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가메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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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루가메번은 1587년 이코마 지카마사가 번주로 봉해지면서 시작되어, 이후 이코마 가문, 야마자키 가문을 거쳐 1658년부터 교고쿠 가문이 통치한 번이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마루가메현이 되었다. 마루가메는 고토히라궁으로 가는 참배길의 기점으로서 관광업이 발달했고, 부채 산업을 육성하여 재정을 안정시켰다. 1694년에는 다도쓰번을 분립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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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다카미치는 마루가메번 2대 번주 교고쿠 다카토요의 아들로 태어나 다도쓰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장남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준 후 사망했다.
마루가메번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유형 | 번 |
국가 | 일본 |
시대 | 에도 시대 |
존속 기간 | 1641년 ~ 1871년 |
위치 | 사누키국 |
현재 위치 | 가가와현 마루가메시 |
다이묘 | 교고쿠 다카카즈 |
![]() | |
성 | 마루가메성 |
역사 | |
시작 | 1641년 |
종료 | 폐번치현 |
주요 사건 | 한 체제 폐지 |
통계 | |
소속 | 국 사누키국 |
2. 번의 역사
1587년부터 1871년까지 마루가메번의 역사는 이코마씨, 야마자키씨, 교고쿠씨 세 가문이 통치한 시기로 나뉜다. 각 시대별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시기 | 연호 | 주요 사건 | 비고 |
---|---|---|---|
1587년 | 덴쇼 15년 | 이코마 지카마사가 사누키국에 봉해짐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공을 세움 |
1597년 | 게이초 2년 | 마루가메성 축성 시작 | |
1602년 | 게이초 7년 | 마루가메성 완성, 이코마 가즈마사가 거성으로 삼음 | |
1615년 | 겐나 원년 | 아코번에서 온 사람들이 제염업 시작, 일국일성령으로 마루가메성 해체 명령 | |
1640년 | 간에이 17년 | 이코마 소동으로 이코마씨 개역 | |
1641년 | 간에이 18년 | 야마자키 이에하루 입봉, 마루가메번 성립. 사누키국은 이웃 이요국 번들의 분할 통치 | 도미오카번에서 |
1642년 | 간에이 19년 | 마루가메성 개수 시작 | |
1658년 | 만지 원년 | 야마자키씨 3대만에 가계 단절, 개역. 교고쿠 다카카즈 입봉 | 다쓰노번에서 |
1660년 | 만지 3년 | 현재의 마루가메성 천수 완성 | |
1670년 | 간분 10년 | 마루가메성 오테 1문, 2문 북쪽으로 이전 | |
1688년 | 조쿄 5년 | 만상원 건립 | |
1694년 | 겐로쿠 7년 | 교고쿠 다카미치에게 다도쓰번 1만 석 분할 | |
1705년 | 호에이 2년 | 최초의 한사쓰(번찰) 발행 | |
1781년 ~ 1788년 | 덴메이 연간 | 부채 제조 장려 | 번사의 부업 |
1794년 | 간세이 6년 | 번학교 정명관(正明館) 창립 | |
1838년 | 덴포 9년 | 곤피라카이도 마루가메카이도 기점에 다조등(太助灯) 건립 | 에도 사람들의 기부 |
1858년 | 안세이 5년 | 세이산후시(서찬부지) 완성 | |
1871년 | 메이지 4년 | 폐번치현으로 마루가메현 성립 |
2. 1. 이코마 가문 시대 (1587년 ~ 1640년)
1587년(덴쇼 15년)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공을 세운 이코마 지카마사가 사누키국에 봉해졌다.[1] 1597년(게이초 2년)에는 가메야마에 마루가메성을 짓기 시작했다.[1]1602년(게이초 7년) 마루가메성이 완성되자 지카마사의 아들인 이코마 가즈마사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1] 1615년(겐나 원년) 하리마국아코번에서 온 사람들이 소금가게(시오야)에 와서 제염업을 시작했고,[1] 같은 해 일국일성령에 따라 마루가메성은 철거 명령을 받았다.[1]
1640년 (간에이 17년) 이코마 소동으로 인해 이코마씨는 개역되었다.[1]
2. 2. 야마자키 가문 시대 (1641년 ~ 1658년)
1641년(간에이 18년) 야마자키 이에하루가 히고국 도미오카번에서 사누키로 입봉하여, 마루가메성을 본성으로 마루가메번이 성립되었다. 이코마 소동으로 이코마씨가 개역된 이후 야마자키씨가 입봉하기 전까지 사누키국은 이웃 이요국의 사이조번, 오즈번, 이마바리번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1]1642년(간에이 19년) 마루가메성 개축에 착수하여 현재와 거의 같은 영역이 되었다.[1]
