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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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서성은 중국 진나라 시대에 황제의 관복 등을 담당하는 육상 중 하나에서 기원하여, 한무제 때 중요성이 커지면서 발전했다. 후한 시대에는 상서대, 위·진 시대에는 상서성으로 개칭되었으며, 수·당 시대에는 삼성육부제의 한 축을 담당하며 황제의 명령을 실행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당나라 말부터 형식화되어 북송에서는 폐지되었다가 부활하기도 했으며, 금나라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초기에 폐지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중서문하성에 속한 하부 기관으로, 지방 공문 및 외교 문서를 관장하고 관료 임명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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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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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상서성 (尙書省) |
영어 명칭 | Department of State Affairs |
역할 | 중앙 정부의 행정 기능을 총괄하는 부서 |
역사 | |
기원 | 한나라 |
주요 시기 | 삼국 시대 남북조 시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
설명 | 한나라 시대에 황제를 보좌하는 비서 기관에서 유래 위진남북조 시대에 권한이 강화되어 행정의 중심 기관으로 발전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삼성(三省)의 하나로 기능 송나라 이후 점차 권한이 축소 |
조직 및 기능 | |
주요 기능 | 6부(六部)를 관할하여 국가의 행정 업무를 총괄 인사, 재정, 군사, 예법, 형벌, 공공사업 등 다양한 분야를 관리 |
구성 | 상서령(尙書令): 장관 상서복야(尙書僕射): 차관 좌승(左丞), 우승(右丞): 장관보좌 낭중(郎中), 원외랑(員外郎): 실무 담당 |
관할 6부 (六部) | |
이부 (吏部) | 인사 관리 담당 |
호부 (戶部) | 재정 및 세무 담당 |
예부 (禮部) | 의례, 교육, 외교 담당 |
병부 (兵部) | 군사 담당 |
형부 (刑部) | 사법 및 형벌 담당 |
공부 (工部) | 토목, 건설, 수리 담당 |
한국사에서의 상서성 | |
고려 | 고려 시대에 상서성이 존재했으나, 중서문하성의 하위 기관으로 기능 |
조선 | 조선 시대에는 상서성이 존재하지 않음 |
2. 역사적 배경
상서성은 진나라 시대에 황제의 관모, 의복, 음식 등을 담당하는 육상(六尚) 중 하나에서 유래했다. 한나라 한 무제 때 서기(尙書, 글을 올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 광무제는 상서성을 6부의 수장으로 설치하였다.
조위와 서진(266-420)을 거치면서 상서성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그 기능은 중서성과 내각으로 이관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상서의 직책이 대부분 공석이었다. 원나라 때 상서성은 폐지되었으며, 명나라에서는 다시 설립되지 않았다.
전한의 상서는 소부에 속해 상주를 처리했다. 후한은 상서대를 소부 산하에 설치하고, 장관을 상서령, 부장관을 상서복야로 하였다. 위·진에서 상서성으로 개칭되었다. 남조 송에서는 상서사로 불렸지만, 남조 양에서 상서성으로 돌아왔다.
수·당은 삼성육부제를 확립하여 중서성(조칙 기안) → 문하성 (조칙 심의) → 상서성 (실행) 체계를 만들었다. 금은 해릉왕이 상서성을 황제 직속 기관으로 삼았다. 명에서는 홍무제가 육부를 황제 직속으로 하면서 상서성이 소멸되었다.
고려는 태봉의 제도를 따라 초기에 광평성(廣評省)이라 칭했으나, 982년(성종 1)에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995년에는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개칭하였다.
