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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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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179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난 폰토스 그리스인으로, 러시아군에서 복무하며 장교로 활동했다. 그는 1820년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가 되어 그리스 독립 전쟁을 준비했고, 1821년 발라키아 봉기를 이끌었으나 실패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7년간 감금되었으며, 1828년 빈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현재 아테네에 안치되어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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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기본 정보
입실란티스가 [[신성대 (1821년)|신성대]] 복장을 입은 모습.
국립 역사 박물관, 그리스 소장.
이름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원어 이름Αλέξανδρος Υψηλάντης
Alexandru Ipsilanti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Ипсиланти
로마자 표기Aléxandros Ypsilántis (그리스어)
Aleksandr Konstantinovich Ipsilanti (러시아어)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
출생일1792년 12월 12일
출생지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사망일1828년 1월 31일
사망지오스트리아 제국
매장지페디온 투 아레오스의 탁시아르케스 교회
직책러시아 제국군 소장
소속러시아 제국
그리스 제1공화국
군사 복무1805년 ~ 1821년
최종 계급소장
소속 군대러시아 제국 육군
필리키 에테리아
그리스 혁명군
신성대
지휘관제1 후사르 사단 제1 후사르 여단 사령관
필리키 에테리아 지도자
신성대 지도자
부대그로드노 후사르 연대
관계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입실란티스(아버지)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형제)
기타 이력알렉산드르 1세 차르의 보좌관
서명
군사 경력
주요 참전 전투/전쟁나폴레옹 전쟁
러시아 원정
클랴스티치 전투
제1차 폴로츠크 전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바우첸 전투
드레스덴 전투 (부상)
그리스 독립 전쟁
왈라키아 봉기
드러거샤니 전투
훈장4급 스뱌토고블라디미르 훈장
2급 스뱌토고안나 훈장

2. 초기 생애 및 가문 배경

입실란티 가문은 트라브존 출신의 폰토스인이다.[1]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1792년 12월 12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디메트리오스 입실란티스, 니콜라스, 게오르기오스, 그리고리고스가 있었다.[1]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입실란티스와 할아버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행정부에서 활동했으며, 술탄 궁정의 통역관과 도나우 공국의 호스포다르를 역임했다. 어머니 엘리사베트 입실란티는 왈라키아의 버커레스쿠 가문 출신이었다.

2. 1. 가문의 기원

입실란티 가문은 트라브존 출신의 폰토스인이다.[1]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1792년 12월 12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로는 디메트리오스 입실란티스, 니콜라스, 게오르기오스, 그리고 그리고리오스가 있었다.[1]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입실란티스와 할아버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1725년 ~ 1805년)는 오스만 행정부에서 활동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으며, 각자 술탄 궁정의 통역관(dragoman)과 도나우 공국의 호스포다르로 봉직했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베트 입실란티(Elisavet Ypsilanti/Elisabeta Văcărescu)는 왈라키아의 버커레스쿠 가문 출신이었다.

2. 2. 출생 및 가족 관계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1792년 12월 12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트라브존 출신의 폰토스 그리스인이었다.[1] 형제로는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 니콜라스, 게오르기오스, 그리고리오스가 있었다.[1]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입실란티스와 할아버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1725~1805)는 모두 오스만 행정부에서 활동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술탄 궁정의 통역관(dragoman)과 도나우 공국의 호스포다르(hospodar)로 봉직했다. 어머니 엘리사베트 입실란티는 왈라키아의 버커레스쿠 가문 출신이었다.

2. 3. 부모 및 가문의 활동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가문은 트라브존 출신의 폰토스 그리스인 가문이었다.[1] 그는 1792년 12월 12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로는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 니콜라스, 게오르기오스, 그리고리고스가 있었다.[1]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입실란티스와 할아버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1725~1805)는 모두 오스만 행정부에서 활동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술탄 궁정의 통역관(dragoman)과 도나우 공국의 호스포다르(hospodar)로 봉직했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베트 입실란티는 왈라키아의 버커레스쿠 가문 출신이었다.

