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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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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언정은 당나라 말기 위박 번진의 절도사이다. 위주 출신으로, 한간 휘하에서 군교를 거쳐 박주 자사를 지냈다. 882년 하양 번진 함락에 공을 세워 전주 자사로 임명되었고, 883년 한간이 천평군을 공격하는 틈을 타 위주를 점령하여 위박군 장병들의 지지를 받아 절도사가 되었다. 당 희종은 악언정에게 악언정이라는 새 이름을 하사하고, 상서좌복야와 동중서문하평장사의 재상직을 수여했다.

악언정은 교만하고 방자한 성격으로, 백성들을 징집하여 위주 내성을 수축하고 황하 대제방을 재건하는 등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884년 아들 악종훈이 전 재상 왕탁 일행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조정은 황소의 난으로 인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885년에는 소의군 장수 마상을 살해하는 등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888년, 악언정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위박 백성들의 반란으로 악종훈이 도주하고, 악언정은 상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위주에서 벌어진 혼란 속에서 악종훈은 살해되었고, 악언정 또한 처형되어 부자 모두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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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언정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악언정
원어이름樂彦禎
본명악행달(樂行達, 884년 개명)
출생일불명
출생지위주(魏州, 지금의 허베이성 한단 시 다밍 현)
사망일888년
사망지위주
사망 원인사형
국적당나라
경력위박군교(魏博軍校)
위박 마보군도우후(馬步軍都虞候)
박주자사(博州刺史)
전주자사(澶州刺史)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사도(司徒)
직업당나라 말기 군벌,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활동 기간880년대 초반 ~ 888년
소속한간 → 반독립(당 희종)
칭호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칭호 기간883년 ~ 888년
전임자한간
후임자나홍신
종교불교 (888년 은퇴 이후)
자녀아들 악종훈(樂從訓)
부모아버지 악소적(樂少寂)

2. 생애

악행달은 위박 번진의 수도 위주(지금의 허베이성 한단시) 출신으로,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 악소적은 위박 번진의 장교로, 전주(지금의 허난성 안양시), 박주(지금의 산둥성 랴오청시), 패주(지금의 허베이성 싱타이시) 자사를 역임했다.[5] 악행달은 젊은 시절 위박군의 군교(軍校)가 되었고, 한간이 절도사가 된 후 마보군 도우후(馬步軍都虞候)를 거쳐 박주자사가 되었다.[5]

882년, 한간이 하양(河陽, 지금의 허난성 뤄양시) 번진을 일시 점령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전주자사로 임명되었다. 883년, 한간이 천평군(天平軍, 지금의 산둥성 타이안시)을 공격하던 중, 하양절도사 제갈상이 하양을 탈환하자 한간은 주선과 강화하고 하양을 재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악행달은 이 틈을 타 위주를 점령하고, 위박군 장병들의 지지를 받아 한간을 대신하여 절도사가 되었다. 당 희종은 악행달을 유후(留後)로 승인하고, 그해 말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2]

884년, 희종은 악행달에게 '악언정(樂言禎)'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및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재상직을 수여했다.[6][5]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악언정은 교만하고 방자한 성격이었다. 그는 위주 내성(內城) 축조와 황하 제방 재건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그의 아들 악종훈(樂從訓)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5]

같은 해 연말, 전 재상 왕탁이 의창군(義昌軍, 지금의 허베이성 창저우 시) 절도사 부임길에 위박 번진을 지나가던 중, 악종훈이 왕탁 일행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악언정은 이를 도적의 소행으로 보고했으나, 조정은 황소농민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7] 위박 백성들은 왕탁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이후 악종훈을 안 좋게 보았다. 그럼에도 조정은 악언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사도(司徒, 삼공의 하나)의 명예직함을 수여하였다.[5]

885년, 소의군(昭義軍, 지금의 산시성 창즈시)에서 맹방립에 맞선 마상(馬爽)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악언정은 뇌물을 받고 마상을 살해했다.[7]

888년, 악언정의 가혹한 통치와 악종훈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위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악언정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아들 악종훈이 군사를 이끌고 위주로 진격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악종훈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악언정 또한 처형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8]

2. 1. 배경

악행달은 위박 번진의 수도 위주(지금의 허베이성 한단시) 출신으로,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 악소적은 위박 번진의 장교로, 전주(지금의 허난성 안양시), 박주(지금의 산둥성 랴오청시), 패주(지금의 허베이성 싱타이시) 자사를 역임했다.[5] 악행달은 젊은 시절 위박군의 군교(軍校)가 되었고, 한간이 절도사가 된 후 마보군 도우후(馬步軍都虞候)를 거쳐 박주자사가 되었다.[5]

2. 2. 절도사 즉위

882년, 한간이 하양(河陽, 지금의 허난성 뤄양시) 번진을 일시 점령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전주자사로 임명되었다. 883년, 한간이 천평군(天平軍, 지금의 산둥성 타이안시)을 공격하던 중, 하양절도사 제갈상이 하양을 탈환하자 한간은 주선과 강화하고 하양을 재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악행달은 이 틈을 타 위주를 점령하고, 위박군 장병들의 지지를 받아 한간을 대신하여 절도사가 되었다. 당 희종은 악행달을 유후(留後)로 승인하고, 그해 말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2]

2. 3. 절도사로서의 통치와 몰락

884년, 희종은 악행달에게 '악언정(樂言禎)'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및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재상직을 수여했다.[6][5]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악언정은 교만하고 방자한 성격이었다. 그는 위주 내성(內城) 축조와 황하 제방 재건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그의 아들 악종훈(樂從訓)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5]

같은 해 연말, 전 재상 왕탁이 의창군(義昌軍, 지금의 허베이성 창저우 시) 절도사 부임길에 위박 번진을 지나가던 중, 악종훈이 왕탁 일행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악언정은 이를 도적의 소행으로 보고했으나, 조정은 황소농민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7] 위박 백성들은 왕탁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이후 악종훈을 안 좋게 보았다. 그럼에도 조정은 악언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사도(司徒, 삼공의 하나)의 명예직함을 수여하였다.[5]

885년, 소의군(昭義軍, 지금의 산시성 창즈시)에서 맹방립에 맞선 마상(馬爽)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악언정은 뇌물을 받고 마상을 살해했다.[7]

888년, 악언정의 가혹한 통치와 악종훈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위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악언정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아들 악종훈이 군사를 이끌고 위주로 진격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악종훈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악언정 또한 처형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8]

3. 최후

악언정과 악종훈의 시신은 효수되어 위박 군영의 영문 앞에 전시되었다.[4] 이후 나홍신이 위박 절도사를 이어받았고, 주전충에게 사죄하여 위박은 안정을 되찾았다.[4]

4. 평가

악언정은 백성을 수탈하고 권력을 남용한 전형적인 군벌로 평가된다.[3] 그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고, 결국 민란으로 이어져 자신과 아들의 몰락을 초래했다.[3]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6]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7]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8]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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