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장 콕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 콕토는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영화감독, 미술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예술가이다.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문학적 사교계에 출입하며 다다이즘 시인으로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시, 음악, 회화, 무용의 총화를 꿈꾸며 초현실주의 작품을 발표했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영화 《시인의 피》, 《미녀와 야수》, 《오르페》 등을 통해 아방가르드 영화에 기여했다. 그는 다양한 예술 사조를 넘나들며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으나, 나치 점령기 동안의 행적과 사생활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장 콕토 - 레몽 라디게
    레몽 라디게는 20세에 요절한 프랑스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육체의 악마』와 『오르겔 백작의 무도회』를 통해 도덕적 해이와 젊은 세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프랑스 심리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장 콕토 - 장 마레
    장 마레는 프랑스의 배우, 영화 감독, 조각가로, 1933년 영화 데뷔 후 장 콕토의 작품에 출연하며 명성을 얻었으며, 1998년 칸에서 사망했다.
  •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 기 드보르
    기 드보르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 시투아시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주요 이론가로서, 『스펙터클 사회』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비판하며 현대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 카산드르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카산드르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아르 데코 양식의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국제 침대차 회사 여행 광고 포스터와 뒤보네 와인 포스터, 비퓌르, 아시에 누아르, 페이그노 등의 글꼴 개발, 이브 생 로랑 로고 디자인 등으로 유명하다.
  • 프랑스의 삽화가 - 토미 웅거러
    토미 웅거러는 프랑스 출신의 삽화가, 작가, 디자이너로, 어린이 책과 사회 비판적인 작품을 통해 풍자와 에로티시즘을 다루었으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다.
  • 프랑스의 삽화가 - 에밀 바야르
    프랑스 화가이자 삽화가인 에밀 바야르는 레옹 코니에의 제자로,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 등 유명 소설 삽화, 특히 코제트 삽화로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 콕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3년의 코크토
본명장 모리스 외젠 클레망 코크토
다른 이름경박한 왕자
출생일1889년 7월 5일
출생지메종라피트, 프랑스
사망일1963년 10월 11일
사망지밀리라포레, 프랑스
직업시인
극작가
소설가
영화 감독
시각 예술가
디자이너
활동 기간1908년–1963년
서명
웹사이트장 코크토 공식 웹사이트
사생활
파트너레이몽 라디게 (1919–1923)
장 부르고앙 (1925)
장 데보르드 (1926–1933)
마르셀 키 (1933–1937)
장 마레 (1937–1947)
에두아르 데르미트 (1947–1963)

2. 생애

파리 근교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난 장 콕토는 학교를 싫어하여 문학 사교계에 출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1917년 사티, 피카소, 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 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음악·회화·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

그 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연극에 있어서도 역사, 풍속, 탐정, 발레 등으로 여러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마술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작(詩作) 전념 시기를 거쳐, 1926년부터 극작으로 되돌아와 <로미오와 줄리엣>, <오르페>, <안티고네>, <지옥의 기계> 등 고전적 명작의 현대화를 시도했다.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종목이 된 <소리>를 비롯하여, 그 후 모든 장르와 모든 테마를 이용하여 재기에 넘치는 작품을 차례로 발표해 나갔다. <르노와 알미드>, <쌍두의 독수리>, <무서운 어버이들> 등이 그 대표작이다.

1930년 전위적인 작품 《시인의 피》로써 본격적으로 극 영화 제작에 나섰다. 1955년 프랑스 예술원 회원이 되고,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작품으로 소설 《사기꾼 토마》, 《무서운 아이들》, 희곡 《지옥의 기계》, 《무서운 어른들》, 시나리오 《비련》, 《미녀와 야수》, 《오르페》 등이 있다.

장르를 넘나드는 화려한 예술적 역량은 한 장르 안에서도 갖가지 시도와 실험으로 다채로운 색채를 보여주었는데, 가령 희곡 장르만 하더라도, 동시대 예술가들(피카소, 마티스, 밀로, 사티,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등)들과 협업하여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발레극, 오페라극(《파라드》, 《지붕위의 황소》)을 시도하였는가 하면, 신화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발표하였으며(《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 셰익스피어희곡에 미학적 수술을 감행하여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선보였고(《로미오와 줄리엣》), 부르주아 연극과 낭만주의 연극, 자연주의 연극을((《쌍두 독소리》, 《성스런 괴물들》, 《무서운 부모들》 등) 시도하는 등 다양한 연극적 경험들을 보여주었다.

