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자키 가타이에
1. 개요
야마자키 가타이에는 오미 야마자키 씨 출신으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인이다. 롯카쿠 요시하루를 섬기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여 그의 가신이 되었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에 참여했으며, 다도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1년 후시미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야마자키 이에모리가 미타 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 씨명 | 근강산기 씨 |
|---|---|
| 이름 | 야마자키 가타이에 |
| 개명 | 히데이에 (초명) → 겐이에 → 가타이에 |
| 별명 | 겐이에, 통칭: 겐타자에몬, 겐타자에몬노조, 법명: 가쿠만 또는 가쿠겐 |
| 시호 | 해당 없음 |
| 신호 | 해당 없음 |
| 계명 | 용덕원법성각현대거사 |
| 영명 | 해당 없음 |
| 묘소 | 비추 국 나루하 계암사 (오카야마 현다카하시 시 나루하초 시모하라) |
| 관위 | 종5위 하시마노카미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 생년 | 덴분 16년 (1547년) |
| 몰년 | 덴쇼 19년 3월 28일 (1591년5월 21일) |
| 부모 | 부: 야마자키 무네이에 (단바노카미) |
|---|---|
| 형제 | 가타이에, 가나우치, 고주로 딸 (고토 사효에노조실) |
| 배우자 | 정실: 이케다 단고노카미의 딸 계실: 이케다 이요노카미의 여동생 |
| 자녀 | 이에모리, 혼조 사토타카혼조 히데쿠니의 양자., 미야기 요리히사미야기 도요모리의 양자., 딸 (가토 기요마사 정실), 가토 효스케가토 기요마사의 양자 후 이혼., 딸 (벳쇼 요시하루 정실) |
| 주군 |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쓰히데→하시바 히데요시→노부카쓰→도요토미 히데요시 |
|---|---|
| 막부 | 해당 없음 |
| 번 | 해당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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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 야마자키씨 -
와카사번
와카사번은 에도 시대에 산다, 나리와를 거쳐 와카사로 옮겨간 번으로, 야마자키 가문에 의해 성립되었다가 이케다 마사쓰나에 의해 재설치되어 돗토리번의 지번 역할을 하였으며, 돗토리니시다테신덴번에서 개칭 후 돗토리번에 흡수 합병되어 폐번되었다. -
오미 야마자키씨 -
마루가메번
마루가메번은 사누키국에 위치했으며 이코마 가문, 야마자키 가문, 교고쿠 가문이 다스렸고, 관광업과 부채 제조로 경제를 유지하며 번교를 통해 인재를 양성했다. -
오미국 사람 -
진구 황후
진구 황후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전설적인 인물로, 섭정 기간 동안 구마소 정벌과 삼한 정벌 등의 업적을 이루었으며,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과 왜곡된 측면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
오미국 사람 -
아사노 나가아키라
아사노 나가아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긴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형의 사망 후 기이 기슈번을 상속받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아키 히로시마번의 번주가 되었다. -
센고쿠 무장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센고쿠 무장 -
사나다 노부시게
2. 생애
야마자키 가타이에는 롯카쿠 가신 시대, 오다 노부나가 가신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신 시대를 거치며 활동했다. 1591년 3월 28일 후시미의 자택에서 45세로 사망했으며, 적남 이에모리가 뒤를 이어 미타 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
2.1. 롯카쿠 가신 시대
오미 야마자키 씨는 우다 겐지사사키 씨의 지류 중 하나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사키 노리이에를 오미국 이누카미 군 야마자키의 지토로 임명한 것이 야마자키를 칭하게 된 시초라고 여겨진다. 가타이에는 단바노카미 무네이에의 아들이다.
초명은 히데이에이다. 롯카쿠 요시카타로부터 편휘를 받아 야마자키 가타이에(山崎 賢家)라고 칭했다. 읽는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에, 이것이 종종 겐가(賢家)로 쓰이기도 한다.
요시카타의 아들인 롯카쿠 요시하루 (사사키 요시스케)를 섬겼지만, 요시하루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에이로쿠 6년 (1563년) 간논지 소동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토 가타토요 부자를 살해당하고 롯카쿠 씨와 적대하였다. 에이로쿠 11년 (1568년) 9월에 오다 노부나가가 오미 롯카쿠 영내로 침공하자, 롯카쿠 씨를 버리고 재빨리 항복하여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그때, 가타이에로 이름을 고쳤다.