3. 러시아 군 복무

1808년 4월 12일,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기사 근위대 연대에서 소위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1] 이후 빠르게 승진하여 1810년 9월 27일 중위, 10월 18일에는 슈타브스-기병 대위가 되었다.[1]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당시 클라스티치 전투와 폴로츠크 제1차 전투에서 활약했고, 1813년 2월 20일 기병 대위로 진급, 바우첸 전투에 참전했다.[1] 같은 해 7월 6일, 그로드노 헝가리 기병 연대 중령으로 전속되어 드레스덴 전투에 참가했으나, 이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오른팔을 잃었다.[1]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령으로 승진했으나, 전투에는 더 이상 참가할 수 없었다. 빈 회의에 참석하여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알렉산더 1세의 신임을 얻어 1816년 1월 1일 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 1817년 말, 25세의 나이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 헝가리 기병 사단 제1 여단 사령관이 되었다.[1]

3. 1. 러시아로의 망명과 교육

1810년대 러시아 헝가리 기병대 고급 장교 제복을 입은 이프실란티


1869년 레오니다스 드로시스가 아테네 아레스 광장에 건립한 알렉산드로스 이프실란티의 묘비(유골 안치)


1805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알렉산드로스 이프실란티스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는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루마니아어에 능통한 교육을 받았다. 15세에 러시아 궁정에 소개되었고,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의 후원을 받았다.[1]

1808년 4월 12일, 기사 근위대 연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 1810년 9월 27일 중위, 같은 해 10월 18일 슈타브스-기병 대위로 승진했다.[1]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동안 클라스티치 전투와 폴로츠크 제1차 전투에서 싸웠다. 1813년 2월 20일 기병 대위로 승진, 바우첸 전투에 참가했다. 7월 6일, 그로드노 헝가리 기병 연대 중령으로 전속되었고, 드레스덴 전투에서 포탄에 오른팔을 잃었다.[1]

3. 2. 군 경력



1808년 4월 12일, 명문 기사 근위대 연대에서 소위 계급으로 임관했다. 1810년 9월 27일 중위로,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슈타브스-기병 대위로 빠르게 승진했다.[1]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동안 클라스티치 전투와 폴로츠크 제1차 전투에서 싸웠다. 1813년 2월 20일 기병 대위로 승진, 바우첸 전투에 참가했다. 같은 해 7월 6일, 그로드노 헝가리 기병 연대 중령으로 전속되었고, 드레스덴 전투에서 포탄에 오른팔을 잃었다.[1]

곧바로 대령으로 승진했지만, 다시 전투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빈 회의에 참석하여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알렉산더 1세의 동정을 얻어 1816년 1월 1일 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817년 말 25세의 나이에 중장이 되었고 제1 헝가리 기병 사단 제1 여단 사령관이 되었다.[1]

4. 그리스 독립 전쟁 준비

1829년 그리스 독립 전쟁 영웅들을 묘사한 카드. 이오아니스 입실란티스는 스페이드 A로 표현되어 있다. 아테네 역사민족학 박물관 소장.


1820년, 요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이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직을 거절한 후,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1] 그는 그리스 독립 전쟁 계획을 검토 및 승인했고, 1820년 5월 부쿠레슈티에서 계획을 수정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의 동시 봉기 지원.
  • 제1차 세르비아 봉기와 제2차 세르비아 봉기 경험이 있는 반군을 동원해 왈라키아에서 반란 유발.
  • 첩보원으로 콘스탄티노플 내란을 유발하고, 오스만 함대를 불태움.
  •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혁명 시작.


입실란티스는 1820년 10월 8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선언했다.[2] 그는 고대 그리스를 칭송하며, 살라미스 해전스파르타레오니다스를 언급했다.[2] 또한 그리스인들의 힘으로 터키인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의 지원을 확신한다고 덧붙였다.[2]

4. 1. 필리키 에테리아 지도자 선출

1820년, 러시아 외무장관이었던 요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이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직을 거절하자,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에게 그 자리가 제안되었고, 그는 결사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1] 이후 그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총체적인 계획을 검토하고 승인했으며, 이 계획은 1820년 5월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 본토의 반란 지휘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수정되었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의 동시 봉기를 지원한다.
  • 세르비아 지역 출신의, 제1차 세르비아 봉기와 제2차 세르비아 봉기에서 단련된 반군들을 동원하여, 왈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 첩보원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내란을 유발하고, 도시 항구에 있는 오스만 함대를 불태운다.
  • 이프실란티스가 도착한 후 펠로폰네소스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이프실란티스는 1820년 10월 8일 선언문을 발표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곧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 이프실란티스는 고대 그리스를 칭송하며 선언문을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려보라. 우리의 항해하는 사촌들이 살라미스 해전의 본보기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육지를 보라. 어디를 보든지 애국적인 스파르타인들의 지도자 레오니다스를 보게 될 것이다."[2] 이프실란티스는 그리스인들이 외국의 도움 없이도 터키인들을 스스로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한 후, 러시아의 지원이 확보되었다고 덧붙였다.[2]