1936년, 세계 일주 여행 중 일본에 체류했을 때, 친구이자 일본 귀국 중인 후지타 시즈와 재회하여, 번역가 호리구치 다이고도 함께하여 스모 관람이나 가부키 관람 등 밤의 유흥가 산책을 즐겼다. 스모를 "균형의 예술"이라고 부르고, 6대째 오노에 키쿠고로를 만나 악수했지만, 그때 분칠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했기 때문에 키쿠고로를 감탄시켰다.[28] 이때 본 거울사자가 후의 《미녀와 야수》의 메이크업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에 와서 처음 충격을 받은 것은, 돌을 차는 소녀가 땅에 분필로 그린 원으로, 아이가 이렇게 정확하고 기하학적인 선을 그리는 나라는 다른 곳에는 없다고 놀라움을 표명했다.[29]

1963년 10월 11일,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암으로 사망하자, 그녀의 팬이자 절친이었던 코크토는 큰 충격을 받아 그날 밤 취침 중 심장마비로 급사했다.[30]

2. 1. 어린 시절

파리 근교의 이벨린주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 조르주 콕토는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콕토가 아홉 살 때 자살했다. 어머니는 외제니 르꽁트이다. 콕토는 열두 살 누나 마르트, 여덟 살 형 폴 다음에 태어난 막내였다.

1900년부터 1904년까지 콕토는 콩도르세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동급생 피에르 다르젤로스와 관계를 맺었다.[6] 다르젤로스는 콕토의 작품 "존 콕토: 에로틱 드로잉" 전반에 걸쳐 다시 등장한다. 15세에 가출했으며, 열아홉 살에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출판했다. 이후 보헤미아 예술계에서 "경솔한 왕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장 코크토의 초상」1912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장 코크토의 초상」1916년 유채, 캔버스


중학교 시절 미술 성적이 좋았다. 동급생 피에르 다르주로스는 소설 『무서운 아이들』의 다르주로스 모델이라고도 한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학업에 힘을 쏟지 않고, 마르셀 프루스트 등을 만나는 등 문학에 몰두했지만,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진학을 포기했다. 1909년, 자비로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발표했다.

2. 2. 초기 경력

파리 근교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난 장 콕토는 학교를 싫어하여 문학 사교계에 출입하였다. 20대 초반,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 모리스 바레스 등의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1912년에는 레옹 바크스트와 협력하여 러시아 발레단을 위해 ''푸른 신(Le Dieu bleu)''을 제작했는데,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주요 무용수로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십자에서 구급차 운전사로 복무하며 기욤 아폴리네르 시인, 파블로 피카소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화가를 비롯한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났고, 이후 그들과 협업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임프레사리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콕토에게 발레 시나리오를 쓸 것을 설득했고, 이는 1917년 ''파레이드(Parade)''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무대 디자인, 아폴리네르가 대본, 에리크 사티가 음악을 작곡했으며, 디아길레프가 제작을 담당했다. 콕토는 "만약 제복을 입고 머리가 깎인 채 관자놀이에 상처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폴리네르가 없었다면, 여자들이 우리 눈을 머리핀으로 찔렀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8]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요한 지지자였던 콕토는 레 씨즈(Les Six)로 알려진 작곡가 그룹을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대 초반, 콕토와 레 씨즈의 다른 구성원들은 르 뵈프 쉬르 르 뚜아(Le Boeuf sur le Toit)라는 인기 있는 바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바의 이름은 콕토가 직접 지었다.[9]

1909년, 자비로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발표하고, 바츨라프 니진스키를 만나는 등 발레 관련 인맥을 넓혔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단 러시아 발레를 통해 코코 샤넬 등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1911년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도 만났다.

