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만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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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만사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1707년 4월 25일에 벌어진 전투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왕위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발렌시아 지역의 자치권 상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 결과로 스페인 북동부와 발렌시아에 대한 필리페 5세의 지배가 확고해졌으며, "알만사에서 온 나쁜 소식은 모두에게 미친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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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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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알만사 전투 |
전쟁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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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707년 4월 25일 |
장소 | 스페인 알바세테 주 알만사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페인 왕국/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포르투갈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신성 로마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
지휘관 2 | 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쉬, 미나스 후작 안토니우 루이스 드 소자, 자크루이 콩트 드 노아유 |
병력 규모 | |
병력 1 | 25,500명 |
병력 2 | 28,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1,500명 사상 |
피해 2 | 4,000명 사상, 3,000명 포로 |
2. 배경
스페인에서의 군사 작전은 플랑드르나 이탈리아보다 보급 문제에 더 크게 제약을 받았다. 사료 및 기타 보급품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기에, 19세기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물자와 보급품이 대부분 수로로 운송되었던 스페인 북부와 같은 건조 지역에서의 작전은 제한되었다.[1] 해상 통제권을 확보한 연합군은 해안 지역 밖에서 단기적인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지만, 대중적 지지가 부족하여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대동맹은 1703년 5월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가 동맹에 합류하면서 리스본에 작전 기지를 확보했고, 1704년 3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이 육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했다.[2]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부르봉 동맹은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에서 일련의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이 지브롤터 점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지브롤터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1704년 8월 해상 전투인 말라가 해전에서 패배했고, 육상 포위 공격은 1705년 4월에 중단되었다.[3] 1705년 영국과 카탈루냐 대표 간에 체결된 '제노바 조약'은 북동부에 제2전선을 열었다. 연합군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를 점령하면서, 부르봉 왕가가 서지중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주요 항구는 툴롱만 남게 되었다.[4]
1706년 5월 스페인의 필리페 5세가 바르셀로나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부재로 연합군이 마드리드와 사라고사를 점령했지만, 기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보급을 받을 수 없어 철수해야 했다. 1706년 11월까지 필리페는 카스티야 왕관, 무르시아 및 발렌시아 왕국의 일부를 장악했다.[4] 같은 해 연합군이 스페인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고, 갤웨이는 1707년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여 이를 이용하려 했다.
이에 맞서 제임스 핏제임스, 버윅 공작 1세가 스페인 북동부에서 부르봉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총 33,000명의 병력이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으로 나뉘어 배치되었고, 여러 아일랜드 연대도 포함되었다.[5] 발렌시아로 진격하기 전에, 버윅은 사티바를 포위하기 위해 8,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연합군 사령관인 피터버러 백작은 갤웨이와 미나스가 이끄는 16,500명의 병력과 합류하기보다는 카탈루냐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버윅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할 때 심각한 열세에 놓였다.[6] 1707년 4월 22일, 버윅은 발렌시아에 있는 연합군 주둔군의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는 알만사 마을 외곽에 진을 쳤다.[5]
