 가문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 5세는 알브레 가문이 프랑스 편에 서면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1367년, 흑태자는 페드로 1세를 도와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프랑스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원정에서 흑태자는 이질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고, 페드로 1세가 약속한 원정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 막대한 빚만 지게 되었다. 결국 페드로 1세는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패사하고 카스티야는 프랑스파인 엔리케 2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아키텐은 서쪽에서 카스티야 해군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90][91]
막대한 전쟁 비용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흑태자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보르도로 돌아온 흑태자는 의회를 소집하여 향후 5년간 가구당 연간 10 솔리두스의 노세(爐稅, 화로에 부과하는 세금)를 징수하기로 결정하고, 이 법은 1368년 1월 25일에 공포되었다. 아키텐의 대법관이었던 존 헤어월은 니오르에서 회합을 열고 새로 제정된 세법을 받아들이도록 귀족들을 설득하였다. 프아투, 생토뉴, 리무쟁, 루에르그의 남작들은 동의하였으나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피에르-레이몽의 백작들과 알브레의 영주는 이를 거부하고 6월 20일과 10월 25일 프랑스 국왕을 자신들의 가장 높은 주군이라 부르며 흑태자의 세금에 대한 불만을 전했다.[149] 이 과정에서 흑태자의 오랜 친구였던 챈더스마저 세금 정책에 강력히 항의하며 직위를 사임하고 자신의 노르망디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샤를 5세는 이 상황을 명분 삼아 1369년 1월 25일 흑태자에게 사신을 보내 개인으로서 파리로 출두해 재판을 받으라고 포고하였다. 흑태자는 "우리는 기꺼이 프랑스 국왕 앞에 출두할 것이다. 우리의 헬멧과 우리의 머리, 그리고 6천의 군사와 함께"라고 답변하였다. 그는 사신을 붙잡아두고 페리고르 백작을 비롯한 샤를 5세에게 청원한 귀족들에게 복수를 하여 많은 병사들을 죽였다. 흑태자는 아직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지만 챈도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는 사이에도 흑태자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는커녕 말조차 탈 수 없는 상태였다. 1367년 3월 이후 이때까지 9백개의 마을과 성들, 그리고 여러 영지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150]

흑태자는 상황 악화에 대해 부왕에게 경고하였으나 부왕 에드워드는 신통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기록을 살피면 부왕은 흑태자의 권력을 질투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369년 4월 전쟁이 선포되었다. 부왕 에드워드는 흑태자를 지원하기 위해 캠브리지와 펨브로크의 백작을 보냈고 오랫동안 측근으로 두었던 로버트 놀레스도 파견하였다. 전쟁은 혼전 양상을 보였고 잉글랜드군은 차츰 아키텐 영토를 지키는 것도 벅찬 상태가 되었다.
1370년 1월 1일 흑태자의 친구 챈도스가 전사하였고 많은 병력을 잃었다. 가스코뉴 영주들을 달랠 전리품이 바닥나자[151] 흑태자는 자신의 직할지만을 간신히 방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사이 흑태자의 동생 곤트의 존은 잉글랜드에서 흑태자에 대항하여 파벌을 형성하였다. 흑태자를 지원하러 간 여름 무렵 존은 거의 에드워드를 대신하여 태자가 된 듯 행동하였다.
그 해 봄 샤를 5세는 두 개의 대규모 군대를 모아 아키텐을 침공하였다. 둘은 양갈래로 진군하여 앙굴렘의 흑태자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흑태자는 병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었고[152] 많은 마을들이 프랑스군 수중에 떨어졌다. 흑태자가 신뢰하였던 리모주의 주교는 도시가 포위되자 항복하였다.[153] 리모주를 잃은 후 흑태자는 코냐크에 4천의 병사를 집결시켰지만 그의 병세는 여전히 말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흑태자의 군대는 리모주를 함락 시킬 수 있었다.[154]
리모주 함락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흑태자는 항복한 주교에게는 목숨을 살려주었으나, 도시의 남성 주민 3천 명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154] 이는 오랫동안 흑태자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프루아사르의 기록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실제 학살된 인원은 약 3백여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155]
흑태자는 코냐크로 귀환한 뒤 병세가 악화되었고 더 이상 지휘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앙굴램을 거쳐 보르도로 퇴각하였다.