1915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몽파르나스 화가들과 교류를 시작하고, 에릭 사티, 파블로 피카소와도 만났다. 1916년 8월 12일, 몽파르나스의 카페 「라 로통드」에서 피카소, 모이즈 키슬링, 막스 자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누엘 오르티스 데 사라테, 앙리-피에르 로슈, 마리 바실리예프, 앙드레 살몽 등과 함께 모였는데, 이때 콕토가 찍은 그들의 사진은 유명하다.

1917년, 피카소, 사티 등과 함께 제작한 발레 『파라드』가 초연되었다. 1918년, 후에 6인조라고 불리는 작곡가들을 모은 콘서트를 열었다. 1920년, 한때 관심을 가졌던 다다이즘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풀랑크 등과 재즈 연주회도 열었다. 조숙한 천재 라디게와 함께 일했지만, 1923년 그의 이른 사망은 콕토를 슬픔에 잠기게 하여, 그 후 10년간 아편에 빠지게 했다.

2. 3. 라디게와의 만남과 영향

1918년, 콕토는 프랑스 시인 라디게(Raymond Radiguet)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여행과 휴가를 보냈으며, 콕토는 라디게가 군 복무를 면제받도록 돕기도 했다.[10] 콕토는 라디게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작품을 홍보하고, 그라세 출판사에서 소설 ''몸 속의 악마'' 출판을 주선하여 "누보 몽드" 문학상을 수상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장 콕토 초상(Portrait de Jean Cocteau)'', 1921


일부에서는 그들의 우정에 낭만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콕토 자신은 그들의 관계가 성적인 본질을 띠었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10]

1923년, 라디게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콕토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의견과,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의 ''결혼식(Les noces)'' 공연을 위해 몬테카를로(Monte Carlo)로 떠났다는 반론이 엇갈린다. 콕토의 아편 중독은[11] 몬테카를로 오페라(Monte Carlo Opera)의 관리인 루이 랄로이(Louis Laloy)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한 것이었다. 콕토는 힘든 아편 금단 과정 중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을 집필했으며, 1929년에는 아편 중독에서 회복한 경험을 담은 ''Opium: Journal d'une désintoxication''을 출간했다.

2. 4. 중년의 활동: 문학과 영화

1929년, 그의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소설 무서운 아이들이 출판되었다.[4] 1930년 코크토는 그의 첫 번째 영화 시인의 피를 제작했고, 1932년에 공개적으로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는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 영화로 받아들여지지만, 초현실주의자들 자신은 이를 진정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인의 피는 코크토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지만, 1930년대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큰 성공을 거둔 인간의 목소리와 무서운 부모들을 비롯한 여러 희곡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의 1934년 희곡 지옥의 기계는 코크토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무대 버전으로 각색한 작품이며, 그의 극작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여겨진다.[12] 이 기간 동안 코크토는 신문 파리-소아르를 위해 제작한 쥘 베른(Jules Verne)의 새로운 스타일의 세계 일주 여행 기사인 『나의 첫 번째 여행: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포함한 두 권의 저널리즘 작품을 출판했다.[4]

2. 5. 1940년대와 나치 점령기 논란

장 코크토는 평생 정치 운동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 한 친구에게 "나의 정치적 입장은 없다"고 고백했다.[13] 클로드 아르노에 따르면, 1920년대부터 코크토의 유일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은 평화주의반인종주의였다.[14] 그는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프랑스 공화국을 칭찬했고, 피카소의 반전 그림 ''게르니카''를 "프랑코가 항상 어깨에 지고 다닐 십자가"라고 칭찬했다.[15] 1940년 코크토는 국제 반유대주의 연맹이 배포한 탄원서에 서명하여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증가에 항의했고, 여행 중 식민지 주민들의 고통을 목격한 후 "자신의 흰 피부가 부끄럽다"고 선언했다.[14]