4. 2. 독립 전쟁 계획 수립

1820년, 러시아 외무장관이었던 요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이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직을 거절하자,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에게 그 자리가 제안되었고, 그는 결사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1] 이후 그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총체적인 계획을 검토하고 승인했으며, 이 계획은 1820년 5월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 본토의 반란 지휘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수정되었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의 동시 봉기를 지원한다.
  • 세르비아 지역 출신의, 제1차 세르비아 봉기와 제2차 세르비아 봉기에서 단련된 반군들을 동원하여, 왈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 첩보원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내란을 유발하고, 도시 항구에 있는 오스만 함대를 불태운다.
  • 이프실란티스가 도착한 후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이프실란티스는 1820년 10월 8일 선언문을 발표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곧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 이프실란티스는 고대 그리스를 칭송하며 선언문을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려보라. 우리의 항해하는 사촌들이 살라미스 해전의 본보기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육지를 보라. 어디를 보든지 애국적인 스파르타인들의 지도자 레오니다스를 보게 될 것이다."[2] 이프실란티스는 그리스인들이 외국의 도움 없이도 터키인들을 스스로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한 후, 러시아의 지원이 확보되었다고 덧붙였다.[2]

4. 3. 봉기 선언

1820년, 러시아 외무장관인 요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이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직을 거절하자, 입실란티스에게 그 자리가 제안되었고, 그는 결사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1] 이후 그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총체적인 계획을 검토하고 승인했으며, 이 계획은 1820년 5월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 본토의 반란 지휘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수정되었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의 동시 봉기를 지원한다.
  • 제1차 세르비아 봉기와 제2차 세르비아 봉기에서 단련된, 세르비아 지역 출신의 반군들을 동원하여 왈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 첩보원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내란을 유발하고, 도시 항구에 있는 오스만 함대를 불태운다.
  • 입실란티스가 도착한 후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입실란티스는 1820년 10월 8일 선언문을 발표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곧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 입실란티스는 고대 그리스를 칭송하며 선언문을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려보라. 우리의 항해하는 사촌들이 살라미스 해전의 본보기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육지를 보라. 어디를 보든지 애국적인 스파르타인들의 지도자 레오니다스를 보게 될 것이다."[2] 입실란티스는 그리스인들이 외국의 도움 없이도 터키인들을 스스로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한 후, 러시아의 지원이 확보되었다고 덧붙였다.[2]

5. 몰다비아-왈라키아 군사 작전

페터 폰 헤스(Peter von Hess)의 작품,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ros Ypsilantis)가 프루트 강을 건너다」, 베나키 박물관(Benaki Museum), 아테네.


필리키 에테리아의 정보 누출로 인해 익실란티스는 1821년 발라키아 봉기를 서둘러 일으켰다. 다뉴브 공국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공동 종주권을 받는 자치 지역이라 오스만 주둔군이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소규모 무장 친위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허락 없이는 군대를 이동시킬 수 없었고, 일방적 파병 시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몰다비아 공 미하일 수초스는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이면서도, 계획된 침략을 오스만 제국에 알린 기회주의자였다. 1821년 2월 22일(율리우스력), 익실란티스는 러시아에서 복무하는 다른 그리스 장교들과 함께 프루트 강 스쿨레니(Sculeni)를 건너 공국으로 들어갔다. 이틀 후, 이아시(Iaşi)에서 그는 "강대국의 지원"(러시아를 의미)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익실란티스는 봉기가 러시아 개입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오스만 제국이 반란 진압을 위해 침략하면, 동방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가 개입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스 반란은 결국 1828년 러시아-터키 전쟁으로 이어져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노플 교외까지 진격, 술탄이 그리스 국가의 자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1821년 차르 알렉산더는 신성 동맹(Holy Alliance) 회원이어서 익실란티스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은 익실란티스를 비난하고 계급을 박탈,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카포디스트리아스 자신도 "무기한 휴가"를 가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키인들을 고무시켰고, 발라키아 봉기 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다. 익실란티스는 이아시에서 부쿠레슈티(Bucharest)로 행진하여 자원병을 모집하려 했다. 익실란티스는 자금이 부족했고, 부하들은 약탈을 시작했다.[1] 갈라치(Galați)에서 익실란티스의 장교 바실리오스 카라비아스(Vasilios Karavias)는 터키 상인들을 살해했고, 이아시에서는 항복한 오스만 경비대 50명이 살해되었다.[2] 유럽 각지에서 온 젊은 그리스 자원봉사자들로 성스러운 대대가 결성되었다.[3] 익실란티스는 천천히 진격하여 4월 초에야 발라키아에 진입,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Tudor Vladimirescu)가 부쿠레슈티를 점령했다.[3] 그리고리오스 총대주교는 익실란티스를 정교회의 적이라 비난하고, 술탄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며, 익실란티스를 "불결하고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했다.[4]

