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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체로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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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앵글로-체로키 전쟁은 1758년, 체로키족과 영국 식민지 간의 무력 충돌로 시작되었다. 체로키족은 과거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영국 편에 섰으나, 영국군의 불공정한 대우와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윌리엄 리틀턴 총독은 체로키족을 억압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인질 학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체로키족의 공세와 영국의 반격으로 전개되었으며, 1761년 평화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 전쟁 이후 체로키족은 영국과 조약을 맺고, 일부 지도자들은 런던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1763년 왕령으로 인해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미국 독립 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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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체로키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앵글로-체로키 전쟁 이후, 헨리 팀버레이크는 새로 선언된 우정을 굳히기 위해 세 명의 체로키족 적수를 런던으로 데려갔다.
앵글로-체로키 전쟁 이후, 헨리 팀버레이크는 새로 선언된 우정을 굳히기 위해 세 명의 체로키족 적수를 런던으로 데려갔다.
분쟁앵글로-체로키 전쟁
일부7년 전쟁
기간1758년 – 1761년
장소현재의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결과영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체로키족
지휘관
지휘관 1아타쿨라쿨라
지휘관 2윌리엄 헨리 리틀턴

2. 배경

7년 전쟁에서 체로키 부족은 1711년부터 1715년까지 벌어진 투스카로라 전쟁에서 캐롤라이나 식민지 편을 들었다.[1][2] 그러나 1715년부터 1717년까지 이어진 야마시 전쟁에서는 영국 동맹군을 배신했다가, 전쟁 중반에 다시 영국과 동맹을 맺어 야마시의 패배에 기여했다. 체로키족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영국의 동맹국으로 남았다.

1754년 전쟁 발발 이후, 체로키 전사들은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영국의 작전에 참여하여, 현재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위치한 포트 듀케인과 오하이오 컨트리의 쇼니족과 싸웠다. 1755년에는 타말리의 오스테나코가 이끄는 130명의 체로키족이 이로쿼이 연맹의 요청에 따라 오하이오 강 어귀에 있는 요새화된 마을의 수비대가 되었다.[1]

수년 동안 포트 툴루즈에서 온 프랑스 요원들은 히와시 강과 텔리코 강에 있는 오버힐 체로키를 방문하여 그 지역에 침투했다. 친프랑스 체로키 지도자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은 탈리콰의 맨킬러, 차투가, 차투가의 올드 시저, 아유와시의 레이븐이었다. 체로키족의 "첫 번째 사랑받는 사람"인 코노코토코는 친프랑스적이었으며, 그의 조카인 코노코토코도 마찬가지였다.[2]

1759년, 친프랑스적인 체로키족이 그레이트 텔리코와 차투가에 거주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머스코기족의 빅 모타르가 쿠사 추장국의 이전 부지를 재점령했다.

2. 1. 7년 전쟁과 체로키

7년 전쟁에서 체로키 부족은 1711년부터 1715년까지 벌어진 투스카로라 전쟁에서 캐롤라이나 식민지 편을 들었다.[1][2] 그러나 1715년부터 1717년까지 이어진 야마시 전쟁에서는 영국 동맹군을 배신했다가, 전쟁 중반에 다시 영국과 동맹을 맺어 야마시의 패배에 기여했다. 체로키족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영국의 동맹국으로 남았다.

1754년 전쟁 발발 이후, 체로키 전사들은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영국의 작전에 참여하여, 현재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위치한 포트 듀케인과 오하이오 컨트리의 쇼니족과 싸웠다. 1755년에는 타말리의 오스테나코가 이끄는 130명의 체로키족이 이로쿼이 연맹의 요청에 따라 오하이오 강 어귀에 있는 요새화된 마을의 수비대가 되었다.[1]

수년 동안 포트 툴루즈에서 온 프랑스 요원들은 히와시 강과 텔리코 강에 있는 오버힐 체로키를 방문하여 그 지역에 침투했다. 친프랑스 체로키 지도자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은 탈리콰의 맨킬러, 차투가, 차투가의 올드 시저, 아유와시의 레이븐이었다. 체로키족의 "첫 번째 사랑받는 사람"인 코노코토코는 친프랑스적이었으며, 그의 조카인 코노코토코도 마찬가지였다.[2]

1759년, 친프랑스적인 체로키족이 그레이트 텔리코와 차투가에 거주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머스코기족의 빅 모타르가 쿠사 추장국의 이전 부지를 재점령했다.