1938년 코크토는 아돌프 히틀러를 유대인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을 저지르고 싶어하는 악의적인 데미우르고스에 비유했지만, 그의 친구 아르노 브레커는 히틀러가 평화주의자이자 프랑스의 이익을 염두에 둔 예술 후원자라고 그를 설득했다.[14] 나치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그는 파리 조르주 5세 호텔에서 만난 프랑스와 독일 지식인들의 '원탁 회의'에 참석했는데, 여기에는 코크토, 작가 에른스트 융거, 폴 모랑, 앙리 밀롱 드 몽테를랑, 출판인 가스통 갈리마르, 그리고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가 포함되었다.[16] 코크토는 일기에서 프랑스가 히틀러에 대해 무례하게 대해왔다고 비난하고, 총통의 성적 취향에 대해 추측했다. 코크토는 1942년에 발표된 '브레커에게 경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브레커의 조각상을 열렬히 칭찬했다. 이 글 때문에 그는 전쟁 후 협력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잘못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고, 막스 자코브와 같은 친구들을 구하려는 실패한 시도를 위해 자신의 인맥을 사용했었다. 나중에 루이 아라고와 같은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워진 후, 코크토는 요셉 스탈린을 "그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치가"라고 지칭했다.[17]

1940년, 에디트 피아프(코크토가 죽기 하루 전에 사망)를 위해 쓰고 그녀가 주연한 코크토의 희곡 ''냉담한 미남''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18]

2. 6. 후기 활동과 죽음

콕토의 말년은 주로 그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콕토가 대부분 각본과 연출을 맡은 그의 영화들은 프랑스 영화에 아방가르드를 소개하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등장한 프랑스 누벨바그 장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3]

콕토가 ''미녀와 야수''(1946)를 연출하는 모습.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영화로는 ''시인의 피''(1930)에 이어 ''미녀와 야수''(1946), ''레 파랑 테리블''(1948), 그리고 ''오르페우스''(1949)가 있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르 테스타망 도르페''(''오르페우스의 유언'') (1960)에는 피카소와 투우사 루이스 미구엘 도밍긴 외에도 영화 제작 자금을 지원한 율 브리너가 출연했다.

1945년 콕토는 떼아뜨르 드 라 모드의 세트를 디자인한 여러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레네 클레르에게 바치는 헌사: 나는 마녀와 결혼했다''를 제작하면서 영화 감독 레네 클레르에게 영감을 받았다. 마케트는 그의 "1942-1945 일기" 1945년 2월 12일 항목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1956년 콕토는 빌프랑슈쉬르메르의 ''생피에르 예배당''에 벽화를 장식했다. 이듬해에는 망통의 시청 결혼식장도 장식했다.[19]

장 코크토는 자신의 양성애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1928년 익명으로 출판된 약간의 동성애적이고 자전적인 성격을 띤 소설 《백서》의 저자였다.[20] 그는 저작권을 포기한 적이 없으며, 후속판에는 그의 서문과 그림이 실려 있다.

그의 작품, 즉 문학 작품(《무서운 아이들》), 미술 작품(에로틱한 그림, 책 삽화, 회화) 또는 영화 작품(《시인의 피》, 《오르페우스》, 《미녀와 야수》)은 종종 동성애적 암시, 동성애적 이미지/상징 또는 캠프로 가득 차 있다. 1947년 폴 모리엔은 장 주네의 《브레스트의 퀘렐》의 비밀 출판물을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코크토의 매우 노골적인 에로틱한 그림 29점이 실려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코크토의 동성애적 작품 앨범 여러 권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930년대에 콕토는 로마노프 대공인 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딸이자 배우, 모델, 그리고 한때 디자이너 뤼시앵 르롱의 전처였던 나탈리 팔레이 공주와 아주 짧은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있다.[21]

콕토의 가장 오래 지속된 관계는 프랑스 배우 장 마레[22]와 코크토가 정식으로 입양한 에두아르 데르미였다. 콕토는 마레를 《영원한 귀환》(1943), 《미녀와 야수》(1946), 《뤼이 블라스》(1947), 그리고 《오르페우스》(1949)에 출연시켰다.

콕토는 1963년 10월 11일, 74세의 나이로 프랑스 에손주 밀리라포레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친구인 프랑스 가수 에디트 피아프는 전날 사망했지만, 콕토의 사망 당일 아침에야 발표되었다. 거의 확실히 사실이 아닌 이야기이지만, 피아프의 죽음을 듣고 콕토의 심장이 멈췄다는 이야기가 있다. 콕토의 건강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악화되고 있었고, 1963년 4월 22일에는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은 바 있다. 이러한 건강 악화의 원인에 대한 보다 그럴듯한 설명은 작가 로제 페르피트[23]가 제시했는데,[24] 그는 콕토가 오랜 친구이자 사교계 명사이자 유명한 후원자였던 프랑신 베이스빌러와의 불화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이 불화는 그녀가 한 무명 작가와의 불륜 때문이었다. 베이스빌러와 콕토는 콕토의 죽음 직전에 화해했다.