4. 2. 스페인 원정 (1367년)
1365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용병대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페드로 1세를 몰아내고 그의 이복형제인 엔리케 2세를 왕위에 앉혔다.[56] 페드로 1세는 에드워드 3세와 동맹 관계였으므로,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페드로 1세는 바욘으로 망명했고, 흑태자는 캅브레통에서 그를 만나 보르도까지 동행하며 보호했다.
흑태자 휘하의 영국 및 가스코뉴 귀족 상당수는 페드로 1세를 돕는 것에 반대했지만, 흑태자는 이복형제가 정통 계승자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지원을 결정했다. 그는 어떤 군주도 왕권에 대한 이러한 도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결정을 관철했다. 페드로 1세는 복위 시 흑태자의 아들에게 갈리시아 왕국의 왕위를 주고, 막대한 재물을 나누겠다고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보르도 의회는 에드워드 3세에게 조언을 구했고, 국왕은 페드로 지원 여부가 흑태자의 권한이라는 답신을 보냈다. 흑태자는 이 답신을 의회에서 낭독했고, 귀족들은 봉급 지급이 보장된다는 조건으로 지원에 동의했다. 흑태자는 페드로 1세에게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었다.
흑태자와 페드로 1세는 바욘에서 카를로스 2세와 만나 군대의 나바라 영토 통과를 허락받았다. 페드로 1세는 그 대가로 56,000 플로린을 지불하기로 했으며, 이 돈 역시 흑태자가 빌려주었다. 1366년 9월 23일, 이들은 도르도뉴 강변의 리부른에서 리부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페드로 1세는 빚 상환의 담보로 비스카야 지방과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의 영토 및 요새를 흑태자에게 넘기고, 6개월치 군대 임금으로 550,000 플로린을 특정일까지 지급하며,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 세 딸을 인질로 보내기로 약속했다.[53]
흑태자는 아버지로부터 장 2세의 몸값 일부인 10만 프랑크를 지원받고,[54] 자신의 은식기까지 팔아 군인들의 급여를 마련했다.[55] 군대가 집결하는 동안 그는 앙굴렘에 머물렀고, 그 사이 보르도에서 아내 켄트의 조안이 차남 리처드 2세(훗날 잉글랜드 국왕)를 출산했다.

1367년 2월 초, 흑태자는 보르도를 떠나 닥스에서 군대와 합류했다. 그의 동생인 랭커스터 공작 존이 이끄는 기사 400명과 궁수 400명의 증원군도 도착했다. 흑태자는 생장피에드포르를 거쳐 피레네 산맥의 론세스바예스를 넘어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로 진군했다. 이때 휴 칼벨리를 비롯한 엔리케 2세 휘하의 영국 및 가스코뉴 용병대 지휘관들은 흑태자가 페드로 1세를 위해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엔리케를 떠나 "자신들의 본래 주군"인 흑태자에게 합류했다.[56] 팜플로나에서 흑태자는 엔리케 2세의 도전장을 받았다.[57]
흑태자는 바스크 지방으로 진군하여 살바티에라의 성문을 열게 하고 비토리아를 점령한 뒤 부르고스로 향했다. 그러나 선발대가 엔리케 군에게 패배하면서, 엔리케가 에브로 강 유역의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와 잘디아란 산 등 주요 거점을 이미 확보했음을 알게 되었다. 직선 경로를 통한 부르고스 진격이 어려워지자, 흑태자는 에브로 강을 건너 로그로뇨 성벽 아래에 진을 쳤다. 이동 중 군대는 습하고 바람 부는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367년 3월 30일, 흑태자는 엔리케의 도전에 답신을 보냈다. 4월 2일, 그는 로그로뇨를 떠나 라리오하 지방의 나바레테로 향했다. 엔리케와 그의 프랑스 동맹군은 나헤라에 주둔하여 두 군대는 서로 가까워졌다. 엔리케는 편지를 통해 페드로 1세가 폭군이며 무고한 피를 많이 흘렸다고 비난하며 협상을 시도하는 듯 보였으나, 흑태자는 페드로가 처형한 자들은 모두 반역자였다고 답했다.
4월 3일 아침, 흑태자의 군대는 나바레테에서 나헤라 전투를 위해 진군하여 모두 말에서 내렸다. 선봉대는 랭커스터 공작, 존 샨도스, 칼벨리 등이 이끄는 3천 명의 영국 및 브르타뉴 기사였고, 우익은 아르마냐크 백작 등 가스코뉴 영주들, 좌익은 독일 용병과 뷔슈 영주 장 3세, 푸아 백작 등이 이끄는 가스코뉴군이 맡았다. 흑태자는 3천 명의 창병으로 구성된 본대(후위)를 직접 지휘했으며, 페드로 1세와 폐위된 마요르카 왕국의 하우메 4세가 소규모 병력과 함께 그의 우측에 자리했다.