2.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에서의 군사 작전은 플랑드르나 이탈리아보다 보급 문제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현지에서 사료 및 기타 보급품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19세기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물자와 보급품이 대부분 수로로 운송되었던 스페인 북부와 같은 건조 지역에서는 작전이 제한되었다.[1] 해상 통제권을 확보한 연합군은 해안 지역 밖에서 단기적인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지만, 대중적 지지가 부족하여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대동맹은 1703년 5월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가 편을 바꾸면서 리스본에 작전 기지를 확보했고, 이듬해 3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이 육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했다.[2]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부르봉 동맹은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에서 일련의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이 지브롤터 점령한 것으로 상쇄되었다. 지브롤터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1704년 8월 말라가 해전에서 패배했고, 육상 포위 공격은 1705년 4월에 중단되었다.[3] 영국과 카탈루냐 대표 간에 1705년 체결된 '제노바 조약'은 북동부에 제2전선을 열었다. 연합군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를 점령하면서, 부르봉 왕가가 서지중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주요 항구는 툴롱만 남게 되었다.[4]
1706년 5월 스페인의 필리페 5세가 바르셀로나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부재로 연합군이 마드리드와 사라고사를 점령했지만, 기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보급을 받을 수 없어 철수해야 했다. 1706년 11월까지 필리페는 카스티야 왕관, 무르시아 및 발렌시아 왕국의 일부를 장악했다.[4] 1706년 동안 연합군이 스페인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고, 갤웨이는 1707년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여 이를 이용하려 했다. 이에 맞서 제임스 핏제임스, 버윅 공작 1세가 스페인 북동부에서 부르봉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총 33,000명의 병력이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으로 나뉘어 배치되었고, 여러 아일랜드 연대도 포함되었다.[5]
발렌시아로 진격하기 전에, 버윅은 사티바를 포위하기 위해 8,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 연합군 사령관인 피터버러 백작은 갤웨이와 미나스가 이끄는 16,500명의 병력과 합류하기보다는 카탈루냐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은 버윅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할 때 심각한 열세에 놓였다.[6] 4월 22일, 버윅은 발렌시아에 있는 연합군 주둔군의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는 알만사 마을 외곽에 진을 쳤다.[5]
2. 2. 1706년까지의 전황
스페인에서의 군사 작전은 플랑드르나 이탈리아보다 보급 문제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현지에서 사료와 보급품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건조한 스페인 북부 지역에서는 작전이 제한되었다. 해상 통제권을 가진 연합군은 해안 지역 밖에서 단기적인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대중적 지지가 부족하여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대동맹은 1703년 5월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가 동맹에 합류하면서 리스본에 작전 기지를 확보했고, 1704년 3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이 육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했다.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부르봉 동맹은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에서 일련의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이 지브롤터 점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1704년 8월 말라가 해전에서 패배하고, 1705년 4월 육상 포위 공격이 중단되면서 지브롤터 탈환 시도는 좌절되었다.[4] 1705년 영국과 카탈루냐 대표 간에 체결된 '제노바 조약'은 북동부에 제2전선을 열었다. 연합군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를 점령하면서, 부르봉 왕가가 서지중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주요 항구는 툴롱만 남게 되었다.
1706년 5월 스페인의 필리페 5세가 바르셀로나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부재로 연합군이 마드리드와 사라고사를 점령했지만, 보급 문제로 철수해야 했다. 1706년 11월까지 필리페는 카스티야 왕관, 무르시아 및 발렌시아 왕국의 일부를 장악했다. 1706년 동안 연합군이 스페인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고, 갤웨이는 1707년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여 이를 이용하려 했다.
2. 3. 1707년, 새로운 국면
1706년 스페인 왕 필리페 5세의 제2차 바르셀로나 포위전이 실패하자, 포르투갈·카탈루냐·발렌시아 연합군은 필리페 5세를 지지하는 카스티야의 수도 마드리드로 진격하였다. 고웨이 백작, 피터버러 백작, 카를 대공 등은 필리페 5세가 버리고 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발렌시아로 후퇴하였고, 필리페 5세가 마드리드로 돌아오면서 전황은 다시 시작되었다.[4]1707년, 피터버러는 영국으로 소환되었고, 고웨이가 영국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미나스 후작과 함께 발렌시아에서 마드리드로 재진출을 결정하였으나, 카를 대공은 발렌시아 방어에 남았다. 고웨이는 네덜란드-포르투갈 연합군을 이끌었지만, 출병은 미흡했다. 한편, 필리페 5세 휘하에 파견된 프랑스군 장군 베릭 공작은 마드리드에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필리페 5세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할아버지인 프랑스 왕 루이 14세도 스페인에 원군을 보냈다.