콕토의 유언에 따라 그는 밀리라포레의 생 블레즈 데 심플 예배당 바닥 아래에 매장되었다.[25] 예배당 바닥에 설치된 그의 묘비에는 "나는 너와 함께 남는다"라고 적혀 있다.

3. 주요 작품

장 콕토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문학과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주요 작품을 남겼다.

1917년 사티, 피카소, 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 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 음악, 회화, 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1] 1930년에는 전위적인 작품 《시인의 피》를 통해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다.

이후 소설 《사기꾼 토마》, 《무서운 아이들》, 희곡 《지옥의 기계》, 《무서운 어른들》, 시나리오 《비련》, 《미녀와 야수》, 《오르페》 등을 발표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955년 프랑스 예술원 회원이 되면서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콕토는 희곡 장르에서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발레극, 오페라극(《퍼레이드》, 《지붕위의 황소》)을 시도하고, 신화를 재해석하거나(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새롭게 선보이는 등(《로미오와 줄리엣》) 다양한 시도를 했다. 또한 부르주아 연극, 낭만주의 연극, 자연주의 연극 (《쌍두 독소리》, 《성스런 괴물들》, 《무서운 부모들》 등)도 시도했다.

3. 1. 문학

장 콕토는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활동했다.

  • '''시'''

  • '''소설'''

  • '''희곡'''

  • '''평론'''


콕토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17년 사티, 피카소, 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 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 음악, 회화, 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1]

3. 2. 영화

콕토의 말년은 주로 그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콕토가 대부분 각본과 연출을 맡은 그의 영화들은 프랑스 영화에 아방가르드를 소개하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등장한 프랑스 누벨바그 장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3]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영화로는 ''시인의 피''(1930), ''미녀와 야수''(1946), ''레 파랑 테리블''(1948), ''오르페우스''(1949)가 있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르 테스타망 도르페''(''오르페우스의 유언'') (1960)에는 피카소와 투우사 루이스 미구엘 도밍긴(Luis Miguel Dominguín) 외에도 영화 제작 자금을 지원한 율 브리너(Yul Brynner)가 출연했다.

1945년 콕토는 떼아뜨르 드 라 모드의 세트를 디자인한 여러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레네 클레르에게 바치는 헌사: 나는 마녀와 결혼했다''를 제작하면서 영화 감독 레네 클레르(René Clair)에게 영감을 받았다.

1956년 콕토는 빌프랑슈쉬르메르의 ''생피에르 예배당''에 벽화를 장식했다. 이듬해에는 망통의 시청 결혼식장도 장식했다.[19]

장 콕토 감독 영화
연도제목비고
1925Jean Cocteau fait du cinéma분실[26]
1930'Le Sang dun poète'' (시인의 피)
1946La Belle et la Bête (미녀와 야수)
1948'LAigle à deux têtes''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1948Les Parents terribles (무서운 부모들)
1950Orphée (오르페우스)
1950Coriolan미공개 가정 영화[27]
1952La Villa Santo-Sospir (산토소스피르 빌라)
1955'LAmour sous llectrode
19578 × 8: A Chess Sonata in 8 Movements (8 × 8: 체스 소나타 8악장)
1960'Le Testament dOrphée'' (오르페우스의 유언)



장 콕토 각본 영화
연도제목감독비고
1943'LÉternel Retour''장 들라누아
1944Les Dames du Bois de Boulogne로베르 브레송
1948Ruy Blas피에르 비용
1950Les Enfants terribles장-피에르 멜빌장 콕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 콕토 각본
1951La Couronne Noire루이스 사슬라프스키
1961La Princesse de Clèves장 들라누아
1965'Thomas limposteur''조르주 프랑주장 콕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 콕토 각본



장 콕토 원작 영화
연도제목비고
1943《유령 남작》(Le Baron fantôme)(+ 배우) 세르주 드 폴리뉴(Serge de Poligny) 감독
1961《클레브 공주》(La Princesse de Clèves)장 드라누아(Jean Delannoy) 감독
1965《사기꾼 토마》(Thomas l'imposteur)조르주 프랑주(Georges Franju) 감독