부쿠레슈티에서 그는 발라키아 판두르가 그리스를 돕기 위해 올테니아 기반의 반란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익실란티스는 에테리아의 동맹자인 판두르 지도자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를 불신했는데, 블라디미레스쿠는 스칼라트 칼리마키가 부쿠레슈티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반란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오스만 제국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익실란티스와 다른 그리스 지도자들은 공통의 기독교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루마니아인들의 지원에 의존했고, 파나리오트 시대 동안 공국에서의 그리스 영향력에 대한 불만과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첫 움직임을 과소평가했다.

블라디미레스쿠는 러시아가 익실란티스를 포기한 것을 필리키 에테리아에 대한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블라디미레스쿠 진영 내에서 갈등이 발생, 결국 블라디미레스쿠는 친그리스파와 에테리아에 의해 즉결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3만 명의 군대로 다뉴브 강을 건넜고, 익실란티스는 브라일라(Brăila)로 진격하여 오스만 군대가 공국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러시아가 ''사실상의 상태(fait accompli)''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있었지만 후퇴, 이아시 근처의 반산악 지역에서 방어를 조직했다. 일련의 주요 전투에서 에테리아 군대는 패배, 6월 7일 드러거샤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긴 비 오는 행군 후, 익실란티스의 군대는 지쳐 있었지만, 술에 취한 카라비아스는 성스러운 대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대에 돌격했다. 훈련이 부족한 성스러운 대대의 병사들은 사각형을 형성하지 않아 오스만 기병에게 쉽게 베였다.

패배 후, 익실란티스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익실란티스는 부하들에게 보낸 마지막 선언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모든 실패에 대해 부하들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 "병사들이여!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 신성하고 명예로운 이름을 너희에게 적용하여 더럽히지 않겠다. 너희는 비겁한 폭도다!...너희는 맹세를 어기고,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했고, 너희들과 함께 정복하거나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던 순간에 나를 배신했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라. 오직 그들만이 너희를 지원할 만하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사람들의 피가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손을 입맞추어라. 그래! 그들에게 달아나서, 너희의 생명과 너희 아내와 자녀들의 명예로 노예가 되어라!"

익실란티스가 이 선언을 읽자 그의 군대는 그를 야유했다.

5. 1. 봉기 시작



필리키 에테리아의 활동 정보가 오스만 제국에 누출되자, 익실란티스는 1821년 발라키아 봉기를 서둘러 일으키고 직접 참여했다. 다뉴브 공국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공동 종주권을 행사하는 자치 지역이었기에 오스만 주둔군이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소규모 무장 친위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허락 없이는 군대를 이동시킬 수 없었고, 일방적 파병 시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몰다비아 공 미하일 수초스는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이면서도, 계획된 침략을 오스만 제국에 알린 기회주의자였다. 1821년 2월 22일(율리우스력), 익실란티스는 러시아에서 복무하는 다른 그리스 장교들과 함께 프루트 강의 스쿨레니(Sculeni)를 건너 공국으로 들어갔다. 이틀 후, 이아시(Iaşi)에서 그는 "강대국의 지원"(러시아를 의미)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익실란티스는 봉기가 러시아 개입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오스만 제국이 반란 진압을 위해 침략하면, 동방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가 개입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스 반란은 결국 1828년 러시아-터키 전쟁으로 이어져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노플 교외까지 진격, 술탄이 그리스 국가의 자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1821년 차르 알렉산더는 신성 동맹(Holy Alliance) 회원이어서 익실란티스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은 익실란티스를 비난하고 계급을 박탈,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카포디스트리아스 자신도 "무기한 휴가"를 가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키인들을 고무시켰고, 발라키아 봉기 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다. 익실란티스는 이아시에서 부쿠레슈티(Bucharest)로 행진하여 자원병을 모집하려 했다. 익실란티스는 자금이 부족했고, 부하들은 약탈을 시작했다.[1] 갈라치(Galați)에서 익실란티스의 장교 바실리오스 카라비아스(Vasilios Karavias)는 터키 상인들을 살해했고, 이아시에서는 항복한 오스만 경비대 50명이 살해되었다.[2] 유럽 각지에서 온 젊은 그리스 자원봉사자들로 성스러운 대대가 결성되었다.[3] 익실란티스는 천천히 진격하여 4월 초에야 발라키아에 진입,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Tudor Vladimirescu)가 부쿠레슈티를 점령했다.[3] 그리고리오스 총대주교는 익실란티스를 정교회의 적이라 비난하고, 술탄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며, 익실란티스를 "불결하고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했다.[4]