1658년(만지 원년) 야마자키 가문은 3대 만에 대가 끊겨 개역되었다.[1]
2. 3. 교고쿠 가문 시대 (1658년 ~ 1871년)
1658년(만지 원년), 야마자키 가문이 3대 만에 대가 끊겨 개역(가이에키)되자, 하리마국 다쓰노번에서 교고쿠 다카카즈가 마루가메번으로 들어왔다.[1]1660년(만지 3년)에는 현재의 마루가메성 천수가 완성되었고, 1670년(간분 10년)에는 마루가메성의 오테 1문과 2문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겼다.[1]
1688년(조쿄 5년)에는 시모카나쿠라 촌(下金倉村) 나카스에 별장을 짓고 만상원이라 이름 지었다.[1]
1694년(겐로쿠 7년), 교고쿠 다카미치에게 다도쓰 1만 석을 분할해 주었다. 마루가메의 3대 다이묘인 교고쿠 다카모치는 아버지를 계승했을 때 겨우 세 살이었다. 따라서 번은 그의 처남인 교고쿠 다카미치와 영지를 분할해 줄 것을 도쿠가와 막부에 청원했고, 다카미치는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었다. 이로써 교고쿠 다카미치가 새롭게 창설된 다도쓰 번의 다이묘로서 분가 가문을 세울 수 있도록 영지의 1만 고쿠를 떼어내었다.[1]
1705년(호에이 2년)에는 처음으로 한사쓰(번찰)를 발행하였다.[1]
1781년~1788년(덴메이 연간)에는 부채 제조가 번사(藩士)들의 부업으로 장려되었다.[1]
1794년(간세이 6년)에는 번교(藩校)인 정명관(正明館)을 창립했다.[1]
1838년(덴포 9년)에는 곤피라카이도 중 하나인 마루가메카이도의 기점에 에도 사람들의 기부로 만들어진 다조등(太助灯)이 세워졌다.[1]
1858년(안세이 5년)에는 세이산후시(서찬부지)가 완성되었다.[1]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마루가메현이 되었다.[1]
3. 번의 정치와 경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던 이코마 지카마사는 1587년 사누키국에 171,800곡을 하사받았고, 1597년 마루가메 성 건설을 시작했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지카마사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아들 이코마 가즈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했다.[1] 지카마사는 다카마쓰 성에 머물며 가신들을 단고국 타나베 성 공격에 보냈다.[1] 어느 쪽이 승리하든 이코마 가문을 보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1] 가즈마사가 도쿠가와 편에 섰기에 이코마 가문은 영지를 유지했으나, 지카마사는 1602년 아들에게 가문 수장 자리를 넘겨주며 책임을 졌다.[1]
1615년 아코번 이민자들이 마루가메에서 소금 생산을 시작했다.[1] 같은 해 도쿠가와 막부는 "한 영지에 한 성" 규칙에 따라 마루가메 성 철거를 명했다.[1] 1640년 이코마 가문은 반란 후 재산 몰수로 데와국 야시마번으로 강등되었다.[1] 이코마 영토는 분할되어 이요국 사이조번, 오즈번, 이마바리번으로 넘어갔다.[1] 남은 부분은 마루가메번이 되었고, 1641년 히고국 도미오카번 출신 야마자키 이에하루에게 하사되어 이듬해 마루가메 성을 복원했다.[1] 야마자키 가문은 1658년 3대 만에 단절, 하리마국 다쓰노번 출신 교고쿠씨 분가로 대체되었다.[1] 1660년부터 1680년까지 마루가메 성이 확장, 현재 덴슈가 완성되었다.[1]
1694년 영지 10,000곡이 분리되어 다도쓰 번이 형성되었다.[1] 1705년 최초 지폐가 발행되었다.[1] 텐메이 시대 실업 사무라이들은 수입 보충을 위해 ''우치와'' 부채를 만들었다.[1] 1794년 번교 "세이메이칸"이 개교했다.[1]
마루가메 번은 막말 시대 황실 측을 지지, 교토 황궁 수비 병력을 파견했다.[1] 도바-후시미 전투 후 적대 다카마쓰번 공격 명령을 받았으나, 마쓰다이라 요리쓰나 사면 중재자 역할을 했다.[1] 1869년 2월 교고쿠 아키유키는 메이지 정부에 영지를 넘긴 최초 다이묘 중 하나였다.[1]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 "마루가메현"이 되었다가 가가와현에 병합되었다.[1]
마루가메 번은 정기적 지적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 기준 ''고쿠다카'' 할당을 위해 계산된 여러 분리 영토로 구성되었다.[4][5]
3. 1. 참배객과 관광업
마루가메번은 고토히라궁으로 가는 참배길인 마루가메카이도, 다도쓰카이도의 기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참배객을 상대로 한 관광업은 번 재정을 크게 윤택하게 해주었다.막말이 되어 재정이 빈곤해지자, 에도 말단 번사들에게 근처에 저택을 짓고 있던 오무라번 번사들에게 부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업으로 만들게 하여 곤피라 참배의 기념품으로 파는 등의 대책을 세워 재정을 다시 세웠다. 그 후, 부채 만들기는 일반 마을 주민에게도 퍼지기 시작해 마루가메의 명물이 되었다.