4월 25일, 양군은 마드리드 동쪽 알만사에서 충돌하였다. 대포 사격으로 시작된 전투에서 스페인-프랑스 연합군 우익의 기병대와 보병대가 연합군 좌익을 격퇴시켰다. 중앙에서는 영국-포르투갈 보병대와 위그노 연대가 선전하였으나, 스페인군 좌익의 프랑스 기병대는 연합군 우익의 포르투갈 기병대를 격파하였고, 연합군은 측면 공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고웨이는 5000명의 잔병을 이끌고 카탈루냐로 도망쳤으나,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전투는 연합군의 완패로 끝났다.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의 사상자는 3500명이었던 반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5000명, 포로 12000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는 카미자르 봉기에서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켰던 장 카바리에가 연합군에 참여하여 위그노 연대를 이끌고 영국군 휘하에서 싸웠다.
전후 베릭은 스페인의 연합군 거점 점령에 나서, 5월에 발렌시아를 함락시켰다. 프랑스에서 온 원군을 거느린 오를레앙 공작도 아라곤을 평정하였고, 카를 대공의 거점은 카탈루냐밖에 남지 않았다. 11월에는 발렌시아의 도시 레이다도 스페인군에 함락되었고, 스페인의 연합군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필리페 5세는 스페인 대부분을 장악하였다.[5]
3. 전투
전투는 포격전으로 시작되었다. 고웨이가 예비대를 부르봉 군대 중앙에 투입하자, 베릭은 영국-포르투갈 군대의 약점을 노려 프랑스-스페인 기병에게 공격을 명령하여 포르투갈 기병대를 궤멸시켰다. 고웨이는 약 5,000명의 병력을 잃고 12,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2,000명의 병력 중 5,000명만이 토르토사로 퇴각했다.
전투의 자세한 경과는 '전투 경과'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양측 군대 배치

4월 25일 이른 아침, 연합군은 진영을 풀고 긴 행군 끝에 알만사에 도착했다. 베릭 공작은 도시 바로 앞에 군대를 두 줄로 배치했는데, 중앙에는 보병, 양쪽 날개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기병을 배치했다. 갤웨이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짧은 포격전 후 오후 중반에 공격을 시작했다. 갤웨이의 보병은 부르봉군 중앙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그들과 오른쪽에 있던 미나스 후작(63세)이 지휘하는 포르투갈군 사이에 틈이 생겼다. 이를 본 프랑스-스페인 기병이 공격했고, 베릭의 기록에 따르면 포르투갈군은 한동안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붕괴되어 도망쳤다. 미나스 후작이 직접 지휘하는 소수의 기병대가 후퇴를 엄호했는데, 여기에는 남장을 하고 싸우다 전사한 그의 정부도 포함되었다.[4]
부르봉 군대는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 그리고 강력한 아일랜드 연대를 포함하여 약 2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맞서 연합군은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로 구성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었다.
3. 2. 전투 경과
1707년 4월 25일, 양군은 마드리드 동쪽 알만사에서 충돌했다.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도시 바로 앞에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를 배치했는데, 중앙에는 보병을, 양쪽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는 아일랜드 연대를 포함하여 약 2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맞서 연합군은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로 구성되었다.[4]
전투는 대포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고웨이 백작 헨리 드 마슈가 예비대를 부르봉 군대의 중앙부에 대한 공격에 투입하자, 베릭은 영국-포르투갈 군대의 약한 부분을 노려 프랑스-스페인의 강력한 기병대에게 공격을 명령했고, 그 결과 포르투갈 기병대를 궤멸시켰다. 중앙에서는 영국-포르투갈 보병대와 위그노 연대가 선전하였으나, 스페인군 좌익의 프랑스 기병대는 연합군 우익의 포르투갈 기병대를 격파하였다. 이들은 한동안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붕괴되어 도망쳤다. 미나스 후작 휘하의 소수 기병대가 이들의 후퇴를 엄호했는데, 여기에는 남장을 하고 싸우다 전사한 그의 정부도 포함되었다.[4]
연합군 중앙은 이제 삼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갤웨이는 남은 기병을 이용하여 일부 부대를 성공적으로 철수시켰지만, 13개 대대가 나머지 군대와 연락이 끊겼다. 스페인 기병의 추격을 받아 전장에서 약 약 12.87km 떨어진 곳에 방어진을 구축했지만 다음날 아침 항복했다.