2. 1. 중국
진나라 시대에 상서성은 황제의 관모, 의복, 음식 등을 담당하는 육상(六尚) 중 하나였다. 한나라 한 무제 때 서기(尙書, 글을 올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 광무제는 6부의 수장으로 상서를 두면서 상서성을 정식으로 설치하였다. 상서성은 영(令)과 복야(僕射)를 수장으로 하고, 좌우 승(丞)과 각 부서마다 6명씩 36명의 시랑(侍郎), 그리고 각 부서마다 3명씩 18명의 영사(令史)의 보조를 받았다. 이 6부는 이후 육부가 되었으며, 각 부서의 수장, 영, 복야를 통틀어 팔좌(八座)라고 불렀다.[3]조위와 서진(266-420)을 거치면서 상서성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그 기능은 중서성과 내각으로 이관되었다. 상서와 부상서의 직책은 고위 대신과 귀족 가문 구성원에게 수여되었고, 그들은 상서성의 행정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 중요성이 감소했다. 양 무제는 귀족만이 서기가 될 수 있도록 했지만, 어느 귀족도 자신의 아들을 그런 낮은 직위에 임명하려 하지 않았다. 오호 십육국 시대와 북조의 상서성은 남조와 유사하게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선비족과 같은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었다.[3]
수나라 (581-618) 시대에는 상서의 직책이 종종 공석이었고, 두 명의 부상서인 고경과 양소가 업무를 처리했다.[4]
당나라 (618-907) 시대에도 상서의 직책은 대부분 공석이었고, 이세민 (재위 626-649) 또는 이괄 (재위 779-804)과 같은 황태자가 임명되었다. 실질적인 기관의 수장이었던 부상서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직책은 좌부상서와 우부상서로 나뉘었고, 좌부상서가 선임이었다. 때때로 부상서의 권력은 재상과 동등했고, 때로는 그를 능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 중기에 재상들이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상서성의 부상서들은 정책 결정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특별한 지위를 가져야 했다. 때로는 상서성의 좌부상서가 내각의 상서와 동일인이기도 했다. 그 이후 상서성은 순수한 행정 기관이 되었다. 정부의 여섯 부서는 공식적으로 육부로 나뉘었고, 각 부는 상서가 이끌었다. 상서성은 구시와 삼사도 담당했다. 상서성은 정부에서 가장 큰 고용주 중 하나였으며 많은 관료들에게 수입과 직책을 제공했다.[5]
원나라 (1271-1368) 시대에 상서성은 폐지되었으며,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1270년, 1287년, 1309년, 1311년에 재도입하려는 시도가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몇 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5] 이후 명나라 시대에는 다시 설립되지 않았다.[6]
전한에는 상서가 소부(황제의 사적 재산을 다루는 부서)에 속해 상주를 처리하는 직책이었다. 황제에게 어떤 상주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본과 부본 두 개의 상표서를 상서에게 제출했고, 상서는 부본을 열람하여 그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를 황제에게 상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선제 시기, 위상은 이러한 고사는 황제의 귀와 눈을 막는 것이라고 하여 폐지할 것을 요구했고, 선제는 위상을 급사중에 임명한 후 이 고사를 폐지시켰다(『한서』위상전).
후한대에는 '''상서대'''로서 소부 산하에 설치되었으며, 장관을 '''상서령'''(일명, 일천 석)·부장관을 '''상서복야'''(두 명, 육백 석)로 하였다(상서령 위에 록상서사라는 비상설 직책이 있다). 그 아래에 상서, 상서시랑, 상서랑 등이 있다.
위·진에서 상서성으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에는 록상서사가 삼공을 능가하여 실질적인 재상직이 되었고, 그전까지의 기밀 문서 취급 업무는 중서(중서령·중서감)가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중서는 상서와 같은 이유로 권한을 증대시켜, 중서령이 재상으로서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고, 상서성은 실무 기관이 되었다.
남조 송에서는 상서사로 개칭되었지만, 남조 양에서 상서성으로 돌아왔고, 이후에는 변동이 없었다.
수·당이 건국 되면서, 삼성육부제가 확립되면서 중서성(조칙의 기안) → 문하성 (조칙의 심의) → 상서성 (실행)이라는 틀이 만들어졌으며, 장관은 상서령·부장관은 좌우의 상서복야가 되었고, 육부의 각 장관이 상서라고 칭해졌다. 다만 당에서는 태종이 상서령에 취임했던 시기가 있어서, 상서령은 공석으로 하고, 좌·우상서 복야가 장관이 되었으며, 중서성 장관의 중서령·문하성 장관의 시중과 함께 실질적인 재상직으로서 정무를 담당했다.
그 후, 당 말부터 오대십국 시대의 전란 속에서 형식화되어, 북송에서는 일단 폐지되었지만 신종의 원풍 3년(1080년)에 일단 부활하여, 좌우복야가 문하시랑·중서시랑을 겸임하게 되었으며, 높은 권한을 갖게 되었다(원풍 개혁).