3. 2. 부채 산업
막말이 되어 재정이 빈곤해지자, 에도 말단 번사들에게 근처에 저택을 짓고 있던 오무라번 번사들에게 부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업으로 만들게 하여 곤피라 참배의 기념품으로 파는 등의 대책을 세워 재정을 다시 세웠다.[1] 그 후, 부채 만들기는 일반 마을 주민에게도 퍼지기 시작해 마루가메의 명물이 되었다.[1]3. 3. 기타
마루가메 번은 고토히라궁으로 가는 참배길인 마루가메카이도, 다도쓰카이도의 기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참배객을 상대로 한 관광업은 번 재정을 크게 윤택하게 해주었다.막말이 되어 재정이 빈곤해지자, 에도 말단 번사들에게 근처에 저택을 짓고 있던 오무라번 번사들에게 부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업으로 만들게 하여 곤피라 참배의 기념품으로 파는 등의 대책을 세워 재정을 다시 세웠다. 그 후, 부채 만들기는 일반 마을 주민에게도 퍼지기 시작해 마루가메의 명물이 되었다.
4. 역대 번주
마루가메번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품계 | 고쿠다카 | |
---|---|---|---|---|---|---|
![]() | ||||||
1 |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일본어 | 1641년 ~ 1648년 | 가이노카미 (甲斐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2 | 야마자키 도시이에|山崎俊家일본어 | 1648년 ~ 1651년 | 시마노카미 (志摩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3 | 야마자키 하루요리|山崎治頼일본어 | 1652년 ~ 1657년 | ||||
1 | 쿄고쿠 다카카즈|京極高和일본어 | 1658년 ~ 1662년 | 교부타이유 (刑部大輔) | 종5위하 (従五位下) | ||
2 | 쿄고쿠 다카토요| 京極高豊일본어 | 1662년 ~ 1694년 | 빗추노카미 (備中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3 | 쿄고쿠 다카모치| 京極高或일본어 | 1694년 ~ 1724년 | 와카사노카미 (若狭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 |
4 | 쿄고쿠 다카노리|京極高矩일본어 | 1724년 ~ 1763년 | 사도노카미 (佐渡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5 | 쿄고쿠 다카나카|京極高中일본어 | 1763년 ~ 1811년 | 와카사노카미 (若狭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6 | 쿄고쿠 다카아키라| 京極高朗일본어 | 1811년 ~ 1850년 | 나가토노카미 (長門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7 | 쿄고쿠 아키유키| 京極朗徹일본어 | 1850년 ~ 1871년 | 사도노카미 (佐渡守) | 종5위상 (従五位上) | ||
-- 교고쿠 가문 분가 (도자마 다이묘) - 다도쓰번 | ||||||
1 | 쿄고쿠 타카미치|京極高通일본어 | 1694년 ~ 1735년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
2 | 쿄고쿠 타카요시|京極高慶일본어 | 1735년 ~ 1756년 | 데와노카미 (出羽守) | 종5위하(従五位下) | ||
3 | 쿄고쿠 타카후미|京極高文일본어 | 1756년 ~ 1796년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
4 | 쿄고쿠 타카카타|京極高賢일본어 | 1796년 ~ 1833년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
5 | 쿄고쿠 타카테루|京極高琢일본어 | 1833년 ~ 1859년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
6 | 쿄고쿠 타카마사|京極高典일본어 | 1859년 ~ 1871년 | 이키노카미 (壱岐守); 이후 카와치노카미 (河内守), 시모사노카미 (下総守) | 종5위하(従五位下) |
4. 1. 이코마 가문 (도자마, 17만 3천 석)
生駒|이코마일본어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이며 고쿠다카는 17만 3천 석이었다.