2. 2. 체로키 부족 내부의 갈등

7년 전쟁에서 체로키 부족은 초기 투스카로라 전쟁에서 캐롤라이나 식민지를 지원했고, 야마시 전쟁 중반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야마시의 패배에 기여했다.[1] 하지만, 1754년 전쟁 발발 이후 체로키 전사들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포트 듀케인 등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지만, 부족 내부에서는 갈등이 심화되었다.[2]

포트 툴루즈에서 온 프랑스 요원들은 히와시와 텔리코 강에 있는 오버힐 체로키 지역에 침투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로 인해 체로키 부족 내에는 친프랑스 파벌과 친영국 파벌이 형성되었다. 친프랑스 성향의 지도자로는 ''탈리콰''의 맨킬러, 차투가의 올드 시저 등이 있었고, 친영국 성향의 지도자로는 아타쿨라쿨라 등이 있었다. 특히, 코노코토코 (일명 "올드 홉")와 그의 조카 코노코토코 ("스탠딩 터키")는 친프랑스적인 성향을 보였다.[2]

1759년, 친프랑스적인 체로키족은 머스코기족의 빅 모타르의 지원을 받아 쿠사 추장국의 이전 부지를 재점령하기도 했다. 이는 머스코기, 체로키, 쇼니, 치카소 및 카토바족의 동맹을 위한 발걸음이었으나, 이 동맹은 드래깅 카누 시대까지 조직되지 않았다.

3. 전조

1711년부터 1715년까지 벌어진 투스카로라 전쟁에서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편을 들었던 체로키 족은 1715년-1717년 사이에 벌어진 야마시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중간에 영국 동맹군에게 등을 돌렸다. 이러한 행동은 야마시 족의 패배를 더욱 확실하게 했다. 이후 체로키 부족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영국의 연합군으로 있었다.

앵글로 체로키 전쟁1758년, 버지니아 민병대가 체로키족의 말 도난 혐의에 대한 보복으로 시티코의 모이토이(''아모-아다웨히'')를 공격하면서 발발했다. 모이토이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야드킨강과 카토바강을 따라 식민지 마을들을 상대로 보복 공격을 이끌었다. 이는 보복의 시작이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2년 차에 영국은 프랑스 및 그들의 인디언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체로키족의 지원을 구했다. 영국은 프랑스가 체로키족 영토에 요새를 건설할 계획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다. 체로키족이 동맹을 맺기로 하자 영국은 체로키족 땅에 요새를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해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키오위 인근 (로어 타운 중)에 프린스 조지 요새를 완공했고 1756년에는 라우던 요새를 완공했다.

1758년 체로키족은 포트 듀케인 점령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버지니아를 지나 귀향하던 중 체로키족 몇 명이 버지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체로키족은 물품 공급을 약속받았지만 어디에서 그것들을 얻어야 하는지 오해했다. 체로키족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한 말을 빼앗았고, 그 후 버지니아인들은 30명에서 40명 사이의 체로키족 전사들을 살해하고 머리 가죽을 벗겼다. 이후, 버지니아인들은 그 머리 가죽이 쇼니족이라고 주장하며 포상금을 청구했다.

