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폰수 2세 (포르투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폰수 2세는 1211년부터 1223년까지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다. 그는 선왕들과 달리 군사적 활동보다는 내정에 집중하여, 형제자매들과의 왕위 계승 분쟁을 해결하고 성문법 제정을 추진했다. 또한,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다가 교황에게 파문당했으며, 말년에 파문이 해제되지 않은 채 사망했다. 아폰수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우라카와 결혼하여 산슈 2세, 아폰수 3세 등을 낳았고, 두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85년 출생 - 퇴레게네 카툰
    오고타이 칸의 아내인 퇴레게네 카툰은 오고타이 칸 사후 섭정을 맡아 제국을 다스리며 아들 귀위크를 칸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권력 투쟁과 내부 갈등을 심화시켜 몽골 제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185년 출생 - 미하일 프세볼로도비치
    미하일 프세볼로도비치는 프세볼로트 4세의 아들이자 키예프 대공국의 여러 공국을 다스린 인물로,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가 함락된 후 킵차크 칸국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동방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 13세기 포르투갈 사람 - 안토니오 디 파도바
    안토니오 디 파도바는 13세기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회 수사이자 가톨릭 성인, 교회학자로, 웅변과 성경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 13세기 포르투갈 사람 - 아폰수 3세 (포르투갈)
    아폰수 3세는 1248년부터 1279년까지 포르투갈을 통치한 국왕으로, 평민의 정치 참여를 이끌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수도를 리스본으로 이전하고 카스티야와의 국경을 확정했다.
아폰수 2세 (포르투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폰수 2세, 카스티야 원고
아폰수 2세, 카스티야 원고 "국왕 연대기 개요", 1312-1325년경
칭호포르투갈의 왕
재위 기간1211년 3월 26일 ~ 1223년 3월 25일
이전 통치자산슈 1세
다음 통치자산슈 2세
본명아폰수 산체스
출생일1185년 4월 23일
출생지코임브라, 포르투갈 왕국
사망일1223년 3월 25일 (37세)
사망지코임브라, 포르투갈 왕국
매장지알코바사 수도원
왕가포르투갈 부르고뉴 가문
왕조부르고뉴 왕조
아버지산슈 1세
어머니아라곤의 둘스
배우자카스티야의 우라카 (1206년 결혼, 1220년 사망)
자녀산슈 2세
아폰수 3세
레오노르, 덴마크 왕비
세르파의 영주 페르난두
로마자 표기Afonso II
결혼과 자손
자녀 목록산슈 2세
아폰수 3세
레오노르, 덴마크 왕비
세르파의 영주 페르난두

2. 재위

아폰수 2세는 아버지 산슈 1세와 할아버지 아폰수 1세와는 달리 군사적인 문제보다는 내정에 더 집중했다. 즉위 초, 형제자매들과의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친족들을 추방하여 왕권을 강화했다.[14] 소에이루 비에가스 주교가 알카세르 두 살을 정복하는 등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주도로 무어인들로부터 일부 도시를 탈환하기도 했다. 1217년 9월에는 홀란트 백작빌헬름 1세가 지휘하는 제5차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알카세르두살을 획득했지만, 이것이 아폰수 2세 치세에서 레콩키스타로 얻은 유일한 성과였다.[7] 1212년의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는 레온 알폰소 9세 (사촌, 누나 테레사의 전 남편)와의 전쟁으로 인해 참전하지 않았지만, 많은 신하들이 카스티야 알폰소 8세에게 합류했다.[6]

아폰수 2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영토 확장보다는 국내 안정에 주력했다. 그는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주로 사유재산, 민법, 화폐 주조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 밖의 유럽 왕국들에 대표단을 보내 우호적인 경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성직자들과의 대립으로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파문을 당했고,[4] 교회에 보상할 것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못하고 1223년에 사망했다.[4] 그의 유해는 코임브라의 산타 크루즈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가, 후에 알코바사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15]

3. 정책

13세기 필사본에 묘사된 아폰수 2세


아폰수 2세는 이전 국왕들과는 다른 통치 방식을 보였다. 아버지 산슈 1세와 할아버지 아폰수 1세는 주로 카스티야 왕국이나 남쪽 무어인과의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아폰수 2세는 영토 확장을 추구하지 않고 카스티야와의 평화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주교 소에이루 비에가스가 알카세르 두 살을 정복하는 등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주도로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아폰수 2세는 국가 행정 기관을 설치하고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사유재산, 민법, 화폐 주조 등에 관한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 밖의 유럽 왕국들에 대표단을 보내 우호적인 경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그 재산 일부를 국익에 활용하려 했던 아폰수 2세는 교황 호노리오 3세와 갈등을 빚어 파문당하기도 했으나, 곧 사망하여 교회와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14]

3. 1. 정치 및 사회

아폰수 2세는 아버지 산슈 1세와 할아버지 아폰수 1세와 달리 군사 문제보다 내정에 집중했다. 그는 국가 행정을 확립하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으며, 사유재산, 민법, 화폐 주조 등과 관련된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했다.[9]

