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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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렌시아 왕국은 아라곤의 하메스 1세가 1232년부터 정복을 시작하여 1238년 발렌시아를 점령하면서 건국되었다. 이후 알미즈라 조약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무데하르 문제와 무슬림 반란을 겪었다. 15세기에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16세기 이후 스페인 제국의 대두와 무역 중심지 변화, 모리스코 추방 등으로 쇠퇴했다. 1707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하며 법적,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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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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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발렌시아어: Regne de València 스페인어: Reino de Valencia 라틴어: Regnum Valentiae |
국가 이름 | 발렌시아 왕국 |
시대 | 중세 / 근세 |
정부 형태 | 군주제 |
존속 기간 | 1238년 ~ 1707년 |
이전 | 발렌시아 타이파 데니아 타이파 |
이후 | 부르봉 스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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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발렌시아 |
공용어 | 발렌시아어 아라곤어 카스티야어 안달루시아 아랍어 라틴어 |
국교 | 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
종교 | 소수: 이슬람교, 유대교 |
입법부 | 발렌시아 법원 |
현재 국가 | 스페인 |
정치 | |
정부 형태 | 군주제 |
역사 | |
성립 | 1238년 |
해체 | 1707년 |
2. 재정복
발렌시아 왕국의 재정복은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초기 정복 이후,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알미즈라 조약을 통해 세력 범위를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무데하르) 인구 문제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무데하르는 새로 건국된 왕국 경제에 필수적이었지만, 충성심 부족과 오스만 제국과의 연계 가능성 때문에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1] 무데하르 족장 알-아즈라크는 1244년, 1248년, 1276년에 걸쳐 세 차례의 주요 반란을 일으켰다.[1] 첫 번째 반란에서는 주카르 강 남쪽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무슬림 독립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곧 항복했다. 두 번째 반란에서는 하메스 1세가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했으나, 알-아즈라크는 오랜 관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세 번째 반란에서 알-아즈라크는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이 무슬림의 불안을 계속 조장했다.[1]
이후 하메스 2세는 남진 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고, 1304년 토레야스 중재 판결과 1305년 엘체 조약을 통해 발렌시아 왕국의 최종 경계가 확정되었다.
2. 1. 초기 정복 (1232-1238)
훗날 발렌시아 왕국이 될 곳의 정복은 123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아라곤 연합왕국의 국왕 하메스 1세(정복왕 하우메 1세)는 주로 아라곤 군대를 이끌고 모렐라를 점령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1233년에는 보리아나와 페니스콜라를 아랍어로 ''발란시아''(بلنسية) 타이파에서 점령했다.[1]
두 번째 확장은 1238년에 하메스 1세가 발란시아 타이파에서 무어인을 물리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238년 10월 9일에 발렌시아에 입성했는데, 이는 발렌시아 왕국의 시작으로 여겨진다.[1]
세 번째 단계는 1243년에 시작되어 1245년에 끝났다. 이때 하메스 1세와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 알폰소 10세(현명왕 알폰소)는 알미즈라 조약을 통해 양국 간의 영향력 영역을 조정하고, 무어인을 남쪽으로 몰아내기 위한 재정복 노력을 계속했다. 이 조약으로 알리칸테 지방 북쪽의 비아르와 부소트 마을을 잇는 경계선이 아라곤의 남쪽 확장 한계선으로 확립되었다. 이 경계선 남쪽의 모든 지역, 즉 무르시아 왕국이 될 지역은 카스티야에 속하게 되었다.[1]
2. 2. 확장과 알미즈라 조약 (1243-1245)
훗날 발렌시아 왕국이 되는 지역의 정복은 123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아라곤 연합왕국의 국왕 하메스 1세(정복자 하우메 1세)는 주로 아라곤 군대를 이끌고 모렐라를 점령했다. 1233년에는 보리아나와 페니스콜라를 ''발란시아'' بلنسية (아랍어로 ''발렌시아'') 타이파에서 점령했다.