4. 전쟁의 발발

일부 체로키 지도자들은 여전히 평화를 요구했지만, 몇몇은 외곽의 영국 개척지 정착지에 대한 보복 습격을 이끌었다. 빅 모르타르(Big Mortar) 휘하의 많은 머스코기는 쿠사웨티(Coosawatie)로 이동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그레이트 텔리코(Great Tellico)에 중심을 둔 체로키 친프랑스 파벌을 지지하며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 윌리엄 헨리 리틀턴은 체로키로 가는 모든 화약 운송을 금지하고 체로키의 로어 타운(Lower Towns)에 맞서기 위해 1,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가을과 겨울 사냥에 사용할 탄약이 절실했던 체로키는 협상하기 위해 온건파 추장 대표단을 보냈다. 38명의 추장은 인질로 잡혀 프린스 조지 요새로 보내졌고, 지방 군대의 호위를 받았다. 리틀턴은 이것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틀턴은 찰스턴으로 돌아갔지만 체로키는 분노하여 1760년까지 변경 정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0년 2월, 그들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프린스 조지 요새를 공격했다. 요새의 사령관은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는 모든 인질을 학살했고 공격을 격퇴했다. 이로 인해 체로키는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개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체로키는 또한 나인티 식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1760년 2월까지 체로키는 보복 작전을 노스캐롤라이나로 확대하여 현대의 윈스턴-세일럼까지 진출했다. 도브스 요새에 대한 공격은 휴 워델 대령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내륙 지방의 작은 정착지들은 체로키의 습격으로 빠르게 함락되었다.

팀벌레이크의 "체로키 컨트리의 지도"


리틀턴은 북미의 영국 사령관인 제프리 앰허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앰허스트는 아치볼드 몽고메리에게 1,200명의 병력(로열 스코츠와 몽고메리의 하이랜더 연대)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보냈다. 몽고메리의 작전은 키오위를 포함한 10개의 체로키 로어 타운을 파괴했다. 이 작전은 몽고메리가 미들 타운 영토에 진입하려다 에코이(Itseyi) 고개에서 패배하면서 끝났다. 1760년 후반, 오버힐 체로키는 포트 라우던 포위전에서 영국 식민지 주민을 물리치고 요새를 점령했다.

1761년, 제임스 그랜트 휘하의 체로키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이 계획되었다. 그는 2,800명의 병력(남부 애팔래치아에 투입된 최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체로키에 맞섰다. 그의 군대는 로어 타운을 통과하여 에코이 고개에서 체로키를 격파했으며, 가는 길에 작물의 밭을 불태우면서 약 18개의 미들 타운을 파괴했다. 영국 정규군, 지방 병사, 동맹 카토바, 치카소, 모호크, 스톡브리지 인디언의 군대는 약 5,000명의 체로키 사람들의 집과 식량을 파괴했다.

4. 1. 영국군의 오판과 체로키의 반격

1758년, 영국은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위해 체로키족의 지원을 요청했고, 체로키는 이에 응하여 포트 듀케인 점령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체로키 전사들의 공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귀환 과정에서 체로키 전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체로키 부족 전체의 분노를 샀다. 일부 체로키 지도자들은 여전히 평화를 요구했지만, 몇몇은 외곽의 영국 개척지 정착지에 대한 보복 습격을 이끌었다. 빅 모르타르(Big Mortar) 휘하의 많은 머스코기는 쿠사웨티(Coosawatie)로 이동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그레이트 텔리코(Great Tellico)에 중심을 둔 체로키 친프랑스 파벌을 지지하며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 윌리엄 헨리 리틀턴은 체로키로 가는 모든 화약 운송을 금지하고 체로키의 로어 타운(Lower Towns)에 맞서기 위해 1,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가을과 겨울 사냥에 사용할 탄약이 절실했던 체로키는 협상하기 위해 온건파 추장 대표단을 보냈으나, 38명의 추장은 인질로 잡혀 프린스 조지 요새로 보내졌다. 리틀턴은 이것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틀턴은 찰스턴으로 돌아갔지만, 체로키는 분노하여 1760년까지 변경 정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4. 2. 프린스 조지 요새 사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 윌리엄 헨리 리틀턴은 체로키로 가는 모든 화약 운송을 금지하고 체로키의 로어 타운(Lower Towns)에 맞서기 위해 1,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가을과 겨울 사냥에 사용할 탄약이 절실했던 체로키는 협상하기 위해 온건파 추장 대표단을 보냈다. 38명의 추장은 인질로 잡혀 프린스 조지 요새로 보내졌고, 지방 군대의 호위를 받았다. 리틀턴은 이것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틀턴은 찰스턴으로 돌아갔지만 체로키는 분노하여 1760년까지 변경 정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0년 2월, 그들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프린스 조지 요새를 공격했다. 요새의 사령관은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는 모든 인질을 학살했고 공격을 격퇴했다. 이로 인해 체로키는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개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5. 전쟁의 전개