전투는 연합군의 완패로 끝났다. 고웨이는 5,000명의 잔병을 이끌고 토르토사를 거쳐 카탈루냐로 도망쳤으나,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는 카미자르 봉기에서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켰던 장 카바리에가 연합군에 참여하여 위그노 연대를 이끌고 영국군 휘하에서 싸웠다.[4][5]
연합군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3. 3. 전투의 특징: 위그노 용병 참전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는 강력한 아일랜드 연대를 포함하여 약 25,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맞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로 구성된 부대를 출격시켰다. 알만사 전투에는 카미자르 봉기에서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켰던 장 카바리에가 연합군에 참여하여 위그노 연대를 이끌고 영국군 휘하에서 싸웠다.[4]4. 영향
알만사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의 결과는 단순히 군사적인 승패를 넘어 스페인 내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1706년, 펠리페 5세의 제2차 바르셀로나 포위전이 실패한 후, 포르투갈, 카탈루냐, 발렌시아 연합군은 카스티야의 수도 마드리드로 진격했다. 고웨이 백작, 피터버러 백작, 카를 대공 등이 마드리드에 입성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발렌시아로 후퇴해야 했다. 펠리페 5세가 마드리드로 돌아오면서 전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4]
1707년, 피터버러가 영국으로 소환되고 고웨이가 영국군 사령관이 되었다. 고웨이는 미나스 후작 안토니오 루이스 데 소사와 함께 마드리드로 재진출을 시도했지만, 카를 대공은 발렌시아 방어에 남았다. 한편, 펠리페 5세 휘하의 프랑스군 장군 베릭 공작은 마드리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펠리페 5세를 지원했고, 루이 14세도 스페인에 원군을 보냈다.
1707년 4월 25일, 양군은 알만사에서 격돌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은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연합군은 5,000명이 전사하고 1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는 장 카바리에가 이끄는 위그노 연대도 연합군 측에서 참전했다.[5]
전투 후 베릭은 스페인의 연합군 거점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5월에는 발렌시아를 함락시켰다. 필리페 2세 (오를레앙 공작)가 이끄는 프랑스 원군은 아라곤을 평정했고, 카를 대공의 거점은 카탈루냐만 남게 되었다. 11월에는 레이다마저 함락되면서 스페인의 연합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펠리페 5세는 스페인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5]
4. 1. 스페인 내전의 전환점
이 전투는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조의 왕좌 기반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단계로 평가된다.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주요 군대가 괴멸됨으로써 왕위를 노리던 앙주 공작의 주도권과 바르셀로나를 획득하게 되었다.[4]사티바(Xàtiva)시는 불타버렸고, 이 도시는 징벌에 대한 의미로 '산 펠리페'(San Felipe)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오래전에 합스부르그 왕위 계승자의 유일한 동맹자로 남아있던 카를 대공은 그의 영지인 카탈로니아(Catalonia)와 발레아레스 제도(Balearic Islands)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알만사 전투는 "전쟁 중 스페인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투"로 묘사되어 왔다. 베릭 공작의 전술은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18세기 최고의 인상적인 전투로 묘사하기도 했다. 승리는 필립 5세의 스페인 북동부와 발렌시아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으며, 1707년 말까지 연합군은 다시 카탈루냐와 발레아레스 제도로 밀려났다.[5]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하티바 공성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고, 6월에 항복하자 마을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이름이 '산 필리페'로 바뀌었다. 패배와 그 결과로 인한 발렌시아와 카탈루냐 자치권의 상실은 두 가지 현대 속담을 낳았다. "De ponent, ni vent ni gent,"('서쪽에서는 바람도 사람도 없다')와 ''Quan el mal ve d'Almansa, a tots alcança,'' ('알만사에서 온 나쁜 소식은 모두에게 미친다').