부쿠레슈티에서 그는 발라키아 판두르가 그리스를 돕기 위해 올테니아 기반의 반란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익실란티스는 에테리아의 동맹자인 판두르 지도자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를 불신했는데, 블라디미레스쿠는 스칼라트 칼리마키가 부쿠레슈티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반란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오스만 제국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익실란티스와 다른 그리스 지도자들은 공통의 기독교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루마니아인들의 지원에 의존했고, 파나리오트 시대 동안 공국에서의 그리스 영향력에 대한 불만과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첫 움직임을 과소평가했다.

블라디미레스쿠는 러시아가 익실란티스를 포기한 것을 필리키 에테리아에 대한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블라디미레스쿠 진영 내에서 갈등이 발생, 결국 블라디미레스쿠는 친그리스파와 에테리아에 의해 즉결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3만 명의 군대로 다뉴브 강을 건넜고, 익실란티스는 브라일라(Brăila)로 진격하여 오스만 군대가 공국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러시아가 ''사실상의 상태(fait accompli)''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있었지만 후퇴, 이아시 근처의 반산악 지역에서 방어를 조직했다. 일련의 주요 전투에서 에테리아 군대는 패배, 6월 7일 드러거샤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긴 비 오는 행군 후, 익실란티스의 군대는 지쳐 있었지만, 술에 취한 카라비아스는 성스러운 대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대에 돌격했다. 훈련이 부족한 성스러운 대대의 병사들은 사각형을 형성하지 않아 오스만 기병에게 쉽게 베였다.

패배 후, 익실란티스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익실란티스는 부하들에게 보낸 마지막 선언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부하들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 "병사들이여!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 신성하고 명예로운 이름을 너희에게 적용하여 더럽히지 않겠다. 너희는 비겁한 폭도다!...너희는 맹세를 어기고,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했고, 너희들과 함께 정복하거나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던 순간에 나를 배신했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라. 오직 그들만이 너희를 지원할 만하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사람들의 피가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손을 입맞추어라. 그래! 그들에게 달아나서, 너희의 생명과 너희 아내와 자녀들의 명예로 노예가 되어라!"

익실란티스가 이 선언을 읽자 그의 군대는 그를 야유했다.

5. 2. 러시아의 지원 기대와 좌절



필리키 에테리아(Filiki Eteria)의 존재와 활동 정보가 오스만 당국에 유출되면서,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발라키아(Wallachia)에서의 봉기를 서둘러 일으켜 직접 참여했다. 다뉴브 공국에서 혁명을 시작한 것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공동으로 종주권을 행사하는 자치 지역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주둔군이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자신의 보호를 위해 소규모 무장 친위대를 유지할 권리가 있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허락 없이 발라키아 또는 몰다비아에 군대를 이동시킬 수 없었고, 오스만 제국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면 러시아가 전쟁을 할 수도 있었다.[1] 몰다비아 공이었던 미하일 수초스는 비밀리에 필리키 에테리아의 회원이자 파나리오트(Phanariot) 출신 그리스인이었지만, 동시에 계획된 침략에 대해 비밀리에 오스만 제국 고위 관리에게 알린 기회주의자였다.[1] 1821년 2월 22일(율리우스력), 러시아에서 복무하는 다른 그리스 장교들과 함께 입실란티스는 프루트 강의 스쿨레니(Sculeni)를 건너 공국으로 들어갔다. 이틀 후, 이아시(Iaşi)에서 그는 "강대국의 지원"(러시아를 의미)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입실란티스는 봉기가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오스만 제국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침략하면, 동방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인들이 동료 정교회 신자들을 위해 개입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 반란은 1828년 러시아-터키 전쟁으로 이어져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노플 교외까지 진격하여 술탄이 새로운 그리스 국가의 자치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821년 차르 알렉산더는 신성 동맹(Holy Alliance)의 헌신적인 회원이어서 입실란티스와의 관계를 신속하게 단절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Capodistria) 백작은 입실란티스가 차르의 신임을 남용했다고 비난하고, 그의 계급을 박탈했으며,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포디스트리아스 자신도 직책에서 "무기한 휴가"를 가져야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키인들을 고무시켰고, 발라키아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다. 입실란티스는 이아시에서 부쿠레슈티(Bucharest)로 행진하여 자원병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금이 부족했고 그의 부하들은 그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2] 갈라치(Galați)에서 입실란티스의 장교 중 한 명인 바실리오스 카라비아스(Vasilios Karavias)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지 터키 상인들을 살해했고, 이아시에서는 생명을 보장받았다는 약속 후 항복한 현지 오스만 경비대 50명이 살해되었다.[3] 그때 유럽 전역에서 온 젊은 그리스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성스러운 대대가 결성되었다.[4] 입실란티스는 천천히 진격하여 4월 초가 되어서야 발라키아에 진입했는데, 그때쯤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Tudor Vladimirescu)가 부쿠레슈티를 점령했다.[4] 설상가상으로 그리고리오스(Grigorios) 총대주교가 입실란티스를 정교회의 적이라고 비난하고, 진정한 신자들에게 술탄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며, 입실란티스를 "불결하고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했다.