측근, 관리, 왕족으로 구성된 국왕 자문 기관인 클리아(Curia)가 결성되었으며, 중요한 사안을 논의할 때는 성직자, 유력 귀족, 기사단장이 소집되었다. 이 모임은 훗날 코르테스의 기원이 되었다.[9][10]

레콩키스타로 영토가 확장되고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여 하층 농민 계급의 유동성이 증가했고, 그 결과 농노제가 점차 소멸했다.[11]

3. 2. 검지 (토지 조사)

아폰수 2세는 성직자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교회 재산의 일부를 국고로 환수하려 시도했다.[4] 그는 종교 단체의 토지 구매를 금지했으나, 개인 성직자의 토지 구매는 허용하여 정책의 효과가 제한적이었다.[12]

토지 소유 귀족들에게는 토지 등기 문서와 왕의 특권 문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국새 상서원에서 확인하도록 했다.[12] 1220년에는 왕령 검찰제(인키리상)를 실시하여 미뉴 지방의 왕권 침해 사례를 조사했다. 1216년부터 상속 영지 안도 제도를 시행하여 왕권의 통제를 강화했다.[5][13]

그러나 아폰수 2세 사후, 어린 산슈 2세가 즉위하면서 검지 정책은 중단되었다.[12]

4. 외교 관계

아폰수 2세는 이베리아 반도 밖의 유럽 왕국들에 대표단을 보내 이들과 우호적인 통상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14]

교황과의 관계는 항상 까다로운 문제였다. 포르투갈의 독립을 교황으로부터 공인받기 위해, 그의 조부 아폰수 1세는 교회에 엄청난 수의 특권들을 제정해야만 했다. 이 특권들은 결국 나라 안에 나라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포르투갈의 입지가 확고해지면서, 아폰수 2세는 성직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산 일부를 국가 주도 공익 사업에 이용하려 하였다. 이는 교황과 포르투갈 간의 심각한 외교 분쟁으로 이어졌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를 파문했고, 아폰수 2세는 교회에 보상하겠다고 약조했지만, 진지한 시도를 하기도 전에 1223년 3월 25일 코임브라에서 사망했다.[14]

5. 가족

1206년 또는 1208년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레온의 알폰소 6세의 후손이기도 하다.[3] 슬하에 산슈 2세, 아폰수 3세 등 4남 1녀와 사생아 2명을 두었다.

5. 1. 자녀

이름출생사망비고
산슈 2세1207년 9월 8일1248년 1월 4일포르투갈 왕[1][2]
아폰수 3세1210년 5월 5일1279년 2월 16일포르투갈 왕[1][2]
레오노르1211년1231년덴마크 왕비[1][2]
페르난두1218년1246년세르파 영주[1][2]
비센테1219년요절



아폰수 2세는 혼외 자식으로 두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2]


  • 주앙 아폰수 (1234년 10월 9일 사망) - 알코바사 수도원에 매장[2]
  • 페드루 아폰수 (1249년 이후 사망) - 형제인 아폰수 3세와 함께 1249년 파루 정복에 동행했다. 콘스탄사 페르스라는 사생녀가 있었다.[2]

5. 2. 사생아


  • 주앙 아폰수 (1234년 10월 9일 사망): 알코바사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 페드루 아폰수 (1249년 이후 사망): 1249년 아폰수 3세와 함께 파루 정복에 참여하였다. 콘스탄사 페르스(Constança Peres)라는 사생아 딸이 있었다.

6. 평가

아폰수 2세는 군사적 업적보다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쓴 왕으로 평가된다. 아버지 산슈 1세와 할아버지 아폰수 1세카스티야 왕국이나 무어인과의 군사적 문제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아폰수 2세는 영토 확장보다는 내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14]

그는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하여 사유재산, 민법, 화폐 주조 등과 관련된 법률을 마련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 밖의 유럽 왕국들과 우호적인 경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14]

하지만 아폰수 2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교회 재산을 국가를 위해 활용하려 했기 때문에 교황 호노리오 3세와 갈등을 빚었다. 이로 인해 파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약속했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1223년에 사망했다.[14]
한국사 비교:고려 광종의 개혁 정치와 유사한 점이 많다. 강력한 왕권 확립을 추구했으나, 호족(귀족, 성직자) 세력의 반발에 직면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정치적 관점:(더불어민주당 관점) 아폰수 2세의 정책은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의 권익 보호에는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백과사전 Alphonso s.v. Alphonso II.
[2] 웹사이트 D. Afonso II http://www.mosteiroa[...] 2017-02-05
[3] Find a Grave
[4] 백과사전 Alphonso 1911 Encyclopædia Britannica
[5] 서적 합田
[6] 서적 ローマックス
[7] 서적 ローマックス, マルケス
[8] 서적 マルケス
[9] 서적 マルケス
[10] 서적 安部
[11] 서적 安部
[12] 서적 マルケス
[13] 서적 マルケス
[14] 백과사전 Alphonso s.v. Alphonso II.
[15] 웹사이트 D. Afonso II http://www.mosteiroa[...] 2017-02-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