1238년, 하메스 1세가 발란시아 타이파에서 무어인을 물리치면서 두 번째이자 더 중요한 확장이 이루어졌다. 1238년 10월 9일, 하메스 1세의 발렌시아 입성은 발렌시아 왕국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 단계는 1243년에 시작되어 1245년에 끝났다. 이 시기에 하메스 1세와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 현명왕 알폰소 사이에 합의된 경계가 확정되었다. 알폰소 10세는 125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 경계는 카스티야 왕관과 아라곤 왕관 사이의 알미즈라 조약을 통해 확립되었으며, 각자의 영향력 범위를 설정하여 무어인을 남쪽으로 몰아내는 재정복 노력을 조정했다. 알미즈라 조약은 오늘날 알리칸테 지방 북쪽의 비아르와 부소트 마을을 잇는 선을 아라곤의 남쪽 확장 경계로 설정했다. 이 경계선 남쪽의 모든 지역, 즉 훗날 무르시아 왕국이 되는 지역은 카스티야에 속하게 되었다.
2. 3. 하메스 2세의 남진과 최종 경계 확정 (1296-1305)
하메스 2세(''하우메 2세 엘 저스트'' 또는 저스트)는 하메스 1세의 손자였다. 그는 1296년에 비아르-부소 조약보다 더 남쪽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의 원정은 무르시아 주변의 비옥한 시골과 베가 바하 델 세구라를 목표로 했다. 이 지역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카스티야와 조약을 맺고 이 왕국을 대신하여 대리 통치를 했다. 카스티야 군대는 종종 이 지역을 습격하여 주권을 주장했지만, 안정적이지는 않았고 국경 지역의 전형적인 전투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맹이 특징이었다.하메스 2세의 원정은 성공적이어서 발렌시아 왕국의 경계를 카스티야와 이전에 합의한 국경보다 훨씬 남쪽으로 확장했다. 그의 군대는 오리우엘라와 무르시아를 점령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 사이의 확실한 경계선은 ''Sentencia Arbitral de Torrellas''(1304)에 의해 합의되었고, 엘체 조약(1305)에 의해 수정되어 오리우엘라( 알리칸테와 엘체 포함)는 발렌시아 왕국에, 무르시아는 카스티야 왕국에 할당되면서 발렌시아 왕국의 최종 남부 국경이 확정되었다.
3. 무데하르 문제와 무슬림 반란
아라곤 연합왕국의 하메스 1세가 발렌시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전선에 남겨진 무데하르(무슬림) 인구는 1609년 추방될 때까지 왕국에 복잡한 문제였다. 이들은 수가 많아 경제 유지에 필수적이었지만, 충성심 부족과 오스만 제국 지원 음모 가담 등의 이유로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무어인들은 기독교 통치에 반기를 들며 자주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중 가장 위협적인 것은 무어 족장 알-아즈라크가 이끈 반란이었다.
3. 1. 알-아즈라크의 반란 (1244-1276)
아라곤 연합왕국의 하메스 1세 치하에서 무데하르(무슬림) 인구 다수가 남겨졌고, 이들은 1609년 추방될 때까지 왕국에 복잡한 문제였다. 무데하르는 경제 유지에 필수적이었지만, 충성심 부족과 오스만 제국 구출 음모 가담 등의 이유로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무어인들은 기독교 통치에 반기를 들며 자주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중 가장 위협적인 것은 무어 족장 알-아즈라크가 이끈 반란이었다. 알-아즈라크는 1244년, 1248년, 1276년에 중요한 반란을 주도했다.
첫 번째 반란에서 알-아즈라크는 주카르 남쪽 땅에 대한 무슬림 독립을 잠시 회복했지만 곧 항복해야 했다. 두 번째 반란에서 하메스 1세는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했지만, 알-아즈라크는 결국 정복당했다. 그는 기독교 군주와 오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세 번째 반란에서 알-아즈라크는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계속해서 무슬림의 불안을 조장했고, 지역 반란은 항상 예상되었다.
3. 2. 1609년 모리스코 추방
아라곤 연합왕국의 무데하르(이슬람교도) 인구 문제는 1609년에 이들이 대량으로 추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수가 많아 경제 유지에 필수적이었지만, 충성심 부족과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려는 음모 때문에 왕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무어인들은 기독교 통치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중 가장 위협적인 것은 알-아즈라크가 이끈 반란이었다. 그는 1244년, 1248년, 1276년에 중요한 반란을 주도했다. 첫 번째 반란에서는 주카르 강 남쪽 땅에 대한 무슬림 독립을 잠시 회복했지만 곧 항복해야 했다. 두 번째 반란에서 하메스 1세 국왕은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했지만, 알-아즈라크는 결국 정복당했다. 세 번째 반란에서 알-아즈라크는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계속해서 무슬림의 불안을 조장했다.