기타 참여 영화
연도제목감독
1950사랑의 노래(Un chant d'amour)장 주네(Jean Genet)


4. 예술적 특징과 영향

장 콕토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한 장르 안에서도 여러 시도와 실험을 통해 다채로운 예술 세계를 펼쳐 보였다. 희곡만 보더라도 피카소, 마티스, 밀로, 에리크 사티,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등 당대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초현실주의 발레극과 오페라극(《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을 선보였다. 또한 《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와 같이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발표하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새롭게 각색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부르주아 연극, 낭만주의 연극, 자연주의 연극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했다(《쌍두 독소리》, 《성스러운 괴물들》, 《무서운 부모들》 등).[1]

4. 1. 다원주의와 실험정신

파리 근교 메종라피트(Maisons-Laffitte) 출신으로, 학교를 싫어하여 문학 사교계에 출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17년 사티, 피카소, 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 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 음악, 회화, 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1]

이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연극에서도 역사, 풍속, 탐정, 발레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6년부터 극작으로 돌아와 <로미오와 줄리엣>, <오르페>, <안티고네>, <지옥의 기계> 등 고전 명작을 현대화했다.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된 <소리>를 비롯하여 모든 장르와 테마를 활용한 재기 넘치는 작품을 발표했다. <르노와 알미드>, <쌍두의 독수리>, <무서운 어버이들> 등이 대표작이다.[1]

1930년 전위적인 작품 《시인의 피》로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1955년 프랑스 예술원 회원이 되어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소설 《사기꾼 토마》, 《무서운 아이들》, 희곡 《지옥의 기계》, 《무서운 어른들》, 시나리오 《비련》, 《미녀와 야수》, 《오르페》 등이 있다.[1]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적 역량은 한 장르 안에서도 다양한 시도와 실험으로 나타났다. 희곡만 하더라도 동시대 예술가들(피카소, 마티스, 밀로, 에리크 사티,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브 등)과 협업하여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발레극, 오페라극(《퍼레이드》, 《지붕위의 황소》)을 시도했다. 또한 신화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발표했으며(《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미학적 수술을 감행하여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선보였다(《로미오와 줄리엣》). 부르주아 연극과 낭만주의 연극, 자연주의 연극을((《쌍두 독소리》, 《성스런 괴물들》, 《무서운 부모들》 등) 시도하는 등 다양한 연극적 경험들을 보여주었다.[1]

4. 2. 그리스 신화의 재해석

1926년부터 극작으로 돌아와 Roméo et Juliette프랑스어, Orphée프랑스어, Antigone프랑스어, La Machine infernale프랑스어 등 고전적 명작의 현대화를 시도했다.[1] La Voix프랑스어를 비롯하여, 그 후 모든 장르와 모든 테마를 이용하여 재기에 넘치는 작품을 차례로 발표해 나갔다.[1] Renaud et Armide프랑스어, L'Aigle à deux têtes프랑스어, Les Parents terribles프랑스어 등이 그 대표작이다.[1] 동시대 예술가들(피카소, 마티스, 밀로, 에리크 사티,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등)들과 협업하여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발레극, 오페라극(《퍼레이드》, 《지붕위의 황소》)을 시도하였는가 하면, 신화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발표하였다.(《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3]

4. 3.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

파리 근교 메종라피트(Maisons-Laffitte)에서 태어난 장 콕토는 학교를 싫어하여 문학 사교계에 출입하며 다다이즘 시인으로 출발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1917년 사티·피카소·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 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음악·회화·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8]

150px


아방가르드 예술(avant-garde art)의 중요한 지지자였던 콕토는 레 씨즈(Les Six)로 알려진 작곡가 그룹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대 초반, 그와 레 씨즈의 다른 구성원들은 르 뵈프 쉬르 르 뚜아(Le Boeuf sur le Toit)라는 매우 인기 있는 바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인기는 콕토와 그의 친구들이 있었던 것에 크게 기인했다.[9]

콕토는 프랑스 영화에 아방가르드를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등장한 프랑스 누벨바그 장르에도 영향을 미쳤다.[3] 그의 영화로는 《시인의 피》(1930), 《미녀와 야수》(1946), 《레 파랑 테리블》(1948), 《오르페우스》(1949) 등이 있다.