전투 시작 전, 흑태자는 신에게 부당하게 쫓겨난 왕을 위해 싸우니 승리를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페드로 1세는 "진격하라, 깃발을! 신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 신께서 우리의 정의를 지켜주시리라!"고 외쳤다. 카스티야 기사들이 돌격했지만 엔리케 군의 양익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가스코뉴 영주들이 측면을 공격했고, 흑태자가 본대를 투입하면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흑태자는 "기사도의 꽃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사"라는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였다. 결국 엔리케 군의 전열이 무너졌고, 엔리케는 전장에서 도주했다.[58]
전투 후 흑태자는 페드로 1세에게 포로로 잡힌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했다. 페드로 1세는 이를 수락했지만, 악명 높은 반역자 한 명은 즉시 처형했고 다음 날 두 명을 더 처형했다. 포로 중에는 프랑스 원수 아르노 도드레헴도 있었다. 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흑태자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풀려난 인물이었다. 흑태자는 그를 보자 "거짓말쟁이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도드레헴은 이를 부인하며 기사단 재판을 요구했고, 흑태자는 영국, 가스코뉴, 브르타뉴 기사 각 4명씩 총 12명으로 배심원단을 구성하여 재판을 열었다. 도드레헴은 자신이 흑태자가 아닌 페드로 1세와 싸웠을 뿐이며 맹세를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배심원단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판결을 내렸다.[59]
1367년 4월 5일, 흑태자와 페드로 1세는 부르고스에 입성하여 부활절을 지냈다. 그러나 흑태자는 군대를 성 밖에 주둔시켰다. 페드로 1세는 약속했던 막대한 보상금은커녕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고, 흑태자가 얻은 것은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리부른 조약의 채무 이행을 다시 한번 약속받은 것뿐이었다.[60] 이때부터 흑태자는 동맹자인 페드로 1세의 배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페드로 1세는 빚을 갚을 의사가 없어 보였고, 흑태자가 담보로 약속받은 비스카야 지역 인도를 요구하자 그 지방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는 부르고스에서는 돈을 구할 수 없다며, 흑태자에게 바야돌리드에 머물면 자신이 세비야로 가서 돈을 보내겠다고 설득했다.
흑태자는 페드로의 말을 믿고 무더운 날씨 속에서 바야돌리드에 머물며 돈을 기다렸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이질을 비롯한 각종 질병과 식량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원정에 참여한 영국인 5명 중 1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61] 흑태자 자신도 이때 심각한 병(이질 혹은 페스트로 추정, 일각에서는 독살설 제기[62])에 걸려 이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식량과 음료 부족은 심각했고,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은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63]
한편, 도주했던 엔리케 2세는 아키텐을 침공하여 바녜르를 함락시키는 등 반격을 개시했다.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는 다시 변심하여 흑태자 군대의 통과를 거부할 움직임을 보였고, 흑태자는 아라곤 왕국의 페로 4세와 교섭하여 통행로를 확보해야 했다. 아라곤 국왕이 통과를 허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카를로스 2세는 마지못해 나바라 통과를 허락했다. 결국 흑태자는 1367년 9월 초, 막대한 빚과 병든 몸, 그리고 큰 손실을 입은 군대를 이끌고 보르도로 귀환했다. 이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막대한 비용과 병력 손실, 그리고 흑태자 자신의 건강 악화로 이어져 정치적, 재정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5. 아키텐 전쟁과 잉글랜드 귀환
스페인 원정에서 돌아온 흑태자는 곧바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약속된 원정 비용을 받지 못했고,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아키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서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49] 또한, 군대 규모 조정 문제, 급여 지급 문제, 그리고 알브레 영주의 혼담에 대한 흑태자의 태도로 인해 아키텐의 주요 귀족들과의 관계가 틀어졌다.[149]
막대한 전쟁 비용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흑태자는 1368년 아키텐에 새로운 세금인 노세(爐稅)를 부과했다. 이는 아르마냐크 백작, 페리고르 백작, 알브레 영주 등 주요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흑태자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149][64] 샤를 5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1369년 1월, 흑태자에게 파리로 출두하여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했으나, 흑태자는 "6만 명의 군사와 함께 가겠다"고 답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99]