4. 권력 구조와 사회 변화
현대 역사학은 발렌시아 정복을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재정복 노력과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즉, 왕이 귀족의 농노제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운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이끈 싸움으로, 새로운 영토는 왕에게만 책임을 지므로 귀족의 권력에 비해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중세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증가하는 추세의 일부였으며, 1492년 그라나다 왕국 항복, 유대인 추방,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등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사건들을 거쳐 합스부르크 스페인 시대까지 이어졌다.[1]
군주제가 귀족의 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쉽지 않았다. 귀족은 여전히 많은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Lleis de Repartiments'' 하에 통치되는 새로 획득한 영토의 Christian 식민지화에서 나타났다. 아라곤 귀족은 여러 영토를 부여받았지만, 발렌시아 왕국의 대부분 산악 지대이고 인구가 희박한 내륙 지역만이었다. 왕은 해안 평야의 비옥하고 인구가 더 많은 땅을 자유 시민과 초기 부르주아지를 위해 예약했는데, 이들 도시에는 Furs 또는 왕립 헌장이 주어져 지역적으로 시민법과 행정을 규제했지만 항상 왕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1]
이러한 사실은 언어적 결과를 가져왔다. 내륙은 대부분 아라곤 왕국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져 다양한 고대 아라곤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해안 지역은 대부분 카탈로니아 공국의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이 정착민들의 언어가 이전 언어를 완전히 대체했고 일반적으로 카탈루냐어의 변형으로 간주되는 현대 발렌시아어가 되었다고 본다. 다만, 몇몇 저자는 정복자의 언어가 카탈루냐어와 이미 유사한 지역 로망스어(모자라브어)와 혼합되었다는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4. 1.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견제
현대 역사학은 발렌시아 정복을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재정복 노력과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즉, 왕이 귀족의 농노제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운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이끈 싸움으로 본다. 그러면 새로운 영토는 왕에게만 책임을 지므로, 귀족의 권력에 비해 왕의 권력이 확대되고 강화된다. 이러한 발전은 중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증가하는 추세의 일부였으며,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항복과 유대인 추방,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을 위해 아메리카를 발견한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행위로 끝났다고 하며, 합스부르크 스페인 시대까지 이어졌다.[1] 오늘날 왕국의 재인구는 이러한 역사학적 접근 방식을 통해 평가된다. 이 왕국은 원래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고 종종 대중 반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마그레브에서 이 목적을 위해 모인 무슬림 군대에 의한 심각한 복종 위협도 받았다.[1]군주제가 귀족의 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귀족은 여전히 많은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유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Lleis de Repartiments'' 하에 통치되는 새로 획득한 영토의 Christian 식민지화를 나타냈다. 마침내 아라곤 귀족은 여러 영토를 부여받았지만 발렌시아 왕국의 대부분 산악 지대이고 인구가 희박한 내륙 지역만을 얻을 수 있었다. 왕은 해안 평야의 비옥하고 인구가 더 많은 땅을 자유 시민과 초기 부르주아지를 위해 예약했는데, 그들의 도시에는 Furs 또는 왕립 헌장이 주어져서 지역적으로 시민법과 행정을 규제했지만 항상 왕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1]
4. 2. 도시 발전과 시민 계층 성장
현대 역사학은 발렌시아 정복을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재정복 노력과 비슷한 관점에서 본다. 즉, 왕이 귀족의 농노제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운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이끈 싸움으로, 새로운 영토는 왕에게만 책임을 지므로 귀족의 권력에 비해 왕의 권력이 확대되고 강화된다. 이러한 발전은 중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증가하는 추세의 일부였으며, 합스부르크 스페인 시대까지 이어졌다.[1]군주제가 귀족의 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귀족은 여전히 많은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유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Lleis de Repartiments'' 하에 통치되는 새로 획득한 영토의 Christian 식민지화로 나타났다. 아라곤 귀족은 여러 영토를 부여받았지만, 발렌시아 왕국의 대부분 산악 지대이고 인구가 희박한 내륙 지역만을 얻을 수 있었다. 왕은 해안 평야의 비옥하고 인구가 더 많은 땅을 자유 시민과 초기 부르주아지를 위해 예약했는데, 그들의 도시에는 Furs 또는 왕립 헌장이 주어져서 지역적으로 시민법과 행정을 규제했지만 항상 왕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1]
4. 3. 언어적 변화
이러한 사실은 언어적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내륙은 대부분 아라곤 왕국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고대 아라곤어, 즉 서부 로망스어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언어는 모자라브어와 현대 스페인어가 유래한 고대 카스티야어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 해안 지역은 대부분 카탈로니아 공국의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는 오키타노-로망스어 중 하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 정착민들의 언어는 이전 언어를 완전히 대체했고 일반적으로 카탈루냐어의 변형으로 간주되는 현대 발렌시아어가 되었다.