금에도 계승되어, 초기 금이 한지를 지배함에 있어서 행대상서성을 설치하여 통치했던 것을 해릉왕이 중서성·문하성을 폐지하고 상서성을 황제 직속 기관으로 삼아, 상서령이 재상이 되었다.
원(元)에서는 재정 담당 부서로 여겨졌지만, 그 당시에 재정을 담당하는 인물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존재였으며, 여러 번 부활과 폐지가 반복되다가 지대 4년(1311년)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명에 들어, 황제 독재를 목표로 한 홍무제는 육부를 황제 직속으로 하고, 그 사이의 상서성은 소멸되었다.
2. 2. 한국
고려는 태봉의 제도를 따라 초기에 광평성(廣評省)이라 칭했으나, 982년(성종 1)에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995년에는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의 상서성은 중국 상서성과 달리 중서문하성에 예속된 하부 기관이었으며, 지방으로 보내는 공문과 외교 문서를 관장하고, 관료 임명(제배, 除拜)과 부인(符印) 관리,[8] 발마패(發馬牌) 발행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10] 물고기 모양 어대(魚袋)를 좌우 2개로 나누어 왼쪽은 궁궐에 바치고 오른쪽은 공복을 착용한 문관이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궁궐 출입에 이를 합쳐 보도록 하였다.[9]2. 2. 1. 고려
고려는 태봉의 제도를 따라 초기에 광평성(廣評省)이라 칭했으나, 982년(성종 1)에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995년에는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의 상서성은 중국 상서성과 달리 중서문하성에 예속된 하부 기관이었으며, 지방으로 보내는 공문과 외교 문서를 관장하고, 관료 임명(제배, 除拜)과 부인(符印) 관리,[8] 발마패(發馬牌) 발행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10] 물고기 모양 어대(魚袋)를 좌우 2개로 나누어 왼쪽은 궁궐에 바치고 오른쪽은 공복을 착용한 문관이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궁궐 출입에 이를 합쳐 보도록 하였다.[9] 원 간섭기에는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에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가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상서성으로 부활했으나 1362년에 폐지되었다.2. 2. 2. 기타
오호십육국시대와 북조의 상서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조와 유사하게 운영되는 경향을 보였지만, 선비족과 같은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었다.[3] 금나라 초기에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행대상서성을 설치하였고, 해릉왕은 상서성을 황제 직속 기관으로 삼아 상서령이 재상이 되도록 하였다.3. 기능 및 역할
고려의 상서성은 중국의 제도와는 다른 독자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다. 중서문하성에 예속된 하부 기관이었으며, 중앙기구인 도성은 지방이나 외국으로 보내는 공문 및 외교문서를 담당했지만, 실제로는 상서도성 아래 6부의 기능이 더 강력했다.[7] 주된 기능은 제배(除拜)·부인(符印) 등을 관리하는 것이었다.[8]
3. 1. 중국
진나라 시대에 황제의 일상생활을 보좌하는 육상(六尚) 중 하나인 서기(''상서'', 尚書)에서 유래했다. 상서는 문자 그대로 "글을 올림"을 의미한다. 한 무제는 승상과 어사대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관료들에게 의존하면서 서기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한 광무제는 ''상서''를 6부의 수장으로 하여 상서성을 만들었다. 상서성은 영(令)과 복야(僕射)를 수장으로 하고, 좌우 승(丞)과 각 부서마다 6명씩 36명의 시랑(侍郎), 그리고 각 부서마다 3명씩 18명의 영사(令史)의 보조를 받았다. 이 6부는 이후 육부가 되었으며, 각 부서의 수장, 영, 복야를 통틀어 팔좌(八座)라고 불렀다.[3]조위와 서진(266-420)을 이은 왕조에서는 상서성의 권한이 약화되었고, 그 기능과 권한 일부가 중서성과 내각으로 이관되었다. 상서와 부상서 직책은 고위 대신과 귀족 가문 구성원에게 수여되었으나, 그들은 상서성 행정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 중요성이 감소했다. 실제 서류 작업은 서기들이 담당했고, 그들의 영향력 증가는 양 무제를 두렵게 했다. 무제는 귀족만이 서기가 될 수 있도록 했지만, 어느 귀족도 자신의 아들을 그런 낮은 직위에 임명하려 하지 않았다. 상서성 구성원들은 무제와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행정에 대한 모든 변화에 저항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와 북조의 상서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조와 유사하게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선비족과 같은 이민족에게 지배되었다.[3]