이 사건을 계기로 1369년 백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흑태자는 스페인 원정에서 얻은 병(수종으로 추정)이 악화되어 말을 타거나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 어려운 상태였다.[99]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70년 1월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유능한 지휘관이었던 존 챈도스가 전사했고[99], 많은 영지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는 등 전황은 잉글랜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150] 같은 해, 흑태자가 신뢰했던 주교가 리모주를 프랑스군에 넘겨주자[153], 격분한 흑태자는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정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주민 학살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학살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54][155]
리모주 함락 이후 흑태자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때마침 그의 장남 앙굴램의 에드워드가 사망하는 비극까지 겹쳤다.[100] 결국 흑태자는 1371년 잉글랜드로 귀환을 결정하고, 동생 곤트의 존에게 아키텐 통치를 맡겼다.[156]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1372년에는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아키텐 공작과 가스코뉴 영주 지위를 공식적으로 사임했다.[158] 말년에는 국정 개혁을 목표로 한 선의회(1376년)를 지지하며 동생 랭커스터 공작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74], 병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376년 6월 8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사망했다.[76] 그의 유해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5. 1. 아키텐 전쟁 (1369년 ~ 1370년)
카스티야 왕국 원정에서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페드로 1세로부터 약속된 전쟁 비용을 받지 못한 흑태자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 더해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 역시 재정난을 부추겼다. 보르도로 돌아온 흑태자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368년 1월 아키텐 공국의 삼부회를 소집하여 향후 5년간 가구당 연간 10 솔리두스의 노세(푸아주)를 부과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1월 25일 이를 공포했다.[149][99] 푸아투, 생토뉴, 리무쟁, 루에르그의 남작들은 이 세금에 동의했지만, 아르마냐크 백작, 페리고르 백작 등 고위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1369년 6월 20일과 10월 25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를 자신들의 최고 주군으로 인정하며 흑태자의 과도한 세금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149][64] 심지어 흑태자의 오랜 친구이자 충실한 부하였던 존 챈도스 경마저 이 세금 부과에 강력히 반대하며 자신의 영지인 노르망디로 돌아가 버렸다.[99]샤를 5세는 아키텐 귀족들의 호소를 명분 삼아 1369년 1월 25일, 흑태자에게 사신을 보내 파리로 출두하여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흑태자는 "우리는 기꺼이 프랑스 국왕 앞에 출두할 것이다. 우리의 투구와 머리, 그리고 6만 명의 군사와 함께"라고 답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99] 그는 샤를 5세의 사신들을 투옥하고, 프랑스 왕에게 호소한 페리고르 백작 등에게 군대를 보내 보복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1369년 4월, 샤를 5세는 아키텐 공국의 몰수를 선언하며 백년 전쟁이 재개되었다.[92][93][99] 흑태자는 이미 부왕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의 위협을 경고했지만, 잉글랜드 궁정 내의 견제 세력 때문인지 그의 경고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에드워드 3세는 케임브리지 백작과 펨브로크 백작, 그리고 로버트 놀스 경을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전쟁은 잉글랜드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흑태자는 나헤라 전투 이후 얻은 병(수종으로 추정)이 악화되어 직접 말을 타고 군대를 지휘할 수 없는 상태였다.[99] 1369년 3월까지 이미 900개가 넘는 성과 마을이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150][65]
1370년 1월 1일, 흑태자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자 친구였던 존 챈도스가 전사하면서 잉글랜드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99] 흑태자는 가스코뉴 귀족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다.[151][66]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그의 동생 곤트의 존이 흑태자에 반대하는 세력을 형성하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370년 여름, 곤트의 존이 지원군을 이끌고 아키텐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마치 흑태자를 대신할 듯한 태도를 보였다.[99]
그 해 봄, 샤를 5세는 앙주 공작 루이와 베리 공작 존이 이끄는 두 개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아키텐을 침공했다. 프랑스군은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앙굴렘에 있는 흑태자를 압박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152][67] 흑태자는 코냐크에서 군대를 모아 대응하려 했지만, 그가 신뢰했던 리모주의 주교 장 드 크로가 도시를 프랑스군에게 넘겨주었다.[153][68]