몇몇 저자는 정복자의 언어가 카탈루냐어와 이미 유사한 지역 로망스어(모자라브어)와 혼합되었다는 대안적 관점을 홍보했다.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5. 번영과 쇠퇴
1479년, 페르디난트 2세가 아라곤 국왕으로 즉위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와의 결혼으로 스페인 왕국이 탄생했고, 발렌시아는 점차 스페인에 통합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와 이사벨라 1세의 손자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은 개인 연합 형태로 영구히 합쳐졌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시대(1516년 1월 23일~1700년 11월 1일)에도 발렌시아 왕국을 이루는 영토와 도시들의 특권과 자유는 유지되었고, 법적 구조와 실체도 그대로 남았다. 발렌시아 총독이라는 새로운 직위가 만들어져 독립 왕국을 관리하게 했다.
한편, 스페인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이라는 이전 지위를 넘어 대국으로 성장했다. 제국은 이베리아 영토보다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화와 유럽 내 영토에 더 집중했다.
16세기에 발렌시아는 유럽의 주요 상업 중심지 지위를 잃었다. 스페인 내에서는 카디스와 같은 안달루시아 도시들이 대서양 무역에 유리해지면서 지중해 무역의 이익이 줄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잦은 충돌, 바르바로사 같은 오스만 사략선과 드라구트 등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으로 무역은 위축되었다. 1492년 알함브라 칙령에 따른 유대인 추방으로 이미 타격을 입었던 발렌시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3]
귀족과 상류 부르주아지, 일반 대중과 하류 부르주아지 간의 갈등 속에서 왕은 권력을 강화하고 지방 정부의 권한을 줄여나갔다. 왕은 유럽 내 영토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발렌시아 왕국에 자주 요구했지만, 발렌시아 왕국은 다른 스페인 영토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1609년 모리스코 추방은 수만 명의 농민들이 강제로 추방되면서 발렌시아 왕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약 125,000명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3] 이는 귀족 계층에게 저렴한 노동력의 상실을 의미했고, 결과적으로 큰 사회경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귀족과 상류 부르주아는 왕에게 특권 보호를 요청했고, 왕국은 점차 자치권을 잃어갔다.
5. 1. 15세기 경제적 번영과 문화 발전
발렌시아 왕국은 15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경제는 번영했고 지중해를 통한 무역을 중심으로 했다. 아라곤 왕관은 점점 더 무역을 통제하게 되었고, 대부분은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구에서 이루어졌다.발렌시아 시에는 Taula de canvi가 만들어졌는데, 일부는 은행으로, 일부는 증권 거래소 시장으로 기능했다. 전반적으로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섬유 제조업과 같은 지역 산업은 큰 발전을 이루었고 발렌시아는 유럽 전역의 상인들이 일하는 지중해 무역 중심지로 변모했다. 아마도 이 화려한 시기를 가장 잘 상징하는 특징은 실크 거래소일 것이다. 이곳은 유럽의 가장 훌륭한 시민 고딕 건축 사례 중 하나이며 15세기 말과 16세기 내내 지중해의 주요 무역 시장이었다.

발렌시아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설계에 따라 활자 인쇄기를 설치한 유럽 최초의 도시 중 하나였다. Joanot Martorell이나 Ausiàs March와 같은 발렌시아 작가들은 고전 발렌시아 문학의 정경을 발렌시아에 맞추었다.