4. 2. 발렌시아 지역에 대한 탄압
사티바(Xàtiva)는 펠리페 5세 군대에 의해 불태워졌고, 징벌의 의미로 도시 이름이 ''산 펠리페''(San Felipe)로 변경되었다.[4] 이를 기념하여 지역 박물관에는 국왕의 초상화가 거꾸로 걸려 있다.[5] 이 패배와 그 결과로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의 자치권이 상실되면서, "De ponent, ni vent ni gent,"('서쪽에서는 바람도 사람도 없다')와 ''Quan el mal ve d'Almansa, a tots alcança,'' ('알만사에서 온 나쁜 소식은 모두에게 미친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5. 유산
프리드리히 대왕은 알만사 전투를 "우리 시대에 가장 과학적인 전투"로 묘사했으며, 윈스턴 처칠은 이 패배를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나치 독일에게 궤멸당할 위기에 놓인 영국군의 상황에 비유했다.
알만사 전투는 "전쟁 중 스페인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투"로 묘사되었다. 베릭 공작의 전술은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18세기 최고의 인상적인 전투로 꼽았다. 이 승리로 펠리페 5세는 스페인 북동부와 발렌시아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으며, 1707년 말 연합군은 카탈루냐와 발레아레스 제도로 밀려났다.
하티바 공성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승리하고 6월에 항복하면서, 마을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산 필리페'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국왕의 초상화가 현재 지역 박물관에 거꾸로 걸려 있다.
5. 1. 발렌시아 지역의 자치권 상실
최근 발렌시아 지역에서는 ''Quan el mal ve d'Almansa, a tots alcança'' ("알만사에서 온 소식은 무조건 나쁜 소식이다." 혹은 문자 그대로 "알만사에서 오는 나쁜 소식은 모두에게 미친다"라는 뜻이 있으며, 이는 영어로 비교하면 "안 좋은 소식을 불러오는 나쁜 바람"(It's an ill wind that blows no good)이라는 뜻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이 패배의 결과로 인해 발렌시아 왕국의 자치권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억압당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1] 패배와 그 결과로 인한 발렌시아와 카탈루냐 자치권의 상실은 "De ponent, ni vent ni gent,"('서쪽에서는 바람도 사람도 없다')와 같은 또 다른 현대 속담도 낳았다.[1]6. 평가
프리드리히 대왕은 알만사 전투를 "우리 시대에 가장 과학적인 전투"로 묘사하였으며, 윈스턴 처칠은 이 패배를 2차 세계대전 초기 나치 독일의 손아귀에 놓여 궤멸을 기다리는 영국군의 상황에 비교하였다.[1]
발렌시아 지역에서는 ''Quan el mal ve d'Almansa, a tots alcança''("알만사에서 온 소식은 무조건 나쁜 소식이다." 또는 "알만사에서 오는 나쁜 소식은 모두에게 미친다"라는 뜻이며, 영어 속담 "It's an ill wind that blows no good"(나쁜 소식을 불러오는 나쁜 바람)과 비슷하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이 패배의 결과로 발렌시아 왕국의 자치권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억압당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1]
참조
[1]
서적
Bulletin de la Commission pour l'histoire des églises Wallonnes
https://books.google[...]
Martinus Nijhoff
2023-07-04
[2]
서적
La guerra de sucesión en Valencia (De bello rustico Valentino)
Real Instituto de Estudios Asturianos
[3]
서적
Resumen de historia de España: con un breve compendio dialogado para los niños
https://books.google[...]
Litogr. del autor
[4]
서적
루이十四世의 세기(二), 스페인 계승 전쟁
[5]
서적
루이十四世의 세기(二), 루이十四世의 세기(三), 스페인 계승 전쟁
[6]
서적
The Middle Sea. A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Chatto & Win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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