일부 체로키 지도자들은 여전히 평화를 요구했지만, 몇몇은 외곽의 영국 개척지 정착지에 대한 보복 습격을 이끌었다. 빅 모르타르(Big Mortar) 휘하의 많은 머스코기는 쿠사웨티(Coosawatie)로 이동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그레이트 텔리코(Great Tellico)에 중심을 둔 체로키 친프랑스 파벌을 지지하며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 윌리엄 헨리 리틀턴은 체로키로 가는 모든 화약 운송을 금지하고 체로키의 로어 타운(Lower Towns)에 맞서기 위해 1,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가을과 겨울 사냥에 사용할 탄약이 절실했던 체로키는 협상하기 위해 온건파 추장 대표단을 보냈다. 38명의 추장은 인질로 잡혀 프린스 조지 요새로 보내졌고, 지방 군대의 호위를 받았다. 리틀턴은 이것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틀턴은 찰스턴으로 돌아갔지만 체로키는 분노하여 1760년까지 변경 정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0년 2월, 그들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프린스 조지 요새를 공격했다. 요새의 사령관은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는 모든 인질을 학살했고 공격을 격퇴했다. 이로 인해 체로키는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개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체로키는 또한 나인티 식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1760년 2월까지 체로키는 보복 작전을 노스캐롤라이나로 확대하여 현대의 윈스턴-세일럼까지 진출했다. 도브스 요새에 대한 공격은 휴 워델 대령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내륙 지방의 작은 정착지들은 체로키의 습격으로 빠르게 함락되었다.

리틀턴은 북미의 영국 사령관인 제프리 앰허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앰허스트는 아치볼드 몽고메리에게 1,200명의 병력(로열 스코츠와 몽고메리의 하이랜더 연대)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보냈다. 몽고메리의 작전은 키오위를 포함한 10개의 체로키 로어 타운을 파괴했다. 이 작전은 몽고메리가 미들 타운 영토에 진입하려다 에코이(Itseyi) 고개에서 패배하면서 끝났다. 1760년 후반, 오버힐 체로키는 포트 라우던 포위전에서 영국 식민지 주민을 물리치고 요새를 점령했다.

1761년, 제임스 그랜트 휘하의 체로키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이 계획되었다. 그는 2,800명의 병력(남부 애팔래치아에 투입된 최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체로키에 맞섰다. 그의 군대는 로어 타운을 통과하여 에코이 고개에서 체로키를 격파했으며, 가는 길에 작물의 밭을 불태우면서 약 18개의 미들 타운을 파괴했다. 영국 정규군, 지방 병사, 동맹 카토바, 치카소, 모호크, 스톡브리지 인디언의 군대는 약 5,000명의 체로키 사람들의 집과 식량을 파괴했다.

5. 1. 체로키의 공세와 영국의 반격

일부 체로키 지도자들은 여전히 평화를 요구했지만, 몇몇은 외곽의 영국 개척지 정착지에 대한 보복 습격을 이끌었다. 빅 모르타르(Big Mortar) 휘하의 많은 머스코기는 쿠사웨티(Coosawatie)로 이동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그레이트 텔리코(Great Tellico)에 중심을 둔 체로키 친프랑스 파벌을 지지하며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 윌리엄 헨리 리틀턴은 체로키로 가는 모든 화약 운송을 금지하고 체로키의 로어 타운(Lower Towns)에 맞서기 위해 1,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가을과 겨울 사냥에 사용할 탄약이 절실했던 체로키는 협상하기 위해 온건파 추장 대표단을 보냈다. 38명의 추장은 인질로 잡혀 프린스 조지 요새로 보내졌고, 지방 군대의 호위를 받았다. 리틀턴은 이것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틀턴은 찰스턴으로 돌아갔지만 체로키는 분노하여 1760년까지 변경 정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0년 2월, 그들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프린스 조지 요새를 공격했다. 요새의 사령관은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는 모든 인질을 학살했고 공격을 격퇴했다. 이로 인해 체로키는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개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체로키는 또한 나인티 식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1760년 2월까지 체로키는 보복 작전을 노스캐롤라이나로 확대하여 현대의 윈스턴-세일럼까지 진출했다. 도브스 요새에 대한 공격은 휴 워델 대령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내륙 지방의 작은 정착지들은 체로키의 습격으로 빠르게 함락되었다.