몇 주 후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그는 발라키아 판두르가 그리스 대의를 돕기 위해 올테니아 기반의 반란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실란티스는 에테리아의 명목상 동맹자인 판두르 지도자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불신을 받았는데, 블라디미레스쿠는 스칼라트 칼리마키가 부쿠레슈티의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반란을 시작했으면서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더 근본적으로, 입실란티스와 다른 그리스 지도자들은 공통의 기독교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루마니아인들의 지원에 의존했고, 파나리오트 시대 동안 공국에서의 그리스 영향력에 대한 증가하는 불만과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첫 움직임을 과소평가했다.

블라디미레스쿠는 러시아가 입실란티스를 포기한 것을 필리키 에테리아에 대한 추가적인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 블라디미레스쿠 진영 내에서 갈등이 발생했고, 블라디미레스쿠는 친그리스파와 에테리아에 의해 즉결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3만 명의 군대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입실란티스는 브라일라(Brăila)로 진격하여 오스만 군대가 공국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러시아가 ''사실상의 상태(fait accompli)''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있었지만, 후퇴하여 이아시 근처의 반산악 지역에서 방어를 조직했다. 일련의 주요 전투가 이어졌고, 에테리아 군대는 패배했으며, 6월 7일 드러거샤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긴 비 오는 행군 후, 입실란티스의 군대는 지쳐 있었지만, 술에 취한 카라비아스는 성스러운 대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대에 돌격했다. 경험이 없고 훈련이 부족한 성스러운 대대의 병사들은 충분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사각형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만 기병은 반군을 쉽게 베어낼 수 있었다.

패배 후, 입실란티스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부하들에게 보낸 마지막 선언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모든 실패에 대해 부하들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 "병사들이여!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 신성하고 명예로운 이름을 너희에게 적용하여 더럽히지 않겠다. 너희는 비겁한 폭도다!...너희는 맹세를 어기고,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했고, 너희들과 함께 정복하거나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던 순간에 나를 배신했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라. 오직 그들만이 너희를 지원할 만하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사람들의 피가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손을 입맞추어라. 그래! 그들에게 달아나서, 너희의 생명과 너희 아내와 자녀들의 명예로 노예가 되어라!"

입실란티스가 이 선언을 읽자 그의 군대는 그를 야유했다.

5. 3. 블라디미레스쿠와의 갈등



1821년 왈라키아 봉기 당시,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는 필리키 에테리아의 명목상 동맹이었지만, 익실란티스는 그를 불신했다. 블라디미레스쿠는 스칼라트 칼리마키가 부쿠레슈티의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반란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및 오스만 제국과도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익실란티스를 비롯한 그리스 지도자들은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루마니아인들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파나리오트 시대 동안 공국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한 불만과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초기 움직임을 간과했다.

러시아가 익실란티스를 포기하자, 블라디미레스쿠는 이를 필리키 에테리아에 대한 약속을 철회하는 것으로 여겼다. 결국 블라디미레스쿠는 친그리스파와 에테리아에 의해 즉결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5. 4. 드러거샤니 전투와 패배