4. 2. 야마자키 가문 (도자마, 5만 석)
야마자키 가문 (''도자마 다이묘'', 5만 석)#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품계 | 석고 |
---|---|---|---|---|---|
1 |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일본어 | 1641년 ~ 1648년 | 가이노카미 (甲斐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2 | 야마자키 도시이에|山崎俊家일본어 | 1648년 ~ 1651년 | 시마노카미 (志摩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3 | 야마자키 하루요리|山崎治頼일본어 | 1652년 ~ 1657년 | - | - |
4. 3. 교고쿠 가문 (도자마, 6만 석 → 5만 1천 석)
순서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1 | 다카카즈[1] | 1658년 ~ 1662년 | |
2 | 다카토요[1] | 1662년 ~ 1694년 | |
3 | 다카모치[1] | 1694년 ~ 1724년 | 이복 형 다카미치에게 다도쓰 영지를 분봉하여 5만 1천 석으로 삭감. |
4 | 다카노리[1] | 1724년 ~ 1763년 | |
5 | 다카나카[1] | 1763년 ~ 1811년 | |
6 | 다카아키라[1] | 1811년 ~ 1850년 | |
7 | 아키유키[1] | 1850년 ~ 1871년 |
5. 지번
다도쓰번[1]
마루가메의 3대 다이묘인 교고쿠 다카모치는 아버지를 계승했을 때 겨우 세 살이었다.[1] 따라서 번은 그의 처남인 교고쿠 다카미치와 영지를 분할해 줄 것을 도쿠가와 막부에 청원했고, 다카미치는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었다.[1] 이는 교고쿠 다카미치가 새롭게 창설된 다도쓰 번의 다이묘로서 분가 가문을 세울 수 있도록 영지의 10000고쿠를 떼어내면서 이루어졌다.[1] 그러나 교고쿠 다카미치 역시 겨우 4살에 불과했기에 그는 계속 마루가메 성에서 거주했다.[1] 1827년 교고쿠 다카카타 재임 기간에 오늘날 가가와현 다도쓰정의 일부인 분령 내에 실제로 진야가 건설되었다.[1]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 교고쿠씨, 1694-1871 (도자마) | |||||
1 | 교고쿠 다카미치|경극고통일본어 | 1694 - 1735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0000고쿠 |
2 | 교고쿠 다카요시|경극고경일본어 | 1735 - 1756 | 데와노카미 (出羽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0000고쿠 |
3 | 교고쿠 다카후미|교고쿠 다카후미일본어|경극고문}} | 1756 - 1796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0000고쿠 |
4 | 교고쿠 다카카타|교고쿠 다카카타일본어|경극고현}} | 1796 - 1833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0000고쿠 |
5 | 교고쿠 다카테루|교고쿠 다카테루일본어|경극고탁}} | 1833 - 1859 | 이키노카미 (壱岐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0000고쿠 |
6 | 교고쿠 다카마사|교고쿠 다카마사일본어|경극고전}} | 1859 - 1871 | 이키노카미 (壱岐守); 이후 카와치노카미 (河内守), 시모사노카미 (下総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0000고쿠 |
- 다도쓰번[1]
6. 막말의 영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던 장군 이코마 지카마사는 1587년 사누키국에 171,800곡을 하사받았고, 1597년 마루가메 성 건설이 시작되었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지카마사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그의 아들 이코마 가즈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했다.[1] 지카마사는 다카마쓰 성에 머물면서 가신들을 단고국 타나베 성 공격에 보냈는데, 이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이코마 가문을 보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1] 가즈마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서 싸웠기 때문에 이코마 가문은 기존 영지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지카마사는 1602년 아들에게 가문의 수장 자리를 넘겨주는 것으로 패배한 쪽에 섰던 책임을 졌다.[1]