5. 비판

장 콕토는 평생 정치 운동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 한 친구에게 "나의 정치적 입장은 없다"고 고백했다.[13] 1920년대부터 콕토의 유일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은 평화주의반인종주의였다.[14] 그는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프랑스 공화국을 칭찬했고, 피카소의 반전 그림 ''게르니카''를 "프랑코가 항상 어깨에 지고 다닐 십자가"라고 칭찬했다.[15] 1940년 콕토는 국제 반유대주의 연맹이 배포한 탄원서에 서명하여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증가에 항의했고, 여행 중 식민지 주민들의 고통을 목격한 후 "자신의 흰 피부가 부끄럽다"고 선언했다.[14]

하지만 나치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콕토는 파리의 조르주 5세 호텔에서 열린 프랑스와 독일 지식인들의 '원탁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작가 에른스트 융거, 폴 모랑, 앙리 밀롱 드 몽테를랑, 출판인 가스통 갈리마르,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6] 콕토는 일기에서 프랑스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고 비난하고, 총통의 성적 취향에 대해 추측하기도 했다. 또한 1942년에 발표된 '브레커에게 경례'라는 기사에서 아르노 브레커의 조각상을 칭찬하여 전쟁 후 협력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14]

콕토는 양성애자였으며, 그의 작품에는 동성애적 암시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1928년 익명으로 출판된 소설 《백서》에서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냈으며,[20] 1947년에는 장 주네의 《브레스트의 퀘렐》 비밀 출판물에 콕토의 노골적인 에로틱한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콕토의 가장 오래 지속된 관계는 프랑스 배우 장 마레[22]와 에두아르 데르미(Édouard Dermit)였다.

5. 1. 나치 협력 논란

장 코크토는 평생 정치 운동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 한 친구에게 "나의 정치적 입장은 없다"고 고백했다.[13] 클로드 아르노에 따르면, 1920년대부터 코크토의 유일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은 두드러진 평화주의반인종주의였다.[14] 그는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프랑스 공화국을 칭찬했고, 피카소의 반전 그림 ''게르니카''를 "프랑코가 항상 어깨에 지고 다닐 십자가"라고 칭찬했다.[15] 1940년 코크토는 국제 반유대주의 연맹이 배포한 탄원서에 서명하여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증가에 항의했고, 여행 중 식민지 주민들의 고통을 목격한 후 "자신의 흰 피부가 부끄럽다"고 선언했다.[14]

1938년 코크토는 아돌프 히틀러를 유대인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을 저지르고 싶어하는 악의적인 데미우르고스에 비유했지만, 그의 친구 아르노 브레커는 히틀러가 평화주의자이자 프랑스의 이익을 염두에 둔 예술 후원자라고 그를 설득했다.[14] 나치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그는 파리 조르주 5세 호텔에서 만난 프랑스와 독일 지식인들의 '원탁 회의'에 참석했는데, 여기에는 코크토, 작가 에른스트 융거, 폴 모랑, 앙리 밀롱 드 몽테를랑, 출판인 가스통 갈리마르, 그리고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가 포함되었다.[16] 코크토는 일기에서 프랑스가 히틀러에 대해 무례하게 대해왔다고 비난하고, 총통의 성적 취향에 대해 추측했다. 코크토는 1942년에 발표된 '브레커에게 경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브레커의 조각상을 열렬히 칭찬했다. 이 글 때문에 그는 전쟁 후 협력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잘못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고, 막스 자코브와 같은 친구들을 구하려는 실패한 시도를 위해 자신의 인맥을 사용했었다.