수나라(581-618) 시대에는 상서 직책이 종종 공석으로 남아 있었고, 두 명의 부상서인 고경과 양소가 업무를 처리했다.[4]
당나라(618-907) 시대에도 상서 직책은 대부분 공석으로 남아 있었고, 채워진 경우 이세민(재위 626-649) 또는 이괄(재위 779-804)과 같은 황태자가 임명되었다. 실질적인 기관 수장이었던 부상서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직책은 좌부상서와 우부상서로 나뉘었고, 좌부상서가 선임이었다. 때때로 부상서의 권력은 재상과 동등했고, 때로는 그를 능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 중기에 재상들이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상서성 부상서들은 정책 결정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특별한 지위를 가져야 했다. 때로는 상서성 좌부상서가 내각의 상서와 동일인이기도 했다. 그 이후 상서성은 순수한 행정 기관이 되었다. 정부의 여섯 부서는 공식적으로 육부로 나뉘었고, 각 부는 상서가 이끌었다. 여섯 부서는 지방의 주(州) 수준에서 복제되었고, 각 부서는 중앙 정부의 해당 부서에 직접 보고했다. 육부 외에도 상서성은 구시와 삼사도 담당했다. 상서성은 정부에서 가장 큰 고용주 중 하나였으며 많은 관료들에게 수입과 직책을 제공했다. 이 기관은 원나라(1271-1368) 시대에 폐지되었으며,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1270년, 1287년, 1309년, 1311년에 재도입하려는 시도가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몇 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5] 이후 명나라 시대에는 다시 설립되지 않았다.[6]
3. 2. 고려
고려의 상서성은 중서문하성에 예속된 하부 기관이었으며, 중앙기구인 도성은 지방이나 외국으로 보내는 공문 및 외교문서를 담당했지만, 실제로는 상서도성 아래 6부의 기능이 더 강력했다.[7] 주로 제배(除拜)·부인(符印) 등을 관리했다.[8]물고기 모양의 어대(魚袋)를 좌우 두 개로 나누어 왼쪽은 궁에 바치고, 오른쪽은 공복을 입은 문관이 소지하여 궁궐 출입 시 이를 맞추어 보도록 했다.[9] 또한, 포마법에 따라 공무로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발마패(發馬牌)를 발행했다.[10]
4. 구성 및 관직
상서성은 진나라 시대에 황실 물품을 담당하는 육상(六尚) 중 서기(''상서'' 尙書) 직책에서 유래했다. 한나라 한 무제는 승상과 어사대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서의 중요성을 높였다. 한 광무제는 ''상서''를 6부의 수장으로 하여 상서성을 만들었다. 상서성은 영(令)과 복야(僕射)를 수장으로 하고, 좌우 승(丞), 시랑(侍郎), 영사(令史)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6부는 이후 육부가 되었으며, 각 부서의 수장, 영, 복야를 통틀어 팔좌(八座)라고 불렀다.[3]
조위와 서진(266-420) 시대에 상서성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일부 기능과 권한이 중서성과 내각으로 이관되었다. 상서와 부상서 직책은 고위 대신과 귀족 가문에게 수여되었으나, 실제 행정에는 참여하지 않아 중요성이 감소했다. 양나라 양 무제는 귀족만 서기가 될 수 있도록 했지만, 귀족들은 낮은 직위에 임명하려 하지 않았고, 상서성 구성원들은 무제와 협력하지 않고 행정 변화에 저항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와 북조의 상서성은 남조와 유사하게 운영되었지만, 선비족과 같은 이민족이 지배했다.[3]
수나라 시대에는 상서 직책이 공석인 경우가 많았고, 부상서인 고경과 양소가 업무를 처리했다.[4] 당나라 시대에도 상서 직책은 대부분 공석이었고, 황태자가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다. 실질적인 기관의 수장인 부상서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좌우부상서로 나누었고, 좌부상서가 선임이었다. 당나라 중기에는 재상이 우위를 점했고, 상서성의 부상서는 특별한 지위를 가져야 정책 결정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후 상서성은 순수 행정 기관이 되었고, 정부의 여섯 부서는 육부로 나뉘어 각 부는 상서가 이끌었다. 육부 외에도 상서성은 구시와 삼사도 담당했다. 상서성은 원나라 시대에 폐지되었으며, 재정 문제로 재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명나라 시대에는 다시 설립되지 않았다.[5][6]