2.2. 오다 노부나가 가신 시대
1568년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오미 롯카쿠 영내로 침공하자, 롯카쿠 씨를 버리고 재빨리 항복하여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이때, 가타이에로 이름을 고쳤다.
노부나가에게 섬긴 이후, 오미의 무사로서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 참가했다. 1573년 4월, 노부나가를 따라 교토의 조쿄 야키우치와 니조 고쇼 전투에 참가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마키시마 성을 공격했다. 다음 해 8월, 아사이 씨 공격에도 참가했다. 1581년 9월, 제2차 덴쇼 이가노 란에서는 시가라쿠 입구에서의 침입을 맡았다. 1582년 4월, 고슈 정벌에서 개선하는 노부나가를 재소의 야마자키에서 다실을 설치하여 대접했다.
2.3. 혼노지의 변 전후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가타이에는 아즈치의 자택을 불태우고 거성인 야마자키 성에 칩거했다. 그러나 아케치 미쓰히데의 압박을 받아 항복했다. 아케치 측 장수로서 사와야마 성 점거 등에 협력했지만, 미쓰히데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토벌되자 곧바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이누야마 군 야마자키 성의 영지를 안도받았다.
2.4.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신 시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한 후, 아케치 미쓰히데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토벌될 때까지 아케치 측에서 활동하다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영지를 안도받았다.
그 해 겨울, 야마자키 성에서 셋쓰국 미타 성 성주로 2만 3천 석에 봉해졌다. 1583년(덴쇼 11년) 8월 1일에는 오미국 아이치 군 내에서 1만 4천 석의 지행을 안도받았다.
기요스 회의 후, 잠시 오다 노부오의 가신이 되었지만,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노부오와 히데요시가 대립하자 다시 히데요시에게 속하여 750명의 병사를 이끌고 노부오 측의 성을 공격했다. 1585년(덴쇼 13년) 종5위하 시마노카미에 서임되었으며, 이후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했다.
1587년 규슈 정벌에 참가하여 히데요시 본진 옆에 1,000명을 이끌고 3월 1일 오사카 성을 출발했다. 규슈 정벌이 끝날 때 이시다 미쓰나리, 나가쓰카 마사이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함께 황폐해진 하카타 부흥을 담당하는 봉행으로 임명되었다.
1588년(덴쇼 16년) 4월, 주라쿠다이 행행 때에는 간파쿠 제대부로서 히데요시의 우차에 시중을 들었다.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에도 1000기의 기병을 이끌고 종군했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함께 각 군을 감독했으며, 무사시국 이와쓰키 성 공격에 참가했다.
3. 인물
가타이에는 노부나가를 거처에 초대하여 다실을 세우거나, 쓰다 소큐가 주최한 다회에도 자주 초청되는 등 다도에 조예가 깊었다.
3.1. 다도
가이 다케다 씨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개선한 노부나가를 거처에 초대하여 다실을 세우거나, 쓰다 소큐가 주최한 다회에도 자주 초청되는 등 다도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3.2.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인장 분석에 따르면, 덴쇼 16년(1588년) 가토 기요마사가 히고국 북반국의 다이묘로 임명되어 입국했을 때 처자가 있었다. 이 아내는 『야마자키 가계도』에 기재된 야마자키 가타이에의 딸로 추정된다. 가타이에의 아들 효스케가 기요마사의 양자가 되는 등, 두 가문은 중첩된 관계를 맺으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는 복수의 기요마사 서찰이나 『속선 기요마사기』 등의 고문헌과도 일치한다. 야마자키 씨가 낳은, 기요마사의 적남으로 추정되는 토라쿠마의 이름은 문록의 역 당시 조선에서 온 기요마사 서찰 6통에 나타나는데, "토라쿠마에게 2천의 병사를 붙여 보내도록" 등의 내용이 있다. 그중에는 토라쿠마의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요마사가 동요하는 내용도 있다. 토라쿠마와 그 어머니는 문록의 역 이후 소식이 불명확하여, 이 무렵 전후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