필리키 에테리아(Filiki Eteria)의 존재와 활동이 오스만 제국 당국에 알려지면서, 입실란티스는 발라키아(Wallachia)에서의 봉기를 서둘러 일으키고 직접 참여했다.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공동 종주권을 행사하는 자치 지역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주둔군이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자신의 보호를 위해 소규모 무장 친위대를 유지할 권한이 있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허락 없이 발라키아나 몰다비아(Moldavia)에 군대를 이동시킬 수 없었고, 오스만 제국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면 러시아가 전쟁을 할 수도 있었다.[1] 몰다비아 공(Prince of Moldavia) 미하일 수초스는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이면서도, 계획된 침략을 오스만 제국 고위 관리에게 알린 기회주의자였다.[1] 1821년 2월 22일(율리우스력), 입실란티스는 러시아에서 복무하는 다른 그리스 장교들과 함께 프루트 강의 스쿨레니(Sculeni)를 건너 공국으로 들어갔다. 이틀 후, 이아시(Iaşi)에서 그는 "강대국의 지원"(러시아를 의미)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입실란티스는 봉기가 러시아의 개입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오스만 제국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침략하면, 동방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인들이 동료 정교회 신자들을 위해 개입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반란은 결국 1828년 러시아-터키 전쟁으로 이어져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노플 교외까지 진격하여 술탄이 새로운 그리스 국가의 자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1821년 차르 알렉산더는 신성 동맹(Holy Alliance) 회원이였고, 입실란티스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Capodistria) 백작은 입실란티스가 차르의 신임을 남용했다고 비난하고, 그의 계급을 박탈했으며,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포디스트리아스 자신도 "무기한 휴가"를 가져야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키인들을 고무시켰고, 발라키아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다. 입실란티스는 이아시(Iaşi)에서 부쿠레슈티(Bucharest)로 행진하여 자원병을 모집하려고 했다. 입실란티스는 자금이 부족했고 그의 부하들은 그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2] 갈라치(Galați)에서 입실란티스의 장교 바실리오스 카라비아스(Vasilios Karavias)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지 터키 상인들을 살해했고, 이아시(Iași)에서는 생명을 보장받았다는 약속 후 항복한 현지 오스만 경비대 50명이 살해되었다.[3] 유럽 전역에서 온 젊은 그리스 자원봉사자들로 성스러운 대대가 구성되었다.[4] 입실란티스는 천천히 진격하여 4월 초가 되어서야 발라키아에 진입했는데, 그때쯤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Tudor Vladimirescu)가 부쿠레슈티를 점령했다.[4] 그레고리오스 총대주교가 입실란티스를 정교회의 적이라고 비난하고, 진정한 신자들에게 술탄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고, 입실란티스를 "불결하고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했다.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그는 발라키아 판두르가 그리스를 도울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실란티스는 에테리아(Eteria)의 명목상 동맹자인 판두르 지도자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Tudor Vladimirescu)의 불신을 받았는데, 블라디미레스쿠는 스칼라트 칼리마키가 부쿠레슈티의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반란을 시작했으면서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입실란티스와 다른 그리스 지도자들은 공통의 기독교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루마니아인들의 지원에 의존했고, 파나리오트 시대 동안 공국에서의 그리스 영향력에 대한 불만과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첫 번째 움직임을 과소평가했다.

블라디미레스쿠는 러시아가 입실란티스를 포기한 것을 필리키 에테리아에 대한 추가적인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블라디미레스쿠 진영 내에서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블라디미레스쿠는 친그리스파와 에테리아에 의해 즉결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3만 명의 군대로 다뉴브 강을 건넜고, 입실란티스는 브라일라(Brăila)로 진격하여 오스만 군대가 공국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러시아가 ''사실상의 상태(fait accompli)''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있었을 텐데도 후퇴하여 이아시(Iași) 근처의 반산악 지역에서 방어를 조직했다. 일련의 주요 전투가 이어졌고, 에테리아(Eteria) 군대는 패배했으며, 6월 7일 드러거샤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긴 비 오는 행군 후, 입실란티스의 군대는 지쳐 있었지만, 술에 취한 카라비아스(Karavias)는 성스러운 대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대에 돌격했다. 경험이 없고 훈련이 부족한 성스러운 대대의 병사들은 충분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사각형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만 기병은 반군을 쉽게 베어낼 수 있었다.

패배 후, 입실란티스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입실란티스는 부하들에게 보낸 마지막 선언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모든 실패에 대해 부하들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 "병사들이여!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 신성하고 명예로운 이름을 너희에게 적용하여 더럽히지 않겠다. 너희는 비겁한 폭도다!...너희는 맹세를 어기고,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했고, 너희들과 함께 정복하거나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던 순간에 나를 배신했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라. 오직 그들만이 너희를 지원할 만하다…터키인들에게 달아나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사람들의 피가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손을 입맞추어라. 그래! 그들에게 달아나서, 너희의 생명과 너희 아내와 자녀들의 명예로 노예가 되어라!"

입실란티스가 이 선언을 읽자 그의 군대는 그를 야유했다.