4. 1. 중국
한나라 시대 상서성은 영(令)과 복야(僕射)를 수장으로 하고, 좌우 승(丞)과 각 부서마다 6명씩 36명의 시랑(侍郎), 각 부서마다 3명씩 18명의 영사(令史)로 구성되었다.[3] 당나라 시대에는 좌우상서복야가 장관을 맡았고, 육부의 각 장관을 상서라 칭했다.[5]4. 2. 고려
고려 문종 때 상서성의 관직은 다음과 같다.[1]품계 | 관직 | 정원 |
---|---|---|
종1품 | 상서령(尙書令) | 1명 |
정2품 | 좌우복야(左右僕射) | 각 1명 |
종2품 | 지성사(知省事) | 1명 |
종3품 | 좌우승(左右丞) | 각 1명 |
종5품 |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 각 1명 |
정6품 |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 각 1명 |
종7품 | 도사(都事) | 2명 |
이속(吏屬) | ||
주사(主事) | 4명 | |
영사(令史) | 6명 | |
서령사(書令史) | 6명 | |
기관(記官) | 20명 | |
산사(算士) | 1명 | |
직성(直省) | 2명 |
5. 구경과 삼성/오성
구경(九卿)은 태상사(제의), 광록사(광록훈), 종정사 또는 종인부(종정), 태복사(태복), 태부사(소부), 위위사(위위), 홍려사(대홍려), 사농사(대사농), 대리사(정위/대리)를 말한다.
수나라에서는 군기감(軍器監) 또는 장추감(長秋監)이 때때로 삼성(三省) 혹은 오성(五省) 중 하나로 여겨졌다.
5. 1. 구경
관청 | 대신 |
---|---|
태상사(太常寺|제의사중국어) | 제의 |
광록사(光祿寺|광록사중국어) | 광록훈 |
종정사 또는 종인부(宗正寺|종정사중국어 또는 宗人府|종인부중국어) | 종정 |
태복사(太僕寺|태복사중국어) | 태복 |
태부사(太府寺|태부사중국어) | 소부 |
위위사(衛尉寺|위위사중국어) | 위위 |
홍려사(鴻臚寺|홍려사중국어) | 대홍려 |
사농사(司農寺|사농사중국어) | 대사농 |
대리사(大理寺|대리사중국어) | 정위/대리 |
5. 2. 삼성/오성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수도감(都水監), 소부감(少府監), 장작감(將作監)을 삼성(三省) 혹은 오성(五省)이라고 불렀다. 때로는 군기감(軍器監) 또는 장추감(長秋監)이 삼성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국자감(國子監)을, 송나라 시대에는 사천감(司天監)을 추가했다.감(監) 명칭 | 음역 | 중국어 |
---|---|---|
수도감 | dushuijian | 都水監 |
소부감 | shaofujian | 少府監 |
장작감 | jiangzuojian | 將作監 |
군기감 | junqijian | 軍器監 |
장추감 | changqiujian | 長秋監 |
국자감 | 국자감 | 國子監 |
사천감 | sitianjian | 司天監 |
참조
[1]
서적
An Introduction to Chinese History and Culture
[2]
웹사이트
shangshusheng 尚書省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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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inaknow[...]
[4]
웹사이트
shangshusheng 尚書省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5]
서적
Marco Polo Was in China: New Evidence from Currencies, Salts and Revenues
Brill
[6]
웹사이트
shangshusheng 尚書省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7]
웹인용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3) 상서성 > (3) 상서성의 기능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022-11-27
[8]
웹인용
상서사 (尙瑞司)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2-16
[9]
웹인용
어대 (魚袋)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2-16
[10]
웹인용
역참 (驛站)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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