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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랑글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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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랑글루아는 프랑스의 영화 보존가이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공동 설립자이다. 그는 영화 필름, 장비,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여 영화 유산의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랑글루아는 1936년 조르주 프랑주, 장 미트리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하여 영화 보존 및 상영 공간을 마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 맞서 영화를 보호했으며,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62년에는 쿠바 시네마테크 설립에도 기여했다. 1968년에는 시네마테크 운영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지만, 영화계의 지지로 복직했다. 1974년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1977년 사망 후 파리 13구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조성되었다. 그의 삶과 업적을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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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랑글루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앙리 랑글루아
원어 이름Henri Langlois
본명앙리 조르주 귀스타브 랑글루아
출생일1914년 11월 13일
출생지터키 스미르나
사망일1977년 1월 13일 (62세)
사망지프랑스 파리
국적프랑스
직업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창설자 겸 감독
알려진 정보영화 보존, 영화 아카이브, 영화사, 영화광
파트너메리 메르송

2. 생애

앙리 랑글루아는 1914년 오스만 제국 이즈미르(현 터키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화 필름 보존 및 복원 사업의 선구자였다. 파리의 명문 콩도르세 고등학교를 다녔다.[14]

사비를 들여 극소수 필름으로 시네마 아카이브를 운영했는데, 처음에는 집 욕조에 필름을 보관했다고 한다. 이후 컬렉션은 수천 편으로 늘어났다.

1936년 9월 2일, 21세의 랑글루아는 조르주 프랑주, 장 미트리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전신이 되는 시네마 아카이브를 파리에 설립했다. 처음에는 필름이 10개뿐이었고, 공개 후 잘려 매니큐어 원료 등으로 사용되던 필름을 사 모은 것이었다. 1970년에는 소장 필름이 6만 개를 넘었다. 대부분 열화되기 쉬운 셀룰로이드 필름이라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지만, 랑글루아는 필름 보관뿐 아니라 손상된 필름 복원, 복구, 상영도 진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수많은 필름을 지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고향 스미르나1919년 그리스군에 의해 파괴되고, 1922년 터키군이 탈환하면서 그리스인들이 추방되거나 살해당하는 등 파괴와 약탈을 겪었던 경험이 랑글루아가 잊혀질 뻔한 필름을 구하려 했던 이유로 여겨진다.

2. 1. 스미르나에서 파리까지 (1914-1935)

1914년 11월 13일,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스미르나(현 터키 공화국 이즈미르)에서 프랑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미르나가 그리스에 편입되었다가 터키 공화국에 의해 재정복되면서 랑글루아 가족은 프랑스로 귀향했다. 파리 9구에 정착한 랑글루아는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14] 1933년, 법학부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영화계에 투신하기 위해 바칼로레아 시험을 일부러 망쳤다. 인쇄업자 일을 하며 만난 조르주 프랑주와 함께 단편 영화 <지하철> (1934년)을 제작하기도 했다. 1935년, 폴 오귀스트 아를레의 주간지 <프랑스 영화 기술>에 무성 영화 보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를 기고했다. 같은 해, 장 미트리를 만나 여성 영화 클럽을 '세르클 뒤 시네마(영화 서클)'로 개편하고, 무성 영화 전문 클럽으로 만들었다.

2. 2.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과 활동 (1936-1977)

1936년, 앙리 랑글루아는 조르주 프랑주, 장 미트리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했다.[21] 초기에는 10편의 영화로 시작했지만,[5] 1970년대에는 6만 편 이상의 영화를 소장하게 되었다. 랑글루아는 단순 보관뿐 아니라 필름 복원과 상영에도 힘썼으며, 카메라, 영사기, 의상, 프로그램 등 영화 관련 자료도 수집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 맞서 영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22] 전후,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알랭 레네누벨 바그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스스로를 "시네마테크의 자식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2년에는 <카예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보존, 복원, 철학에 관한 주제를 펼치며 시네마테크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쿠바 시네마테크 설립에도 기여했다.