5. 5. 패배 후 선언



드라가샤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입실란티스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부하들에게 보낸 마지막 선언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모든 실패에 대해 부하들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1]

"병사들이여!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 신성하고 명예로운 이름을 너희에게 적용하여 더럽히지 않겠다. 너희는 비겁한 폭도다!... 너희는 맹세를 어기고,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했고, 너희들과 함께 정복하거나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던 순간에 나를 배신했다… 터키인들에게 달아나라. 오직 그들만이 너희를 지원할 만하다… 터키인들에게 달아나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사람들의 피가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손을 입맞추어라. 그래! 그들에게 달아나서, 너희의 생명과 너희 아내와 자녀들의 명예로 노예가 되어라!"


입실란티스가 이 선언을 읽자 그의 군대는 그를 야유했다.

6. 망명과 죽음

이프실란티스는 람니쿠에서 오스트리아 당국과 국경 통과를 협상했지만, 신성 동맹의 반동적인 정책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망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7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2] 석방 후 비엔나에서 은퇴하여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받다가 1828년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그리스로 보내졌고, 시신은 여러 차례 이장된 끝에 1964년 아테네에 안치되었다.[3]

6. 1. 오스트리아로의 망명과 감금

입실란티스는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람니쿠로 후퇴하여 며칠간 오스트리아 당국과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허가를 협상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패배한 추종자들이 자신을 튀르키예인들에게 넘길까 두려워, 그는 오스트리아가 튀르키예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발표하고, 코지아 교회에서 ''테 데움''을 부르게 했으며, 오스트리아 총사령관과 조치를 취한다는 구실로 국경을 넘었다.[2] 그러나 신성 동맹반동적 정책은 프란츠 1세와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에 의해 강화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이웃 국가의 반란 지도자들에게 망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실란티스는 7년 동안(1823년부터 1827년까지 테레진에서) 엄중한 감금 상태에 놓여 있다가,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2]

6. 2. 석방과 죽음

석방 후 그는 비엔나로 은퇴하여 극심한 빈곤과 고통 속에 1828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2] 그의 마지막 소원은 그의 심장을 그의 시신에서 꺼내 그리스로 보내는 것이었는데, 이는 게오르기오스 라사니스에 의해 이루어졌고, 현재 아테네의 아말리에이온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초상화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가 선천적인 다발성계 질환인 근긴장성 이영양증(dystrophia myotonica)을 앓았음을 시사한다.[3]

그의 시신은 원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었다. 1903년 2월 18일, 그의 유해는 그의 가족 구성원들에 의해 오스트리아 지하르츠키르헨의 익실란티-시나 저택인 슐로스 라폴텐키르헨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마지막 이장은 1964년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망 136년 후 그리스 아테네 페디오 투 아레오스의 탁시아르헤스 교회로 최종적으로 이장되었다.

비엔나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 기념패


네아 트라페주타(그리스 피에리아주)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익실란티스 흉상

6. 3. 유해 이장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석방 후 비엔나로 은퇴하여 극심한 빈곤과 고통 속에 1828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2] 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심장을 그리스로 보내는 것이었는데, 이는 게오르기오스 라사니스에 의해 이루어졌고, 심장은 현재 아테네의 아말리에이온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초상화와 삶에 대한 기록은 그가 선천적인 다발성계 질환인 근긴장성 이영양증(dystrophia myotonica)을 앓았음을 시사한다.[3]

그의 시신은 원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었다. 1903년 2월 18일, 그의 유해는 가족들에 의해 오스트리아 지하르츠키르헨의 익실란티-시나 저택인 슐로스 라폴텐키르헨으로 이장되었다. 1964년 8월, 사망 136년 후 그의 유해는 그리스 아테네 페디온 투 아레오스의 탁시아르헤스 교회로 최종 이장되었다.

7. 평가 및 영향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그리스 독립 전쟁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로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봉기를 조직하고 주도했다. 비록 그의 군사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리스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지역에서의 봉기를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역량 부족과 성급한 결정, 그리고 다른 그리스 지도자들과의 협력 부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러시아의 지원을 확신하고 왈라키아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시작한 것은 전략적 판단 착오였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그리스 독립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그의 희생은 그리스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8. 문화적 묘사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단편 소설 "결투"에 등장한다. 푸시킨 소설의 주인공 실비오는 입실란티스의 지휘하에 있는 전투에서 사망한다.

참조

[1] 웹사이트 князь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Ипсиланти http://adjudant.ru/c[...] Adjudant.ru 2014-02-12
[2] 백과사전 Ypsilanti s.v. Alexander Ypsilanti Encyclopædia Britannica
[3] 서적 Dystrophia Myotonica and Related Disorders 1991
[4] 웹사이트 이프실란티스 202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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