리틀턴은 북미의 영국 사령관인 제프리 앰허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앰허스트는 아치볼드 몽고메리에게 1,200명의 병력(로열 스코츠와 몽고메리의 하이랜더 연대)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보냈다. 몽고메리의 작전은 키오위를 포함한 10개의 체로키 로어 타운을 파괴했다. 이 작전은 몽고메리가 미들 타운 영토에 진입하려다 에코이(Itseyi) 고개에서 패배하면서 끝났다. 1760년 후반, 오버힐 체로키는 포트 라우던 포위전에서 영국 식민지 주민을 물리치고 요새를 점령했다.

1761년, 제임스 그랜트 휘하의 체로키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이 계획되었다. 그는 2,800명의 병력(남부 애팔래치아에 투입된 최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체로키에 맞섰다. 그의 군대는 로어 타운을 통과하여 에코이 고개에서 체로키를 격파했으며, 가는 길에 작물의 밭을 불태우면서 약 18개의 미들 타운을 파괴했다. 영국 정규군, 지방 병사, 동맹 카토바, 치카소, 모호크, 스톡브리지 인디언의 군대는 약 5,000명의 체로키 사람들의 집과 식량을 파괴했다.

5. 2. 라우던 요새 함락

1760년 후반, 오버힐 체로키는 포트 라우던 포위전에서 영국 식민지 주민을 물리치고 요새를 점령했다.

6. 평화 조약과 그 이후

1761년 11월, 체로키족은 버지니아 식민지와 롱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했다.[3] 그들은 12월에 찰스턴 조약을 통해 사우스캐롤라이나와 평화를 맺었다.[3] 팀버레이크 원정대 동안, 헨리 팀버레이크 중위, 토마스 섬터 상사, 통역관 존 매코맥은 체로키족에게 버지니아와의 조약 사본을 전달하기 위해 오버힐 정착지 지역으로 이동했다. 팀버레이크의 일기 및 그의 여행 지도는 1765년에 출판되었으며, 역사가들은 그의 일기에 체로키 문화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담겨 있었다고 평가한다.

프랑스 지지 지도자 스탠딩 터키는 폐위되었고, 친영국 성향의 아타쿨라쿨라가 "최고의 사랑받는 남자"로 교체되었다. 존 스튜어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기반을 둔 남부 지역의 영국 인도 담당 감독관이 되었으며, 체로키족과 영국 정부 간의 주요 연락 담당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부관인 알렉산더 캐머런은 키오위에서, 리틀 테네시 강의 토콰에서 체로키족과 함께 살았으며, 두 번째 부관인 존 맥도널드는 치카마우가 크릭 서쪽, 그레이트 인디언 워패스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에 거주했다.

전쟁 동안 많은 체로키 마을이 그랜트 장군 휘하에서 파괴되었고 다시 점령되지 않았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키투와였으며, 그곳의 주민들은 서쪽으로 이주하여 그레이트 아일랜드 타운 (리틀 테네시에 위치)에 정착하여 오버힐 체로키족과 함께 살았다. 전쟁의 결과로, 1755년 전쟁 전 2,590명으로 추산되던 체로키 전사들의 수는 전투, 천연두, 기아로 인해 2,300명으로 감소했다.