2. 3. 랑글루아 사건 (1968)

1968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는 랑글루아의 독단적인 운영 방식과 필름 관리 소홀 등을 이유로 그를 해임하려 했다. 공식적으로는 랑글루아의 관리 소홀과 보관된 필름 재고의 부적절한 보관을 이유로 2월 7일, 국립 시네마테크 이사회는 랑글루아를 피에르 바르뱅으로 교체했다.[8]

이에 영화계와 지식인 사회는 거세게 반발했으며, 알프레드 히치콕, 구로사와 아키라, 페데리코 펠리니 등 세계적인 영화감독들도 랑글루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피에르 레오, 알랭 레네, 장 뤽 고다르 등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옹호 위원회"를 결성하고 랑글루아 복직을 위한 시위를 벌였다. 파리의 시위대에는 낭테르-파리 대학교의 학생 운동가 다니엘 콘-벤디트도 포함되었다.[8]

결국 앙드레 말로는 4월 22일 랑글루아를 복직시켰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 68년 5월 시위의 전조로 평가받는다.[8] 트뤼포는 1968년 영화 ''훔친 키스''를 랑글루아에게 헌정하며, 영화 도입부에서 문이 닫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 4. 말년과 유산

1970년 랑글루아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시네마테크" 전시를 위해 시네마테크 소장품에서 7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뉴욕 시티 센터 오브 뮤직 앤 드라마가 공동 후원한 이 전시는 1970년 7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35일 연속으로 상영되었으며, 영화 매체의 첫 75년 동안 제작된 70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랑글루아는 공식 영화 산업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재와 초기 아방가르드 감독들의 작품을 포함하여 영화 제작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한 영화를 선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개최된 가장 다양한 영화 전시회였으며, 미술관의 첫 번째 주요 영화 프로젝트였다.[9]

1974년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에서의 평생 업적을 기려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10] 그는 3년 후 사망하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랑글루아의 묘에는 장 콕토가 그를 기린 말 "우리 보물을 지키는 용신 Ce dragon qui veille sur nos trésors"이 새겨져 있다.

파리 13구에 있는 앙리 랑글루아 광장은 그의 업적을 기려 명명되었다.


파리 13구에 있는 앙리 랑글루아 광장은 그의 업적을 기려 명명되었다. 2004년에는 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앙리 랑글루아, 파노럼 오브 시네마테크》가 제작되었다. 1936년 창설부터 1977년 랑글루아 사망까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위업을 다룬 작품이다.

빔 벤더스1977년 영화 《미국인 친구》를 그에게 헌정했다.

3. 랑글루아에 대한 평가 및 영향

앙리 랑글루아는 영화 필름뿐만 아니라 카메라, 영사기, 의상, 세트, 각본, 포스터 등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보존했으며, 영화 상영에도 힘을 쏟았다.[15]

1960년대 누벨바그 시기 프랑수아 트뤼포, 장뤼크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알랭 레네, 에릭 로메르 등 프랑스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며 영화 감독의 꿈을 키웠고, 스스로를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66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전위 영화제"에 랑글루아가 참가하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소장 작품들을 상영했다.[15] 크리스 마르케의 『방파제』,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 등이 상영되었다.[16][17][18]

랑글루아의 독특한 운영 방식은 1968년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에 의한 해임으로 이어지는 '''"랑글루아 사건"'''을 야기했다. 그러나 영화계의 거센 반발로 랑글루아는 복직되었고, 이는 영화인들의 승리로 기록되었다.[19]

1970년 랑글루아의 삶과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앙리 랑글루아』가 제작되었으며, 1972년 샤이요 궁에 영화 박물관이 창설되었다. 1974년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고, 1977년 사망 직전까지 시네마테크 시스템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다.[20]