리모주의 배신에 격분한 흑태자는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도시를 되찾고 배신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68] 그는 병 때문에 가마에 실려 이동하면서도 약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리모주로 향했다. 리모주 공방전 끝에 1370년 9월 19일, 잉글랜드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함락시켰다.[154][69] 당시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흑태자가 리모주 함락 후 주민 3,000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했으나,[154][69] 현대의 연구자들은 실제 사망자 수를 수비대와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300명 정도로 추정하며 프루아사르의 기록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155][70] 리모주 주교는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곤트의 존의 만류로 목숨을 건졌다.[69]
리모주 함락 후 흑태자는 코냐크로 돌아왔지만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앙굴렘을 거쳐 보르도로 퇴각했다.[100]
5. 2. 잉글랜드 귀환과 죽음 (1371년 ~ 1376년)

1371년, 흑태자의 장남 앙굴램의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그는 큰 슬픔에 잠겼고 병세도 악화되었다.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동생인 랭커스터 공에게 아키텐 통치를 맡겼다. 1371년 1월 초 사우샘프턴에 상륙한 흑태자는 윈저 성에서 아버지 에드워드 3세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부왕이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진행하던 영지 분할 조약(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 관련 내용 포함)을 중단시키도록 설득했는데, 이는 샤를 5세가 요구한 영토 할양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6][71] 이후 흑태자는 자신의 영지인 버크햄스테드로 돌아갔으나, 그의 병세는 이미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흑태자가 잉글랜드로 귀환할 당시 플랜태저넷가 내부에서는 이미 분열의 조짐이 보였고, 특히 랭커스터가는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157] 잉글랜드에서 흑태자는 반교회적이고 랭커스터파의 영향력 확대에 반대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성직자들의 신뢰를 받았다. 1371년 5월 2일, 그는 캔터베리 공의회에 참석하여 성직자들에게 상당한 규모의 기부금을 내도록 설득했다.[72]
건강이 잠시 호전되자 1372년 8월, 부왕과 함께 프랑스의 투아르 구원을 위해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으나, 거센 역풍으로 인해 프랑스 해안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같은 해 10월 6일, 흑태자는 아키텐 공작과 가스코뉴 영주 지위를 사임했는데, 이는 영지의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 달 뒤 아키텐 의회는 그의 사임을 승인했고, 기사단도 해체되었다.[158][73] 의회 이후 그는 상인 대표들을 만나 상선 보호를 위한 관세를 1년 더 연장하도록 설득했다.[73]
1374년 성령강림절 이후, 흑태자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고위 성직자와 귀족 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피렌체에 대항하는 것을 돕기 위한 보조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교황의 서신이 낭독되자 일부 주교들은 교황의 영적 군주로서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흑태자는 왕실의 입장을 강하게 옹호하며 이에 반박했다.
1376년 4월 28일, 국정 개혁을 목표로 한 "선의회"(Good Parliament)가 소집되었을 때 흑태자의 병세는 다시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행정부의 부패와 남용을 비판하는 하원의 주요 지지자로 여겨졌다. 특히 동생 랭커스터 공작의 커져가는 권력이 자신의 아들 리처드의 왕위 계승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위컴의 윌리엄 등과 협력하여 랭커스터 공작과 그를 지지하는 궁정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74] 당시 막대한 사기 혐의로 고발된 왕의 재정 담당관 리처드 라이언스가 흑태자에게 1000GBP 상당의 뇌물을 보내왔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75]
선의회 시기부터 흑태자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그는 이질로 추정되는 병으로 인해 극심한 쇠약과 기절 상태를 반복했다.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여 자신의 하인들에게 선물을 남기고, 아버지 에드워드 3세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자신의 빚을 신속히 갚아주고 아들 리처드를 보호해 줄 것을 간청했다.
흑태자는 1376년 6월 8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사망했다.[76] 임종 직전, 그는 뱅고르 주교 앞에서 신과 자신이 해를 끼친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신앙심 깊은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장례식은 9월 29일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묘의 디자인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결정되었다. 묘 위에는 성삼위일체를 묘사한 그의 청동상이 놓여 있고, 그의 장례 문장(문장, 외투, 투구, 방패, 건틀릿 등)이 걸려 있었다. 현재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원본 유물들은 대성당 내 유리 진열장에 보관되어 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네가 지금 있는 모습, 내가 한때 그러했네.
내가 지금 있는 모습, 네가 그러할 것이네.
숨 쉴 동안은 죽음의 시간을 생각지 않았네.
나는 땅에서 큰 부를 누렸네.
땅, 집, 큰 보물, 말, 돈, 그리고 금.
그러나 이제 나는 비참한 포로가 되었네,
깊은 땅 속에, 보라, 여기 누워 있네.
나의 큰 아름다움은 모두 사라졌네,
나의 살은 뼈만 남았네.