전쟁 이후, 미시시피강 동쪽의 프랑스 루이지애나는 캐나다와 함께 영국으로 넘어갔고,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그 대가로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영국으로 넘어가 동 플로리다와 서 플로리다로 분할되었다.

조약이 체결되고, 팀버레이크 원정이 종료된 후, 헨리 팀버레이크는 오스테나코, 스탠딩 터키, 우드 피전(아타와이) 등 3명의 체로키 지도자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했다. 체로키족 손님들은 런던 타워를 방문하고, 극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를 만났으며,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았고, 조지 3세 국왕을 알현했다. 영국으로 가는 항해 중, 그들의 통역가 윌리엄 쇼레이가 사망하여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런던에서 체로키족이 따뜻하게 환영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특히 1763년 왕령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정착을 금지)을 고려할 때, 식민지 주민들을 희생시키면서 제국이 특혜를 베푸는 징조로 여겼고, 이는 미국 독립 혁명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주민들의 주요 불만 사항 중 하나가 되었다.

6. 1. 조약 체결

1761년 11월, 체로키족은 버지니아 식민지와 롱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했다.[3] 12월에는 찰스턴 조약을 통해 사우스캐롤라이나와 평화를 맺었다.[3] 헨리 팀버레이크 중위, 토마스 섬터 상사 등은 팀버레이크 원정대를 통해 체로키족에게 버지니아와의 조약 사본을 전달했다.[3] 팀버레이크의 일기와 지도는 1765년에 출판되었으며, 체로키 문화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3]

프랑스 지지 지도자였던 스탠딩 터키는 폐위되고, 친영국 성향의 아타쿨라쿨라가 지도자가 되었다.[3] 존 스튜어트는 남부 지역의 영국 인도 담당 감독관이 되어 체로키족과 영국 정부 간의 주요 연락을 담당했다.[3]

전쟁 동안 많은 체로키 마을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체로키 전사들의 수는 1755년 2,590명에서 2,300명으로 감소했다.[3]

6. 2. 팀버레이크 원정대

전쟁 이후, 미시시피강 동쪽의 프랑스 루이지애나는 캐나다와 함께 영국으로 넘어갔고,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그 대가로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영국으로 넘어가 동 플로리다와 서 플로리다로 분할되었다.

조약이 체결되고, 팀버레이크 원정이 종료된 후, 헨리 팀버레이크는 오스테나코, 스탠딩 터키, 우드 피전(아타와이) 등 3명의 체로키 지도자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했다. 체로키족 손님들은 런던 타워를 방문하고, 극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를 만났으며,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았고, 조지 3세 국왕을 알현했다. 영국으로 가는 항해 중, 그들의 통역가 윌리엄 쇼레이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런던에서 체로키족이 따뜻하게 환영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특히 1763년 왕령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정착을 금지)을 고려할 때, 식민지 주민들을 희생시키면서 제국이 특혜를 베푸는 징조로 여겼고, 이는 미국 독립 혁명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주민들의 주요 불만 사항 중 하나가 되었다.

6. 3. 전쟁의 결과

전쟁으로 인해 미시시피강 동쪽의 프랑스 루이지애나는 캐나다와 함께 영국으로 넘어갔고,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그 대가로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영국으로 넘어가 동 플로리다와 서 플로리다로 분할되었다.

조약 체결 후, 헨리 팀버레이크는 오스테나코, 스탠딩 터키, 우드 피전(아타와이) 등 3명의 체로키 지도자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했다. 체로키족 손님들은 런던 타워를 방문하고, 극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를 만났으며, 조지 3세 국왕을 알현했다. 영국으로 가는 항해 중 통역가 윌리엄 쇼레이가 사망하여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런던에서 체로키족이 따뜻하게 환영받았다는 소식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 1763년 왕령(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정착을 금지)과 더불어 제국이 식민지 주민들을 희생시키면서 특혜를 베푸는 징조로 여겨졌고, 이는 미국 독립 혁명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주민들의 주요 불만 사항 중 하나가 되었다.

7. 한국과의 관계 (별도 하위 항목)

참조

[1] 서적
[2] 서적 Eastern Cherokee Chiefs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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