3. 1. 영화 보존 철학

1936년, 앙리 랑글루아는 조르주 프랑쥐, 장 미트리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하여 영화를 역사적, 문화적 유산으로 보존하고자 했다.[21] 그는 영화 필름뿐만 아니라 카메라, 영사기, 영화 의상, 상영 시간표 등 영화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 힘썼다.[21][5] 랑글루아는 단순히 영화를 보관하는 것을 넘어, 필름이 풍화되는 것으로부터 수많은 영화를 보호하고 복원하고 상영했다.[2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랑글루아는 동료들과 함께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맞서 많은 영화들을 보호하는데 힘썼다.[22] 영화가 잊혀지는 것에 맞서 영화를 보존하고자 한 랑글루아의 욕망은 출생지인 이즈미르(스미르나)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괴되고 약탈당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랑글루아의 이러한 노력은 영화 보존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로 평가받으며,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등 프랑스 누벨 바그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시네마테크의 자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

1962년, 랑글루아는 미셸 마르도르, 에릭 로메르와의 인터뷰에서 보존, 복원, 철학에 관한 주제를 펼쳤으며, 이 인터뷰는 시네마테크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한다.

하지만 랑글루아의 방식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 기록 보관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9년 7월 10일에는 니트로 필름 화재로 소장품 일부를 잃기도 했다.[6]

3. 2. 누벨바그에 미친 영향

19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은 앙리 랑글루아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통해 젊은 영화광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접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1]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알랭 레네와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은 랑글루아의 영화 상영과 강연을 통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고,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하는 데 영감을 받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시네마테크의 자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1] 랑글루아와 그의 시네마테크는 전 세계 영화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존재였다.

3. 3. 비판과 논란

랑글루아의 독단적인 운영 방식과 필름 관리 소홀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기록 보관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6] 1959년 7월 10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니트로 필름 화재가 발생하여 소장품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이 화재의 원인과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6]

랑글루아는 국제 영화 자료 연맹(FIAF) 설립에 참여했지만, 1959년 9월, 운영 방식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FIAF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분쟁은 랑글루아가 사망한 지 몇 년 후에야 해결되었다.[7]

1968년 2월,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는 정부의 의향에 따라 랑글루아를 갑작스럽게 해임했다. 이것이 '''"랑글루아 사건"'''이다. 그러나, 곧바로 각계각층의 예술가와 지식인, 그리고 찰리 채플린, 구로사와 아키라 등 해외 영화인들로부터 랑글루아 복귀를 요구하는 서명이 쏟아졌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피에르 레오, 알랭 레네, 장뤼크 고다르 등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옹호 위원회"를 결성하여 랑글루아의 복직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결국, 같은 해 4월, 랑글루아와 해고된 직원들은 모두 원래 자리로 복직하게 되면서 영화인들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랑글루아의 독단적인 운영으로 인한 시네마테크의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랑글루아 개인의 카리스마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지배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19]

4. 랑글루아 관련 작품

앙리 랑글루아는 여러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에서 다뤄졌다.


  • Henri Langlois영어(1970)는 로베르토 게라와 에일라 허손이 제작하고 연출한 영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잉그리드 버그만, 릴리언 기시, 프랑수아 트뤼포,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등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11]
  • Citizen Langlois영어(1994)는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가 제작한 에세이 형식의 전기 영화이다. 랑글루아가 아마추어 수집가에서 누벨바그의 영웅, 그리고 스타들의 친구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12]
  • Le Fantôme de la Cinémathèque프랑스어(시네마테크의 유령, 2004)는 자크 리샤르가 랑글루아의 경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13]
  • Henri Langlois vu par...프랑스어(앙리 랑글루아, ...에 의해 보여지다, 2014)는 시네마테크가 공개한 단편 다큐멘터리이다.
  • 몽상가들》(2003)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로 랑글루아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8]