1615년 아코번에서 온 이민자들이 마루가메에서 소금 생산을 시작했고,[1] 같은 해 도쿠가와 막부는 "한 영지에 한 개의 성"이라는 규칙에 따라 마루가메 성 철거를 명령했다.[1] 1640년 이코마 가문은 반란 이후 재산 몰수로 데와국 야시마번으로 강등되었다.[1] 이코마 가문의 영토는 분할되어 상당 부분이 인접한 이요국의 사이조번, 오즈번, 이마바리번으로 넘어갔고, 마루가메 성을 중심으로 한 남은 부분은 마루가메번이 되어 1641년 히고국 도미오카번 출신인 야마자키 이에하루에게 하사되었다.[1] 이듬해 그는 마루가메 성을 복원했다.[1]
야마자키 가문은 1658년 3대 만에 단절되었고, 하리마국 다쓰노번에서 온 교고쿠씨 분가로 대체되었다.[1] 1660년부터 1680년까지 마루가메 성이 확장되었고, 현재의 덴슈가 완성되었다.[1] 1694년 영지의 10,000고쿠가 분리되어 다도쓰 번이라는 하위 영지가 형성되었는데, 이 영지는 고토히라궁으로 가는 주요 순례길에 위치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1] 마루가메번 역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705년 최초의 지폐를 발행하고, 텐메이 시대에는 실업 상태인 사무라이들에게 ''우치와'' 부채를 만들도록 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시도했다.[1] 1794년에는 번교인 "세이메이칸"이 개교했다.[1]
마루가메번은 막말 시대에 황실 측을 일찍부터 확고하게 지지했으며, 교토 황궁을 지키기 위해 종종 병력을 파견했다.[1]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적으로 지정된 인접 다카마쓰번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마쓰다이라 요리쓰나의 사면을 확보하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했다.[1] 1869년 2월, 교고쿠 아키유키는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 자신의 영지를 넘기는 최초의 다이묘 중 한 명이었다.[1] 1871년 폐번치현에 따라 마루가메번은 폐지된 최초의 영지 중 하나가 되었고, 이후 현대 가가와현으로 병합된 "마루가메현"이 되었다.[1]
6. 1. 마루가메번령
마루가메번은 에도 시대에 여러 개의 분리된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토는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를 제공하기 위해 계산되었다.[4][5] 마루가메번의 영토는 다음과 같다.국 | 군 | 마을 수 | 비고 |
---|---|---|---|
사누키국 | 도요타군 | 46개 | |
사누키국 | 미노군 | 32개 | |
사누키국 | 나카군 | 23개 | |
사누키국 | 우타리군 | 1개 | |
사누키국 | 다도군 | 9개 | |
오미국 | 가모군 | 2개 | 오쓰현 (현재의 시가현)에 편입 |
오미국 | 사카타군 | 2개 | 오쓰현 (현재의 시가현)에 편입 |
하리마국 | 잇토군 | 6개 | |
하리마국 | 잇사이군 | 22개 |
6. 2. 다도쓰번령
1694년, 마루가메번의 영지 10,000 고쿠가 분리되어 다도쓰 번이라는 하위 영지가 형성되었다.[1] 이 영지는 고토히라궁으로 가는 주요 순례길에 위치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1]마루가메의 3대 다이묘인 교고쿠 다카모치는 아버지를 계승했을 때 겨우 세 살이었다. 따라서 번은 그의 처남인 교고쿠 다카미치와 영지를 분할해 줄 것을 도쿠가와 막부에 청원했고, 다카미치는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었다. 이는 교고쿠 다카미치가 새롭게 창설된 다도쓰 번의 다이묘로서 분가 가문을 세울 수 있도록 영지의 1만 고쿠를 떼어내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고쿠 다카미치 역시 겨우 4살에 불과했기에 그는 계속 마루가메 성에서 거주했다. 1827년 교고쿠 다카카타 재임 기간에 오늘날 가가와현 다도쓰정의 일부인 분령 내에 실제로 진야가 건설되었다.[1]
대부분의 한 체제와 마찬가지로, 마루가메번의 다도쓰번령은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기 위해 계산된 여러 개의 분리된 영토로 구성되었다.[4][5]
사누키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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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군 5개 촌 |
타도군 15개 촌 |
구체적으로는 사누키국 내 아래의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 미노군 중 5개 촌: 오미, 마쓰자키, 고다, 하카타, 가미노무라
- 타도군 중 15개 촌: 다도쓰, 도후쿠지, 쇼, 미쓰이, 호리에, 히가시시라카타, 아오키, 야마시나, 오쿠시라카타, 니시시라카타, 미나미가모, 기타카모, 신마치, 구즈하라, 히도노무라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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