5. 2. 엘리트주의와 사생활 논란

1918년 그는 프랑스 시인 라디게(Raymond Radiguet)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여행과 휴가를 보냈으며, 콕토는 라디게가 군 복무를 면제받도록 도왔다.[10] 콕토는 라디게의 작품을 홍보하고, 그의 소설 ''몸 속의 악마'' 출판을 주선하여 문학상을 받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우정에 낭만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콕토는 이러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10]

1923년 라디게가 갑작스럽게 죽자, 콕토는 충격을 받고 아편 중독에 빠졌다는 의견과,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파리를 떠났다는 반대 의견이 존재한다.[11] 콕토의 아편 사용은 그의 문학적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은 아편 금단 과정 중에 쓰였다. 그는 1929년 아편 중독에서 회복한 경험을 ''Opium: Journal d'une désintoxication|아편: 해독 일지프랑스어''에 기록했다. 콕토는 가톨릭 철학자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의 지원을 받아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기도 했다.

장 코크토는 자신의 양성애를 숨기지 않았으며, 1928년 익명으로 출판된 소설 《백서》에서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냈다.[20] 그의 작품에는 동성애적 암시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1947년에는 장 주네(Jean Genet)의 《브레스트의 퀘렐》 비밀 출판물에 콕토의 노골적인 에로틱한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코크토는 나탈리 팔레이 공주와 짧은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있다.[21] 콕토의 가장 오래 지속된 관계는 프랑스 배우 장 마레[22]와 에두아르 데르미(Édouard Dermit)였다. 콕토는 마레를 여러 영화에 출연시켰다.

참조

[1] 웹사이트 Jean Cocteau http://www.artnet.co[...] 2021-12-29
[2] 웹사이트 Jean Cocteau https://www.poetryfo[...] 2021-12-28
[3] 웹사이트 Biography https://www.allmovie[...] 2018-10-05
[4] 서적 Jean Cocteau: A Brief Biography Abbeville Press
[5] 서적 501 Movie Directors Cassell Illustrated
[6] 서적 Jean Cocteau: Erotic Drawings Evergreen 1999
[7] 서적 A Backward Glance https://web.archive.[...] eBooks@Adelaide 2016-04-09
[8] 서적 Picasso: Creator and Destroyer Simon and Schuster 1988
[9] 웹사이트 How the ''Ox'' got its name, and other Parisian legends. http://daniellathomp[...] Musica Brasiliensis 2002-05-06
[10] 서적 Cocteau, A Biography https://archive.org/[...] Boston, Little, Brown
[11] 웹사이트 Jean Cocteau Biography – Jean Cocteau Website http://www.netcomuk.[...] Netcomuk.co.uk 1963-10-11
[12] 서적 The Theater of Jean Cocteau Abbeville Press
[13] 서적 Jean Cocteau: A Life Yale University Press 2016
[14] 서적 Jean Cocteau: A Life Yale University Press 2016
[15] 서적 Jean Cocteau: A Life Yale University Press 2016
[16] 서적 A German Officer in Occupied Paris Columbia University Press
[17] 서적 Jean Cocteau: A Life Yale University Press 2016
[18] 뉴스 Musée SACEM : Edith Piaf et Jean Cocteau https://musee.sacem.[...] 2020-08-23
[19] 서적 Jean Cocteau and the French scene Abbeville Press
[20] 웹사이트 Cocteau's White Paper on Homophobia http://rictornorton.[...] 2018-04-24
[21] 서적 Natalie Paley: Une princesse dechiree Filipacchi 1996
[22] 웹사이트 Légendes d'Écran Noir: Jean Marais http://www.ecrannoir[...] 2017-07-05
[23] 서적 Propos secrets Albin Michel
[24] 뉴스 Francine Weisweiller https://www.telegrap[...] 2004-01
[25] 서적 Resting Places: The Burial Sites of More Than 14,000 Famous Persons McFarland & Company, Inc., Publishers
[26] 서적 Jean Cocteau: A Life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9-09-02
[27] 웹사이트 Coriolan http://www.imdb.com/[...] 2019-08-31
[28] 간행물 僕の初旅 (Mon Premier voyage) 東京創元社 ジャン・コクトー全集 第5巻
[29] 웹사이트 日本への二つの「挨拶」 ―『セルパン』ジャン・コクトー来日特集号をめぐって(1)西川正也 http://www.kyoai.ac.[...]
[30] 기타 심근경색
[31] 웹사이트 三連リングの物語(仏文) https://www.richardj[...]
[32] 서적 ジャン・コクトー 幻視芸術の魔術師 講談社現代新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