4. 1. 다큐멘터리

Henri Langlois영어(1970)는 잉그리드 버그만, 릴리언 기시, 프랑수아 트뤼포,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등과의 인터뷰를 담은 영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11] 로베르토 게라와 에일라 허손이 제작하고 연출했다.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의 1994년 다큐멘터리 영화 Citizen Langlois영어는 랑글루아의 아마추어 수집가에서 누벨바그 영웅, 그리고 스타들의 친구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에세이 형식의 전기 영화이다.[12]

2004년에는 자크 리샤르가 랑글루아의 경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Le Fantôme de la Cinémathèque프랑스어(시네마테크의 유령)을 연출했다.[13] 이 영화에는 친구, 동료, 학자, 그리고 시몬 시뇨레, 장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트뤼포, 장 미셸 아르노와 같은 영화계 유명인사들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2014년에는 시네마테크가 Henri Langlois vu par...프랑스어(앙리 랑글루아, ...에 의해 보여지다)라는 제목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이 영화에는 아녜스 바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로만 폴란스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구로사와 기요시, 빔 벤더스 등 13명의 영화감독들이 랑글루아와 그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4. 2. 극영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2003년 영화 《몽상가들》은 랑글루아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8]

참조

[1] 웹사이트 Henri Langlois: Phantom of the Cinematheque http://www.leisurefe[...]
[2] 웹사이트 Truffaut’s manifesto : La Politique des Auteurs http://www.indianaut[...] 2011-07-07
[3] 서적 Film theory: critical concepts in media and cultural studie Routledge
[4] 뉴스 HENRI LANGLOIS, 62, HISTORIAN OF FILM; Director of La Cinematheque Dies-- Founded French Archives in '36 --Collected 50,000 Movies Center of Controversy Eccentric Work Methods https://select.nytim[...] The New York Times 2010-01-10
[5] 웹사이트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http://www.francemag[...] 2008-03-16
[6] 서적 This Film is Dangerous: A Celebration of Nitrate Film FIAF
[7] 문서 Smither This Film is Dangerous
[8] 뉴스 Affaire Langlois, séance tonnante à la Cinémathèque https://www.liberati[...] Libération 2022-02-10
[8] 웹사이트 L'Affaire Langlois, matrice des États généraux du cinéma? https://www.cnc.fr/c[...] Centre national du cinéma et de l'image animée 2022-02-10
[9] 웹사이트 Finding aid for the George Trescher records related 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Centennial, 1949, 1960–1971 (bulk 1967–1970)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4-08-08
[10] 웹사이트 Honorary Oscars: Full list of 132 winners from Charlie Chaplin to Cicely Tyson https://www.goldderb[...] 2019-08-12
[11] 뉴스 Movie Review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0-05-01
[12] 웹사이트 Edgardo Cozarinsky – Citizen Langlois (1994) https://worldscinema[...] 2019-11
[13] 뉴스 It makes a persuasive case for Langlois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in the history of film. https://movies.nytim[...] NY Times 2005-10-12
[14] 문서 Henri Langlois - Leben und Werk
[15] 문서 「座談会 フィルムの幻影に憑かれて―アンリ・ラングロワ氏に聞く」 映画評論 1966-05
[16] 웹사이트 前衛記録映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の諸活動をもとに https://johokan.kyot[...] 京都精華大学情報館 2023-08-22
[17] 웹사이트 世界前衛映画祭 https://mediaarts-db[...] 文化庁 2023-08-22
[18] 간행물 世界前衛映画祭から 日本視聴覚教育協会 1966-03
[19] 서적 フランス映画史の誘惑 集英社新書
[20] 뉴스 訃報欄 アンリ・ラングロワ氏(フランス・フィルム・ライブラリー館長) 朝日新聞 1977-01-14
[21] 서적 Le pot au feu de Mary Meerson 라 디페랑스 출판사
[22] 문서 Trois fois par jour, rendez-vous au 29 La Fabrique de l'histoire 2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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