5. 2. 16세기 이후 쇠퇴
16세기 발렌시아는 유럽의 주요 상업 중심지 지위를 북유럽과 중부 유럽 도시에 빠르게 빼앗겼다. 스페인 내에서는 대서양 무역이 카디스와 같은 안달루시아 도시에 유리해지면서 지중해 무역의 이익이 감소했다. 스페인 제국은 지중해 동부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과 자주 충돌했으며, 바르바로사와 같은 오스만 사략선과 드라구트와 같은 바르바리 해적들의 공격으로 무역이 위축되었다. 1492년 알함브라 칙령으로 인한 유대인 추방으로 이미 경제적 타격을 입은 발렌시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3]1519년, 샤를 1세는 ''게르마니''(길드)에게 무장 허가를 내렸으나, 이들은 귀족과 충돌하는 경제적 의제를 가지고 있었다. 1520년 발렌시아 총독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가 ''게르마니''를 지지하는 공무원 임명을 거부하면서 형제단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반이슬람적 측면도 강했는데, 무데하르(무슬림)는 귀족의 대농장에서 일하며 발렌시아인들의 임금을 깎아내리는 존재로 여겨졌다. 반란군들은 많은 무슬림을 학살하고 강제 세례를 시켰다. ''게르마니'' 진압 후에도 이 세례가 유효하다고 판결되어 모리스코(무슬림 "개종자")의 반란을 야기했다.
귀족과 상류 부르주아지, 일반 대중과 하류 부르주아지 간의 충돌로 왕은 권력을 확대하고 지방 정부의 권한을 축소할 수 있었다. 왕은 유럽 내 영토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발렌시아 왕국에서 자주 요청했지만, 발렌시아 왕국은 다른 스페인 왕국 영토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했다.
1609년 모리스코 추방은 수만 명의 농민들이 강제로 떠나면서 발렌시아 왕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약 125,000명이 땅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3] 이 추방은 귀족 계층의 저렴한 노동력 상실을 의미했고, 사회경제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귀족과 상류 부르주아는 왕에게 특권 보호를 요청했고, 왕국은 자치권을 잃어갔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1707년 발렌시아 왕국은 법적, 정치적 실체로서 종말을 맞았다. 발렌시아 주민들은 샤를 대공 편을 들었으나, 알만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누에바 플란타 법령이 통과되고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중앙 집권적인 스페인을 만들었다.
5. 3. 형제단의 반란 (1520-1522)
샤를 1세는 1519년에 ''게르마니''(문자 그대로 "형제단")에게 무슬림 약탈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무장할 수 있는 허가를 내렸다. ''게르마니''는 장인 길드였으며, 처음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고 약탈하는 해적과 싸우는 민간인 민병대로 활동했다. 그러나 ''게르마니''는 귀족과 충돌하는 평민이 주도하는 길드를 선호하는 경제적 의제를 가지고 있었다. 1520년, 새로 임명된 발렌시아 총독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가 ''게르마니''를 선호하는 선출직 공무원을 앉히는 것을 거부한 후, 본격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형제단의 반란(''Revolta de les Germanies'')은 1522년까지 지속되었고, 카스티야의 동시대 코무네로스의 반란과 많은 특징을 공유했다.귀족들의 경제적 분노 외에도 반란은 또한 강력한 반이슬람적 측면을 특징으로 했는데, 미신적인 대중은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의 원인을 무슬림에게 돌렸다. ''무데하르(무슬림)''는 귀족의 동맹으로 여겨졌는데, 귀족의 대농장에서 일하고 발렌시아 사람들의 임금을 깎아내어 희소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란 동안 아게르마나츠(agermanats)는 많은 무슬림을 죽이고 나머지에게 강제로 세례를 주었다. ''게르마니''가 진압된 후에도 이러한 세례가 유효하다고 판결되어 모리스코(무슬림 "개종자")의 새로운 반란이 촉발되었다.[3]
5. 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발렌시아 왕국 소멸 (1707)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1707년에 발렌시아 왕국은 법적, 정치적 실체로서 종말을 맞이했다.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합법적인 현상 유지를 주장했던 샤를 대공 편에 섰다. 그러나 알만사 전투에서 샤를 대공이 패배하면서, 발렌시아 왕국은 아라곤 왕관의 다른 자치 의회들과 함께 법적, 정치적으로 종식되었다.[3]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누에바 플란타 법령을 통해 부르봉 왕가의 중앙 집권적인 스페인을 만들었다.
참조
[1]
간행물
La memoria del reino. 600 años de la Generalitat Valenciana
http://www.presidenc[...]
Presidència de la Generalitat
[2]
서적
Barcelona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3]
뉴스
La expulsión de los moriscos, 400 años después
https://elpais.com/d[...]
200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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