6. 결혼과 가족
1361년 10월 10일, 에드워드는 31세의 나이에 그의 사촌인 켄트의 조안(1328~1385)과 결혼하였다.[132] 조안은 에드워드 1세의 둘째 부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제1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함께 자랐으며, 당시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는 드물게 사랑 결혼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장 프루아사르는 이 결혼이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였는데,[132] 이는 조안이 이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몽태규 및 토머스 홀랜드와 두 차례 결혼했고 혼인의 유효성에 대한 재판까지 치렀던 전력 때문에 반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흑태자가 결혼을 강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혼 후 부부는 하트퍼드셔의 버컴스테드 성에 거처를 마련했다. 조안은 당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칭송받았으며, 가터 훈장 창설 설화 속 솔즈베리 백작 부인이 바로 조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에드워드와 조안 사이에는 아키텐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 앙굴렘의 에드워드: 1365년 1월 27일 앙굴렘에서 태어났으나,[77][159] 1371년 1월 어려서 사망하여 런던 오스틴 수도원 교회에 매장되었다.[78][160]
- 리처드 2세: 아버지 에드워드가 일찍 사망함에 따라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조안은 흑태자와 결혼하기 전 제1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흑태자는 이들의 계부가 되었다.
- 토머스 홀랜드: 제2대 켄트 백작.
- 존 홀랜드: 제1대 엑서터 공작.
에드워드는 결혼 전에 몇 명의 서자를 두었다.
- 에디스 드 윌레스포드(Edith de Willesford, 1385년 이후 사망) 사이에서:
- * 로저 클라렌던 경(Sir Roger Clarendon, 1352년경 – 1402년 처형됨)
- 어머니를 알 수 없는 자녀:
- * 존 사운더스 경(Sir John Sounders)
- * 그 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녀들
7. 흑태자라는 호칭
에드워드를 '흑태자'(Black Prince)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사후 약 165년이 지난 16세기부터이다. 최초 기록은 1530년대 고증학자 존 릴랜드가 라틴어 메모에서 'Edwardi Principis cog: Nigrila'(에드워드 왕자, 별명: 흑태자)라고 언급한 것이다.[161][79] 릴랜드는 이전 기록을 요약하며 이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가 참고한 원본 문헌에는 '흑태자'라는 호칭이 없다.
릴랜드 이후 16세기 여러 작가들이 에드워드를 흑태자로 불렀다. 로저 애스컴(1545년), 리처드 그래프턴(1569년), 래피얼 홀린셰드(1577년) 등이 있으며, 특히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희곡 《리처드 2세》(1595년경)와 《헨리 5세》(1599년경)에서 이 호칭을 사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흑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며,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에드워드가 검은색 갑옷이나 방패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실제로 그의 '평화를 위한 방패' 문장은 검은색 바탕에 은색 타조 깃털 세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역사가 존 하비는 에드워드가 크레시 전투에서 갈색 강철로 만든 검은 갑옷을 입었다는 프랑스어 기록이 있다는 불확실한 증거를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평소 검은 갑옷을 즐겨 입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며, 역사가 리처드 바버는 15세기 연극에서 왕자를 검은 갑옷으로 묘사하는 전통이 생겨났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둘째는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보인 그의 잔혹한 행위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다. 에드워드의 프랑스 약탈과 학살 기록은 잘 남아 있으며, 당시 프랑스 군인 필립 드 메지에르는 에드워드를 기독교 세계를 어지럽힌 가장 큰 '검은 멧돼지'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는 군대와 함께 지나간 'L'Homme Noir|롬 누아르프랑스어'(검은 남자)에 대한 구전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17세기 영국 역사가 존 스피드는 흑태자라는 명칭이 '그의 갑옷 색 때문이 아니라 전투에서의 두려운 행위 때문'이라고 기록했고, 토마스 풀러 역시 '그의 안색이 아니라 두려운 행위 때문에' 명명되었다고 썼다.[80]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서도 프랑스 왕이 '그 검은 이름, 에드워드, 웨일스의 흑태자'라고 언급하는 대사가 나온다. 다만 프랑스에서 유래한 부정적인 별명이 어떻게 영국으로 건너와 널리 쓰이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깃털 문양 바탕색이 검정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대에 덧붙여진 설명으로 신빙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에드워드는 생전에 '흑태자'로 불린 적이 없으며, 이 별명은 사후 16세기 이후 만들어져 여러 작가들에 의해 퍼지면서 굳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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